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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40)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사전 답사 (합천→심랑진) ① 황강[합천-거창]
2020년 11월 02일 (월요일) [카니발&미니벨로]▶ 대원 동행
* [합천 제우스모텔]→ 합천→ (합천의 역사)→ (대야성전투)→ 합천댐→ 합천임란창의사→ (합천임란창의사) 의병활동 이야기→ (삼가 뇌룡정)→ (합천팔경)→ 합천 황강→ 함벽루→ [거창} 수승대→ (거창 양민학살사건)→ 합천 벽한정→ 의령으로 가는 길→ 의병장 곽재우 장군 생가→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 정암나루 이야기→ 의령읍 전통시장→ 의령 소고기국밥→ 충익사→ 20번 국도→ [낙동강]…(합천보→ 황강 하구→ 적포교(20번 국도)→ 낙서초교)→ 진등산 박진고개(낙동강 조망)→ 1008번 지방도로→박진로→ 박진교(낙동강)→ 칠현리 1022 영아지길→ [청아지→ 영아지→ 신전저수지 앞(우향)→ 하계리→ 남지 강둑길]→ [남지체육공원]→ 남지대교(도강)→ 함안 칠서→ 칠서 강나루캠핑장→ 강둑길→ 덕촌마을→ 밀포교(이령천)→ 창녕함안보→ 노고지리수변공원길→ 임해진(소우정)→[강나루민박]
* [합천군 청덕면 삼학리] ← 합천-창녕보 아래 서쪽에서 황강 합류(남덕유산 발원, 거창, 합천호, 합천 경유)
*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서남쪽에서 남강 합류(남덕유산, 뱀사골 발원 / 경호강-진양호 경유)
* [창녕군 유어면 가항리] ← 동쪽에서 창녕(우포늪) 토평천 합류 / ← 서쪽에서 신반천 합류
카니발 & 미니벨로 투어
오늘은 경상남도 내륙의 깊숙한 지역인 합천(陜川)에서 아침을 맞았다. 바야흐로 낙동강 1300리 대장정에서 ‘경상남도 구간’이 시작되는 날이다. 어제 오후 합천·창녕보에 도착했을 때, 낙동강 종주 ‘태백시 출정'의 동반 대원인 기원섭 일행과 이상배 대장을 만나게 됨으로써, 오늘부터 이틀 간(11.02~11.03) 자연스럽게 동행(同行)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두 발로 홀로걷기’는 일단 보류하고, ‘네 바퀴의 카니발’이나 ‘두 바퀴의 미니벨로[輪발]’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기원섭의 카니발에는 4대의 미니벨로[접이식 자전거]가 실려 있다. 그러므로 이 이틀간의 여정은 ‘벗들과의 유쾌한 어울림’이 되는 동시에, 내가 ‘두 발로’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탐방할 수가 있게 되었다. 자동차의 기동성, 신속성을 활용함으로써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명소나 유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 Minivelo 미니벨로 ― 영어로 '작다'는 뜻을 가진 미니(Mini)와 프랑스어로 '자전거'라는 뜻을 가진 벨로(velo)가 합쳐진 합성어로 '작은 자전거'를 말한다. 특히 요즘은 '접이식 작은 자전거'를 통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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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 ‘두 발로’ 다시 출행하는 낙동강 물길
— 창녕군 명소와 남지읍 영아지 고개 그리고 남강(南江) 유역의 역사와 문화를 찾아서 —
그러나 카니발이나 미니벨로 투어에서 갈 수 없거나, 가지 않은 ‘포인트’, 즉 꼭 탐방해야 할 유적지나 명소를 탐방하기 위해서, 필자는 3일 후(11.06) 아래와 같이 다시 출행하여 ‘두 발로 홀로걷기’를 했다. 특히 어제 도착하였던 합천·창녕보를 시작점으로 하여 박진고개-박진교-영아지고개-남지에 이르는 여정을 다시 걷게 된다. 특히 박진교에서 남지에 이르는 낙동강은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던 ‘박진전투기념탑’이나 ‘영아지 고개를 넘어가는 일’, 그리고 영아지 고개 넘어 남지읍 용산리의 낙동강 대안(對岸, (의령과 함안 사이)에서 유입되는 남강(南江)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남강(南江)은 경상우도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는 유서 깊은 장강이다. 남강은 지리산과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상류에 함양과 산청이 있고, ‘경호강’이라는 이름으로 남하하다가, 진주의 서쪽에서 진양호를 이루고 남강의 본류가 된다. 남강은 진주성(촉석루)을 휘감아 돌아서 북동 방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굽이굽이 흐르면서 의령과 함안의 경계를 이루며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와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사이의 하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 먼저 「낙동강 종주 이야기」는 2일 간(11.02~11.03)의 카니발&미니벨로 여정(합천→물금)을 정리하면서, 내 독행의 여정을 해당 지역의 차례에 따라 서술해 나갈 것이다. 특히 카니발 투어에서 빠진 중요한 부분을 탐방한 내용이나 해당 지역의 문화유적에 대한 이야기를 삽입하여 서술해 나간다. 11월 06일(금) 합천-창녕보→ 남지읍 구간의 재 출행 일정은 다음과 같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합천→창녕) ② 합천-창녕보→남지
2020년 11월 06일 (금요일)
두 발로 걷기 (獨行) ▶ 차로 간 길을 다시 걷다
* [합천-창녕보→ 황강 하구→ 적포교(20번 국도)→ 낙서초교→ 진등산 박진고개(낙동강 조망)→ 1008번 지방도로(박진로)→ 박진교(낙동강)→ [박진전투기념관](남지읍 월하리)→ 박진교 앞 둑방 (바이크로드)→ 영아지길→ 청아지→ (마분산) 영아지 고개→ [영아지 낙동강 전망대]→ 신전리(우향)→ → [남지읍 용산리 낙동강 대안에서 남강(南江) 합류]→ 학계리→ [남지 인도교]
* 11월 03일 카니발 투어 구간 중, 삼랑진→물금 구간도 11월 07일(토) '두 발로' 재 출행했다. ― 별도로 서술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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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출행
☆… 이른 아침, 숙소(제우스모텔)에서 일어나, 이웃에 있는 가고파 식당에서 솜씨 좋은 할머니가 특별히 마련한 구수한 된장끼개와 별미 은갈치조림을 곁들여 아침식사를 하고 오늘이 출행이 시작되었다. 오전 9시, 기원섭의 카니발에 이상배 대장과 이진애·김옥련 대원 그리고 필자가 동승했다. 모든 대원의 상태는 아주 양호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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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慶尙南道) ― 유서 깊은 역사와 의기가 살아 있는 땅
경상남도 지역은, 백두대간 지리산—낙남정맥과 낙동정맥-영남 알프스의 정기가 모아진 낙동강 유역이다. 여기 합천-창녕에서 저 부산 하구둑-몰운대까지 경상우도의 역사와 학문 그리고 그 특유의 유서 깊은 문화와 정신이 빛나는 곳이다. 이 지역 낙동강의 지천인 거창-합천의 황강, 함양-산청-진주-함안-의령의 남강, 밀양-삼랑진의 밀양강, 양산-물금의 양산천, 그리고 창녕의 우포늪 등 도처에, 생명이 살아 있고, 이 땅에 뿌리 내린 토착민들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文化) 그리고 선현들의 의리(義理)가 살아 있는 곳이다. 가야와 신라, 고려와 조선을 관류하는 뿌리 깊은 의리(義理)와 기상(氣相)이 높다. 예컨대 임진왜란 때 창의한 의병(義兵)들의 활약상은 장렬하기 그지없다. 고요하게 흐르는 낙동강은 그 뜨거운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합천(陜川)
경상남도의 서북에 위치한 합천은 동·남쪽은 창녕군·의령군, 서쪽으론 거창군·산청군, 북으론 경북 고령·성주군과 접하고 있다. 합천 동부는 낙동강이 흐르고, 그 외 지역은 높고 험한 산이 중첩하고 있다.
백두대간 대덕산-초점산에서 분기한 수도산지맥이 동쪽으로 뻗어내려 가야산(1,430m)을 이루고, 그 우람한 산줄기는 계속 남으로 뻗어 우두산 비계산(1,125.7m), 두무산(1,083.4m), 오도산(1,133.7m), 인덕산을 경유하여 남쪽의 소룡산에서 황강(黃江)을 만나 멈추고, 합천읍 인곡리 있는 인덕산에서 분기하여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합천지맥]가 토곡산-만대산-어태산-너릿골산-솜등산-노구산-소학산을 지나 등밑산에서 회천(會川)을 만난다. 합천지맥은 분수산맥이다. 그 북쪽은 묘산천(→안림천→고령 회천)이 흐르고 남쪽의 모든 산곡에서 발원하는 물은 각각 황강으로 흘러든다.
황강(黃江)은 백두대간 초점산에서 분기한 수도산-가야산-오도산 지맥과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남으로 분기한 기백산 지맥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한 모든 지천이 거창(居昌)에서 합류하여 방대한 합천댐을 이루고, 고도 합천(陜川)을 경유하여 합천군 청덕면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한 산줄기가 기백산, 감악산, 월여산, 황매산(1108m)으로 이어지는데 이 황매산 줄기는 동쪽으로 거창-합천의 황강, 서쪽으로 함양-산청의 경호강(→남강)이 흐른다. 그러므로 황매산 지맥은 경호강과 황강의 분수산맥이다.
합천은 한반도 남부내륙산간지방에 속하는 외진 산골이지만 유서 깊은 역사와 귀중한 문화유산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합천의 역사
일찍이 청동기시대부터 제각기 문화권을 형성하여 삼국시대 초기에는 이미 크고 작은 부족국가들이 이 지역에서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합천지역의 ‘다라(多羅)’ 또는 ‘대량(大良)’, 초계지역의 ‘초팔(草八)’, 신번(新繁)지역의 ‘신이(辛爾)’ 등의 이름은 내외 문헌에 일찍부터 등장하는 국명들이다. 이러한 나라들은 고령지방의 ‘대가야(大伽倻)’나 창녕지방의 ‘빛벌가야[比自火伽倻]’ 세력권에 속했던 가야연맹의 일원으로, 그 중에서도 합천지역에는 상당히 유력한 나라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555년(진흥왕 16) 신라(新羅)는 창녕의 ‘비사벌(比斯伐)’을 병합하고 이곳에 하주(下州)를 둔 데 이어, 562년 고령의 대가야(大伽倻)를 정복하면서 합천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이어서 565년에는 창녕의 하주를 합천으로 옮겨 대야주(大耶州)를 설치하여 백제에 대비하는 전진기지로 삼았다. 백제와 신라가 치열한 공방을 벌인 ‘대야성전투’는 삼국시대의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는 중요한 전투이다. ☜ 『삼국사기』
대야성전투(大耶城戰鬪)
‘대야성전투’는 642년(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을 둘러싸고 신라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대야성(大耶城)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의 황강 연안에 위치해 있는데,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신라의 요충지이다. … 640년대 접어들면서, 백제(百濟)는 옛날 신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642년(의자왕 2) 7월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8월에는 고구려 군사와 연합해 신라의 대(對) 중국교통 거점인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을 공격하였다. 대야성전투는 이러한 백제의 공세가 절정에 달한 사건이었다.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윤충은 대야성을 포위하여 압박을 가하였다. 대야성 도독(都督)은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그런데 김품석은 이 지방 세력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은 적이 있어, 대야성 지방의 상당한 세력들이 많이 이탈하였다. 검일은 이 일을 원망하다가 백제군과 내통해 대야성 창고에 불을 질렀다.
백제 군사가 대야성을 공격해 왔을 때, 그러나 이 지방 출신인 죽죽(竹竹)과 용석(龍石)은 백제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성주 김품석은 싸우지도 않고 보좌관인 아찬(阿飡) 서천(西川)의 주장에 따라 항복하여 아내 고타소(김춘추의 딸)와 가족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대야성의 남녀 1천여 명이 사로잡혀서 백제의 서쪽지방으로 끌려갔다.
신라(新羅)는 대야성전투의 패배로 서부 국경지역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백제 방어선도 압량(押梁,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대야성의 함락(陷落)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정치능력에 대한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야성의 책임자는 선덕여왕의 세력기반인 김춘추의 사위였으므로 반대파들의 정치공세가 적지 않았다.
당시 선덕여왕의 정치는 대신(大臣)으로 불리는 소수 귀족들에 의해 구성된 회의체를 통해 운영되고 있었다. 국가의 중대사는 대신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진평왕(眞平王) 사후 남자로서 적절한 왕위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선덕여왕의 즉위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대립·갈등하였고, 결국 그들 간의 정치적인 타협에서 나온 정치운영 형태였다. 여왕지지파와 여왕반대파는 균형을 이루어 서로 대립하고 견제하였는데, 대야성의 함락으로 여왕지지파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수세에 처한 신라는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두 방면으로 대응하여 나갔다. 먼저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파견해 외교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영토 할양을 강요당하며 원병요청에 실패하였다. 다음으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서 새로이 압량주(押梁州, 경산)를 설치하고 군주(軍主)에 김유신(金庾信)을 임명해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가혜성(加兮城)을 비롯한 7성을 함락시키는 등 상실된 대야성 지역은 김유신에 의해 점차 탈환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압량주 도독(都督)을 역임한 지역과 새로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은 김유신의 군사적인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신라는 당면한 직접적인 위기는 일단 벗어날 수 있었으며, 김유신의 대(對) 백제 군사 활동의 성공은 여왕 지지파들의 정치적인 위상을 강화시켜 주는데 큰 몫을 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 김유신(金庾信)은 백제군을 대야성 밖으로 유인해 격파하고, 백제 장군 8인을 사로잡고 1천인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사로잡은 8인을 대야성 전투 때 죽은 김품석 부부의 유해와 교환하는 한편, 백제의 경내를 공격해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이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伊飡)의 벼슬을 받고 더하여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그리고 김춘추(金春秋)는 고구려와 왜(倭)에 대한 외교노력은 실패했지만 입당(入唐)한 뒤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간 목적은 단순히 외교에 머문 것이 아니라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를 지향하는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당제(唐制)의 적극수용이라는 정치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김춘추는 당나라가 대고구려 원정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백제 공략을 위해 당(唐)을 끌어들이는 원병 요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0만 구원군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대야성전투의 승리로, 일시적으로 백제가 신라를 압도했지만, 이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몰리게 된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과정에서 군권(軍權)을 장악한 김유신과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후 양자가 연합해 새로운 왕실의 핵심세력을 형성했으며, 바로 이들의 주도 하에 삼국통일(三國統一)이 성취된 것이다.
경남 최대 규모의 합천댐
합천댐은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상천리의 낙동강 지천인 황강(黃江)의 중류에 있는 다목적댐이다. 합천에서 황강 상류 17km 거리에 있다. 우선 보기에도 댐의 규모가 엄청났다. 거대한 댐을 경유하여 전망대 기념공원에 올라갔다. 합천댐의 내용은 이러하다.
경남 합천군 대병면에 있는 합천다목적댐은 경남에 들어선 댐들 가운데 담수량이 가장 많다. 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합천호(陜川湖)는 대병면에서 봉산면을 거쳐 거창군 남하면까지 30여㎞에 이르고, 최대 7억9000만t까지 담수 할 수 있다. 지난 1999년 보강공사를 완료한 진주의 남강댐 저수량이 3억920만t임을 비교하면 배가 훨씬 넘는 규모다.
합천댐이 완공됨에 따라 홍수조절이나, 생활용수, 농업용수 및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연간 232.4Gwh의 수력발전을 하고 있다.
[수상 태양광발전] 그리고 합천댐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설치한 수상 태양광 발전시스템이 있다. 대병면 역평마을 앞 합천호 수면에 태양광 전지 모듈 414장과 이를 지지하는 수상 구조물을 설치했다. 시간당 100㎾의 전기를 생산한다. 이 시스템이 가동되면 4인 가족 30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기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합천댐 입구의 우측에 거대한 ‘합천댐준공기념탑’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에 각가지 조각상이 시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물문화회관’의 옥상에는 합천호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랐다. 아득한 산곡 사이에 담수된 광활한 합천호는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의 모든 산들이 호수와 어울려 만추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맑은 하늘 밝은 햇살이 내리는 호반의 풍경은 그야말로 정결한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사실 합천호의 풍경은 ‘합천팔경’에 들어있다. 특히 호반을 돌아가는 백리 벚꽃길을 팔경에 담고 있는데, 오늘 같은 만추의 호반도 화사한 봄 벚꽃과 다른 절경이다.
합천 임란창의사(陜川壬亂倡義祠)
‘합천댐 물문화회관’ 옥상의 전망대에서 합천호의 광활한 전경과 그 일대의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감상하고 내려오는 길, 도로에서 올려다 보이는 합천댐의 규모는 엄청났다. 거의 높이가 100m에 가까운 거대한 콘크리트 절벽이다. 그 아래 조금 내려오면 합천댐 휴게소가 있는데, 그 뒤의 산록에 ‘합천임란창의사(陜川壬亂倡義祠)’가 있다.
120년 간의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대륙정복의 허황된 야욕으로 16만 대군을 출병하여 조선을 침략하여 국토를 유린하자, 패퇴만을 거듭한 관군을 대신하여 조선의 선비와 선민들이 분연히 일어났다. 합천창의사(陜川倡義祠)는 임진왜란(1592년)과 정유재란(1597) 때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격퇴했던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을 비롯한 110위의 의사,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사의 충혼을 기리는 곳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합천호 옆의 산비탈을 4단의 층으로 정지하여 창의사를 건립했다. 합천군이 사업비 61억 원을 투입, 2001년 5월 10일 개관하였다.
창의사 입구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높이 17m의 거대한 ‘陜川壬亂倡義記念塔’(합천임란창의기념탑)이 세워져 있고, 다시 긴 계단을 올라서 외삼문인 ‘崇仁門’(숭인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陜川壬亂倡義事蹟碑’(합천임란사적비)이 있고, 우측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다시 세 번째 계단을 올라서면 우측에 강당인 ‘敬義堂’(경의당)이 있고 좌측에 유물관(遺物館)이 있다. 다시 계단을 올라 내삼문인 ‘忠義門’(충의문)에 들어가면 그 정면에 사당인 ‘倡義祠’(창의사)가 자리 잡고 있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사당까지 둘러보려면 모두 4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합천임란창의기념탑의 높이는 현재 합천군의 17개 면을 상징하여 17미터, 탑신(塔身)의 세 개의 주탑은 임진왜란 당시 합천군, 초계면(당시 초계군), 삼가현을 상징하고, 기단(基壇)은 6천여 명의 의병들을 상징하여 6각 6단이라고 한다.
창의사 봉안 위패 (초계 · 합천 지역 의병)
강수, 강익문, 곽율, 권개, 권양, 김두남, 김란손, 김준, 김준민, 김질, 노세기, 노흠, 류영, 마가련, 무명 의병(無名義兵), 문경호, 문덕수, 문려, 문사영, 문익순, 문익신, 문혁, 문홍원, 박개, 박건갑, 박곤갑, 박덕순, 박사겸, 박사돈, 박사재, 박서구, 박천우, 배형원, 변옥희, 손승의, 손인갑, 송희달, 송희순, 송희철, 안각, 안극기, 안기, 안철, 유세온, 윤언례, 윤탁, 이대약, 이대윤, 이동빈, 이영, 이영숙, 이운, 이윤서, 이임, 이정, 이춘형, 이태기, 이해룡, 이현좌, 전문, 전우, 전제, 전치원, 정걸, 정방준, 정석조, 정석희, 정언충, 정연, 정유일, 정인영, 정인함, 정질, 정창서, 조계명, 조의민, 하혼, 허자대, 허홍기 (가나다순)
의병장 내암(來菴) 정인홍(鄭仁弘)
1592년 5월 2일, '조선의 서울' 한양이 일본군에 함락 당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4월 13일로부터 불과 20일만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여행을 다니는 듯한 기세로 거리낌없이 한강을 넘어섰다. 그만큼 조선군은 무기력의 극치를 보였고,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사실 의병들은 1592년 4월 13일 개전 이래 줄곧 패전 소식만 들었다. 4월 14일 부산진 전투(부산진첨사 정발 전사), 4월 15일 동래 전투(동래부사 송상현 전사), 4월 18일 밀양 전투(군관 이대수, 김효우 전사), 4월 19일 김해 전투(4명의 의사 송빈, 이대형, 김득기, 유식 전사), 4월 21일 경주 전투(일본군 무혈 입성), 4월 24일 상주 전투(이일 패주, 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 의병장 김준신, 김일 전사), 4월 26일 문경 전투(문경현감 신길원 전사), 4월 28일 충주 전투(신립,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조방장 변기 전사), 4월 28일 추풍령 전투, 4월 30일 (선조와 조정)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란, 5월 2일 조선의 도성인 한양(漢陽) 함락 … 국가의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전쟁 발발 한 달, 5월에 들어서면서 아군의 승전보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개전 25일 후인 5월 7일에야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과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 해전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이 옥포 해전, 합포 해전에 이어, 5월 8일 적진포 해전, 5월 16일 해유령 전투, 5월 29일 사천 해전, 6월 3일 당포 해전, 6월 5일 당항포 해전... 특히 남해에서 이순신 장군의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왜적을 무찔렀다는 소식이 잇달아 의병들에게 들려왔다. 여기 낙동강 왜군의 병참기지인 무계(茂溪)와 70리(28km) 떨어진 (경남 합천) 야로에 진을 친 채 서로 맞서고 있던 정인홍의 합천의병의 사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합천지역 의병은 정인홍(鄭仁弘) 의병장을 중심으로 손인갑, 윤탁, 박사제, 전치원, 이대기를 비롯하여 의병 4~5천명이 봉기하여, 초계, 현풍 등 낙동강 연안 일대와 고령, 성주, 금산(지금의 김천지역), 진주 등지로 진출하여, 내륙 깊숙이 북상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호남의병군과 협동하여 적을 무찌르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데 공헌하였다. 의병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전의를 상실한 왜적이 전선을 축소하고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의병의 활약으로 관군이 재정비하고 또 명군(明軍)의 지원으로 전세를 뒤집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 창의가 전무한 가운데 유일하게 합천지방에서 창의(倡義)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는 왜적을 소탕하고 명군의 작전을 향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당시 경상우도의 의병은 정인홍, 김면, 곽재우가 주도한 3대 의병군단이었다. 합천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은 고령의 김면(金沔) 의병대장,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의병장과 함께 모두 합천 뇌룡정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수학한 제자이다. 이른바 영남 3대 의병장인 이들 중 김면은 거창·지례 방면을, 곽재우는 의령·현풍을, 정인홍은 합천·삼가·초계·성주·고령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이들 의병의 주축은 남명 조식의 문인집단이었다. 이들은 패전에서 퇴피해온 관군들도 모여들었다. 이때의 전국의 의병의 총수는 2만 3천 명이었는데, 경상우도의 의병이 1만 명이 넘었다. 정인홍 의병의 군사적 역할은 의령의 곽재우, 거창의 김면, 초계의 전치원·이대기 등과 고령의 김응성, 성주 일대를 지키는 문려·이홍우 등과 긴밀하게 공조하면서, 위급한 곳을 지원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의병군의 지휘본부는 야로의 주학정에 설치하고 하빈 들을 연병장으로 삼았다. 군세는 3천명에 달했고 유능한 무장인 손인갑, 김준민, 정방준, 정언충 등을 휘하에 거느리고 창병, 사수, 기병의 조직적 편제와 뛰어난 전략으로 낙동강 우측의 8~9개읍을 보존하였다. 당시 정인홍 대장이 거주한 돈평마을 뒤편에 야철장을 활용하여 병기를 제조하고 타처의 의병들에게도 병기를 공급하였다. 실제로 의승도대장인 사명대사의 『분충서난록』에 ‘해인사 부근 야로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합천을 거점으로 하여 고령, 성주, 진주 방면으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무엇보다 정인홍을 비롯한 합천 의병군은 7년의 전란에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무사하게 지켜냈다.
무계전투(茂鷄戰鬪)의 승리 1592년 6월 4일~6일
일본의 3군 중 우로군이 동래-김해-무계-지례-금산(김천)-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를 따라 진군할 때,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개령현(현재 김천)에 주둔하고 5월 19일에 부장인 무라카미 가게치카(村上景親)로 하여금 무계(茂鷄)를 지키게 했다.
무계(茂鷄)는 낙동강 현풍의 대안에 위치하여 상경 우로의 도강지점으로 역(驛)이 설치되어 있는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왜군(倭軍)은 낙동강 수로를 보급로로 이용하고자 이곳에다 견고한 보루를 쌓고 병참기지를 만들어 매일 백여 척의 수송선단이 왕래하고 있었다.
5월 29일 정인홍(鄭仁弘)이 고령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창의 김면(金沔)과 함께 무계를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김면은 합류하지 못하였고 6월 5~6일 사이의 손인갑(孫仁甲)이 정인홍의 병사와 함께 공격하였다. 정인홍 대장은 손인갑 중위장에게 “무계를 지켜야 성주성을 방어하고 적의 교통로를 차단한다.”고 하여 5월 27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초계(草溪)에서 위급함을 고해오자 그 쪽의 적을 먼저 쳐부수고 29일 고령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1천 여명을 거느리고 고령의 영병장(領兵將) 김응성(金應星) 성주 기군장 이승(李承)이 합세하였다.
합천의병 중위장 손인갑
합천의병 중위장 손인갑은 본래부터 장수였다. 임진왜란 의병장들의 상당수가 선비로서 고향 장정들을 규합해 창의한 데 견주면 그는 경력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손인갑은 1544년(중종 39) (경상남도) 밀양부 서면 서가정리에서 태어나 1571년(선조 4)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부산첨사 등을 역임한 후 1577(선조 10) 관직에 물러났고, 1597년부터 창녕군 대합면 장기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손인갑은 즉시 경상감사 김수에게 달려갔다. 손인갑은 동래현령으로 임명되었지만 이미 동래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으므로 부임하지 못하고 감사를 수행했다. (동래는 원래 부였으나 부사 송상현이 전사한 뒤 지역의 위상이 격하되어 현으로 떨어졌다.)
5월 4일, 경상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손인갑은 김천역 앞에서 왜군과 마주쳤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던 손인갑은 용맹을 뽐내며 적의 수급(首級) 열일곱을 취했고, 왜군들은 물러갔다. 김수는 정인홍에게 합천, (경남 합천) 삼가, 초계, (경북) 성주 등의 군대를 이끌 군사권을 맡기면서 (동래현감 직무 수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손인갑을 합천의병군의 중위장(中衛將, 중앙을 지키는 핵심 장수)으로 활약하게 했다.
정인홍 의병장은 중위장 손인갑 등 지휘부들과 연이어 회의를 가진 끝에 무계를 선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왜군의 보급로인 낙동강 수로를 차단하고, (왜군들의) 경상도 통치 거점인 성주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무계진(茂鷄津)에 설치된 적의 병참 기지를 격파하기로 한 것이었다. ☜ 이형석의 『임란전란사』2집 참조
손인갑은 6월 5일 아침부터 3백여 의병을 은밀히 이동시켰다. 이윽고 깊은 어둠이 밀려왔을 즈음, 아군은 적의 진지를 완전히 포위했다. 손인갑은 무기를 잘 다루는 50여 날쌘 병사를 직접 이끌고 적진 내로 깊숙이 들어갔다. 야습을 예상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적들은 손인갑 군의 날랜 무예 앞에서 속수무책 신세가 되었다. 아군은 순식간에 30여 적을 베었다. 적들은 황급히 조총을 쏘아댔으나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으므로 허공만 어지럽혔다.
밖에서 적진을 포위하고 있던 의병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리고 불덩이를 집어던졌다. 적들은 불을 끄랴, 총과 활을 챙기랴, 정신이 없었다. 장창을 잡고 있는 적장 무라카미 가게치카(村上景親)는 여러 명 부하들에 둘러싸인 채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손인갑이 활을 날려 그 중 한 명을 즉사시켰다. 이에 촌상도 활을 쏘며 반격하기 시작했고, 피차간에 치열한 궁사전(弓射戰, 활을 쏘며 싸우는 전투)이 벌어졌다.
이윽고 10여 발의 화살을 맞은 무라카미가 병사들에게 사지가 들린 채 옮겨졌다. 그래도 나무 성채가 아니라 흙벽이었던 적군의 진지에서 불이 꺼지고, 본래 적군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던 탓에 이제부터는 기습 공격이 아니라 보통의 접근전으로 변했다. 적의 조총 부대도 탄환을 난사해댔다. 손인갑은 의병들을 철수시켰다. 소규모 기습 작전으로 수백 명의 적을 참살했으니 이만 하면 야습의 목적은 백배 달성되고도 남았던 까닭이다.
경상도 지역 왜적이 영산-창녕-현풍-무계-성주를 잇는 낙동강 수운 확보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차 무계전투는 경상우도 지역의 보전은 물론 경상도를 통해 전라도로 침공하려던 왜군의 작전 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제2차 무계전투
당시 낙동강은 전라도를 넘보는 일본군의 주요 이송수로 였고, 무계 지역을 확보한 김면의 의병군이 6월 18일 낙동강을 통과하던 왜선 두 척을 발견하여 공격한 했다. 이때 노획한 물품은 세조의 광묘(光廟, 세조의 별칭) 어휘가 적혀 있는 금지장자(金紙障子, 금종이로 만든 병풍)와 제복(祭服) 두 벌, 적석(赤舃, 왕이 정복을 입을 때 신는 붉은 신) 두 켤레 등 궁중에서 사용되는 물건으로 낙동강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한 듯하다. 빼앗은 물품은 초유사 김성일에게 보내졌다.
이어지는 합천의병의 활동
6월 6일 이후 무계의 일본군은 밖으로 나와 활동을 펼칠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진지를 지키는 데만 전념했다. 적장 무라키마도 상처를 치료하느라 한 달 내내 병상에 누워서 지냈다. 7월 말 의병장 김준민이 또 다시 무계(茂鷄)를 공격했을 때에도 적들은 방어에 몰두할 뿐 '추격하지 못하고 죽지 않은 것만 다행으로 여겼다. 결국 적들은 9월 11일 스스로 진지를 불태운 뒤 성주성 안으로 물러갔다. ☜ 남원 의병장 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권1, 임진 6월6일, 이긍익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권16, 『임진의병 정인홍·손인갑·김준민』,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권2 [이형석의 『임란전란사』참조 ]
이어 합천의병군은 전인홍 대장 산하의 초계 의병장 전치원, 이대기 등이 6월 19일~22일에 ‘초계마진전투(草溪馬津戰鬪)’에서 크게 승리하였고(이로(李魯) 『용사일록(龍蛇日錄)』 1762년 6월 21일조,『연려실기술』 권16, 선조조고사본말) 『』
합천의병 정인홍과 거창의병 김면 대장이 합동작전으로 8월 19일~21일 공격을 개시한 ‘성주성전투(星州城戰鬪)’에서 공방을 벌이다가 이듬해 2월에 승리하여 성주성을 수복하였다. (조경남(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의병장 정경운(鄭慶雲) 『고대일록(孤臺日錄)』)
지금의 낙동강변의 무계는 뛰어난 경치를 뽐내는 마을이다. 강둑에 오르면 비슬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거칠 것 없는 강바람이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마을의 땅 모양이 춤추는(舞) 닭(溪)처럼 생겼다고 해서 처음에는 무계(舞溪)라 불렀는데 뒷날 물가(溪)에서 번창할(茂) 마을이라는 뜻에서 무계(茂溪)로 바뀌었다. 무계전투는 임진왜란 의병의 첫 '의미 있는' 승전지였다. 단순히 몇 명의 적을 죽인 승리가 아니라 일본군의 낙동강 수로 이용을 차단하여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적들이 일찍 남해안으로 물러가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무계는 매우 '의미 있는' 전승지로 역사에 남아 있다.
경상우도와 합천, 의병활동의 중심지
경상도라는 명칭은 1332년 고려 충숙왕 때 상(尙)·양(良)·강(康) 3주를 합하여 처음으로 부르게 되었고, 조선조 중종 14년(1519년)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은 좌도 서쪽은 우도로 속하게 하였다가 폐가 많다 하여 같은 해에 일도로 환원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도로가 통하지 않으므로 좌·우도로 나누고 좌도는 경주에 우도는 상주에 감영을 두고 병수사를 절제하다가 다음 해 한 도로 합하고 감영을 성주 팔거현에 설치하였다. 경상우도는 왕성(한양)에서 볼 때 경상도 지역의 우측을 뜻하며 낙동강 서쪽의 28개 군현이 여기에 속한다.
경상우도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우도의 토지가 비옥하여 농작물의 생산성이 높고, 피병·피세에 적합한 사족의 거주지로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천혜의 고장에서 남명의 학문적·사상적 맥락에 기초한 무실역행(務實力行)하는 과단성이 향촌 사회의 기반이 되었다. 통혼권(通婚圈)의 광역화에 따른 족적기반과 사림사회가 형성되어 자치세력을 단합시킴으로써, 나라를 위한 의리정신(義理精神)으로 승화되어 의병(義兵)을 궐기하게 된 것이다.
후일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퇴계와 남명을 경상좌·우도의 대표적 학자로 거론하면서, 좌도는 ‘상인(尙仁)’이오 우도은 ‘주의(主義)’라 하여 남명학파의 본질을 ‘주경의의(主敬意義)’라는 정의를 내리고 ‘낙선호의(樂善好義)’라는 표현으로 우도인의 기질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것이 상무정신(尙武精神)으로 표출되어 남명학파가 초기 의병을 주도하는 배경이 되었다. 합천(초계·삼가)은 고령, 성주까지 포함하여 지리적 조건으로 경상우도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합천 뇌룡정(雷龍亭)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兎洞]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삼가현 토동(兎洞)은 경호강(남강)의 지천인 ‘양천’의 중류에 있다. 양천은 합천군 쌍백면 백역리 점안산(328,4m)에서 발원한 ‘백역천’과 쌍백면 대곡리 성현산 산곡에서 발원한 ‘대곡천’이 쌍백(면)에서 합류하여, 삼가(면)을 경유, 굽이굽이 흘러 산청군 신안(면)에서 경호강에 합류한다. 오늘날 삼가면 외토리(토동)는 합천에서 진주로 통하는 33번 국도가 지나는데, 합천읍에서 남쪽으로 30km 지점에 있다. 진주에서는 26km이다. 동남쪽으로 20번 국도, 의령에서는 18km 떨어진 지점이다.
* 남명 조식 선생의 생애 *
— 경(敬)과 의(義)로 선비정신을 실천한 산림처사(山林處士) —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501년(연산군 7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경상도 삼가현 토골(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曺彦亨)과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따님 인천 이씨의 3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역시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지만, 과거에는 한두 번 응시하고 이후로 응시하지 않았다. 남명이 31세(1531) 처가가 있는 김해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48세(1548)에 다시 이곳 토골[兎洞]에 와서 ‘뇌룡사(雷龍舍)’를 지었다. 뇌룡사는 조선 연산군 7년(1501)에 지은 집으로, 남명 61세(1561)에 산청 덕산의 ‘산천재(山天齋)’로 옮겨가기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소년기에 아버지 조언형이 단천군수로 발령되자 따라가 단천에서 지내면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 지리 ,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 유교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과 집중력, 담력 등을 스스로 시험하려고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좌구명(左丘明), 유종원(柳宗元)의 문장(文章)과 노장(老莊)에 심취하여, 거의 초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 조언형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 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典)〉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단념하게 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숙부인 조언경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는 처가가 있는 김해(金海) 탄동으로 옮겨 18년간 산해정(山海亭)이라는 독서당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 30대 후반에 "경상좌도에는 퇴계(退溪)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南冥)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는 일생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수행을 하듯 늘 근신하였다. 1539년(중종 33년) 38세에 특별히 초빙되어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그해 6월에 유일한 적장자였던 조차산을 병으로 잃었다.
1545년 인종(仁宗) 즉위 후 다시 조정에서 불렀지만 다만 그는 인종(仁宗)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 한다. 명종(明宗) 즉위 후 문정왕후와 그녀의 동생 윤원형과 첩 정난정 등 외척이 어린 왕을 등에 업고 전횡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뇌룡정(雷龍亭)을 짓다
☆… 1548년 전생서 주부(主簿),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합천 삼가면 집 근처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뇌룡’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에서 따온 말이다. 즉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龍)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는 뜻이다. 풀이하면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과 같이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뢰처럼 소리친다.’는 뜻이다. 주역 건괘(乾卦) 초구의 효사에 나오는 잠룡(潛龍)이 때가 되면, 떨쳐 일어나 뇌성벽력(雷聲霹靂)을 동반하는 용(龍)이 되어 오르는[飛龍在天] 모습이 그려진다. 초야에 은둔하는 남명의 기개를 함축하고 있다.
정자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초야에 은둔하는 남명의 기개를 함축하고 있다.
1551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뒤에 인종 때와 선조 때에도 사림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그 뒤 선무랑에 제수되었다가 1555년 단성 현감,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다. 단성현감 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가「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인데 「단성소(丹城疏)」라고도 불린다.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 유학계의 거유였다. 남명은 이론 위주의 성리설(性理說)을 전개하기보다는 경의(敬義)에 바탕을 둔 실천위주(實踐爲主)의 학문을 중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창의한 수많은 인물들이 남명의 제자였던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남명의 높은 학덕이 조정에 알려져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세상을 등지고 은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높을 경륜을 가지고 있었다.
부패한 조정(朝廷)을 질타하다
뇌룡정(雷龍亭)에서 강학하던 시절, 남명(55세, 1555년 을묘년)에게 조정에서 산청군 ‘단성현감’ 벼슬을 내렸다. 당시의 조정은 어린 임금 명종(明宗)을 대신해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척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던 때였다. 남명(南冥)이 그런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명은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사직의 상소문(上疏文)를 썼다. 거기에는 벼슬을 사직의 이유와 함께, 임금과 조정의 무능과 무도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개진했다. 남명의 시퍼런 칼날[筆鋒]이 부패한 조정을 질타했다. ‘목숨’을 내어놓고 쓴 글이었다. 이것이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일명]「단성소(丹城疏)」이다. 그 추상같은 상소문의 일부분을 읽어보자.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抑殿下之國事已非。邦本已亡。天意已去。人心已離。比如大木。百年䖝心。膏液已枯。茫然不知飄風暴雨何時而至者。久矣。在廷之人。非無忠志之臣夙夜之士也。已知其勢極而不可攴。四顧無下手之地
“… 전하의 나랏일이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殿下)에게서 멀어졌으며, 인심(人心)도 이미 떠나 버렸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 먹혀 진액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의 인물 가운데 충성스럽고 뜻 있는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나랏일에 힘쓸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小官嬉嬉於下。姑酒色是樂。大官泛泛於上。唯貨賂是殖。河魚腹痛。莫肯尸之。而且內臣樹援。龍挐于淵。外臣剝民。狼恣于野。亦不知皮盡而毛無所施也。臣所以長想永息。晝以仰觀天者。數矣。噓唏掩抑。夜以仰看屋者。久矣
아랫자리에선 히히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뇌물로 재산만 불리고 있습니다. 물고기의 배가 썩어 가는데도 아무도 치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을 못물에 끌어들이듯 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의 재물을 벗기기를 이리[狼]가 들판에서 날뛰듯 하는데도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臣)은 이 때문에 낮에는 깊이 생각하고 자주 탄식하면서 하늘을 자주 우러러 보고, 밤에는 흐느끼며 침울해 하면서 천정을 우러러 본지 오래되었습니다.
慈殿塞淵。不過深宮之一寡婦。殿下幼冲。只是先王之一孤嗣。天災之百千。人心之億萬。何以當之。
자전(慈殿, 文定王后)께서는 비록 생각이 깊으시다 하나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일개 어린 후사(後嗣)이실 뿐입니다. 그러니 온갖 천재(天災)와 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하략>”
☆… 이렇게 지엄한 대비[국왕 명종(明宗)의 어머니]를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만인지상인 임금을 고아(孤兒)에 지나지 않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무엄하고 신랄한 비판인가. 이 상소문으로 그는 목숨이 위태한 지경에 갔지만 다행히 그를 벌하면 언로가 막힌다는 사림의 지원 덕분에 참형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언로가 자유로운 오늘날에 보더라도 참으로 섬뜩한 ‘돌직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언로가 보장된 정치 제도라 하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임금까지 비판했으니, 스스로 죽음을 불사한 상소였다. 오히려 뜻있는 선비나 모든 백성들이 상소문에 따른 형벌(刑罰)을 두려워하여 모두 가슴을 졸였다.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不敬)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겨우 가라앉았다.
뇌룡사(雷龍舍)는 정유재란 때 소실된 뒤, 1678년 합천군 봉산면 계산(界山)에 있었던 용암서원(龍巖書院)의 부속건물인 뇌룡정(雷龍亭)으로 복원되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용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조희규(趙禧奎)의 발의에 따라 현감 신두선(申斗善)의 협조로 1883년 허유(許愈), 정재규(鄭載圭) 등 삼가 유림들이 원래의 자리에 중건한 것이다. 뇌룡정(雷龍亭) 전체 건물의 배치는 남명이 지은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근거를 두고 있다. 지금도 유림들이 매년 3월 상정일(上丁日)에 제례를 거행하면서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남명학(南冥學) ― 의병활동의 사상적 기반
조선 명종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더불어 동시대에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는 대학자였다. 그는 경상우도라는 역사적 전통과 지역적 특성 속에 성장하였고, 15세기 영남사림파가 이루어놓은 학문적 연원을 계승하여 남명학파를 형성하였다. 그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한 문도(門徒)들은 특유의 학풍으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창의하여 왜적과 싸우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국난극복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명의 학문 자세는 경의(敬義)를 전제로 한 의리실천(義理實踐)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그는 한때 상경한 적도 있고 잠시 기호지방을 여행하기도 했지만, 그의 발자취는 합천을 중심으로 김해·진주·산청 일대에 머물러 있었다. 이처럼 산림처사로 초야에 묻혀 있었지만 결코 은둔자는 아니었다. 남명은 네 차례에 걸친 상소(上疏)와 한 차례의 진언(陳言)에서 자신의 소견을 대담하고도 과격하게 임금을 비롯한 위정자들을 비판하여 대오각성을 촉구하였다. 남명의 이와 같은 대응자세는 그의 문도들로 하여금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모두 창의 토적에 앞장서게 하였고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강직한 자세는 최영경을 기축옥사에서 옥사케 하고 인조반정에서 정인홍을 처형당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상의(尙義, 義를 숭상하는 것)와 주기적(主氣的)인 학풍은 마침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망설임 없이 창의 기병하여 왜적 토벌에 앞장서게 했다. 영남 3대의병장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곽재우(郭再祐) 등을 비롯한 50여 명의 의병장을 배출하여 국난 극복에 앞장섰다.
합천팔경(陜川八景)
☆… 합천은 남부 내륙의 산골인 마큼 빼어난 산수와 명승이 많다. 이른바 합천팔경(陜川八景)은 그 중에서 명승 중의 명승이다. 제1경 가야산, 제2경 해인사, 제3경 홍류동 계곡, 제4경 남산제일봉(매화산), 제5경 함벽루, 제6경 합천호 백리벚꽃길, 제7경 황계폭포, 제8경 황매산 모산재가 그것이다.
황매산(黃梅山, 1,108m)은 합천댐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군립공원인 황매산은 철쭉군락지로도 전국적으로 알려져 있다. 황매산 끝자락인 모산재(해발 767m)는 무학대사가 수도한 곳으로, 집채만 한 바위 군상이 절경이다. 그 남쪽의 영암사지 절터에는 국보인 ‘쌍사자 석등’이 남아있다. 합천을 가로지르는 황강도 금사와 백사의 모래사장이 일품이다. 남정교 옆에는 조선시대 최고 유학자였던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함벽루(涵碧樓)가 있다. 제5경이다.
특히 합천호 둘레길은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합천호수로’와 ‘합천호반로’로 불린다. 합천호와 산허리를 끼고 도는 길이 약 40㎞에 걸쳐있다. 동서로 길게 황강을 끼고 병풍처럼 이어진 그림 같은 능선을 감상할 수 있다. 봄이면 벚꽃과 호반이 함께 어우러지고, 가을이면 붉은 단풍이 아름답다.
경남의 금강산 ― 가야산 국립공원
합천군 가야산(伽倻山)은 해발 1430m, 경남과 경북이 서로 맞닿아 있는 곳에 있다. 북으론 경북 성주군, 남으로는 경남 합천군의 경계를 이룬다. ‘우뚝 솟은 상왕봉이 소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우두산(牛頭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야국이 있던 지역에서 가장 높고 웅장하여 ‘가야산’으로 불리게 됐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경상도에는 암석으로 된 석화산[石火星, 바위로 된 산봉우리가 불꽃처럼 솟아있는 모양의 산]이 전혀 없다. 오직 합천의 가야산만이 바위 봉우리가 줄줄이 이어져 마치 불꽃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듯하여 지극히 높고 수려하다.”고 하면서 가야산을 경상도의 명산으로 꼽았다.
가야산(伽倻山)은 해동의 10승지 또는 조선팔경의 하나로 산세가 웅장하고 수려해 대가야의 시조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가야산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찰, 대가람 해인사(海印寺)가 있다. 한국 화엄종의 근본 도량, 법보종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을 비롯하여 국보가 3가지, 보물이 7가지, 지방유형문화재가 6가지를 보유하고 있다.
해인사 계곡의 ‘홍류동(紅流洞) 계곡’은 가야산 입구부터 해인사까지 약 4km에 이른다. 가을에는 단풍에 물이 붉게 변한 듯 보인다 하여 ‘홍류동’이라고 불리며, 여름에는 금강산의 옥류천을 닮았다 해서 ‘옥류동’으로 불린다. 가야산 일대는 1966년 6월24일 사적 및 명승지 제5호, 1972년 10월 13일 국립공원 제9호로 지정됐다.
황강의 함벽루(涵碧樓)
너른 모래사장을 감고 도는 황강(黃江)은 소리 없이 흐른다. 황강은 때론 홍수로 범람하기도 하지만 물길을 돌리면서 유역에 풍부한 자양분의 토사를 뱉어 놓는다. 그 비옥한 토양에서 농경을 터득한 사람들은 특유의 문화와 역사를 만들고 이어왔다. 백사장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황강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대야성 강안의 데크길에 함벽루(涵碧樓)가 있다. 황강의 절벽 위에 자리한 함벽루, 바로 앞에는 맑은 강이 흐르고 강 건너 모래밭과 더 멀리 수려한 산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곳이다.
함벽루는 합천 읍내 남쪽의 황강 가에 임해 있다. 함벽루 뒤쪽은 백제와 신라가 전투를 벌인 대야성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다. 거기에는 충장사가 있고 신라충신죽죽비가 있다. 지금은 대야성공원이다.
함벽루(涵碧樓)는 고려 충숙왕 8년(1321년) 함주(涵州) 지사 김영돈이 세워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함벽루를 만들 당시 황강에 큰 나무가 많이 떠 내려와 사람들이 나무를 건져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특히 함벽루에서 맞은편 정양호를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다워 많은 시인(詩人) 묵객(墨客)들이 찾아와 시흥(詩興)을 즐겼던 명소이다. 퇴계 이황(李滉)·남명 조식(曺植)·우암 송시열(宋時烈) 같은 조선시대 명유(名儒)들의 글이 누각 현판에 걸려 있다. 또한 누각 뒤편 암벽에 ‘涵碧樓’(함벽루)라고 새긴 송시열의 글씨가 있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 들보 5량으로 된 목조 기와집이며, 특히 누각 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도록 배치된 점이 유명하다. 함벽루는 그 이름과 같이 하늘의 푸름, 강의 푸름, 나무의 푸름이 어우러져 인간의 감정을 적시는 절세의 경승지다. 그 중 합천 출신이고 당대에 문명을 떨친 남명 조식(曺植)의 초서체 현판이 있다.
喪非南郭子 (상비남곽자) 남곽자처럼 무아경에 이르지 못해도
江水渺無知 (강수묘무지)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가 없네.
欲學浮雲事 (욕학부운사) 뜬구름의 세상사 익히려고 하나
高風猶破之 (고풍유파지) 굽 높은 바람이 오히려 흩어 버리네.
강물에 그 비경을 담고, 세상사 온갖 번뇌 망상을 떨쳐버리나니, 먼 산의 경치가 어른거리고, 더 넓어진 황강이 세월을 잊고 유유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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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居昌)
황강(黃江)의 상류에 ‘거창(居昌)’이 있다. 거창은 백두대간 덕유산 줄기와 대덕산-수도산 지맥의 사이에 있다. 황강은 북쪽의 백두대간 대덕산-수도산 산곡에서 발원한 ‘황강’의 원류에 서쪽의 덕유산 줄기에서 발원한 ‘거창 위천’이 거창읍에서 합류한다. 합천(陜川)에서 거창(居昌)을 거쳐 백두대간 삼봉산과 흥덕산 사이의 ‘신풍령(빼재)’를 넘어가면 전라북도 무주군 설촌면으로 이어진다. 황강 상류를 따라가는 지금의 37번 국도이다. 예로부터 거창은 진한과 변한, 신라와 가야, 신라와 백제, 신라와 후백제 사이에 위치하여 지리상의 요충지였다. 특히 신라와 백제가 교통하는 요로이다. 무주군 설촌면에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이 있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관문에 해당한다. 서기 642년 대야성전투에 윤충의 1만의 백제군이 넘어온 길이고 김유신이 백제를 치기 위해 황산벌로 가는 길목이었다.
옛날의 거창은 첩첩산중의 오지이지만 지금은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이다. 거창을 지나는 3번 국도는 남으로 산청으로 통하고 북으로는 김천으로 가는 길이다. 동서로 이어지는 24번 국도는 서쪽으로 함양으로 통하고 동쪽으로는 합천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구-광주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길목(거창 I.C)에 있다.
거창의 명승, 위천 ‘원학계곡’의 ‘수승대’
거창은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첩첩산중의 고을이다. 그래서 계곡도 많고 흘러내리는 물도 맑고 아름답다. 산이 많고 계곡이 깊으니 예로부터 누대와 정자가 많다. 거창 위천(渭川)의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원학계곡(猿鶴溪谷)에 수승대(搜勝臺)가 자리 잡고 있다. 수승대는 맑은 계곡에 듬직한 바위가 있고 이들이 어우러지며 그려내는 풍광이 자못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바위가 어우러진 암구대, 요수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관수루라는 누대가 있으며, 구연서원이 있다.
거창 신씨(愼氏) 집안은 이 고장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이다.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조상 가운데 신권(愼權, 1501~1573)이 있다. 자(字)는 언중(彦仲), 호가 요수(樂水)이다.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한 그는 이곳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가꾸어 심성을 닦고 학문에 힘썼다. 거북을 닮은 냇가의 바위를 ‘암구대’(岩龜臺, 거북바위)라 이름 짓고 그 위에 단(壇)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중종 35년(1540)부터는 정사(精舍)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정사의 이름 또한 ‘구연재’(龜淵齋)라 했으며, 아예 동네 이름조차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2년 뒤에는 냇물 건너편 언덕에 아담한 정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 편액을 걸었다. … 수승대(搜勝臺)는 퇴계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요수(樂水) 신권(愼權)이 죽은 뒤, 그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재실은 서원이 되었다. 구연서원(龜淵書院)이다. 그 문루(門樓)인 관수루(觀水樓)가 아름답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이층 누각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왼편으로 덩그렇게 놓인 크고 펑퍼짐한 바위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천연스러움을 한껏 살렸다. 덤벙주초 위에 놓인 누하주(樓下柱)는 굽으면 굽은 대로 그저 껍질만 대충 벗긴 나무들을 그대로 썼다. 특히 안쪽 것들이 그렇다. 그리 크지 않은 집인데도 네 귀퉁이마다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를 세웠다. ☜ 「수승대」 (답사여행의 길잡이 13 - 가야산과 덕유산, 2000. 2. 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홍선,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 참조
거창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
6·25전쟁 중,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국방부는 후방에 흩어져 있던 인민군 병력과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 제11사단을 창설했다. 제11사단은 1950년 10월 4일부터 1951년 3월 30일까지 경상남도 일부와 전라남·북도 전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거창사건은 토벌작전의 제4기에 해당하는 1951년 2월 1일부터 3월 31일 사이에 발생한다.
6·25전쟁 발발 이후 유엔군이 참전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개시하자,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은 지리산, 덕유산 일대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거창군 신원면은 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1개월이 지나서야 행정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거창경찰서는 1950년 9월 27일, 거창의 신원지서는 11월 5일이 되어서야 경찰이 복귀했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38°선 이남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1951년 초반, 국군은 전방의 조선인민군과 중공군뿐만 아니라 후방의 빨치산으로부터도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에 국군은 전선을 단일화하기 위해 후방의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거창에 배치된 군부대는 11사단 9연대 3대대였다. 그러나 빨치산의 유격전술 때문에 만족할 만한 토벌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거창사건은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국군과 경찰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토벌작전을 전개할 무렵에 발생했다.
제11사단 9연대장 오익균(吳益均)의 지시를 받은 3대대장 한동석(韓東錫) 소령은 1951년 2월 10, 11일 양일간에 신원면 소재 부락주민 570명을 빨치산 또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켜 대부분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총살했다. 학살당한 570명 중 젖먹이부터 16세까지의 아이들이 327명이었고, 나머지는 노약자거나 부녀자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학살당한 사람들은 빨치산이 아니었다.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 중유천 박산골이 무자비한 학살의 현장이다.
이 학살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후 한 사병이 엄상섭(嚴祥燮) 의원에게 사건의 내막과 학살 당시의 사진, 그리고 학살당한 사람의 명단을 보내옴으로써 국회 차원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국회조사단의 현지조사는,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金宗元) 대령의 집요한 방해를 받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거창출신 국회의원 신중목(愼重穆)의 집요한 추적 끝에 사건의 진상이 국회에 공개되었다. 국회의 결의로 이들 범죄자들은 1951년 12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오익균·한동석은 무기징역을,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얼마 되지 않아 김종원을 특사로 풀어주어 경찰간부로 채용했고, 오익균·한동석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된 시기에 유족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고 유골을 한 곳에 모아 봉분을 만들고 위령비(慰靈碑)를 세웠다. 유족들은 1951년 2월 사건 발생 당시 신원면장이었던 박영보(朴榮輔)를 잡아 실신시키고 생화장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만큼 유족들의 분노와 한은 깊었다. 1960년 4대 국회는 거창사건을 비롯해 한국전쟁기 학살사건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형식적인 피해신고 접수에만 머물렀다. 1987년 민주화가 성취되고 유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지금 신원면 중유천 박산골 학살터와 사천천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있는 신원(면)은 산청에서 고령을 경유 김천으로 통하는 59번 국도가 지난다. 이 사건은 6·25전쟁 기간 동안 곳곳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처럼 이 사건 역시 군이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주민들을 의도적으로 학살한 사건으로, 우리 현대사에 커다란 상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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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으로 가는 길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 함천호-합천댐을 관망하고, 합천창의사를 앞을 지나 다음 포인트인 의령(宜靈)으로 향했다. 함천댐에서 황강을 따라 내려오는 지방도로를 타고 내려오다가 주유소 앞에서 우회전하여 용주교(황강)를 건너면 1026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용주(면)이다. 용주에는 황계천이 황강에 유입된다. 황계천의 상류에는 합천팔경 중의 하나인 ‘황계폭포(黃溪瀑布)’가 있다. 황계천이 황강에 유입되는 용주면 손목리 하구(河口)에는 ‘벽한정(碧寒亭)’이 있다. 1026번 도로 손목교(황계천) 건너 좌측으로 들어간다. 벽한정은 내가 아주 오래 전, 합천댐이 만들어지기 전 이곳 합천 대병이 고향인 친구와 함께 탐방한 적이 있다.
합천 벽한정(碧寒亭)
벽한정(碧寒亭)은 고령 박씨 무민당(无悶堂) 박인(朴絪, 1583∼1640)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성리학을 연구하는 유학자들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박인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생활을 하던 선비로, 덕망과 학식과 충절이 뛰어났다고 한다. 일찍이 남명(南冥) 선생의 “티끌이 만약 오장에 생긴다면, 곧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보내리.(塵土倘能生五內 直今刳腹付歸流)”라는 시구를 읽고서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였다. 28세 때는 임헌(臨軒)이라고 스스로 호를 정했다. 이 호는 ‘주역 臨卦(임괘)’에 “… 대개 군자가 남들을 가르치는 생각은 무궁하여 백성을 보존함이 끝이 없다.(象曰 澤上有地 臨 君子以 敎思無窮 容保民無疆)”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벼슬을 생각하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기로 작정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 전권을 휘두르고 있던 이이첨(李爾瞻) 일파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에게 편지를 보내어 불가함을 주장했다. 박인과 정인홍은 외척관계로 같은 고향 출신이며, 박인이 일찍이 그의 문하에 출입을 한 적이 있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스승인 정인홍이 처형을 당하고, 1637년 55세 때 인조(仁祖)가 청(淸)에게 항복하는 삼전도의 국치(國恥)를 당하자 거처하는 곳의 이름을 무민당(无悶堂)이라고 고치고 문을 절호문(節戶門)이라고 하였다. 그는 남명(南冥)이 세상을 떠난 후 남명학 계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합천 선비이다.
황강에서
벽한정으로 들어가는 손목리 마을 입구를 지나, 우리는 용주면 성산리, 맑은 물이 흐르는 황강(黃江) 가 둔치에 차를 세웠다. 강의 건너편은 합천 읍내, 그 제방 너머로 아파트 건물 등이 보인다. 강안은 넓고 정결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합천의 황강에는 강안을 따라 고운 모래밭이 이어진다. 어떤 사람이 “합천에는 팔아먹을 것이 황강의 모래밖에 없다.”고 농을 친 그 모래사장이다. 강의 동쪽(하류)에 다리가 보인다. 제2남정교이다. 그 다리 건너 뒤쪽에 숲으로 우거진 산이 보이는데, 거기가 바로 대야성(大耶城)이고 그 강안에 함벽루(涵碧樓)와 연호사가 있다.
☆… 깊어가는 가을, 고즈넉한 황강은 소리 없이 흐른다. 불가역의 세월 저편, 치열한 역사의 현장을 떠올리며 삶의 무상함과 시대의 아픔을 느낀다. 역사란 인간사 흥망성쇠의 흐름이기도 하지만, 아프고 치열한 삶의 모습이 곳곳에 스며있다. 늘 머리를 떠나지 않는 문제는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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