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 데이이찌로 지음 21世紀와 聖書의 비밀 구로다 데이이찌로 지음/박세직 옮김 들녘/2001년 11월/264쪽/10,000원 ▣ 저 자 구로다 데이이찌로 1964년 臺灣, 臺北市에서 출생했다. 1970년 독일 뒤셀도르프 의과대학병원 유학하고 그 후 트리아대학 정신위생학부에서 수학하였다. 뷰다네스트 성서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부터 구 소련, 동유럽 선교를 시작하였다. JEEQ의 소장을 지냈으며 인터내셔널 바이블 처치 목사이다. 저서로는 『무에서 유를 낳은 신』『세계의 해시계 1․2․3』『격동하는 구조와 성서예언』『사랑 받는 제자』등이 있고, 역서로는 『스바스바』외 다수가 있다.
▣ 역 자 박세직 1933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부산사범학교, 육군사관학교,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미국의 남가주대학교와 콜럼비아대학교 등 5개 대학 명예박사이며,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조직위원장이다. 저서로는『부국강병론』『2002 월드컵과 한일 양국(지구촌)의 미래』『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서울올림픽 우리들의 이야기』등이 있다. ▣ Short Summary 21世紀와 聖書의 비밀 이 책 속에는 한 인간이 창안해 낸 이데올로기가 불러 온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유태인 대학살사건이나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 그리고 소련 각지와 동유럽에서 자행된 상상을 초월한 인간학대나 대규모 살육의 참상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그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자녀들이나 주민들에게 끈질기게 신앙을 전수하여 마침내는 ‘신의 응답’을 받고 ‘인간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신앙의 힘’의 위대성을 저자 자신의 현장 선교에서 적나라하게 입증하고 있다. 아울러 점차 실체화되어 가는 유럽연합과 성서 속에 암시된 부흥 로마제국은 물론 바빌론의 부흥과 그의 장래 등에 관한 예언과 함께 21세기에 펼쳐질 지구의 모습이 조명되어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동사태와 지난 몇 세기에 걸쳐 일어난 세계적인 사건들을 총정리한 역사서로서의 가치도 있다. 동시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언약하신 이스라엘 민족과 전 인류와의 관계와 미래에 관하여, 그리고 유럽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기독교 신앙의 공동화현상을 파고드는 이슬람교의 급격한 신장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해서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성경을 통하여 언젠가는 이슬람 문명과 넓은 의미의 기독교 문명이 서로 화해하여 중동과 지구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 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책자는 성서가 환난의 시대가 가까워져 바야흐로 지구 종말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며, 이는 인류 멸망이나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번영과 행복을 약속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 차 례 1. 이데올로기 사회의 붕괴 2. 나의 공산권 전도 3. 거대 유럽의 실현 4. 이슬람교 사회의 대두 5. 이스라엘과 성서적 예언 21世紀와 聖書의 비밀 구로다 데이이찌로 지음/박세직 옮김 들녘/2001년 11월/264쪽/10,000원 1. 이데올로기 사회의 붕괴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이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이것은 지구상의 큰 재앙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소련뿐만 아니라 동유럽 제국에 이르렀다. 그는 매우 잔인했으며, 그에게 숙청이나 처형되고 아사하여 결국 희생당한 사람의 수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러면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그는 남을 의심하는 것이 병적이었고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고 한다. 어떤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스탈린은 사람을 신용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어찌해서 오늘 그대는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가?’ 그는 그를 바로 보지 못한 자를 닥치는 대로 모조리 적, 위선자, 스파이로 몰아붙였던 것이다.” 또한 다른 보고에는 “스탈린의 허가를 받고 친구로 초청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스탈린과 함께 앉아 있으면 그 후에 어디로 끌려갈지, 또는 집으로 제대로 갈 수 있을지, 아니면 감옥에 처넣어지는 신세가 될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라고 쓰여 있다. 스탈린은 소련 농업이 잘 되지 않는 것은 농촌에 남은 자본가, 즉 부농(富農)이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그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개인 소유의 토지를 마구 빼앗았다. 개인 소유의 토지는 곧 국가의 집단농장의 것이 되었고, 농민을 ‘부농’과 ‘빈농’으로 나누어 ‘부농’으로 분류된 농가는 죽이거나 강제수용소로 끌고 갔다. 이 정책에 의해 9백만에 가까운 농민이 농토를 잃고, 절반의 농민들이 죽었다. 그리고 스탈린이 공산당 서기장에 있었던 1934년에 ‘소련 공산당 제17차 당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선임된 당중앙위원회의 위원과 위원 후보 139명 중 98명, 즉 70%가 체포 또는 총살당했다는 후문이 있다. 또한 당대회의 대의원 1,956명 중 1,108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모조리 ‘인민의 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비밀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자마자 즉시 처형되었다. 이처럼 독재자 스탈린은 무제한의 권력을 쥐고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의 말살을 기도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권력의 횡포는 이루말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개인숭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일깨우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스탈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크고 작은 개인숭배가 횡행했다. 구 동유럽 제국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무서움과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20세기의 유럽 역사는 지금까지 생각해 온 바와 같이 실로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시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옛날 사람들도 평화를 희구하여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처럼 번영하였던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그리스 사회도 붕괴했다. 더욱이 현대는 인간의 영지(英知)를 자랑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손에 넣어 본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평화의 이상사회가 있는 것일까? 우리들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왜 20세기의 이데올로기가 붕괴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사회붕괴의 첫째 이유는 창조주가 부정된 데에 있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히브리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두 가지의 조류 가운데서 역사의 시간이 진행되어 왔다. 히브리 문화란 성서를 토대로 한 문화로서 유태민족의 움직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헬레니즘 문화는 이와는 정반대로 신을 인간 사회와 인생설계에 넣지 않는 세계관이다. 이것은 멀리는 기원 전의 바빌로니아 사회나 로마, 희랍 사회를 위시하여 최근에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까지를 포함한다. 말하자면 신이 아니고 자기들만의 노력, 지식, 경험으로 사회를 지탱하고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약 27년간 소련과 동구권의 선교를 해 오면서 나는 이러한 사회붕괴의 최대 원인은 창조신을 사회와 인생설계의 한가운데에 넣지않은 데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소련, 동구권에 있어서 신을 부정한 지도자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예는 허다하며 그것은 역사 속의 진실로 남아 있다. 둘째로 들 수 있는 사회붕괴의 원인은 신을 부정하는 사회에서 신의 축복을 멀리함으로써 경제적인 축복을 잃어버리고만 것이다. 소련은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였고, 동유럽 제국 역시 비옥한 토지를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석유도 생산하는 국가들이다. 원래대로라면 크게 혜택 받은 국가들임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이 늦어져 가난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부정한 결과였다. 사회붕괴의 제3의 원인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국가의 지도자가 그리스도 교회와 성직자에게 극심한 박해와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히브리 문화의 관점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교회와 성직자에 대해 가한 박해는 하나님에게 행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와 그의 역사를 읽게 되면 거기에 하나의 원칙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는 자는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소련, 동유럽 제국에서 듣고 또한 보아 왔다. 소련, 동유럽 국가들이 붕괴되고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사람들은 혼미를 거듭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부(負)의 유산이라고 외치고 있으나 히브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의 원칙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차원의 세계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확실하다. 히브리적인 관점에서 우연이라든가 ‘가끔’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가령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지라도 영적인 원칙을 세워 맞추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신론 이데올로기 등을 내세우는 국가들은 영적인 원칙에서 보면 하나님의 축복에서 먼 곳에 있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먼저 당시의 세계 대국이었던 로마로 건너가 드디어 유럽 지역이 그리스도교로 교화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은 서쪽을 돌아 진전했다. 이전에 영국이 세계를 지배한 시대에는 가장 많은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했으며, 일본에서도 교회가 번창한 시대였다. 지금의 시대는 미국이 세계를 선도하고 있지만 미국에서도 많은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해외에 파견된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신의 원칙은 이처럼 단순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소련, 동유럽의 이데올로기 붕괴는 당연히 일어날 것이 일어났다고 이해해도 될 것이다. 즉, 성서에 입각한 히브리적인 관점에서 보는 눈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은 금후의 세계의 동향, 또는 작게는 개인의 인생에도 적용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이 역사를 히브리적인 관점에서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2. 나의 공산권 전도 당시 독일 유학생이었던 나는 한 친구의 권유로 서독의 구 수도 본에 있는 모 교회에서 소련으로부터 귀환한 독일인 크리스천들이 모여 예배보는 장소에 가본 적이 있다. 예배에 출석하고 있던 대다수 사람들은 수십 년이란 세월을 시베리아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구 소련에서 살아남은 이들 생존자들의 ‘사도의 사명을 다한 살아 있는 간증’이 참으로 충격적이었고 여기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후 28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나와 구 소련에서 온 사람들과의 교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때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이들이 지닌 무거운 짐에 관심을 갖게 되어 당시 구 소련의 국가들에 대하여 좀더 깊은 내막을 알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것이 내가 이들 국가에서 기독교 전도를 시작한 동기이다. 그러다가 나는 아놀드 로-제 전도사와 알게 되었는데 이 러시아계 독일인과의 만남이 나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아놀드 로-제 전도사는 1929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에카 시대에 개척민으로 독일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 그때부터 공산주의자에 의한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는 평화의 시대였다. 경건한 크리스천이었던 로-제 가족에게 러시아 혁명은 악몽과도 같았다. 로-제가 태어난 다음해 그의 부친은 그리스도교 전도사라는 이유 때문에 체포되어 그 일가가 따뜻한 우크라이나에서 극한지대인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의 부친은 종신형이었고, 이것은 사실상 사형선고를 의미했다. 그 당시 성서는 모두 몰수되기 때문에 로-제 전도사 부친은 작은 성서를 한 장 한 장 찢어내어 어머니가 입고 있는 옷 속에 넣어 바늘로 누볐다. 신체검사 때 발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시베리아에 당도하니 온도가 섭씨 영하 45도였다. 그들이 화차에서 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 장소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올려 기도했다. ‘사랑하는 하나님, 당신께서 여기에 계시는 것을 저희는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자비와 은총을 저희에게 내리어 주시옵소서’ 또, 그 당시 어린 로-제 전도사가 밤에 잠을 자다가 눈을 떠보면 그의 부친과 모친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손을 치켜든 채 열심히 기도하였다. 눈과 얼음으로 그들의 머리는 이미 하얗게 되어 있었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어머니의 눈물은 곧 얼음이 되어 양쪽 뺨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기를 원해 기도를 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들 가운데 아무도 동사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로-제 전도사는 이처럼 가혹한 수용소에서 27년이나 살았다. 로-제 전도사의 생활은 그 후에도 가난의 연속이었다. 더욱이 당국의 엄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박해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부친처럼 그리스도를 성실히 믿는 성도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교회의 강력한 지도자가 되어 선교활동에 몸을 바치게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숲 속에서 비밀집회를 열었다. 섭씨 영하 20~30도의 추위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열었으며 그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20~30Km 떨어진 먼 곳에서 걸어와서 동참하기를 원했다. 로-제 전도사는 지하교회의 지도자로서 몇 차례나 당국에 소환되었다. 심문대 의자에 앉게 한 뒤 눈을 부라린 10~15명의 담당계원들이 그를 둘러싸고는 사정없이 몽둥이 세례를 가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로-제 전도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오직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뿐이었다. 로-제 전도사는 수없이 구타당했다. 양손, 양발이 묶인 채 독방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는 살아계시는 위대하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든 당신의 사랑을 저들에게 불어넣어 주시옵소서! 저들은 저를 잡아다가 손을 뒤로 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거룩한 사랑으로 그들을 반드시 붙잡아 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가 계속된 후 하나님의 사랑이 작용하였는지 이상하게도 로-제에게 박해를 가한 자 중에서 신앙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자가 생겨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로-제 전도사는 시베리아에서 27년의 긴 생활 끝에 라트비아의 리가로 옮겨졌다. 거기서도 그는 지하에 잠입하여 그리스도교의 선교활동을 계속했다. 아놀드 로-제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그러한 그가 1971년 구 서독과 구 소련과의 국가적인 교섭에 의해 독일계 이민으로서 조국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로 이주해 온 로-제 일가는 구 독일의 수도인 본에 정착하게 됐다. 나는 몇 차례 그의 집을 방문하고 머물기도 했다. 그와의 사귐이 깊어 가는 동안 나는 구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사역의 책임을 느끼게 되었고, 이들 국가에 대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아놀드 로-제 전도사와 알게 되면서부터 많은 영적인 양식을 얻었다. 이 한 사람의 러시아계 독일인과의 만남이 나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나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박해와 고난이 있는 가운데 많은 물질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원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면 그의 고난을 제하고는 알 수가 없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돕고 원조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고난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사람은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일에 관여하여 많은 수확을 얻었다. 나에게 있어 그는 일생일대의 벗이다. 지금까지도 그와 친교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지금의 로-제는 러시아에서 나온 때와 같이 구 소련의 동포들에게 원조를 계속하고 있다. 주로 성서나 신앙서, 식료품, 의류 등을 대형트럭에 실어 이들 국가에 보내고 있다. 그는 저 시베리아에서의 활동과 조금도 다름없이 ‘거룩한 사명감’에 넘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사명감에 넘치는 인간의 힘이 얼마나 강하고 위대한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것은 그가 자기 인생에 대해 불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고통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걸어가는 생활에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3. 거대 유럽의 실현 1999년 1월 1일, 유럽 공통의 화폐 ‘유로’가 탄생했다. EU는 이처럼 공통의 통화를 가짐으로써 시간을 두고 여러 가지 통합을 진행시켜 마침내 정치통합, 군사통합까지도 해 낼 이상(理想)을 갖고 있다. 유로화 발행으로 EU는 이미 유럽에서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만드는 움직임을 시작한 것이다. 비록 일반 시민과 행정적 측면에서 시각 차이는 있어도 유럽 연방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단계는 확실히 마련되고 있다. EU에는 각료이사회가 있으며, 여기에는 입법권이 있어 유럽 전체가 지켜야 할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다. 유럽의회의 인원수는 626명으로 의원은 인구에 따라 각국의 정수(定數)가 정해져 있어 비례대표제로 의원이 선정된다. 5년에 1회 선거가 행해지는데 최근에는 1999년 6월에 있었다. 또, EU의 행정은 유럽위원회에서, 위원은 참가한 각 국에서 뽑힌 20인으로 되어 있고 각료이사회가 결정한 내용을 실행한다. 유럽재판소에는 판사가 15명 있다. 이러한 조직 만들기는 계속 진행되어 장차 유럽연방을 향한 통합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유럽의 20세기라는 짧은 기간을 돌아봐도 끊임없이 혁명이나 전쟁이 반복되어 왔다. 유럽은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서로 증오하고 사람과 사람과의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다툼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역사는 옛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러한 비참한 역사를 겪어온 유럽인의 염원은 이제는 더 이상 전쟁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럽연방의 건설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시야를 넓게 생각해 유럽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의 EU의 15개 가맹국 내에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도 있으며, 유럽 EFTA(자유무역연합)에 속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위스, 리히텐슈타인의 4개 국이 있다. 거기에 발틱 3국인 리토아니아, 라토비아, 에스토니아와 구 동유럽 제국의 9개 국(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소련 붕괴 후의 CIS(독립국가연합) 등 12개 국도 유럽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 국가 중 유로를 실질적으로 사용하면서 지지하고 있는 국가와 유로가 포함된 통화 바스켓제를 채용하고 있는 나라, 또는 변동 상장제를 취하면서 유로를 참고통화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 등 어떤 방법이든 유로를 자국의 통화제도와 연계하고 있는 국가가 거의 50개 국이나 존재한다. 그 중에는 달러 보다도 유로에 더 강하게 묶여 있는 통화제도를 채용하고 있는 국가가 거의 30개 국이나 된다. 이 같은 이유로 통화권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EU라는 모체에 흡수될 것이다. 예를 들면 코소보, 몬테네구로에서는 독일 마르크만 사용하므로 자동적으로 유로로 옮겨갈 것이다. 세계화가 정보통신 시대에 들어와 그 진척속도가 감속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지금은 세계 전체가 지금까지의 경험과 방정식으로는 풀 수 없는 어려운 시대에 들어서 있다. 이런 때에 우리들은 어디에다 시점을 두고 걸어야 할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4. 이슬람교 사회의 대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은 철의 장막이 드리운 채 길고도 차가운 동서유럽의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 동측의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하나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여 독재정권 하에서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 그러한 때에 기적 같은 사건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대혁명이 일어나 동유럽 제국은 독재정권에서 하나하나 붕괴되기 시작했다. 혁명 후 구 동유럽 제국은 정치․경제적 체제를 급격히 서방측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 유럽 제국의 사람들이 거대 유럽에 눈을 돌리고 있을 동안에 EU제국 자체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이슬람교라고 하는 종교의 일대 신장이었다. 지난 25년간 이슬람교의 신도 수가 2배 이상 성장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크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가 바로 이슬람교이다. 세계의 이슬람교도 수는 현재 14억 6천만이며 러시아를 포함한 전 유럽의 이슬람교도 수는 2001년 7월 31일 현재 5,180만이다. 그들의 신장률은 연간 6.5%로 높은 편이다. 프랑스는 500만, 독일은 350만, 영국은 200만, 이태리는 100만, 스페인은 70만의 이슬람교도를 갖고 있다. 또, 유럽 각지에서는 현재 이슬람교 사원이 건조되고 있고, 학교에서는 이슬람교도의 자제들에게 코란을 가르치는 종교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지구가 세계화되고 있는 마당에 지금 이슬람교는 교육, 문화, 예술, 정치, 법률과 같은 분야에서 국경을 초월하여 세력을 증대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장래 터키 같은 이슬람교 국가가 EU에 정식 가맹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며 EU 안과 밖으로 적지 않는 영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유럽에서의 이슬람교의 대약진은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이슬람교가 도대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코란이 가르치고 있는 대로 그의 결론은 세계제패 즉 이슬람사회 만들기에 있다. 그들이 알라에게서 나온 계시라고 받아들인 코란은 구약성서의 내용과 유사하다. 주의 깊게 읽으면 구약성서 가운데 등장하는 인물로 바꾸어 놓았거나 어휘를 달리 해석한 것들이 눈에 띈다. 또한 천국에 대한 해석도 코란은 다만 육욕을 만족케 하는 곳이라고 가르치고 있어 성서가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오늘의 유럽 기독교는 전통이나 습관이라는 외형적인 것만 남고 몸체는 쇠퇴해 버린 상태에 있다. 이처럼 기독교의 공동화(空洞化)된 현상을 메우는 방편으로 이슬람교, 인도의 종교, 선불교, 그 밖의 여러 가지 신흥종교가 밀어닥치고 있다. 말하자면 유럽인의 마음의 틈 사이로 스며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분명한 것을 갈구한다. 알라에 의한 규율과 신앙이 새로운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적합한 슬로건으로 유럽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유럽에서의 이슬람교도 수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은 거대 유럽 건설의 실현으로 향하고 있는 시점에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성서가 말하는 종말예언, 특히 유럽과 중동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의 필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제부터 유럽 이슬람교도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여 두는 것이 중요하다. 말하자면 유럽에서의 이슬람교의 대두는 그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이스라엘과 성서적 예언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책인 성서는 이제부터의 역사적인 추이를 예언하고 있다. 성서에는 다수의 예언이 쓰여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예언은 맞아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보자. 그리스도 강림의 예언은 구약성서에 약 350군데나 나오며, 이것은 사실대로 다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성서의 종말 예언에 관해 다음의 세 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먼저 이스라엘의 부흥에 관한 것이다. 한번 파괴된 국가가 재건되는 예는 대단히 드문 일이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의 도읍이 파괴되어 그 이후 유태인은 이산민족으로 세계에 흩어졌다. 그리고 1948년 다시금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유엔이 승인한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 이스라엘의 재건에 관하여는 에스겔이 예언하였다. 지금도 많은 유태인들이 약속의 땅 이스라엘로 귀환하고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유럽에서 유태인의 귀환 수는 매우 증가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귀환한 유태인의 수만도 이미 100만 명이고, 난민문제가 있는 그루지아에서도 유태인은 귀환하고 있으며 그 수는 11만이나 된다. 그밖에 루마니아에서도 10만 명 이상의 유태인이 귀환하고 있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성서의 예언과 같이 이스라엘에 돌아와 조국을 부흥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에 관한 예언은 이미 성취되었다. 두 번째로 로마제국의 부활에 관한 예언을 살펴보자. 기원전 6세기경, 다니엘은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이 괴롭게 꾼 꿈을 풀었다. 여기서의 제1의 국가는 바빌로니아를 의미하며, 제2의 국가는 메도 페르시아를, 제3의 국가는 그리스, 그리고 제4의 국가는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왕의 꿈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나라들의 지배하에 놓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서나 요한 묵시록을 읽게 되면 이 거인의 다리 부분이 그 후에 성취되는 예언임을 알 수 있다. 발의 발가락이 10개인 것같이 철과 점토의 나라가 10개로 구성된다. 이것이 다음에 일어날 예언 즉, 부흥 로마제국이다. 현재의 EU는 그대로의 부흥 로마제국은 아닐 것이다. EU의 가맹국은 이제부터 증대해 갈 것으로 예상되며 각 국의 민족적,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고려가 복잡하게 얽혀 반드시 모자이크 모양으로 변해 갈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다시금 흔들릴 것이라는 예상이 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성서의 예언과 같이 10개 국에 의한 부흥 로마제국으로 완성될 것이다. 부흥 로마제국의 예언은 현재 진행형이며 이제부터 성취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제부터 유럽의 움직임에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다. 그리고 제3의 예언은 바빌론이 부흥하리라는 것이다. 성서의 예언에 의하면 바빌론이 한 번 더 부흥한다. 바빌론이라고 말하면 지리적으로는 현재의 이라크에 해당한다. 걸프전쟁 때 그처럼 피해를 본 이라크가 부흥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성서의 예언에 의하면 이 나라는 열쇠를 쥐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라크 지역은 바빌론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데 현재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인접한 아랍 제국이 이라크와의 관계를 급속히 회복시키려는 움직임이다. 관계복원의 움직임은 2000년 가을부터 요르단, 모로코, 알제리 등 대부분이 바그다드에 인도적 원조물자나 지원단체를 태운 차터기를 운행하여 대 이라크 유엔 제재의 조기해제를 호소하고 있다. 또한 레바논처럼 각료를 파견하여 경제협력을 합의하는 국가도 나타나고 있다. 또, 시리아는 2000년 11월에 대사급 외교관계를 회복했고, 12월에는 유프라테스 강의 수자원 분할에 합의했을 뿐만 아니라 유엔의 허가 없이 파이프라인을 통하여 1일 약 15만 배럴의 이라크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등 페르시아만 연안의 아랍 6개 국으로 구성된 GCC(만 연안 협력회의)도 2000년 12월 바레인에서 열린 수뇌회의의 공동성명을 통하여 걸프만 전쟁 이래 처음으로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에 대한 비난의 문구를 삭제하고 “제재해제를 위하여 이라크와 유엔이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성서의 예언에 의하면 바빌론은 지금부터 반드시 부흥하여 지금까지 적대 관계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손을 잡게 된다. 이것도 현재의 상황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미 완성 단계에 있는 부흥 로마제국과 함께 이스라엘에 지금까지 없었던 규모로 지원을 시작할 것이다. 그때에 중동에는 진정한 평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성서가 말하는 환난시대의 시작이 되어 세계는 종말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어쨌든 바빌론은 종말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서는 이제부터 중동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시간이 꽤나 많이 지난 시점에 와 있다고 하겠다. 20세기에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혁명,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 홀로코스트까지 일어난 시대였다. 그리하여 그 흐름 속에 시대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것은 신의 마스터플랜에 따라 시간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21세기도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아니 IT시대에 들어와 시간은 더욱 가속이 붙을 것이다. 현재는 시대의 가치관이 크게 바뀌어 어디에 관점을 두는 것이 좋을지 알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큰 흐름을 확실히 붙잡는 일이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하게 구해야 되는 것은 자기 위주의 주장이나 개개인의 의견이나 사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전체적인 흐름을 확실히 파악하는 것이다. 역사를 지배하는 신은 반드시 존재한다. 당신은 한 번밖에 없는 되돌릴 수 없는 귀중한 인생을 유익하게 보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성서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성서의 메시지의 중심은 아브라함의 계약에 있는 대로 바로 축복에 있다. 신이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당신이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을 아는 데 있다. 역사를 지배하고 있는 신은 사실상 지금 당신의 인생을 눈여겨 응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도 역사의 지배자에게 명확히 인생의 관점을 정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되면 당신은 반드시 인생 최대의 발견을 이룩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 요한 3서 2절 |
출처: 발의 무리 원문보기 글쓴이: 발의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