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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귀 선조님의 묘상에 대방군파
선조 3위[양수정,양변,양우룡]의 신단을
건립하신 남원양씨 대방군파 종문에게 감히 여쭙습니다.
선조님은 문과에 올라 조선초기에 사간원 대사간의 요직을 지냈는데 사간원은 사헌부와 더불어 양사(兩司)라고 불리는 언론기관으로 문과출신의 명망이 들어난 인물이 임명되었고, 대사간은 사간원의 장관으로 언론과 규찰을 주도하였고 많은 특권이 보장되었으며 승진도 관행적으로 보장되는 문관 최고의 요직인데 양사귀 선조님은 대사간의 자리를 마다하시고 외직을 자청하여 김해부사로 내려갔습니다.
양사귀 선조님은 중앙정계에서 최고의 위상을 들어냈지만 권력을 탐하지 않으셨고 김해부사로 내려가신 후 얼마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단성지역에서 평생 은거하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사귀 선조님은 남원양씨 3개 종파인 병부공파, 용성군파, 대방군파 모든 종파의 족보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은 각기의 종파에서 세대를 이어왔고 또 이어가고 있습니다.
남원양씨 병부공후 문양공파 족보에는 양사귀 선조님을 문양공의 종숙부로 등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사귀 선조님의 대부분의 자손들은 대방군파로 종파를 구분하여 세대를 이어가고 있고 또 일부 자손들은 용성군파로 종파를 구분하여 세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자손들이 대방군파라고 믿고 있는데 방계 자손의 족보에서 병부공파로 등재하는 것은 문양공 대종회에서 나름대로 힘겨운 판단이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양사귀 선조님이 병부공의 자손이라는 문양공 대종회의 공식 입장은 1799년 기미대동보와 운창 이시분 선생님의 단성지에 근거하며, 문양공 대종회의 공식 입장이라 함은 문양공 대종회에서 배포한 문건 자료에 의합니다. 또한 문양공 대종회는 과거로부터 최근 2007년에 편찬한 족보까지 양사귀 선조님을 문양공의 종숙부로 등재하고 있습니다.
운창 이시분 선생님은 단성지역의 충신, 열부, 효자, 학자의 행적을 정리해서 단성지(1640년)를 편찬하였는데 지금까지 중요한 학술자료로 이용되고 있고 현존하는 양씨 최고의 족보인 병인보(숙종, 1686년)보다 앞선 시대에 편찬되었는데 양사귀 선조님은 판도판서를 지낸 양우(병부공10세) 선조님의 손자이며 선공사승을 지낸 양우룡(병부공 11세) 선조님의 아들로 등재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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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新等八坊考證
우신등팔방고증
都山第一坊是圓山故金海府使梁思貴之所居坊有井而俗傳梁司諫之井豈昨非府使會爲司諫也
도산제일방시원산고금해부사량사귀지소거방유정이속전량사간지정기작비부사회위사간야
其祖祐版啚判書其父友龍繕工寺承旨云思貴生六男二女一子往南原二子贅晉州一子往古邑大
기조우판비판서기부우룡선공사승지운사귀생륙남이녀일자왕남원이자췌진주일자왕고읍대
二子往杮基而卜居有若完山之四鳥散而之四惟兩女壻李詰金重侃卽忠烈公金方慶之後有子有孫
이자왕폐기이복거유약완산지사조산이지사유양녀서리힐금중간즉충렬공금방경지후유자유손
其曰亨南碩南曰鎣卽重侃八世孫李詰官號錄事而有素之稱無子而只有一女而靡處不到爲
기왈형남석남왈형즉중간팔세손리힐관호록사이유소지칭무자이지유일녀이미처불도위
沈姞相攸莫如沈樂領相而右相之子公亦蟬珮位至參議門楣映曜閭里生輝至今皆稱沈參議五世有
침길상유막여침악령상이우상지자공역선패위지참의문미영요려리생휘지금개칭침참의오세유
孫曰苓以直言忤權奸竄逐而付處於此以其有先世基業故也公嘗築室於山腰賦楚些而日哦
손왈령이직언오권간찬축이부처어차이기유선세기업고야공상축실어산요부초사이일아
其間基地址尙在見其基而思其人則孰不墮淚公終死於杖下有若字汝栗者卓荦不羈之士
기간기지지상재견기기이사기인칙숙불타루공종사어장하유약자여률자탁락불기지사
名縝參議七世孫也見嬴承蹢躅之狀知時政之將亂人或勸之仕而不應掉臂南歸修先代
명진참의칠세손야견영승척촉지상지시정지장란인혹권지사이부응도비남귀수선대
別業而因居焉歲在庚戌矣傲遊江海之間蕭灑送日月而視不義
별업이인거언세재경술의오유강해지간소쇄송일월이시불의
1799년 기미대동보는 정조대왕께서 문양공 양성지(병부공 13세) 선조님의 외손 족보를 펴내자 우리 종문에서도 족보를 편찬하자는 결의가 세워져서 발행된 족보입니다. 정조대왕께서는 송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규장각을 설치하였는데 이 제도가 이미 삼백여년 전의 양성지 선조님이 제안한 것임을 알고 나서는 무척 놀라셨고 양성지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관원에게 명하여 양성지 선조님이 남긴 글을 찾아 보도록 하였는데 양성지 선조님이 남긴 글을 찾아서 읽어 본 정조대왕께서는 다시 한번 더 놀라게 되었습니다.
양성지 선조님이 제안한 많은 정책들은 너무나 획기적이고 탁월하였으며 역사, 지리, 병학, 문학 등 모든 분야에서 실용적인 개선책을 제안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조대왕께서는 양성지 선조님에게 무안한 정신적 교감을 느꼈고, 규장각을 설치하고 관원을 배속시키고 보니 규장각 관원 모두가 양성지 선조님의 외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조대왕께서는 양성지 선조님과의 인연을 더더욱 소중하게 생각하였고 양성지 선조님의 외손 족보를 만들게 하였던 것입니다. 문양공 외예보가 1791년 이루어지자 문양공의 자손들은 본손의 족보인 정사보(1797)를 만들었는데 양학신 선조님께서 주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문양공의 증조부 이신 묵재공 양우 선조님의 바르지 못한 계보가 편찬되어서 국가기관인 예조에 소장을 재기하여 기 편찬된 족보가 폐기되는 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혼탁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문양공파의 정사보(1797) 편찬을 주관하였던 양학신 선조님께서 묵재공 종문의 일을 주관하고 있었던 양보구 선조님께 족보 편찬을 함께할 것을 청하여 1799년 기미대동보가 편찬되었습니다. 기미대동보의 서문은 양성지 선조님의 후손이신 양학신 선조님이 지으셨고 발문은 양사귀 선조님의 후손이신 양보구 선조님이 지었습니다. 서문을 지으신 양학신 선조님은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지내셨고 양성지 선조님의 셋째 아드님이신 양찬 선조님의 자손이며 양학신 선조님의 조부님께서는 양찬 선조님의 7대 장손이었기 때문에 종문의 일을 주관하는 집안의 자손으로써의 역할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발문을 지으신 양보구 선조님은 양사귀 선조님의 자손이며 양사귀 선조님의 아버지이신 양우룡(병부공 11세) 선조님은 묵재공 양우(병부공 10세) 선조님의 장남이셨고 그 자손들께서 묵재공 종문의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양학신 선조님과 양보구 선조님이 주관하여 편찬한 기미대동보에는 양사귀 선조님은 묵재공의 손자로 등재되었습니다.
양성지외예보는 규장각 본이 있고 왕실도서관인 장서각 본인 남원양씨외예보가 있는데 규장각 본은 양성지 외손들의 계보만 정리되어 있고 장서각 본은 병부공 파조로부터의 계보와 묵재공 양우 선조님의 자손 계보와 문양공의 외손 계보가 등재되어 있습니다. 남원양씨외예보에는 양사귀 선조님은 묵재공 양우 선조님의 장손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문양공파의 정사보(1797)는 본손 5권과 외예보 1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서각본은 정사보와 같이 문양공파 족보속에 포함되었던 내용으로 판단됩니다.
묵재공 양우 선조님은 여말 판도판서(호조판서, 재정경재부장관)을 지내셨는데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선영이 있는 교룡산 아래에서 은거하셨고 조선개국 태조께서 묵재공의 학문이 깊음을 들으시고 대재학의 벼슬로 회유 하였으나 낮에는 하늘을 바라보지 않으시고 밤에는 옷도 벗지 않으시고 말씀조차 하지 않으시며 끝까지 출사를 거부하셔서 후대에 개경 두문동 서원에 배향된 충신이시며 정조대왕 시대에는 고향에 월곡서원이 건립되고 묵재공을 영구히 향사할 수 있는 국불천위가 내려졌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불천위로 영구히 향사되는 선조를 둔 종가의 자손들은 가문의 명예를 들어내며 위상을 높이셨는데 묵재공을 향사하는 일에 정성이 부족함을 느끼신 양처해 선조님께서 월곡서원 구제통문을 발기하셨습니다.
양처해 선조님은 기미대동보의 발문을 지으신 양보구 선조님의 백부님이시며 묵재공 양우 선조님의 향사를 일족과 함께 주관하셨습니다. 통문이 발기되자 문양공의 자손들도 답례를 올리셨는데 통문과 답례에 대한 자료를 남원양씨 관포문중의 양방수님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거제관포문중은 양사귀 선조님의 6子이신 양준 선조님의 자손이며 양준 선조님은 내직으로 사헌부감찰/사헌부지평/정랑/사재감정을 지내시고 외직으로 진보현감/전주판관/영광군수를 지내셨기 때문에 그 자손들은 군수공파로 분파하여 세대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월곡서원구제통문에 의하면 거제관포문중의 직계선조님이신 양처해 선조님께서 묵재공 종문의 일을 주관하고 있었고 기미대동보의 발문에 의하면 양처해 선조님의 조카이신 양보구 선조님께서 묵재공 종문의 일을 주관하였습니다. 전해지는 사료는 두 종류이지만 하나의 역사로 일맥상통합니다. 양처해 선조님의 자손이신 거제관포문중의 양방수님이 묵재공의 계보를 바로 세우려고 하는 것 또한 200여년 전 남원양씨 병부공후 묵재공후 사간공후 군수공파의 양처해 선조님이 묵재공 종문의 일을 주관하신 것에서 일맥이 흘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양사귀 선조님의 묘갈명이 면우집에 등재되어있습니다. 묘갈에 의하면 양사귀 선조님은 대방군파의 후손이지만 판도판서를 지내신 양우[병부공 10세] 선조님의 손자이시고 선공사 승을 지내신 양우룡[병부공 11세] 선조님의 아들로 등재되었습니다.
양사귀 선조님의 묘상에 대방군파 선조 3위[양수정,양변,양우룡]의 신단을 건립하신 남원양씨 대방군파 종문에게 감히 여쭙습니다.
1) 현존하는 남원양씨 족보 보다 앞선 시대에 운창 이시분 선생님이 남기신 단성지에 의하면 양사귀 선조님은 묵재공 양우 선조님의 손자 이십니다.
첫댓글 천산이라 이름하여 대방군파보의 誤譜를 통렬히 비판한 글을 올린 종문에게 찬사의 갈채를 보냅니다.
이는 일찍히 남원양씨 가문에 없던 대방군 파보를 조작하여 만든, 대방군파 일가들에게 알리는 호소문입니다.
족보에 대한 오보가 있다면 종친회가 나서서 과감히 정리하고, 후손들이 함께 따라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남원양씨 중앙종친회에서 정조임금때부터 12세조 양사귀(梁思貴)의 자녀들인, 13世祖(세조) 장남 梁 결(양결), 차남 梁 岷(양민), 삼남 梁 嶧(양역), 사남 梁 岐( 기), 오남 梁 嶠( 교), 육남 梁 峻(양준)의 자손들에게 수차 통합을 종용해왔으나, 일부 후손들이 대방군파를 버리지 못하고, 우리 선대조상이 만든것이니 맞던 틀리던, 무조건 맞다고 억지를 쓰는 사례다. 잘 알지도 못하고 맞다 틀리다. 다투다 보니 우리 사회는 분열이 생긴다. 형제가 서로 다투고 분열하면 고구려의 멸망을 자초한 역사를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조선시대는 譜廳에서 族譜를 폐기시키고, 곤장을 때렸단다. 분열이 생겨 三聖祠의 序列도 못챙기는 꼴이다
이는 1984년 서울 중앙종친회에서 대사간 세보 즉 갑자보를 만들어 대방군파보는 정보가 아니라고 천명했지만 대방군파 후손들이 그 뜻을 모르니 어쩔 도리가 없답니다. 1799년에 만든 기미 보첩이나 1803년에 남원양씨 병부공파 22세조님 친필 월곡서원 구재통문에 모든 일가는 위로 선조를 공경하여 받들고 아래로는 자손에게 주는 도리를 밝히라고 군수공파 22세조 양 처해 선조님의 친필이 있어 천명했지만 요즈음 세상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 말씀도 듣지 않는데 누가 남의 뿌리를 들추어 바른말 한다고 추종하겠는가 자책을 해 봅니다. 머나먼 나라 미국에서도 남원 양씨들이 혜아릴수 없을 정도로 와 있지만 단합이 되지 않는 답니다.
1803년 계해년에 천명한 월곡서원 구재통문에도 한심한 생각이 지경에 미치니 오열을 감추지 못신다는 비통한 글귀가 남아 있습니다. 미국 뉴옥이나 LA에서도 양씨가 많고, 심지어 노우스캘롤라이나 그린스보로에도 싸롯에서도 1992년경에 남원양씨들이 유학을 많이 와서 놀랠 정도로 많았는데 서로 서로 교류가 안되었고, 양씨들은 형제들 간에도 우애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있습니다.
1984년 대한민국 중앙양씨 종친회에서도 갑자보를 발간 하였는데도 아직까지 대방군파 자손을 자처하는 일가들에게 공부하라고 통렬히 비방하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