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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11-26일 2주간의 미국과 카나다 북미지역 여러 도시를 방문한 내용을 소개한다.
1월 11일(토) 오전 10시 멕시코 칸쿤공항을 출발해 오후 2시 반 뉴욕 JFK공항에 도착해 마중나온 친구 승용차로 1시간 여 달려 뉴저지에 도착했다. 몇 년만의 방문에 가족들도 반겨주었다. 따뜻했던 중미 지역에서 겨울인 미국 동부로 이동해 곧바로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라.
12일 일요일 오후 약속대로 김동찬 KACE(Korean American Civil Empowerment. 시민참여센터) 대표를 만나 그동안의 활동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제 20년이 된 단체답게 이런 저런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 있어 반가웠고 기회가 되면 한국에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인터뷰가 되는 것이다. 이번 방문 취지를 설명하고 만날 수 있는 단체와 개인을 소개 받았다.
13일 월요일에는 뉴욕에 다니러 온 친구 조카와 함께 버스로 맨하탄에 도착해 근처 T-Mobile에서 한달간 미국과 카나다 멕시코로 무제한 통화를 할 수 있는 휴대전화 유심칩을 70불에 구입했다. 월드폰에 유심칩을 끼워보니 통화가 자유롭다. 걸어서 뉴욕시내를 돌아보다가 헤어져 강변을 걸어 유엔빌딩을 다시 방문했는데 정문앞에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았다는 관리를 고발하는 대자보 시위를 하고 있었다. 번지수가 적절한지 모르겠다. 센츄럴파크를 돌아보다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서 다시 퀸즈에 있는 KACE 사무실을 방문했다. 국회 외교위 간사인 정창래의원이 워싱턴 의회의 하원 외교위원회를 방문하고 글래그 전 주한대사와 만나는 일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사무실에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져 돌아왔다.
14일 화요일 새벽 첫 버스로 맨하탄을 거쳐 터미널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워싱턴으로 향했다. 4시간만에 도착한 유니온역 버스터미널에서 감리교본부회관을 방문해 교회와 사회위원회 담당해 온 마크해리슨을 다시 만났다. 지난 해 2월 서울에서 개최된 WCC총회를 대비한 교회의 탈핵선언 사전 준비 모임에서 잠시 만난 적이 있어 반가웠다. 한국스탭인 이에이미씨 그리고 연합교회(United Church of Christ)의 국제이슈를 담당하는 미첼 뉴로스목사는 WCC총회 기간 동안 탈핵선언 준비회의에서 계속 만났던 터라 반가웠다. 사전에 준비된대로 Skype로 김용복박사께서 함께 회의에 참여해 기본적인 설명 등은 해 주어서 한결 수월했다. 아시아 탈핵운동에 관해 아태 협력 그리고 특히 핵무기와 발전소의 진원지에 해당하는 미국의 참여가 중요하고 특히 GE가 미국기업이므로 미국시민의 소송 참여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3월 21-24일 예수께서 우신다(Jesus Weeps 누가19. 예루살렘 곧 워싱턴을 바라보며 우시는 예수) 주제로 워싱턴에서 큰 연례행사인 12회 Advocacy Days - 폭력에 저항하고, 평화를 새우는 집회와 행진이 예정되어 있음을 알려 주었고 그 중에 한반도 문제와 핵문제를 포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가 참여하면 좋을 것 같다. 3월 중순 센다이에서 개최될 국제컨퍼런스에 참여할 에너지 전문가 스텝도 나중에 참여해 인사를 했다. 1시간 반의 간담회를 마치고 워싱턴을 돌아보려고 시티투어 버스를 탔다. 먼저 방문한 곳은 유태인홀로코스트박물관이었다. 삼엄한 검문을 거쳐 들어가자 수용소 분위기가 연상된다. 여태 본 홀로코스트 규모와 전시물 모두 최고 수준이었고 마지막에 오늘의 분쟁지역에서의 제노사이드에 관해 설명해 둔 세련됨도 보였다. 인상적인 문구는 2차 대전 후 ‘팔레스타인을 개방하라’는 구호였다. 지금 그 구호가 이스라엘에 의해 차단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얼마나 절실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걸어서 마틴 루터 킹목사의 기념석상까지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국전 참전 야외전시장을 찾아 잠시 추모 묵념을 했다. 방문 추모를 계획했던 웰링턴 국립묘지를 바라보기만 하고 아슬아슬하게 버스를 타고 맨하탄으로 돌아와 버스로 친구 집에 도착하니 밤 12시가 넘었다.
15일 수요일 아침에 나와 11시 맨하탄 터미널에서 몬트리얼행 버스를 탔다. 하루 종일 달려 저녁에는 국경을 통과하고 8시 반에 도착 오타와행 버스를 타고 도착하니 밤 11시가 다 되었다. 몇 년만의 방문이었고 보드카 한잔을 하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16일 목요일 아침에 다시 몬트리얼행 버스를 타고 오후1시에 도착해 구 시가지와 세인트 로렌스강과 구 시가지를 돌아보는데 여러 가지 영화를 누렸던 모습이 보인다. 퀘벡의 협동조합 방문을 위한 사전 준비가 되지 못했고 시간 계산을 잘못해 소모적인 재방문이라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혼자 몇 시간 거리를 걸으니 그 나름대로 좋다. 생로렌스강이 워낙 넓어 커다란 배들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시간상 퀘벡시 방문은 포기한채 오타와로 돌아왔다. 단이의 남자친구, 어학연수중인 여조카, 의과대학을 다니는 단이, 광이는 이제 대학진학을 했는데 음악을 하기 위해 몬트리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광이의 기타 연주에 맞춘 노래도 들으며 오랜만에 가족이 다 모인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17일 금 아침 다시 터미널에서 토론토행 버스를 탔다. 전날 사전 예약해 둔 덕분에 절반가격으로 저렴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오후 2시 반 토론토 다운타운 터미널에 도착하니 김경천목사가 마중을 나와 주어 승용차로 이동해 서애란목사를 만나 함께 대학가를 방문했다. 7개의 신학교가 함께 공동캠퍼스를 이루고 있다고 했는데 임마누엘 신학교를 비롯해 공동 도서관도 돌아보니 한중일 서적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문재린목사 함석헌선생 김재준목사등 선배들의 사진도 보였다. 함께 새로운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뉴코리아타운화 하고 있는 지역의 식당 금강산에 도착하니 정해빈목사와 염웅목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토론토에서 생활 퀘벡의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 그리고 최근의 한국 상황에 그리고 10월 말 토론토발 쿠바 평화여행 추진 이야기까지 다양하게 나누다 헤어져 정목사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아이들과 사모 서지윤님과 함께 앉아 카나다 생활로 이야기를 나눴다. 둘째를 낳고 부터 병원비 무료에 각종 육아지원 정책으로 도움을 받으면서 카나다 사회복지를 실감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기초지방선거는 정당공천제가 배제되어 있다는 카나다의 정치현실이 흥미롭기도 하고 또 연방과 주 사이의 역할분담에 관해서도 신선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자유당과 보수당 그리고 신민당이 연방정치를 좌우하고 있으며 퀘벡당이 퀘벡주를 기반으로 연방의회에 50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역에서는 자유당이 다수인 지역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카나다 협동조합에 관해서도 정목사로부터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앞으로 한국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그리고 시민운동 노동운동차원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방문하고 교류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나누었다.
18일 토요일 아침 일어나 집 주위를 돌아보는데 눈이 오는 시간에 맞춰 차량에서 도로에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염화칼슘보다는 나을 것 같다. 함께 알파한인교회로 이동했다. 카나다 교회를 빌려서 함께 사용하지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교회도 안정되어 보였다. 잠시 후 전화로 연락된 7선의 조성준 토론토 시의원을 만날 수 있었다. 아동보호소 교육청 근무 등 공직을 거쳤고 교회 장로라 공감대가 있어 만나기 수월했다. 근처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며 토론토 시의회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핵발전소 문제를 논의하는데 핵무기 폐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에너지 문제로 원전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완곡한 입장을 밝히셨다. 의회 사무실로 옮겨 보니 활발한 의정 활동이 한눈에 보일 정도이고 2명의 한인 보좌관이 있으니 직접 연결하면 도움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90년대 삼척의회에서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앞으로 한국 지방의회 의원들이 방문하면 교류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인해 주셨다. 시간 부족을 아쉬워하며 정목사의 승용차로 의회 근처의 버스터미널로 이동해 디트로이트행 버스를 탔다. 모든 버스에는 전원장치가 준비되어 있어 스마트폰을 충전하기에 편리했고 무선인터넷도 제공되고 있었다. 거리 풍경에서 볼만한 것들이 꽤 많았다. 수학여행중인 듯한 학생들은 쉽게 통과하는데 중국인을 포함해서인지 강을 사이에 두고 몇 명되지 않는 입국자들이 미국입경을 해야 하는 절차가 만만치 않다. 국경을 통과하자 곧 이어 디트로이트 버스터미널로 마중나온 박문재선생을 만났다. 3개월 전에 파산선고를 했다는 디트로이트시의 밤거리는 침침해 보였다. 거리가 멀어 집까지 갈 수 없다며 한참을 달려 좋은 호텔에 예약해 주신 방에 혼자 짐을 풀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함께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먹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박선생님은 연세대의대를 졸업하고 유학해 의과대학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하고 아직 현직의사로 활동중이시란다. 의사로서 북한의 의료체계의 특성 그동안 지원하고 교류했던 일 등 북한을 수차례 다녀온 경험 특히 비판적인 시각까지 들을 수 있었고 통일을 염원하는 열정이 마음에 전달되는 것을 느끼게 해 주셨다. 미국을 방문해 김정은 생일축하노래를 했던 농구스타 로드먼이 이 곳 출신인데 평소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인물이라 미국내에서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셨다. 과거와 달리 유엔에서의 활동에 지역 제약을 받고 있는 북한 외교관에 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19일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박선생님 차로 다시 터미널로 이동하면서 거리 곳곳이 썰렁한 모습을 들어 파산된 디트로이트시의 많은 빌딩들이 텅 비어 있다고 하신다. 아쉬운 작별을 하고 어제 저녁 예약해 둔 티켓으로 다시 늦어진 버스를 기다려 탑승했다. 시카고까지 가는 거리도 만만치 않았지만 카나다에서 불가능했던 통화가 가능해 수월했다. 오후 4시경 시카고 터미널에 도착해 잠시 후 마중나온 강상배선생 승용차로 시카고 민주시민단체의 신년회 장소로 행했다. 한국을 떠나 온지 오래 되었지만 친구이야기 그리고 북한 방문했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핫라인이라는 여성보호단체 사무실인데 준비된 간단한 뷔페식 저녁식사와 막걸리를 곁들이면서 인사와 소개를 하는데 탈핵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북미지역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원전제조사 소송 원고단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해 서명과 후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어서 윷놀이도 하고 2차로 근처 한국식 맥주집에 들러 생맥주를 한잔 하며 좀더 이야기를 나누다 모텔에서 숙박을 했다.
20일 월요일 새벽에 다시 강선생의 승용차로 시카고 공항에 도착해 전날 일정이 불확실해 미리 할 수 없었던 항공권을 김점숙목사에게 부탁해 인터넷으로 예약해 준 비행기표로 발권하는데 가방비용을 45불이나 따로 부담해야 했다. 저가항공의 함정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어쩔 수 없다. 2시간의 시차가 있어 좀더 일찍 도착할 수 있었던 LA 공항에 삼 칸노선생께서 마중을 나와 주셨다. 지난 해 6월 한국에서 진행된 탈핵투에 참여하신지 반년만이다. 민간회사가 공항 탑승수속을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고 출발과 도착이 함께 이루어지는 공항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9.11테러 후 미국내 공항들이 많은 혁신과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10년만의 방문인데 기억이 나기도 했다. 먼저 코리아타운에 있는 KIWA(코리아타운노동연대) 라는 단체를 방문했다. 전태일의 방이라는 문패가 붙은 회의공간도 있었다. 칸노선생이 준비해 주었는데 담당자가 없어 식사후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먼저 코리아타운 주변 구경을 하고 대표적인 코리아타운 빌딩의 식당몰에서 한식으로 식사를 하며 LA에서 만날 사람들과 통화하면서 일정을 조정할 수 있었다. 다시 KIWA에서 박영준집행위원장을 만나 초창기 한인 이주노동자를 위한 활동에서 코리안타운내 이주노동자 문제로 확대되어온 20여년간의 활동에 관해 그리고 LA사회와 재미동포들의 생활과 활동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좋은 활동가로서 많은 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원전 제조사 소송원고 참여도 요청했는데 흔쾌히 응해 주면서 추가 서명자는 칸노선생께 우편으로 보낼 수 있도록 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이나 시민단체와는 별도의 교류는 없다고 했고 만날 수 있는 분들을 소개해 주기도 하셨다. 사무실내에서 가주생활협동조합 홍보책자를 보고서 연락해 다음 날 방문약속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와 칸노선생의 승용차로 LA 여러 곳을 돌아 보면서 설명을 들었다. 중심가에 있는 유니온기차역 주변에는 홈리스와 급식을 기다리는 흑인과 히스페닉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이 여러 차례 보였다. 인종차별에 맞서 싸웠던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인 마틴루터킹 기념일(1월 셋째 월요일)이라 곳곳에서 관련된 홍보문구를 볼 수 있었다. 저팬타운도 방문해 보니 작은 규모에 아기자기한 모습이 일본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LA는 코리아타운의 규모가 훨씬 커져서 영어 못하고도 살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시내에서 베트남 쌀국수로 저녁을 먹고 슈퍼를 들러 파코이마시에 있는 칸노선생의 집으로 향했다.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2층 맨션단지였다. 맥주 한잔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나를 위해 자신의 방을 내 주셨다.
1월 21일 화요일아침 일찍 출발해 LA공항 근처의 코코스 레스토랑에서 미국연합감리교단에서 활동중인 강영숙목사를 만났다. 지난 10월 부산의 WCC총회 기간중에 만났던 터라 탈핵이슈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미국교회의 적극적인 참여방안을 의논했고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중요한 분들을 소개해 주셨다. 칸노선생의 승용차로 세리토스 시청으로 이동해 ‘평화가 먼저다’ 의 저자이기도 한 조재길시의원을 만나기 위해 도착해 정연진 AOK(Action for One Korea) 대표와 국제교류 연구자 안태영박사 저널리스트 심홍근선생과 함께 시의회 회의실에서 한반도 통일과 평화에 관한 간담회를 가졌다. 핵무기 위협을 절실하게 느껴온 터이라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며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핵전쟁일 수밖에 없기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조재길의원은 세리토스시 의회에 관해서도 소개해 주셨고 선출된 의원이 돌아가며 1년씩 시장을 맡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시의 형편도 잘 알고 계셨고 한인들이 많아 코리아타운이 만들어질 정도라고 소개했다. 작은 시장실을 소개했는데 한국에서는 큰 시장실을 보면서 차이를 많이 느꼈다고 하셨다. 근처 조선옥이라는 한식당으로 이동해 대화를 이어갔다. 특히 박근혜대통령의 결단으로 남북대화와 긴장완화 등을 실현해 가야 한다며 미룰 수 없는 과제이기에 지금 뭔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마치고 다시 LA시내를 거쳐 가주생협을 찾았다. 전화로 미리 약속해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2008년에 결성되었고 주변지역에서 안전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기반이 있어 가능하다고 하셨다. 대개의 경우 이민은 도시지역 상업 또는 직장이나 사업을 생각하는데 이제는 농촌지역에 정착하는 생산자가 있어 가능해 지는 것 같다. 실제로 관련해서 문화활동을 하는 단체도 있어 기대가 되었다. 일정을 바꿔서 대학후배 집을 먼저 방문하고 하루 숙박하기로 했다. 교통체증을 우려했는데 다행히 어바인 근처 상업단지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집으로 갔다.
1월 22일 아침 주변을 산책해보니 안정적인 중산층 주택가라는 느낌이 들었고 초등학교 주변의 모습도 그런 분위기로 느껴졌다. 부부가 운영중인 세탁소를 들러 작별인사를 하고 후배와 함께 차를 타고 폐로 결정을 내린 산오오프르네 원전을 방문해 보았다. 바닷가에 2개의 원전 돔이 자리잡고 있고 직원과 차량이 계속 출입하는 모습이었다.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바닷가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가까운 곳에 캠프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고압송전선로가 통과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사진을 찍으니 보안요원들이 저지를 한다. 오랜만에 미국에서 원전스톱을 결정한 것인 것만큼 주변지역 주민을 만나고 싶었지만 사전 준비도 없어 포기했다.
IACenter(International Action Center) LA를 방문하기 위해 한참을 달려 사무실에 도착했다. 널따란 1층 사무실에 작은 탁자와 전시된 책과 자료를 볼 수 있었다. 정연진대표와 함께 인터뷰를 하면서 단체에 관한 기본적인 소개를 받았고 방문목적인 탈핵글로벌연대를 위한 협력방안에 관해 의논도 했다. 후쿠시마 소송원고단 참여도 기꺼이 응해 주었고 추가 서명도 받아주기로 했다. 그래서 세계핵피해지도를 선물로 증정하고 나왔다. 다시 정대표와 함께 미주한국일보 인터뷰를 위해 LA시내로 이동했다. 미주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한국신문인데 KOREA TIMES라는 명칭으로 한국의 대표성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마감시간에 쫒겨 자세한 인터뷰를 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번 방문 목적에 관해 설명하고 핵정보그림지도를 통해 후쿠시마에서 배출되는 방사성물질이 태평양을 오염시키면서 미국 서부연안으로 이미 도착했다고 설명해 주었다. 신문사를 나와 칸노선생을 다시 만나 미주중앙일보로 이동했다. 방송국도 갖추고 있을 정도였고 자세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언론인터뷰를 마치고 근처 카페에서 고 손정도목사 기념사업을 하고 있는 최재영목사를 함께 만났다. 김일성주석이 어린시절 부친 김형직의 요청에 따라 자신을 의탁했고 존경했던 손정도목사를 소개해 주었는데 금시초문이라 조금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관련해서 하고 있는 활동 그리고 이번 미국 방문 목적도 설명하면서 상호 공감할 수 있었다.
다시 가주한미포럼이 주최한 마이크혼다 연방의원 후원회가 개최되는 JJ그랜드호텔로 이동했다. 위안부문제로 활동해 왔던 김현정선생이 사회를 보면서 진행하고 있어 인사를 했다. 위안부문제에 적극 나서 결의안을 통과시킨 혼다의원을 재미동포들이 돕기 위한 행사였는데 최근 위안부 문제 관련 행동 책임을 예산안과 연계하여 통과시킨 그의 소신있는 행동(7선의 의원이 할 수 있는 신의 한수 였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에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2차 대전기간동안 일본인들을 격리 수용했던 미국 정부의 조치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던 일본인 단체(일본계시민권리배상운동 NCRR) 데이비드 몬카와 대표도 참여했기에 인사를 나누면서 후쿠시마 사고에 따른 공동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JACL(일본계미국시민연맹)도 참가했다. 약 4만불이 넘는 후원금이 모였다고 소개했다. 행사를 마치고 칸노 선생댁으로 이동해 숙박했다. 혼다의원은 2차 대전중 일본인수용소에 격리수용되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 동병상린의 고통을 이해하면서 그의 생각과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1월 24일 금요일 아침 약속이 된 ANSWER Coalition LA지부를 방문했다. 1층 사무실에는 책과 자료와 시위용품 그리고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두명의 젊은 활동가를 함께 만나 단체에 관해 설명을 들었고 이번 방문 취지를 설명하면서 탈핵을 위한 국제협력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핵무기는 모두 공군에서 관리한다고 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지부 방문을 위한 사전 약속과 활동가도 소개받았다. LA일정을 준비하고 연계해 준 정대표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근처 차이나 타운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캘리포니아 사막길로 행했다. 사막길은 고속도로이긴 하지만 높낮이가 달라 오르내리는 커브길이 많았다. 비가 오지 않아 포도밭의 나무들이 거의 말라버린 정도이고 중간에 모래폭풍이 닥치는데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아 거북이 걸음을 해야 할 정도였다. 바람소리와 승용차앞 창문에 모래가 쌓일 정도여서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6시간을 달려 도착한 산호세 시내 약속장소에는 홍승환님을 만났다. 신학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기간제교사를 하고 있단다. 그리고 잠시후 엔지니어 출신으로 최근 은퇴한 정선생님도 합류하셔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따. 예정된 7시를 넘기고서 모임을 시작했는데 이번 방문 목적인 후쿠시마 소송원고단 모집에 모두 응해 주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다 이찬수목사가 합류하고서 장소를 옮겨 따로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었다. 10년만의 해후인지라 반갑기도 했지만 내일 출근을 위해 돌아가야 하기에 맥주 한잔으로 아쉬운 작별을 했다. 홍선생이 준비해둔 공항 가까운 호텔로 이동해 숙박을 했다.
1월 24일 금 여유있게 일어나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 금문교도 둘러보고 약속장소인 오가네갈비 식당에 도착해 권혁인목사를 만났다.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기장출신의 민기욱목사도 함께 만나 미국생활 드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이런저런 모습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식사 후 오후 3시 미리 약속해 둔 샌프란시스코 ANSWER Coalition을 방문했다. 1층에는 작은 강당처럼 조성되어 있고 2층에는 각종 시위용품 특히 피켓 수백개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어 인상적이었다. 연합활동을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서부지역 코디네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리차드 백커씨가 반갑게 맞아 주어 회의실에서 함께 간담회를 했다. 단체 소개 그리고 최근의 활동에 관해 설명해 주었고 상당한 수준의 중견 활동가 다운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자료를 보니 수만명이 참석하는 각종 집회를 조직해 냈던 모습이 보였다.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탈핵을 위한 글로벌네트워크 그리고 핵발전소에 관한 미국 시민들의 관심과 아시아평화운동에의 동참 들을 요청했다. 그는 우호적으로 대응해 주었고 향 후 지속적인 연대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확인하고 후쿠시마 소송 원고단의 탈핵네트워크 방문단의 미국 재방문을 위한 방안 등을 협의했는데 연락주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핵문제 세계지도를 증정하고 기념촬영으로 마무리 했다. 작은 현수막이라도 준비해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계속 들었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시내 구경을 하다가 5시반 약속장소인 재팬타운의 슈퍼마켓앞에서 정운찬선생을 만났다. 현재는 건물 지붕작업을 위주로 건축과 인테리어 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한인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실리콘벨리의 IT경기가 활성화된 샌프란시스코의 경기 현황 한인회 활동 그리고 한인들이 중국상권으로부터 밀려나는 이야기 등을 들을 수 있었다. 커피숍으로 이동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칸노선생은 샌프란시스코 공항으로 픽업해 준 후 헤어졌고 공항에서 잠시 머물다 밤 10시 뉴저지행 비행기를 타고 잠이 들었다.
1월 25일 토 오전 6시 필라델피아 공항에 도착해 작은 쌍발프로펠러 비행기로 환승해 뉴왁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가 뉴저지로 이동하면서 낮게 비행하다보니 전화통신도 가능해 카톡으로 군포 지인들에게 간단한 소식도 보낼 수 있었다. 다음 미국방문시 쓰기 위해 미국과 카나다 멕시코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제한이 없고 충전이 가능한 스마트폰용 유심칩을 미리 구입했다. 전화번호도 가질 수 있어 든든하게 여겨졌다. 공항에서 맨하탄행 버스를 타고 눈내리는 길을 이동해 맨하탄터미널에서 작은자공동체의 김동균목사를 만났다.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은 세대로서 유니온신학대학에서 조직신학을 하셨고 미국에서 진보적인 연합그리스도교회에 속해 있어 나름대로 안정적이고 또 타종교와의 교류도 하고 있다고 했다. 각종 활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실무적인 역할을 많이 맡고 있었다. 지하철로 이동해 워싱턴스퀘어에서 동부지역의 미국교회 목회중인 유영철목사를 만나 근처 한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이번 방문과 향후 미국 시민단체와의 교류 협력에 관해 의논했다. 미국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미국 시민단체와의 교류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제안해 주었고 시골교회 목회자로서 지역교회의 변화가 중요한 일이라고 하셨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 다음 약속을 위해 콜롬비아대학 정문에서 헤어지고 다시 베푸라 모임(건강한 삶을 위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최선생의 승용차로 이동했다. 오후 6시 도착한 최변호사집에서 신년회를 하게 되었고 돌아가며 소개하고 식사를 한 후 김동찬대표의 요청대로 1시간 동안 협동조합에 관해 강의를 했다. 준비된 자료는 없었지만 정의와 기본 원칙 그리고 한국과 세계적인 추세 등을 설명해 주었는데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모두 진지하게 경청해 주었다. 미국 동포사회에서 협동조합을 모색하는 것은 정말 반가웠다. 9시가 되어 마치고 다시 최선생의 승용차로 집으로 돌아오니 10시 반이 지났다. 경원씨와 이야기를 나누다 내일 아침 출발을 위해 짐을 정리하고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1월 26일 일 아침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8시를 조금 지나 친구부부와 함께 승용차로 JFK공항으로 향했다. 날씨가 쾌청해 좋은 풍경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이동하면서 아내와 국제통화를 하기도 하면서 1시간만에 도착한 공항에서 작별을 했다. 시간여유가 있어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미국과 카나다내 여러 방문자들에게 전화로 인사를 나누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기도 했다. 12시 반 AA와 공동운항하는 JAL 비행기를 타고 한국시간에 시계를 맞추고 점심식사와 함께 나온 와인에 취한 채 일찍 잠을 청했다. 어제 저녁 잠을 조금 잔 것이 효과를 본 탓인지 잠이 잘 와서 시차적응에 도움이 되었다. 중간에 잠이 깨 창밖을 보니 얼음으로 덥힌 북미 대륙이 끝없이 펼쳐저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날씨가 좋은 탓에 선명하게 보여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연신 사진을 찍으니 옆 좌석에 앉은 승객이 휴대폰속의 자신이 카나다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준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인데 스마트폰에 저장한 것으로 전문가다운 수준의 사진이었다.
1월 27일 월 오후 도쿄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환승을 위해 이동해 일본 지인에게 전화를 하려고 어렵게 10불을 천엔으로 바꿔 전화카드를 구입해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못했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아쉽게도 통화하지 못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역시 JAL인데 서비스가 좋다. 저가 항공과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다. 9시 반이 되어 인천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밤 11시 반에 집에 도착해 짐을 내려 놓고 잠이 들었다. 한 달여만의 귀가이고 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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