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통 바슐라르라는 이상한 철학자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스무 살 무렵이다. 한 월간지에서 민희식이란 불문학자가 번역한 『초의 불꽃』을 읽은 뒤 그 문체에 깃든 심오한 깊이와 철학적 몽상의 새로움에 나는 기절할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다음에 읽은 것은 김현이 번역한 『몽상의 시학』이다. 그 책에서 앙리 보스꼬라는 시인의 이름을 처음 접하고, "불들은 우리의 기억에, 아주 오래된 추억 너머에서 잠들어 있는 태고의 삶이 우리 속에서 그 불꽃으로 깨어나서, 우리의 비밀스러운 넋의 가장 깊은 나라를 우리에게 계시해 줄 만한 힘을 행사한다."라는 앙리 보스꼬가 쓴 구절을 처음 읽었다. 그 책의 한 귀퉁이에 내 필체임이 분명한, 1978년 9월 25일 새벽 0시 37분에 부산에서 출발하는 서울행 열차에 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쯤 나는 어깨 너머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서울의 한 시립도서관 참고열람실에서 햇빛을 하얗게 반사하는 백지 위에 내 첫 평론을 쓰고 곧바로 두 번째 평론을 썼다. 내 나이 스물세 살 때이다. 평생을 상상력과 몽상, 꿈의 연구에 바친 철학자, 중등교육만을 마친 뒤 우체국 임시직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뒤 독학으로 중학교선생이 되어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프랑스의 명문 소르본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된 바슐라르를 만나지 않았다면, 또한 그가 내게 물질의 상상력과 사원소론에 대한 계시를 내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언감생심 평론가를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바슐라르에 관한 모든 문헌들을 꼼꼼하게 찾아내 탐욕스럽게 읽어치웠다. 바슐라르가 펼친 몽상의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은 뒤 나는 비로소 평론가로 태어났다. 바슐라르는 내 평론의 출발점이자 원체험이 되었다.
바슐라르에게서 몽상의 은사를 받은 뒤 서른 해만에 다시 『불의 정신분석』을 읽으니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바슐라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의 형태, 즉 불, 전깃불, 인광, 화산 불, 번갯불들, 저마다 개성을 가진 불들을 끌어 모으며 그 앞에서 몽상한다. 화덕에 얹힌 냄비에서 음식이 익어가듯 불에 대한 몽상 속에서 그 철학적 사유는 깊어진다. 바슐라르는 불의 철학자, 정신분석가, 그리고 연금술사다. 그 연금술사에 의하면 불은 "극단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불은 "물질 속으로 내려가, 증오와 복수처럼 잠재 상태로 그 속에 몸을 숨기기도 한다. 모든 현상 중에서, 불이야말로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가치 부여를 분명하게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현상이다. 불은 '낙원'에서 빛난다. 불은 '지옥'에서 타오른다. 불은 온화함이기도 하고 고문이기도 하다. 불은 부엌이기도 하고 세상의 종말이기도 하다."
태초의 세상은 불의 세상이었다. 불꽃은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고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처럼 타올랐다. 세상은 불의 바다였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불들이 사라졌다. 그 불들을 집어삼킨 것은 숲속의 나무들이다. 불들은 나무들 속으로 들어갔다. 나무들이 땅에서 수직으로 일어선 녹색 불꽃이란 별명을 얻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모든 나무들은 불들이 그러하듯 그 머리를 하늘을 향한다. "불은 두 나뭇조각에서 태어난 자식"(막스 뮐러)이다. 두 나무 조각을 마찰시키면 그 안에 숨은 불들이 홀연히 깨어 일어난다. 불은 욕망이며, 변화하고 생성하는 힘이다. 욕망이 꿈꾸는 것은 피안이다. 불은 피안을 향해 달리지만 그 끝은 욕망의 소멸이며 죽음이다. "불을 관조하는 인간에게, 불은 신속한 생성의 한 예이자 상세한 생성의 한 예이다. 물보다 덜 단조롭고 덜 추상적이요, 매일 우리가 숲속에서 감시하는 둥지 속의 새보다 더 빨리 자라고 더 빨리 변화하는 불은 변화의 욕망을, 시간을 앞당기고자 하는 욕망을, 모든 생명을 그 종말, 그 피안으로 나르고자 하는 욕망을 암시한다."
중국 고대신화에 수명국(遂明國)이라는 나라가 나온다. 세상의 서쪽, 그 끝에 있는 나라다. 해도 달도 닿지 않아 늘 어둠에 묻혀 있는 나라다. 그 나라의 한 가운데 수목(遂木)이라는 거대한 나무가 자라는데 무성한 가지로 하늘을 가려 누리는 빛 한 점 없는 칠흑이다. 한 나그네가 칠흑 세상을 헤쳐 이 수목 아래에 닿았다. 나그네는 거대한 독수리가 수목의 밑동을 계속 쪼아대는 걸 보았다. 영롱한 불빛들이 그 주위에서 반짝였다. 독수리가 나무에 숨은 불을 단단한 부리로 쪼아 깨우는 것이다. 지금도 불은 어린애가 제 엄마에게 달라붙듯이 나무에 쉽게 달라붙는다. 어린애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와 같이 나무는 불에게 제 몸통을 내주고 아무 조건없이 그 속의 자양분을 빨아먹게 한다. 불은 나무에 매달리고 파고들며 제 뿌리를 뻗어 나무속에 깊이 박는다. 나무가 불에게 제 자양분을 다 빨린 뒤 재가 되면 불꽃 줄기는 그 재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제 씨앗을 간수하며 다시 타오를 기회를 엿본다.
어린시절 아궁이 앞에서 부지깽이로 불꽃을 들쑤시면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는다. 불은 어린애가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는 사회적 금기의 대상이다. 아버지는 화재의 위험성을 늘 과장하며 금기의 원칙을 강화한다. 불은 오로지 아버지의 것이다. 어린애들은 아버지의 것을 훔친 뒤 처음으로 불이 주는 기쁨을 맛본다. 불을 훔치는 아이들은 저희가 프로메테우스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어른들이 전유하는 지식과 제작, 힘에의 의지를 욕망하는 아이들이 저지르는 첫 번째 범죄이다. 야단치는 목소리와 위협하는 몸짓이 만든 금기들을 위반하며, 그리고 아버지의 원칙에 불복종하며 자라는 어린애들의 무의식에는 한결같이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가 자리한다.
바슐라르는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원시적 불에 대한 직관들을 찾아낸다. 노발리스의 상상력은 불의 빛보다 그 열에 더 반응한다. 노발리스의 상상력은 열 감각의 만족과 열이 주는 행복에 대한 깊은 의식에서 더 많은 자극을 받고 움직인다. "열은 하나의 재산이요 소유다". 빛이 사물의 표면에서 미끄러지며 놀고 웃지만 열은 한사코 사물의 내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저 심연으로 스며들며, 심지어는 땅속 깊은 곳으로 하강한다. 표면의 아래로 스미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밀한 열의 형태로 존재하는 불은 싹이다. 대지에 떨어진 씨앗은 그 중심에 불을 품는다. "불타는 것은 싹을 틔운다." 빛은 보이지만 열은 느껴진다. 노발리스는 느낌 속에서 불을 감지한다. 부드럽고 모호하게 분산되는 열은 교감과 공감의 전도체다. 바슐라르는 불에 달라붙는 이 공감적 집착들에 노발리스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물은 여성적 물질이다. 차고 축축하며 끈적이고 어둡다. 반면에 불은 그 본질에서 남성적 원소, 유황에 의해 배태된 물질이다. 남성의 고환은 불의 씨앗들을 저장하는 작은 창고다. 남성을 움직이는 것은 힘, 용기, 의지다. "사물들의 여성적 원리는 표면과 외피의 원리요, 품이요, 은신처요, 포근함이다. 남성적 원리는 중심의 원리요, 불꽃이나 의지처럼 능동적이고 갑작스러운 '힘'의 중심이다." 여성의 수태는 오로지 불을 가진 남성의 생식력을 제 안으로 끌어당길 때만 가능하다. 여성의 질(膣)은 불의 정기를 자궁으로 이끄는 도관이다. 남성의 생식력만이 여성적 물에 작용하여 수태시킬 수 있다. 즉 물에 작용하여 형태를 결정짓는 불은 수컷의 원소인 것이다. 정낭은 불의 씨앗들, 정액이라는 액체화된 불의 저장소다. 그러나 여자들은 이미 그 내부에 남성적 요소들을 숨긴 "신비스러운 남자들"이다. 거꾸로 불의 원리로 움직이는 남성적 활동들, 팽창 같은 물리적 활동들을 전유하는 남자들은 실은 "열에 의해 팽창된 여성"일 뿐이다.
바슐라르는 불을 제 몽상의 동반자로 초대한다. 불은 사람에게 "제1의 몽상 주제요, 휴식의 상징이요, 휴식에의 초대"인 까닭이다. 따뜻한 화덕 앞에서 몽상에 빠지는 것은 불의 일차적인 활용이다. 사람은 누구나 아궁이의 붉은 잉걸불이나 화덕의 희고 푸른 불꽃들 앞에서 안락한 몽상의 세계로 미끄러진다. 그 몽상은 철학적인 축(軸)들을 갖고 있다. 불보다 더 따뜻한 사유의 요소, 몽상에 적합한 원소는 없다. 불의 철학자, 불의 정신분석학자인 바슐라르는 불의 물리화학적인 성질과 그 현상에 대한 탐미적, 정신분석적 관조를 펼쳐 보여준다. 불을 매개로 신화와 종교, 문학을 가로지르며 이끌어낸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와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와 노발리스 콤플렉스와 호프만 콤플렉스를 거쳐 그것의 시적 다이어그램을 찾아주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