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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12~13] 지리 서남부 폐칠암자지 탐방
많은 이들의 정성이 더해진 걸음이 모여 작은 길을 내었다 한다.
마침 동행의 기회가 있기로 작정하여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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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자 정수복은 '개인적 체험을 사회적 자산으로 만들고 그것을 후대에 전수하는 일'을 일러
기록(記錄)이라 한다 했다. 이에 제격인 어느 선비의 실로 뜻밖의 세세한 '기록'이 있다.
우담 정시한의 <우담집>에 실린 <산중일기> 편이 그러하다. 뜻밖인 이유와 제격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조선과 성리학의 넝쿨인 양 '두렵고도 질긴 관계'와 '냉정한 역사 인식'을
강명관 교수의 섬뜩하고도 재미난 저서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등의 의견을 일부 참조하여 우선 살핀다.
혁명의 완성을 꿈꾸었던 정도전의 '서적포' 설치 의도에서 출발한 조선 건국의 기틀은
이후 정도전을 제거하지만 이를 적극 수용한 태종과 태종의 정치적 기반닦기로
치세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세종의 한글창제의 대업에서 일정하게 완성이 된다.
이 때까지만 하여도 성리학이 나라의 기틀이긴 하였으되 전체는 아니었는데
이는 스스로 다방면으로 박학과 다식의 독서광이었던 세종의 존재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퇴계가 <주자대전>을 연구하여 이를 토대로 성리학이 뿌리 깊게 박히고
당파의 시기를 거치며 다양한 분야의 철학적 사유는 이단이란 이름으로 말살되거나 억압되고
오직 성리학만이 모든 가치의 중심으로 통용되는 사회로 굳어간다.
이는 호학의 군주라는 정조 역시 다름 아니어 문체반정으로 극히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니
그의 왕권강화를 위한 고육지책은 인정하더라도 그도 조선의 발전을 저해한 일인임을 부인할 수 없을 지경이다.
풀어보자. 조선 중기 문인이자 정치가인 장유(張維)가 말하길, 퇴계가 주자대전을 연구하고 집대성한 후
100년이 흐른 즈음에 조선은 주자학(성리학)의 나라가 되었다 하였다. 조선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했던 성리학은
퇴계에 이르러 학문적으로 성취를 이루고 명징하게 국가의 근본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은 퇴계 이전엔 억불숭유라 하여도 유교외의 다양한 학문적 접근과 종교활동이 일정 부분 허용되는
사회였다는 반증이겠다. 재차 말하자면 퇴계 이후로는 성리학 외엔 모두가 이단이며 금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남명이니 점필재니 우암이니 당파를 떠나 조선의 태산 같고 대하 같은 지식인을 평하기로
감히 '수신(修身)'하였다 할진대 성리학은 옳고 그름의 가치 철학을 수확한 외에 여러 긍정 낳은 반면
지식의 편협화라는 절망적 혼란을 잉태하고 말았으니 큰소리 뻥뻥의 성리학의 시선만 쫓는 사회가
다방면에서 차츰 내실이 허약해져 간 것은 당연지사 아닐까. 개혁의 군주로 숭상되는 정조마저
'문체반정'의 기치를 내걸어 이로 인재를 등용하고 나라를 운영하는 기초로 삼았음에 이르러서는 통탄도 부족하다 않을 것인가.
홍대용이 그의 저서 <담헌서>에서 술화하였듯 '얼굴을 들고 한참 보고 있노라면
책의 제목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어질어질해진다'하여 그 규모를 놀라워한 베이징의 유리창이나 융복사 등의
문화집적지로 부터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여 실학을 궁리하려는 개혁적 성향의 양반과 중인들의
간헐적 변혁의 기운 마저 주자학을 해체하려 하고 지식인을 오염시킨다 하여 서적의 수입을 금지하거나
앞서 말한 문체반정을 통해 저작을 검열하는 등 사상을 직접적으로 억압하였으니 말이다.
생각이 이에 닿으면 천원 지폐의 모델로 조선 최고의 선비라는 퇴계도 개혁군주 정조도 일면 야속하기도 하다.
이토록 조선을 관통하여 절대의 가치가 되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퇴계를
진즉 정통으로 계승한 대학자 중 한분이 바로 우담 정시한이다.
'정구, 장현광 이후로 진정하고 순수한 유학자는 선생 뿐이다'라는 다산의 칭송을 인용하는 것으로
선생을 얼추 대접한다 할까. 그런데 이런 유학자가 세상 유람에 나섬에 주로 암자 주변을 서성였다는 것이다.
대처를 피해 숲으로 숨어든 이단의 무리와의 교류가 심히 빈번한 것이니 이것을 일러 뜻밖이라 하겠고
그 유람의 기록이 한 수 시에 머물지 않고 일기의 형식으로 사뭇 세세한 것이니 일러 제격의 기록물이라 하는 것이다.
심증 없지 않다. 당시의 승려라 한들 선생에겐 하대의 백성일 뿐, 더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선생의 명불허전 기록 '산중일기'는 하나의 초월한 선비의 정신이니
하물며 미물도 함부로 하지 않아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공감을 하게 한다.
이제 그 선비 걸은 300여년 전의 행적을 쫓는다.
그 중 지리산에 머문 선생의 행적을 쫓아 연곡사 뒷편의 여러 암자를 찾아 나선 열정 가득한 분들이 있고
고증을 마친 것은 아니지만 오랜 탐구의 결과로 세상에 알려도 부족치 않을 사실로 관계 확인이 되어
그중 일곱을 이어 가칭하여 '지리 서남부 폐칠암자지'라 이름하는가 보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정성으로
선생 다녀간 그날의 기록이 새빛을 받아 오늘날 무심한 21세기 서생의 서툰 걸음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폐칠암자지 탐방>
피아골 초입 반야봉 산장 앞에 주차를 하고 작은 바랑 하나 둘러메고 산에 든다.
삼도봉에 이르는 불무장등과 노고단에 이르는 문바우등의 사이 깊은 골짝, 피아골.
남명의 '삼홍소'가 피아골이며 김지하의 피 토하는 절규 '지리산'이 또한 피아골이다.
폐칠암자 : 삼일암 - 금류동암 - 오향대 - 양진암 - 금강대 - 금선대 - 법왕대
짧은 된비알을 올라 그야말로 쑥대밭인 촘촘한 대숲을 지난다.
이윽고 훤한 시야의 묘에 닿아 우측으로 내려서니 삼일암 터다.
독담의 뒤로 삼일암의 축대가 가지런하다.
우담 선생이 자주 들렀던 곳이라하나 지금은 기와 파편 몇으로 그리 짐작할 뿐,
선생의 발자취도 한 잎 낙엽인 양 쌓여 흔적없이 바람되었을 것이다.
이윽고 금류동폭(금주폭)
겨울이어도 물줄기가 기운차다.
노구의 우담, 저 소리를 일러 주자의 가르침이라 했을 것.
금류동암
높은 석축 위 시야 훤한 자리라
선생이 석달 가까운 시간을 머물렀다 한다.
금류동암의 해우소
오향대
저 대숲 안에 잘 닦여진 터가 오향대라 한다.
인적은 간데 없고 대숲의 소리만 고졸하다.
양진암
역시 산죽이 점령해 버린 터는 축대만이 남았다.
산중일기에 기록하기로 금강대위 120보 거리의 조망이 남다른 터라 하였고
수행중인 73세의 노승인 각담(覺湛)과 하루에도 수차례 토론을 하였다 한다.
몇십 보 아래 금강대
오늘 본 암자 터 가운데 가장 훤하고 넓은 암자 터다.
아래로 돌계단이 이어져 옛날 우담 선생이 걸은 길임을 반증한다.
그리 길을 따라 내려서면 거무내바위가 나온다.
다섯의 암자 터를 밟았다.
길은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지만
겨울이라 그런가 잡목의 방해가 없어 걷기로 수훨하였다.
가는 길가, 목이 버섯도 만나고
귀여운 영지도 만나고
그 옛날, 우담 선생의 걸음에도 간혹 눈에 띄었을까.
그 성품에 은나라 백이숙제나 생육신 조려 처럼 채미(采薇) 한다하여 사치라 여겼을까.
폭신 폭신 낙엽의 산모롱이를 돌아
북암재를 거쳐 산보를 잇는다.
산중 물골로 불리운 마을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녹슨 농기구만 뒹굴어 한 많은 세월을 서글퍼하고 있다.
돌배나무엔 철지난 돌배가 아직 달려
객의 갈증을 달래는데 보태어진다.
금선대
조망이 실로 대단하다.
모르긴 해도 이곳에서라면 구도(求道)는 쉽지 않을 듯.
마지막으로 법왕대에 닿았다. 4시간 남짓의 산보다.
국림공원 경계석만 나뒹굴 뿐, 선생의 흔적은 있는 듯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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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담 선생 다녀간 그 길이며 그 절집이며 쫓아 보았다.
발견되는 기와 파편이며 축대며 무슨 무슨 암자의 터임을 알겠다.
호구지책도 변변치 못하던 시절,
개오(開悟)의 일념으로 수행에 나선 승려들과 우담 선생의 정신이 가치롭다.
이제 그 길 쫓은 서생들을 보며 기원한다.
저마다의 시선에도 칠암자의 불심이랄까 우담의 정성이랄까 한줌씩 담겼으면.
봄날과 같은 포근한 산을 휘돌아 서니
산 아래 농평마을의 한적한 겨울이 따뜻하다.
<무명암 터에서>
사리암재에서 하루 묵어가려 했으나
이러 저러 사정으로 무명암지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한다.
피아골을 건너 숲으로 가는 길,
옛사람과 나 사이 소통의 물길이 이어진다.
호젓한 숲길을 걸었다.
이윽고 쉬어갈 참인데 어언 예정하는 야영지란다.
무명암지도 쑥대밭.
고단한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한잔 커피로 몸을 녹인다.
변변한 도구도 없이
환갑의 노구가 다녔을 즈음의 산을 떠올린다.
흔히 선인들은 산에 드는 것을 등산한다 하지않고 입산한다 하였다.
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공생의 나아가 섬김의 대상으로 인식한 때문이리라.
그 마음이 좋다.
낮건 높건 길이 있건 없건 절경이건 하등의 품질이건 산은 그대로 산이다.
날이 참 좋았다. 겨울이라지만 초봄의 날씨다.
마침 초면의 몇 분 동행을 하게 되었다.
산을 안다하기로 얼마나 겸손하여야 할까.
오랫도록 산을 다녔기로 산을 안다 할까.
굽은 나무 한그루, 아무렇게나 피어난 한떨기 꽃,
산에 대한 가없는 열정과 다정, 이것들이야 말로 그 기초.
오늘 만난 여러 선배님들의 맑은 시선, 가슴에서 배운다.
겸손하게 산에 들고 겸손하게 내려설 것을.
저 길 내려서면 다시금 일상이다.
걸음도 가뿐하다.
가는 길, 연곡사에 들렀다.
절집의 유구한 역사와 너른 품에 공감.
선방 너머 지리의 기운이 유장하다.
시원한 배치가 돋보이는 가람의 백사마당에 서서 한참을 시선 머문다.
동부도를 지나
대광보전 뒤로 난 예쁜 길을 따라 오르면
국보 제54호인 북부도가 있다.
절의 동서북으로 부도가 특이하게 놓인 것이다.
산방다원
달콤한 모과차 한잔 놓고
연기 나는 화로의 온기에 몸 녹이며 선인의 심사 쫓을까.
김지하의 지리산은 오늘은 너무 슬프다.
남명의 피아골 삼홍소(三紅沼)가 좋다.
흰구름 맑은 내는 골골이 잠겼는데
가을에 물든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하여 묏빛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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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일기를 그저 유람의 기록이라 치부할텐가.
유일(遺逸)로의 연이은 천거에도 세상으로 나아가지 않은 우담의 처세.
성수침, 민순, 장현광 등 조선 처사들의 생애를 그와 견주어서라도
선생의 생애로 가르침 한줄 구해야 마땅할 것인데 무지한 자로 고작 발자국만 찾는다.
그래서 산중일기는 성리학자의 문제적 역사다.
함축의 우주라는 시에는 없는 기록의 역사다.
차 한잔 끓여 그 길을 추억하는 시간,
뜻밖의 세세한 기록인 <산중일기>가 드디어 사홍(四紅)으로 물드는구나.
첫댓글 동장군이 '나 왔소!' 하는 양 날이 찹습니다. 각별히 컨디션 유의하는 한 주 되세요~~~~~ 지리 서남부 폐칠암자지 탐구가 대략 마무리된 듯, 걸음 있다기로 동행하여 즐거운 시간 가졌네요. 모두들 송구영신도 잘 하시구요~
이곳 올 겨울에 꼭 가보려고 하는 곳인데 기억이 가물거려... 팬다님 자세한 정보(접근로, 등로 등등)좀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아직 상기의 폐칠암자지 탐구는 확정이 아니며 여전히 진행중인 것 같습니다. 역시 칠암자지 탐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번에 동행한 몇 분의 의견을 보면 실제 양진암과 금강대암의 위치의 경우 금강대암이라 한 곳이 실은 양진암의 터이며 금강대암은 그 아래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네요. 차츰 정립이 되겠지요~~~
쪽지보내기에 오류 메시지가 뜨네요^^; 메일로 보내 보았습니다.
사서(史書)에 님의 그림까지 곁들이니......五紅이네요^^
오호호호호호홍~~~~하고 즐겁게 웃어 봅니더^^
일 때문에 밖에 돌아다니다... PC방에서 시간 보내는데... 이렇게 팬다님의 글을 보니... 좋군요.. 지리산... 이제 내일부터는 들어갈 수 있나요? 여러가지로 배우고 생각하게 합니다... ^^ 팬다님두... 올한해 잘보네세요^^
예^^ 산방기간이 끝나네요. 이번 주엔 산방도 끝나고 주중 폭설 예상으로 주말 지리산은 제법 많은 분들이 찾지 싶습니다. 눈꽃이 활짝 피었을테지죠^^
감사 합니다. 많은 것을 가슴으로 배우고 느끼는 후기네요.....^^
앞선 우담 선생과 최근의 여러분들의 일련의 노고입니다^^
사실 제 짧은 지식으로 팬다님의 글을 다 이해 할순 없지만 그 기분이나 감정은 저도 조금은 느낄수 있네요. 다녀오신 곳이 너무도 제 맘에 드는 곳입니다. 제가 좀 더 강건한 허리와 무릎을 가졌다면 쫒아가겠다 부탁 드리고 싶지만 그러질 못하여 이렇게 글과 사진을 보며 상상만 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저 역시 그 마음이었을 뿐, 옛사람이나 저 길 낸 이들의 마음은 모르는 셈입니다. 그저 걸을 길 있어 좋은 것이네요. 겨울 날이 찹니다. 늘 건강 유의하세요~~~~
" 변변한 도구없이 .. " 이 구절이 정모에 들떠 있던 맘을 추스리게 합니다. 팬더님 ! 그런데, 우담선생이 해우소도 직접만드신건가요 ? 자연친화적인 자취가 넘 좋아보입니다.
그 해우소야 금류동암의 어느 행자승이거나 보살이거나 놓았겠지요^^ 우담 선생이야 근심을 내려 놓으시고....
깊이있는 사색과 글들 잘 보고 있습니다
지리산을 다녀오셨군요^^
예~ 날이 포근하여 산책이 되었습니다^^
최근 탐구산행이 이어지던 연곡사 일대인가 봅니다. 멀리로는 조상들의 지리산 입산기와 가까이로는 산 선배들의 탐구산행 기록이 값진 열매를 맺어가는 거 같습니다. 공헌한 바도 없어 염치없지만 그 길을 따라 발자취를 더듬을 날을 즐거이 떠올려 봅니다.
저 역시 염치 없는 동행이었습니다^^ 동장군의 위세가 대단합니다. 건강 유의하세요.
전 왜 장비하고 텐트하고만 눈에 들어오는지 ㅠㅠ 요즘제가 오토캠핑 -> 트래킹&비박쪽으로 변경중이라...^^ 그래도 2번씩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읽어보았습니다. 느낀점은 독서좀 해야겠다고 반성합니다. 팬다님의 음악과 사진은 언제나 좋아요 *^^*
당연한 일이지요. 저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산이 참 정갈하군요..역시 온유한 지리산입니다.. ^^
그 품의 넓이와 깊이를 좀체 헤아리기 쉽지 않은 우리의 산입니다^^
우와 빠르시군요. 9월말 탐구산행에 이은 가객님의 탐구산행길이 여기에서도 공개가 되는군요. 피아골 위 서굴암을 금강대로 추정하는것 같던데 그길이 좋다하여 혼자 시간내서 다녀올 생각입니다. 산은 늘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가고 또 가도 가고 싶은것이겠죠. 팀이 부럽네요. 예전에는 혼자서도 잘도 다녔는데 사는것이 녹록찮아서 혼자 다니는 경비가 만만찮아서 늘 미룹니다.
여러분들의 노고로 전 그냥 무임승차하여 유람하였습니다^^ 서굴암은 폐칠암자에 속하지 않는 별개의 암자구요 금강대암과 양진암의 위치가 아직은 확인이 정확치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피아산방에 있을 때 가객님의 탐구산행팀이 새벽에 도착해서 아침에 인사를 드렸는데 그분들중에서 몇년을 알고 지내는 지인분들이 있어서 소주한잔 나누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때는 금강대아래 108개의 계단이 있다하여 서굴암을 금강대로 추정하더군요. 저는 과거 지리산 10대 산행할때 무착대에서 왕시루봉쪽 정확하게 피아골산장 좌측편으로 금강대가 있다고 추정을 했는데 탐구산행팀 면면히 워낙 출중한분들이라서......무임승차면 어떻습니까? 그분들의 노고에 저 또한 감사할 뿐입니다.
그건 조금 이전의 추정이었던가 봅니다. 실제 금강대 아래 80여 돌계단이 있다하고 얼추 찾아도 졌는가 봅니다. 이번 길, 우리 일행도 피아산방서 소주 한잔 나누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