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은 조선 시대 가장 많이 읽힌 책 가운데 하나였다. 주희의 정치철학에 따라 만들어진 이 책은 일종의 국민교육 교과서이다. 누구든 여덟 살이 되면 『소학』을 배워야 한다는 주희의 지침을 충실히 따른 것은 조선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배우는 것을 넘어 『소학』의 모든 것을 실천하여 소학의 화신이 되고자 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자칭 “소학동자(小學童子)” 김굉필(1454~1504)이다. 사림(士林)의 계보로 보자면, 김종직(1431~1492)의 제자이자 조광조(1482~1519)의 스승인 그를, 동갑내기 남효온(1454~1492)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김굉필. 자는 대유(大猷)이다. 점필재에게 수업하였고, 경자년(1480)에 생원이 되었다. 나와는 동갑이나 생일이 나보다 늦다. 현풍(玄風)에 살았다. 뛰어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었으니,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였고, 부인 외에는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항상 『소학』을 읽어서 밤이 깊은 뒤라야 잠자리에 들었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사람들이 국가의 일을 물으면, 언제나 “『소학』이나 읽는 동자가 어찌 큰 의리를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공부해도 오히려 천리 알지 못했는데, 『소학』 읽고 나서야 지난 잘못 깨달았네.”라고 하자, 점필재선생이 “이것이 곧 성인 될 수 있는 바탕이다. 요즘 세상에 이만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나이 삼십이 된 뒤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다. 열심히 후진을 가르쳤으니, 이현손, 이장길, 이적, 최충성, 박한공, 윤신이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는데, 이들은 그 스승처럼 재주가 높았고 행실은 도타웠다. 나이가 들수록 도덕이 더욱 높아졌는데 세상이 글러져서 도를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재주를 감추고 세상을 피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러는지를 알고 있었다. 점필재선생이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나라에 건의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자 시를 지어 비판하였는데, 선생도 역시 시를 지어 대답하였으니, 그 내용은 대개 비판을 싫어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의 사이가 벌어졌다. 정미년(1487)에 부친상을 당하여 죽만 먹으며 슬피 울었는데, 혼절했다가 다시 깨어나곤 하였다.*
金宏弼字大猷。受業於佔畢齋。庚子年生員。與余同庚。而日月後於余。居玄風。獨行無比。平居必冠帶。室家之外。未嘗近色。手不釋小學。人定然後就寢。鷄鳴則起。人問國家事。必曰。小學童子何知大義。嘗作詩曰。業文猶未識天機。小學書中悟昨非。佔畢齋先生批云。此乃作聖之根基。魯齋後豈無其人。其推重如此。年三十後。始讀他書。訓後進不倦。如賢孫,李長吉,李勣,崔忠成,朴漢恭,尹信皆出門下。茂材篤行如其師。年益高。道益邵。熟知世之不可回。道之不可行。韜光晦迹。然人亦知之。佔畢先生爲吏曹參判。亦無建明事。大猷上詩曰。道在冬裘夏飮氷。霽行潦止豈全能。蘭如從俗終當變。誰信牛耕馬可乘。先生和韻曰。分外官聯到伐氷。匡君救俗我何能。從敎後輩嘲迂拙。勢利區區不足乘。蓋惡之也。自是貳於畢齋。丁未年。遭父憂。饘粥哭泣之哀。絶而復穌。
* 번역은 원의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부 생략하였으나, 원문은 그대로 두어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 남효온 (南孝溫, 1454~1492)「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추강집(秋江集)』
사육신과 생육신을 규정한 것으로 유명한 남효온은, 그가 지은 「사우명행록」에 첫 번째로 김굉필을 수록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사우란 스승과 벗이라는 뜻으로 내가 배울 만한 사람을 말하며, 명행이란 명절(名節)과 행실(行實)을 가리킨다. 풀어보자면 남효온의 입장에서 배울 만한 사람들의 뛰어난 절의와 행실을 기록한 것 정도가 될 것이다. 아마도 남효온이 보기에 김굉필이 명절과 행실에서 당시에 첫 번째로 꼽을 만한 사람이었던가 보다.
이 글에는 두 가지 서사 구조가 있다. 하나는 김굉필의 행실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종직과의 관계이다. 김굉필은 오직 『소학』만 공부하고, 또 그대로 실천한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부르며, 오로지 『소학』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구현하려고 한다. 이런 실천적 자세를 스승인 김종직 역시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김종직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면서도 제대로 역학을 하지 못하자 제자인 김굉필이 이를 비판하였고, 결국엔 둘 사이가 갈리고 만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서사를 연결해 보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완성된다. “나야 소학동자이니 정치를 모르지만, 당신은 이조참판이니 제대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전통시대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교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수신(修身) 이후에 제가(齊家)해야 하고, 제가(齊家) 이후에 치국(治國)해야 한다. 다시 말해 수신이 안 된 사람은 제가나 치국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매우 당연한 듯한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남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나에겐 그런 일이 없어야 하고, 남을 바루기 위해서는 나부터 발라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소학』으로 도덕과 행실이 갖추어진 김굉필이니까 높은 자리에 있는 김종직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비판하기에 앞서 자연스레 자기를 검열하게 되고, 또 비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 도리어 비판자의 윤리적 자격을 심사하는 희한한 지경에 빠지게도 된다. 이리 보면 김굉필의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는 언제든 “내 알바 아님”으로 흐를 소지가 원천적으로 숨어 있는 것이다.
글쓴이: 서정문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나는 소학동자, 나랏일을 어찌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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