● 계산 성당
(대한민국의 사적 제 290호. 1911년에 대구대목구가 설정 주교좌성당)
★1897년초 로베르신부는 대어벌(현 인교동) 임시성당에서 대구본당을 옮겨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 있는 성당부지를 매입.
1899년 초 로베르신부는 계산동 성당부지에 한국식 십자형 성당을 준공.
★1901년 2월 4일과 5일 밤사이 한국 건축양식의 걸작으로 아름다운 노틀담의 루르드 성당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화하였다.
로베르신부는 1901년 2월 15일부터 2주일 동안 화재 현장을 정리하고 3월에는 사용할 목재를 사서 절단하였으며 4월에는 한국식 벽돌공장을 지었다. 5월말에 석공 14명과 목수 3명, 그리고 요리사 2명 등 중국인 건축업자 19명이 대구에 도착하고 6월에는 서울에서 중국인 벽돌 제조업자 9명이 내려와서 새 벽돌을 만들었다.
석공들은 지반이 약해서 1미터 반 깊이로 땅을 파고 석회 1,000부대를 사용해 기초공사를 하고 7월 20일부터 9월 15일까지 170,000장의 붉은 벽돌을 구워서 9월 20일부터 11월말까지 장문의 절반 높이까지 벽돌들을 쌓았다.
★1903년 9월 12일 로베르신부는 뮈델주교의 집전으로 11월 1일 대구대성당 축성식 거행
★1918년 12월 24일 증축되어 초대 대구감목 드망즈 주교가 주교좌 성당으로 축성한 것이다.
― 이상 계산성당 홈페이지에서 발췌 ―
※ 해성학교 ― 효성여자학교
성당안에 1899년말 설립한 한문서당 해성재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908년 초 신학문 교육기관인 성립학교를 세우게 된다.
사립학교 규칙 개정령으로 교회학교의 운영이 어렵게 되자 현재의 매일신문사가 있는 부지를 매입해 교사를 신축 이전하고, 1916년 9월 3일 해성학교(4년제)로 교명을 바꾸면서 드망즈주교의 집전으로 학교 축성식을 거행
1923년 11월 9일 무세신부가 해성학교 여자부를 맡게 됨에 따라 1924년 2월 1일 교명을 효성여자학교로 개칭하고 해성학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효성여자학교는 1925년 5월 15일 효성보통학교로 승격돼 대구지역의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효성초등학교는 1899년 서당 해성재를 학교의 시작으로 잡다. (해성재-성림학교-해성학교-효성학교)
― 이상 효성초등학교 홈페이지에서 발췌 ―
기타
● 해성학교-효성학교 -6.25 사변 시 국군 부대 - 포로수용소 - 국군부대 - 정전으로 군부대 철수 - 효성학교 - 1981년 효성학교 이전 효성학교를 헐고 매일신문사 입주
★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음력 5월 8일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다. 1951년 사제 서품을 계산성당에서 받다.
★이효상 국회의장 아들 이문희 은퇴 대주교가 주재한 성당
★서상돈 선생과 그 아들 서병조가 많은 공헌을 한 성당
★박정희대통령은 6.25사변 나던 해 계산성당안에 있던 효성학교에 주둔한 국군부대(육군본부소속)에서 근무했고 효성학교 강당(현 매일신문사 자리인 계산성당의 강당, 본당이 아님)에서 그해 11월에 육영수여사와 결혼.
강당에서 결혼식을 한 사진과 성당 입구 계단에서 내빈과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매일신문
사옥은 대구시 태평로7가에서 1958년 12월 남일동 138번지로 이전하였으며, 1981년 11월 14일 계산성당 안의 구 효성학교였던 현재의 계산동2가 71의 매일빌딩 신사옥으로 옮겼다.
※성 유스티노신학교 [聖─神學校 ]
위치 대구 중구 남산동 219-3 (1동)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재단법인 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대구 천주교회의 초대 교구장이었던 드망주(한국명 안세화) 신부가 중국인 벽돌기술자를 동원하여 1913년에 착공, 1914년에 완공하였다.
드망주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가톨릭 선교사로 1898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개화기 언론창달과 대구교구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인 《한국 대목구(代牧區) 창설 100년 기념서》(1931)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912년 드망주 신부는 신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서울 명동성당의 건축에 참여하였던 프와넬 신부를 초청하여 건립계획을 세웠다. 세계 각 지역에 재정 지원을 호소하여 1913년 9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익명의 신자가 신학교의 주보로 성 유스티노를 모시는 조건으로 거액의 헌금을 보내오고, 대구의 신도 서상돈이 부지를 기증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프랑스인 신부들이 서구의 근대 건축양식과 함께 벽돌제조 및 조적 기술을 대구민에게 소개한 의의를 가지며 대구의 천주교사를 담고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출처] 성유스티노신학교 [聖─神學校 ] |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계산성당은 그냥 성당 성유스티노신학교는 웃성당이라고 대구 천주교인은 불렀다. 위치가 계산성당은 낮은 곳에 성유스티노신학교는 높은 구릉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