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여행7 - 아라시야마에서 벚꽃철에 왔을때 텐류지 정원을 구경한걸 떠올리다!
2024년 9월 19일 교토 에서 렌터카를 타고 긴카쿠지(銀閣寺 은각사) 를 보고 철학의 길 哲學の道
을 걸은 후에 다시 아라시야마 로 왔는데..... 인파를 헤치고 거리를 걸어서 덴류지 로 올라갑니다.
교토 시내 서북쪽에 헤이안 시대 귀족의 별장들이 모여있던 아라시야마 (嵐山あらしやま) 는
교토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국가사적 및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으니....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데, 또 일본 벚꽃 명소 100선 및 일본 단풍 명소 100선 에 선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텐류지 절 은 관람료 가 비싼지라 딸과 손주등 7명이 다 들어가기는
무리인데다가..... 늦더위로 손주들이 기진맥진 했으니 들어가지는 못하고
좀 시원한 치쿠린 으로 가면서 옛날 벚꽃철 에 우리 부부만 왔던 일을 떠올립니다.
당시 교토 헤이안진구를 거쳐 도시샤대학교에 들러 윤동주 시비 를 보고 료안지와 닌나지
절을 구경하고는.... 킨카쿠지 를 거쳐 하라다니엔 原谷苑 을 거닐고는 내려와서
히라노진자 平野神社 (평야신사) 를 보고 전철 로 아라시야마 嵐山(풍산) 에 도착했습니다.
게이후쿠전철역에는 족욕탕 이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데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200엔 을 받는
지라 단념하고 길을 걸어서 강변에 이르러 도게츠교 渡月橋(도월교) 를 보는데 강에서
뱃놀이 하는 사람들이며 고풍스러운 인력거 에다가 기모노 입은 여인들이 참 예뻐 보입니다.
여기 아라시야마 嵐山(풍산) 는 교토 서쪽에 위치한 관광 명소로 헤이안 시대 平安時代
794∼1185) 에 귀족들의 별장지 로 개발되었는데 사계절의 변화가 선명하며
특히나 봄 철의 벚꽃 과 가을철의 단풍 명소로 교토 시민 사이에에 유명하다고 합니다.
먼저 아래쪽으로 걸어 강에 도게쓰교 를 보고 다시 길을 따라 올라오다가 사람들이 스무명
이나 줄을 길게 선 집이 있어 다가가 기웃거려 보니 별 것은 아니고..... 보통
오뎅 가게로 어째서 이리도 긴 줄이 서 있는지 궁금한데, 아마도 맛이 있기 때문일테지요?
조금 더 올라가니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가 유독 많은데 신파치차야 라는 가게
에서 보니 젤리또 아이스크림 과 말차 아이스크림 이며 일반 아이스크림
을 파는걸 보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은지라 나중에 돌아 올 때 먹기로 합니다.
좀 더 걸어 우리가 내린 아라시야마 嵐山(풍산) 역 을 지나 왼쪽 길로 들어서니 오래된
사찰인 텐류지 天龍寺(천룡사) 에 도착하는데..... 일본에서 신사는 돈을 받지
않지만 유명한 절은 입장료를 받으니 500엔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 대방장 을 봅니다.
아라시야마의 덴류지 (天龍寺てんりゅうじ) 절은 교토 우쿄구 사가노에 있는 사찰로
1994년에 고도 교토의 문화재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으로 등록
되었다고 하며 정원 이 교토 명물이라는데 샷케이라고 차경 을 하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여기 유서깊은 사찰인 텐류지 天龍寺(천룡사) 절은 임제종 텐류지파 대본산 이라는데
1339년에 나라 남부 요시노에서 죽은 고다이고왕(천황) 의 보리사 로
아시카가 다카우지 가 무소 소세키 에게 부탁해 교토시 우쿄구 사가에 건립한 절입니다.
원래 이 땅은 사가왕(천황) 의 황후인 단린이 개창한 단린지 절 이 있던 곳으로 후에 사가왕이
작은 궁궐 을 세우니 고다이고왕이 어릴때 여기서 지냈으니.... 바로 이 자리에
아시카가씨에게 원한을 품고 죽은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보리사 를 세운건 의미가 있다네요?
그러니까 텐류지 절은 무로마치 막부 의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가 막부를 세우기
위해 교토에서 몰아낸 고다이고왕(천황) 의 명복 을 빌기위해 지었다는
얘기인데, 무소 소세키는 건립자금 마련을 위해 덴류사선 을 띄울 것을 건의합니다.
원나라와 무역해 얻은 자금 으로 1343년에 칠당가람 을 갖추었으며 텐류지는 교토 임제종
5산 중에 최고의 세력을 구가했으나..... 1356년부터 8회의 대화재 로 인해 가람이
소실되고 무로마치 막부 가 망하면서 몰락했다가 메이지유신 이후에 재건되었다고 합니다.
텐류지 절에 딸린 무소 소세키 가 만든 소겐치 정원 은 특별 명승으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하는데..... 여기 분위기는 가마쿠라의 겐초지
建長寺(건장사) 나 조금전 본 료안지 龍安寺(용안사) 하고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창설자인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 는 고다이고왕과 가마쿠라
막부 사이의 싸움에서 막부측 토벌대장이었으나..... 유배지를 탈출한 일왕 이 전국에
막부 토벌의 명령을 내리자 고다이고왕(천황) 측으로 돌아서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 시킵니다.
그러나 조정이 행한 공경 중심의 논공행상 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야심 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왕(천황) 의 겐무신정에 반대하며 거병해 이후 고다이고왕을 요시노 吉野 로
내쫓고 북조에 고묘왕(천황) 을 세워 자신이 쇼군의 자리에 오르니 무로마치 막부 입니다.
*** 나라현 남부 요시노의 봄 벚꽃철 풍경 입니다 ***
예로부터 "신상필벌" 이라고 했으니 전쟁후 논공행상 은 국가운영의 기본인데, 고다이고왕
이 전쟁에서 공을 세운 무장 보다는 자신의 측근으로 문신인 공경 들을 우대한 것은
마치 선조 임금을 생각나게 하니.... 조선에서는 임진왜란후 "공신책봉" 을 하면서 선조를
따라 의주 까지 호종한 문신들은 일개 내시 까지 포함해 공신의 숫자 가 무려 90여명 입니다.
7년간 전쟁터에서 풍찬노숙하며 부모처자 까지 돌보지 않고 실제로 목숨을 걸고 왜적과
싸운 장수(무신) 는 불과 18명 뿐이었으니 그럼 90 대 18 이라! 조선은 "칼의 나라"
가 아니고 "붓의 나라" 이었기 때문일까요? 그것도 1등 공신 3명 은 이미 전사한
이순신 장군과 원균 그리고 전쟁이 끝난후 이미 병사한 권율등 모두 "죽은자 뿐" 입니다.
"전쟁터에 나간 장수의 공이 지극히 높으면 임금도 시기하고 하늘도 미워한다 " 고 했던가요?
붓을 쥔자들의 농간으로 내시도 십수명이나 공신칭호 를 받는데, 전장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무장과 재산을 바쳐 궐기한 의병 들은 공신의 반열에 오르지도 못했으니....
그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장수들은 싸우는 시늉만 했고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임금 선조도 할말은 있을터, 임진왜란이 발발해 원병을 요청하자 명나라는 조선이 왜군을 끌어
들였다고 의심 했으니..... 부산에서 서울까지 장정이 걸어서 가자면 스무날이 걸리는 거리 인데
왜군이 불과 스무날 만에 서울에 입성했으니, 조선이 싸우지고 않고 왜군의 길안내 를 했다는 뜻이라?
명나라 사신이 평양성에 와서 왜군과 대치중인 조선군 을 보고서야 의심을 거두게 됩니다. 해서 명나라 황제는
먼저 엄청난 양의 은을 군자금 으로 보내주는데, 선조는 군사비로 쓰지 않고 왕비와 후궁이며 왕자들 그리고
호종하는 대신과 내시 들에게 나누어 주는지라.... 광해군과 유성룡 등은 황망해서 사양하는 촌극 이 벌어집니다.
부산의 경상 좌수영 박홍 은 배 한척 띄우지 않고 대포를 바다에 버리고 배를 불지르고 도주 했으며, 경상
좌병사 이각도 달아나고 우병사는 숨어버렸으며, 이일은 병정 놀음에 학살당하고 신립은 충주에서
반나절 도 버티지 못하고 바로 전멸..... 한강 방어군과 한양 수비군 은 화살 한대 날리지 않고 도주
했으며, 남도근왕군 이광등 6만 조선군은 1,600명 와키자카군에게 몰살 당했는데 조선군을 어찌 믿으랴?
정유재란 은 일본군 14만에 명군 11만 7천명과 조선군 3만 8천명이 참전했으니, 1598년 1월 1만여명의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 도산성 전투 에서 56,000명 명군 은 부산에서 올 일본군에 대비해 2만을 양산에
보낸후 양호와 마귀 3만 6천에 권율의 조선군 1만 1,500명 이 공격했으나 일본군 원군 도착으로 참패합니다.
왜군을 막을 군대는 천조인 명나라 군대 뿐이니, 간곡하게 글을 써서 명나라군을 청해오고
그 뒷바라지를 하는 문신들과 내시 들이 중요하다고 미리 은을 나누어 주었으며
후일 논공행상을 할 때도.... 왜군을 물리친 명나라군을 접대한 이들을 공신 으로
책봉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이런 잘못된 생각이 삼전도의 굴욕 을 불러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 는 교토에 아시카가 막부(무로마치 막부) 를 열어 동생 다다요시와 이원정치
체제를 수립하나.... 요시노로 쫃겨간 남조 고다이고왕(천황) 군 과 싸우는 한편 동생과 대립
하니 10여년에 걸친 치열한 형제 싸움 끝에 다다요시를 살해하고는 무로마치 막부를 안정시킵니다.
고다이고왕 (천황) 은 제96대 일왕으로 귀족 사회의 기존 관습 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고 학문을 장려하는등 조정정치를 개혁 하는 한편, 비밀리에 가마쿠라 막부
타도 계획을 진행하였으나 두 차례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막부에 의해 오키로 유배 됩니다.
그러나 무사들의 봉기로 가마쿠라 막부는 멸망 하고 고다이고왕(천황) 은 복귀 하였으나, 논공행상 잘못
으로 귀족과 무사들의 반발을 사게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반기 를 들자 삼종의 신기 를 넘겨
주고 요시노로 탈출해서는, 60년간 교토의 북조와 요시노의 남조가 병존하는 남북조 시대 가 열립니다.
고다이고왕(천황) 은 요시노에서 권토중래 를 꿈꿨으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닛타 요시사다
등 남조의 주력 무장들이 전사하고 무쓰로 향하던 노리요시 친왕의 배가 폭풍우 를
만나는 등.... 남조의 세력이 급속히 쇠퇴하자 1339년 노리요시 친왕 에게 양위 하고 죽습니다.
“조적토멸 · 교토탈환” 의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52세였는데, 고다이고
왕(천황) 은 ‘이화집’ 과 ‘신엽화가집(新葉和歌集)’ 에 일본 고유 형식의 시가인
와카 를 남겼으니 적 인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이곳에 절을 세워 민심수습 에 나선 것입니다?
고다이고 왕(천황) 이 죽은 후에도 남북조의 대립과 전쟁은 계속되다가 1350년 북조의 내분을
계기로 남조군은 한때 교토를 점령 하기도 했으나..... 3대 쇼군 요시미쓰 대에 이르러
이마가와 사다요가 남군을 제압한후, 1392년 막부는 남조 고카메야마왕이 황위를 북조
고코마쓰왕 에게 넘기면 고카메야마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어 황위를 잇는 조건으로 통일됩니다.
남북조 시대는 1333년 부터 1392년 까지 60년간 으로 왜구 침략 700회가 집중 되었으니.... 공민왕
(1352년~1374년) 시기에 100회 에 달하고, 우왕(1375년~1,388년) 때에는 370회 로 합쳐
모두 470회 이니.... 경상도와 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까지 전국이 약탈당했으며
강화도가 함락 되고 왜구가 황해도에 상륙하자 고려는 수도를 한양이나 철원 으로 옮길려 했습니다.
일부 역사학자는 이런 대규모의 왜구라면 개인이기 보다는 남조의 군대 가 교토를 회복하기
위한 군자금 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고려를 약탈 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북조와 대치해 그럴 여유 는 없었으니.... 중앙이 혼란에 빠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 되자 규슈와 서부 일본 지방의 영주 들이 민간의 왜구에 적극 가담했기 때문으로 봅니다?
여기 대나무숲을 "치쿠린 (竹林ちくりん) " 이라고 하는데 환경성이 정한 "일본의 사운드스케이프
(Soundscape) 100선" 에 포함되어 있으며 주로 모소 대나무로 이루어져있는데... 일본 죽도
(竹刀) 의 90% 를 만든다는 사가의 죽림으로 영화와 CF 에도 자주 등장하는 엄청 유명한 곳입니다.
대나무 숲인 치쿠린 (竹林ちくりん) 삼거리에는 신사가 있으니... 이름이 노노미야
(野宮 神社) 라고 하는데, 좋은 인연 에다가 아이를 점지해 주며 순산을
하도록 도와주며 거기다가 학문의 신을 모신다니 좋은 것은 다 갖다 부친 것 같습니다?
여기 도리이 는 11세기에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세계 여류 최초의 장편 소설인 겐지이야기
(源氏物語) 의 사카키(賢木) 편에 등장하는 흑단나무 도리이 (黑木鳥居) 로 유명하며
맞은편 대나무숲 벽의 게시판에는 아라시야마 축제 사진이 붙어있는데 참 화려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