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불교배척 사유
『삼대(三代)1) 이래로 유학(儒學)의 도(道)가 밝지 못하온데, 진(秦)나라의 분서(焚書)2) 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어두워졌습니다. 한(漢)나라 명제(明帝)3) 때에 이르러 불교(佛敎)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는데, 초왕(楚王) 영(英)이 가장 먼저 이를 좋아했으나 마침내 단양(丹陽)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이를 가장 독실히 믿었으나 대성(臺城)에서 굶주림4) 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불도징(佛圖澄)5) 은 조(趙)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하였고, 구마라즙(鳩摩羅什)6) 은 진(秦)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하였고, 지공(指空)7) 은 원(元)나라를 능히 보존하지 못했으니, 역대(歷代)의 군주가 그 교(敎)를 공경하여 능히 그 복을 누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 동방으로 말한다면, 신라가 불교에 미혹하여 그 재력(財力)을 다 없애서 탑묘(塔廟)가 민가(民家)에 절반이나 되더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되었고, 고려의 의종(毅宗)8) 은 3만 명의 중들을 공양(供養)한 것이 한 달에 십여 곳의 절에까지 이르렀으나, 마침내 임천(臨川)에서 탄식(歎息)함이 있었으며, 공민왕(恭愍王)은 해마다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개최하고 보허(普虛)9) 와 나옹(懶翁)10) 을 국사(國師)로 삼았는데, 보허와 나옹이 모두 사리(舍利)가 있었지마는, 나라의 멸명(滅明)을 구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설(說)은 믿을 것이 못됨이 명백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불교의 청정과욕(淸淨寡欲)을 흠모하려 한다면, 선왕(先王)의 공묵무위(恭默無爲) 사상11)을 본받을 것이고, 불교의 자비불살(慈悲不殺)을 본받으려 한다면 선왕의 능히 관인(寬仁)하고 능히 호생(好生)하는 덕을 생각할 것이고,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설(說)을 두려워한다면 선한 자를 상주고 악한 자를 처벌하고, 죄 가운데 의심나는 것은 경하게 처벌하고, 공(功) 가운데 의심나는 것은 중하게 상주는 것으로 규범을 삼을 것입니다. 이같이 한다면 다만 백성들만 그 은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천지 귀신도 또한 몰래 돕게 될 것입니다.』
[註 1]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註 2]분서(焚書) : 진 시황(秦始皇)이 서적을 모조리 불태운 일.
[註 3]명제(明帝) : 후한의 황제. 재위 27∼75년.
[註 4]대성(臺城)에서 굶주림 : 양(梁) 나라의 반신(叛臣) 후경(侯景)의 포위를 당하여 대성(臺城)에서 굶어 죽었음.
[註 5]불도징(佛圖澄) : 진(晉)나라 때 인도(印度)의 중. 후조(後趙)의 석늑(石勒)에게 돌아와서, 석늑이 그를 존신(尊信)하였음.
[註 6]구마라즙(鳩摩羅什) : 후진(後秦) 때 서역(西域)의 중. 후진의 국왕 요흥(姚興)에게 신임을 받았음.
[註 7]지공(指空) : 인도(印度)의 중. 중국을 거쳐서 고려 충숙왕(忠肅王) 2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왕사(王師)가 되었음.
[註 8]의종(毅宗) : 제 17대 임금.
[註 9]보허(普虛) : 고려 말기의 중 보우(普愚)의 처음 이름. 선종(禪宗)의 주류를 이룩하였으며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왕사(王師)가 되었음.
[註 10]나옹(懶翁) : 고려 공민왕 때 왕사(王師). 중국 서천(西天)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을 따라 심법(心法)의 정맥(正脈)을 받아 왔음.
[註 11]공묵무위(恭默無爲) 사상 : 공묵무위는 공경하고 침묵하며 억지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군주가 과하게 다스리지 않고 백성이 평안하게 살도록 하는 이상적 통치 태도를 가리킴.
<태조 1년(1392년) 9월 21일 대사헌 남재(南在) 등의 상소문(上疏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