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가뭄 끝에 단비는 정말 좋다. 물기 잔뜩 머금은 숲에선 짙은 초록 내음이 피어오르고, 땡볕에 맨살을 드러내며 버석거렸던 땅도 폭신해졌다. 개울과 개울 사이 모처럼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반가운 요즘, 메말랐던 감성마저 장맛비와 함께 촉촉해지던 날 고향을 찾아갔다. 잿빛 하늘 아래 비가 잦아들 즈음 선산 가까이 간다.…
30년 전 심은 주목 두 그루가 양옆을 시위하고 있다. 옳은 나무를 보려면 10년을 키워야 볼 수 있다고 했다. 아무튼, 잘 자라줘서 기쁜 마음으로 어루만진다. 주목은 이름 그대로 나무껍질이 붉은빛을 띠는 나무다. 지구상에는 3억 년 전부터, 한반도에는 200만 년 전부터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목질의 붉은색이 잡귀를 쫓아내고 영원한 내세를 상징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일찍부터 권력자 무덤 관의 소재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경주 금관총의 목곽 일부, 백제 무령왕릉의 왕비 베개도 주목으로 만들었다 한다.…
장마를 탓하지 말자, 연중행사가 아니던가. 산하에 있는 사람이나 도회지에 있는 사람 역시 날이 가물면 노심초사했고, 장마철에는 잡초 때문에 걱정한다. 지금도 ‘자식과 풀은 못 이긴다.’라는 말은 산하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정말 잡초 때문에 못 산다는 말에 공감하기도 한다. 요즘처럼 장마 때면 선산은 잡초가 무성했다. 장마 전 선영을 두 번에 걸쳐 벌초하였다. 그날 지나가던 집안 아주머니가 예초기를 돌리는 나에게 한마디 던진다. ‘더운데 그러지 말고 풀 약(제초제) 뿌리시오’라 말한다. 그래 제초제 사다 확 뿌려볼까? 그러나 수질을 오염시키는 엄연한 사실 앞에 주저하고 말았다. 우스개로 촌사람들은 옷도 초록색은 사 입지 않는다는 말이 공감 가는 게 사실이다.
예방주사를 맞으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낮아지고 설령 걸리더라도 금방 낫기에 다들 맞는다. 하여 농사를 시작할 때 미리 제초제, 살균제, 살충제를 살포하는 게 농작물에 예방주사같이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오염된 물은 동식물의 조직 안에 축적되고, 생식세포에까지 침투되어 유전자를 교란할 수 있다. 제초제는 종류도 다양하고 논밭, 논두렁, 밭두렁, 마을 앞산 유실수에 뿌려지지 않는 곳이 없다. 땅으로 스며든 제초제 잔류물이 흘러가는 길은 한곳이다. 먼저 마을 샘으로 유입된다. 샘물이 발원하여 개울물로 흘러가고 이어서 강과 바다에 다다른다.… 낙동강, 한강은 우리 민족의 풍요로운 생명수다. 낙동강은 황지연못에서 발원하고 한강은 검룡소가 발원지인데 솟는 물은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강으로 내닫는다. 이러듯 강의 발원은 새암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행하고 있는 곳은 아름다운 내川가 있는 미천美川면이며, 이 골을 타고 내려간 물은 남강으로 유입되어 감히 제초제는 엄두를 못 낸다.
예전엔 낫으로 벌초했지만, 근래부터 예초기가 대세다. 문명의 이기로 짧은 시간 많은 지역을 풀을 벨 수 있어 다행이었다. 처음에는 인력을 통하여 벌초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직접 핸들링한다. 서툴렀지만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고 적어도 흘린 땀은 선대 조상의 공덕에 작은 의미를 둔다. 풀이란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풀은 끄덕하지 않는다. 가뭄을 타기는커녕 더 억세지는 게 이놈이다. 흔히 쓰는 말 중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다. 결국, 자식의 뜻을 꺾지 못한다는 말이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수방관해야 할 때가 있고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강해도 풀을 못 이기고, 풀이 아무리 강해도 사람을 못 이긴다는 진리는 불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