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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生一問』 --- 최태성
이 책은 “단 한 번의 삶, 단 하나의 질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요즘 「KBS1 라디오」프로그램 중에 배종찬 선생이 진행하는 〈열린토론〉에서는 “토론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라는 멘트가 나오고, 시청률 1위라고 하는 「MBC 라디오」〈권순표의 뉴스 하이킥〉에서도 “무엇보다 좋은 질문”이라는 멘트가 나온다. 그만큼 세상을 바르게 하는데는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일 것이다. 저자인 ‘큰별샘(泰星)’최태성은 이 책 머리말에서 “삶을 바꾼 질문이 있으신가요?”라고 묻고, “우리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요?”라고도 묻는다. 그러면서 “저는 행복해지기 위해 역사를 배웁니다. 한 번뿐인 인생, 제게 남아 있는 시간들을 후회 없이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행복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가기 위해, 역사와 마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오.”라고 인사를 한다. TV에서 그를 만나면 웃음 띤 그의 얼굴이 마치 시청자를 사랑하는 제자 대하듯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그의 웃음과 이야기는 맹랑한 웃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많다. 책 처음에 가십처럼 한 말이 ‘遺言’인데, 죽음에 이르러 남기는 말이 유언이다. ‘떠나는 자에게는 삶의 이정표가 되는 말, 남겨진 자들에게는 삶의 출발점이자 지향점이 되는 말’이 유언이다. 그것은 의식이 깨어있을 때, 신념으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이 말은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멕시코에서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다.
트로츠키는 1879년 11월 7일, 구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의 야노프카에서 태어났고, 1940년 8월 20일 멕시코시 코요아칸에서 망명 중 암살당했다. 그는 민주적 방식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 멘셰비키편에 서서 레닌과 볼셰비키에 반대했다.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지도자였으며, 소련 외무 및 군사인민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레닌이 죽은 뒤에 일어난 권력투쟁 과정에 요시프 스탈린에게 권력을 빼앗겨 추방당했다. 스탈린의 앞잡이에게 암살당할 때까지 해외에서 반스탈린 세력을 지도했다.
1898년 1월, 혁명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1902년 ‘트로츠키’란 이름으로 위조된 여권을 가지고 탈출했다. 이때부터 그 이름을 자신의 가명으로 사용하고,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여, 소비에트 의장으로 10월 봉기를 지휘했다. 레닌 사후에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권력을 빼앗겼다. 1926년 정치국에서 추방되고, 1년 뒤 중앙위원회에서도 쫓겨났다. 이후 공산당에서 제명되었으며, 1928년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1940년 멕시코에서 암살당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그만의 인생이 있다. ‘유언’은 그 사람의 일생을 응축한 말이기에 더 감회가 깊은 것이다.
다음은 고려 光宗이 개혁을 이룬 이야기다. 아버지 태조 왕건은 호족들 힘을 빌어 왕이 되었다. 그는 호족들을 아우르고자 아홉 명 부인으로부터 25명을 아들을 두고 죽었고, 혜종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혜종은 호족들 눈치를 살펴야 했으므로 뜬눈으로 지새는 날이 많았다. 심한 신경증으로 2년 만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동생 정종이 다음 왕이 되었으나, 그도 호족 세력을 제압하지 못하고, 결국 4년 만에 병사했다. 다음 제4대 광종이 왕이 되었다. 그는 왕건의 아홉째 아들이다. 고려 초에는 아들이 다음 왕위를 잇지 못하고 부득이 동생이 잇는 경우가 많았다.
광종은 왕위에 올랐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허울뿐인 왕이었는데, 그 기간이 자그만치 7년이나 되었다. 7년이면 매미가 알에서 유충으로 땅속에서 지내는 기간과 맞먹는다. 단 7일에서 20일 정도 노래(짝짓기) 하기 위해 7년을 기다리는 매미같이 광종은 기회만 보고 지냈다. 그러니 허수아비 왕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한 호족들이 마음을 놓았을 때, 광종은 개혁을 시작했다. 그가 맨 처음 시행한 개혁은 ‘노비안검법’으로, 이것은 호족들과 정면승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모두 조사해서 양민으로 돌려놓겠다는 것이었는데, 호족들이 누린 힘이 노비를 이용한 군사력이었으므로, 그들이 거느린 노비들을 양민으로 돌려놓으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광종은 그로부터 2년 후인 958년에는 ‘유교적 지식을 갖춘 자를 시험으로 관리로 선발하겠다.’는 ‘과거제’실시를 선언했다. ‘칼로 권력을 쥐기보다 붓으로, 실력으로, 하겠다’는 획기적인 제도가 바로 과거제다. 이것은 광종이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을 찾던 중에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라는 인물이 제안해 시행한 제도다.
자기만의 질문을 품은 사람, 삶의 화두가 분명한 사람은 질문과 화두를 뿌리 삼아 어떤 비바람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다. ‘나의 때는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믿고 흔들림 없이 준비하면 된다.’
1900년대 초는 정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대원군이 풍양조씨 조대비와 얄팍한 술수로 대권을 쥐고 개혁하고자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왕권 강화라는 이유로 백성들의 삶은 안 중에도 없고, 경복궁을 재건한다며 원납전과 당백전을 찍어내 화폐의 가치는 땅에 떨어뜨리고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은 문호를 개방하라고 닦달하고, 일본과 청은 서로 먼저 자신들의 입김을 불어 넣겠다고 혈안이 된데다가 러시아마저 기회를 보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태어난 10, 20대 청년들은 ‘3.1운동’이라는 커다란 격변을 겪었는데, 이들을 우리는 ‘3.1운동 세대’라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 폭탄을 던져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윤봉길, 이봉창 등이 이들 세대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 가운데 간과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1905년생인 ‘김산’이다. 3.1운동 당시에 중학생이었던 그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보고 자신도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700리를 걸어서 그곳에 갔지만, 아직 나이 어리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독립군이 되겠다는 강한 의지 로 먼 길을 홀로 걸어온 강단을 높이 산 관계자 덕분에 3개월 과정에 특별히 입학시켜 주었다.
이후에 그가 펼친 범상치 않은 독립운동 활동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만주와 베이징, 광저우를 누비며 일제와 맞서 싸운 김산의 일대기는 이 책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 한민족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로 탈바꿈하게 된다. 바로 ‘대한민국’이라고 바뀐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그 사람들은 100여 년 후 지금의 대한민국을 상상이나 했을까?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이순신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 이순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적 모습과는 거리가 멀고, 임진왜란 당시에 23전 23전이라는 불패의 신화를 낳은 이순신이지만, 사실은 우리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청년 시절 이순신은 문과에 가고자 했으나 뒤늦게 무과로 바꿔 준비했고, 28세 때 처음으로 훈련원 별과에 응시했다. 그러나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쳐 실격됐다. 이후 4년을 더 준비해 32살 때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섰다. 무관이 되어서도 순탄치 않았는데, 두만강가 조만포만호 겸 녹도둔전사의로 근무할 때 그는 국방강화를 위해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조정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고, 이후 여진족이 침입해 군사와 백성이 피해를 입는 일이 벌어졌다. 조정은 이순신에게 책임을 물어 문책했고 파직했다. 그의 백의종군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뿐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쉬워지기는커녕 갈수록 어렵고 복잡해지는 인생에서 우리는 방황을 반복하게 된다. 가끔 내가 답답하고 한심해서 스스로에게 따져 묻기도 한다. “나는 왜 이토록 계속 방황하는 걸까? 언제쯤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그 어떤 상황이라도 희망의 단서를 찾아내어 내 것으로 만든다면, 지금의 방황을 발판삼아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시작해 보자.
스물한 살에 즉위해 32년간 왕위에 있었던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 농법서, 의학서, 역법서 등 편찬, 물시계·해시계·측우기 같은 과학기구 발명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게 하고, 조세제도를 공법으로 시행하는 등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넘사벽)’을 떠올리게 하는 성군이었다. 얼마나 지극한 ‘애민정신’을 가지고 있었는지 실록에는 그것이 잘 드러난다. “백성은 나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본다. … 만약 한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다면, 감사나 수령이 모두 교서를 위반한 것으로 죄를 논할 것이다.”-《세종실록》3권 “노비는 비록 천민이라도 하늘이 낸 백성이다.”-《세종실록》105권
조선 시대 27명의 왕 중에 세종 못지않게 뛰어난 왕이 있다면 정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복수 대신에 포용을 택했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을 결정하고 선택하게 한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위해야 하는 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찍이 신문고라는 제도가 있었지만 정조 때는 ‘격쟁’이라는 제도도 있었는데, 임금이 행차할 때 징, 북, 꽹과리를 치면서 행차를 막은 후 직접 임금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제도였다. 1791년 어느날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할 때 흑산도에서 올라온 김이수라는 사람이 그 지역 특산품을 공납하는 제도가 있는데, 지금까지 공납하던 당나무를 베어서 공납하다 보니 이제 그 나무가 사라졌으니,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이에 정조는 신하들에게 사실을 알아보고 잘못을 바로잡게 했다. 백성의 사연을 허투루 듣지 않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 무렵 시전 상인들이 상업을 독점하면서 관리들과 결탁해 부정부패가 성행하자 물건값이 오르고 너 나 없이 등짐을 지고 물건을 이고 장사에 나서 문제가 생겼다. 이에 따라 난전을 단속하기에 이르렀는데 심지어 누룩을 머리에 이고 온 노파까지도 난전에서 몰아내고 잡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정조는 1791년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백성 누구나 상거래를 허할 것이다”는 명령을 내려, 이후로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시장이 활성화되었다.
연산군처럼 아버지의 복수를 하겠다며 칼을 휘둘렀다면 ‘광기의 왕’으로 남았을 정조이지만, 그는 역사에 그렇게 남지 않았다. 개혁과 통합을 추진하고 백성을 위하여 애민정책을 펼친 훌륭한 군주라고 기록하고 있다. 과거를 인정하고, 새롭게 바꾸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노력한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다. 스스로 한계를 극복한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의 도움을 얻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자신들의 한계를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뛰어넘었다. 재위 4년 만에 황음방자하다 하여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 그리고 가야의 마지막 구형왕의 증손자 김유신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가야가 멸망하자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이었으나 김유신에게는 신라 진골귀족과는 다른 태생적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이처럼 한계와 싸워야 했던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쳐 훗날 김춘추는 태종무열왕이 되었고, 김유신은 신라 17등급 중 1등급인 이벌찬의 이칭인 각각이 되고도 큰 업적을 치하하려고 태대를 덧붙인 태대각각이 되었다. 김춘추의 증조부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한강 일대를 차지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의 당황성을 뺏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가운데 642년 백제가 대야성을 공격하고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 죽는 등 위기에 처하자 김춘추는 선덕여왕의 명에 따라 고구려에 원군을 청하기 위해 갔다. 그러나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한강 유역을 내놓아야 도와준다고 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한편 김유신은 상대등 비담이 ‘여자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선덕여왕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김유신이 이 반란군을 진압했다.
후사가 없어 선덕이 4촌 진덕에게 왕위를 넘겼으나 진덕도 후사 없이 죽자 화백회의는 상대등 알천을 섭정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알천은 이를 사양하면서 “덕망이 춘추공 만한 자가 없다”며 김춘추를 추대했고 김유신도 적극 지지해 춘추가 왕이 되었다. 그가 29대 태종무열왕이다. 아프리카에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속담이 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삼한통일은 함께여서 가능했음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에게는 무늬가 있다. ‘잘 산다’는 것은 어떤 무늬일까? 1905년 11월 17일 맺은 을사늑약에 찬성한 매국 대신들을 처단하고 조약의 파기를 주장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감시와 위협에 숨죽인 황제는 이를 묵살했다. 이것을 지켜본 이가 있었으니 ‘이제 우리 모두 전멸당하려 하는도다.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나니.’하면서 통곡한 이가 그다.
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날로 그날이 있게 한 것이 바로 을사늑약이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열강들로부터 한국 지배를 인정받고, 한국을 보호국화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사실 고종도 반대했다. 이때 이토를 도와 조약체결에 앞장선 ‘을사5적’이 있었으니, 학부대신 이완용은 알아도 나머지는 누구인지 잘 모른다. 왜일까? 그날의 치욕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알아야 하지 않을까. 박제순(총리대신 서리), 이지용(내부대신), 권중현(농공상대신-조선사편수회 고문), 이근택(군부대신-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충추원 고문) 등이 그들이다.
‘잘살다’와 ‘잘 살다’는 그 뜻이 다르다. 잘살다는 잘 먹고 잘 살 수는 있어도 좋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돈이 많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을사5적 그들의 삶은 일본으로부터 명예와 돈을 얻었고, 떵떵그렸지만, 결코 잘 산 삶이 아니다. 당시 ‘수민원’총재로 대신급이었던 민영환은 을사늑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2,000만 동포에게 고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당시〈황성신문〉은 장지연의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실어 나라의 외교권 박탈을 목놓아 통곡하였고, 〈대한매일신보〉는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전멸당하려 하는 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느나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 제국 2,000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이상은 민영환 유언의 일부이다.
남자든 여자든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지만, 그 운명을 슬기롭게 해결해 가는 사람을 보면 ‘영웅’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조선 시대 외진 제주에서 태어나 한번도 제주를 벗어나 보지 못한 ‘김만덕’이라고 있다. 1739년 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열두 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형제들과도 헤어지게 된 그녀는 생계를 위해 기방에 얹혀살다 기생이 되었다. 태생적 한계에다 경제적 한계, 기생이라는 신분적 한계까지. 그녀의 사회진출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어려워 보였다. 또 제주도에서 육지로 나온다는 것은 인조 때 만든 〈출륙금지령〉으로 더더구나 어려웠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20살이 되자 자신의 신분을 회복해 달라고 여러 차례 관아에 탄원해 마침내 양인 신분을 회복했다. 그녀는 그동안 모은 재산으로 포구에서 객주를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객주를 운영하면서 인근 상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특히 진귀한 특산물을 육지와 거래해 많은 이윤을 남겼다. 쌀, 소금, 옷감, 장신구 등을 제주에서 팔고, 제주 특산물인 말총, 전복, 진주, 미역 등을 내다 팔아 거상이 되었다. 특히 ‘갓’테두리인 양태로 대박을 쳤다. 조선 후기는 신분제가 문란해지면서 양반이 급증했는데,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양반으로 변신하기 위해 갓 수요가 폭발했던 것이다. 김만덕은 이런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1792년 제주에 흉년이 들고, 태풍으로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다. 제주 목사 심낙수는 제주도민 30%가 굶주림으로 죽어갈 형편임을 조정에 알려 구휼미 1만 1,000석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육지에서 오던 배가 그만 풍랑을 만나 가라앉고 말았다. 이에 김만덕은 “부모를 여의고 혼자된 내가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은 이웃들의 은덕이다. 지금 그 은혜를 갚을 때다”며 쌀 600곡을 도민에게 나누어 주라고 내놓았다. 지금으로 치면 80㎏짜리 쌀 600포 정도로, 당시 제주도민 전체가 열흘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이를 보고 받은 정조는 그 고마움을 위로하기 위해 김만덕에게 소원을 물었고, 정승이던 채제공, 정약용 등에게 만덕의 적선을 기록하도록 했다. 김만덕은 죽기 전에 한양에도 가보고 금강산도 가보고 싶다고 하였는데, 출륙금지령으로, 상인신분으로, 궁궐에 든다는 것이 금지된 당시 제주도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정조는 김만덕에게 ‘의녀반수’계급을 하사해 궁궐에 들게 해 칭찬했다고 한다. “의로운 기운을 발휘해 주린 백성을 구했으니 참으로 기특하다.”쉰아홉에 금강산을 돌아보고 다시 제주로 돌아간 김만덕은 양자에게 먹고살 것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제주도민을 위해 기부하라고 했다. 이것이 요새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싶다.
이 책은 큰별샘이 단순히 역사 사실을 기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역사를 보는 눈을 기르라고 하였는데 “우리 모두는 생김도 성격도 꿈도 다르니 각자가 지향하는 삶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각자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라고 한 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선물할 삶’이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말입니다. ‘나’보다 ‘우리’를 앞에 놓기는 어려울 수 있어도 ‘나’와 더불어 ‘우리’도 생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나’와 ‘나’가 모여 ‘우리’가 되듯 ‘내 삶’과 ‘내 삶’이 모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됩니다. 또한 ‘우리의 세상’은 필연적으로 ‘내 삶’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고요.”라 말하고는 “우리 함께 더 나은 ‘사람’으로, 역사 앞에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라고도 했다. - 3.25 오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