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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국가를 위해 싸우지 마라!
전쟁은 모두가 싫어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타인을 전장에서 죽으라고 내보낸다. 그들은 전쟁을 혐오하지만, 이를 어쩌나, 상대편으로 인해 전쟁이 강제된다. 우리의 전통 사냥터를 침범하고 있는 것은, 상대편이다. “주권” 국가를 침해하고 있는 것은, 상대편이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방어해야만 한다... 당신은 “우리”의 어느 쪽인가? 양측의 무자비한 선전이 모두에게 어느 한 편을 선택하도록 압박한다. 전쟁의 적극적 참여자가 되거나 치어리더가 되라고 말이다. 왜냐면, 상대편이란 진정으로 무자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변함없다.
러시아 군대는 전범(戰犯)으로 비난받고 있다. “전범”, 이라는 이상한 용어. 참으로, 쓸모없는 말이다. 전쟁이 범죄로 정의되다니. 그것도 극악한 범죄로.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수단은 언제나 대량 살상과 파괴다. 극악무도한 대학살이 없는 전쟁이란 없다. 전쟁에 무게를 재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 용어가 있다. 문명화된 전쟁과 범죄형 전쟁이다. 만약 둘 사이에 차이가 없는 거라면, 그건 군사 기술로 사전에 제거되었을 것이다. 20세기 초 이래, 전쟁 중 시민 사상자 비율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19세의 미국 내전 중, 전체 전쟁 사망자 중 90% 이상이 군인으로 집계됐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시민 사상자가 전체의 59%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63%로 증가했고, 베트남전에서는 67%로 증가했다. 1980년대의 여러 전쟁에서는 74% 올랐으며, 21세기에는 90%로 올랐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전쟁으로 사라진 적이 없다. 전투원과 민간인의 차이, 군사와 비군사적 표적 간의 차이가 동시대의 전쟁으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각 진영이 전개하는 전투력이 강할수록, 민간인에 대한 “이차적 피해”가 더욱 커진다.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더욱 심화할수록, 평범한 이들의 삶은 더욱 파괴된다. 국가는 더욱 폐허로 변한다.
전범으로의 간주 여부는 견해의 문제가 된다. 모든 분쟁에 대해 모두가 상대방을 비방하는 저급한 욕설이 되어버린 “테러리즘”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비난으로 위장한 변명이다. 대중매체와 정치인이 모든 악 중 최악으로 정의한 “테러리즘”에는 모든 수단으로 그것을 억압해도 좋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테러 자신의 목적에 대한 무미건조한 변명거리가 된다. 마찬가지로, ‘전범’이라는 비난은 ‘우리 쪽’ 범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매체가 거의 언급한 적도 없고, 때로는 전혀 그런 적도 없는 것이다. 예멘을 보기로 생각해보면, 그곳에서 사우디 군대는 러시아 군대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 저지른 것 이상으로 훨씬 심각하게 폭격을 가했으며, 시민들을 굶겼다. 사우디 공군은 영국 및 미국의 군사적/기술적 원조와 무기 공급이 없었더라면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도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이러한 잔혹 행위가 지금 자행되고 있다. 미디어의 조명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리를 옮겨도, 볼만한 것이 없다. 여기서 전범은 안 된다.
현대적 전쟁
전시 중에는 선전과 보도의 경계를 인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자주 본다. 러시아 군대가 키예프(Kyiv)에 텔레비전 타워에 (실패한) 미사일 공격을 가했을 때, 서구 언론은 그것을 전범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나토가 1999년 베오그라드(Belgrade)의 라디오 및 텔레비전 타워에 (성공적으로) 폭탄을 투하했을 당시, 그것은 “합법적인 군사적 표적”이었다.
러시아 군대의 “특별한 군사 작전”이 범죄라는 사실은 그로즈니(Grozny)와 알레포(Aleppo)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최근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의 극단적인 사례를 들자면 말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아직 여기까지 이르지는 못했는데, 아마도 침략의 구실이 우크라이나가 해방되어야 할 형제 같은 이들이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군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러시아는 전쟁을 강화하는 한편, 월등한 파괴력으로 “형제”들을 압도해야만 한다. 전쟁 논리는 러시아 침략이 대대적 파괴에 속도를 높이도록 몰아간다.
이것이 러시아의 현상인 척하지는 말자. 걸프전에서 미국은 바그다드의 은신처에 폭탄(벙커를 파괴하도록 설계되었다.)을 투하했고, 결국 수백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1991년에는 “죽음의 고속도로”에서 도망가는 병사들에게 공중에서 대학살을 자행했을 때, 더욱 많이 죽었다. 서방이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인 전쟁에서는 38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사망했다. 미합중국 군대가 수행한 무자비한 드론 공격 역시, 전투원과 비전투원 간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워싱턴의 가장 충직한 봉신인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인 일은 말한 것도 없다. 그들 모두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전쟁이다.
전쟁은 시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는데 이상적인 프레임이다. 이제 그것은 러시아에서 자명해졌다. 그곳은 전쟁을 전쟁이라고 부른다면 징역 15년에 처할 수 있는 곳이다. 반전 항의가 야만적으로 억압되는 곳이다. 크렘린 궁전의 대변자가 아닌 모든 매체는 침묵해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 정권의 약점이라면, 노골적인 억압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크라이나의 경우만은 아니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젤렌스키를 지지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아는 한 그렇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서구 매체와의 여러 인터뷰에서 전쟁에 관하여 반대한다거나 혹은 의심하는 표현도 듣지 못했다. 비록 우리가 사회적 매체나 우리가 가진 자료로 그들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매체에 따르면, 모두가 국가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8세부터 60세까지의 모든 남성이 이 국가를 떠나는 것을 금지하는 조처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가 고향을 위한 총알받이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야당을 막고, 모든 텔레비전 뉴스 채널을 “연합뉴스”로 불리는 “전략적 소통의 단일 정보 플랫폼”으로 통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가 자유의 수호라는 명목이다. 물론,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러시아 바퀴벌레들”을 죽이라고 하는 매체는 그들의 독을 계속해서 뿜어낸다. 서구의 여러 매체 – 심지어는 뉴욕타임즈와 같은 신문까지도 – 젤렌스키의 권위적인 조치를 보도하려 하지 않는다. 타임즈의 유명한 모토는 “인쇄하기 알맞은 모든 뉴스”를 언급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뉴스는 민주주의를 위한 이 전쟁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거짓말쟁이
러시아 정부와 우크라이나 정부 모두 잘못된 정보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검열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미꾸라지 같은 주장이다. “전범”, “테러리즘”처럼, 그것은 “보는 이의 각도에 달린 것”이다. 물론, 잘못된 정보는 사회적 매체 그 외에도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규정하는가? 러시아에서는 누구에게 발언권이 있는지, 침묵해야만 하는지를 국가가 결정한다. 서방국에서 그러한 일은 대개, 매스 미디어 및 사회적 미디어 플랫폼을 통제하는 기업인 개인적 영역으로 외주를 준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정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유럽 의장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Ursula von der Leyen)은 ”우리는 유럽연합의 크렘린 미디어 기계를 금지할 것이다. 오늘날의 러시아 국영기업, 스푸트니크(Sputnik)와 그들의 자회사는 푸틴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자신들의 거짓말을 퍼뜨리도록 더 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는 유럽에서 그들의 극악한 허위 정보를 막을 도구를 개발하고 있다.”라고 언급했다. 정말이지, 친서방을 따르지 않는 충성스러운 러시아 뉴스 채널과 다른 채널은 더 이상 페이스북에 접근할 수 없으며, 다른 주요 사회 미디어 통로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을 검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이 적이 행하는 바이다.
러시아인과 서양인 각각은 전쟁에 관하여 매우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특히 그들의 미디어가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지 혹은 아니어야 할지가 그렇다. 보기를 들어, 러시아 시청자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에게 구타당하고 위협받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고 서방 시청자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꺼이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남편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작별 인사를 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두 종류의 이미지 모두 진짜이긴 하겠지만, 각국은 그들의 선전 서사에 무엇이 적합한지 보여주기로 선택한다.
서방의 이야기는 악당으로부터 자신을 용감하게 방어하는 솔직한 사회적 약자에 관한 것이다. 용감한 영웅을 위하여 우리는 당연히 환호한다. 당연히 그들을 돕고, 노랗고 푸른 깃발을 흔든다. 이는 그만큼 간단하다.
러시아의 이야기는 매우 정교하지 못하다. 이는 이전 구소련의 천박한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대량 학살 정권인 신나치의 붕괴 속에 신음하고 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의 고향에 위협이 되는 나토의 전초기지가 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뿐이다. 우리는 나치가 없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같은 종류의 뻔한 서문과 함께, 러시아 탱크가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로 동시에 진격했다.
모든 선전이 그렇듯, 진실의 일면이 있다. 나토의 압박은 진실이다. 우크라이나 내부에 극단적 민족주의의 기류가 흐른다. 동성애자, 페미니스트, 로마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그룹, 스보보다(Svoboda), 아조프(Azov) 대대(현재는 우크라이나 군대에 통합되었다.)와 같은 파시스트 그룹이 존재한다. 물론 극우세력이 추악한 고개를 들고 있는 나라는 우크라이나뿐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정치 시스템이 파시스트라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러시아에서는 덜 그렇다. 그리고 대량 학살? 러시아 군대가 시리아 및 체첸공화국에서 행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개를 때리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막대기를 찾을 것이다. 모든 국가는 그들의 군대가 외부로 향하면 거짓을 말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사담 후세인의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 살상 무기”, 알카에다(미국의 이라크 침략의 전조였다)와의 거짓된 연합을 생각해보라.
진실
진실은 상호 제국주의라고 불리는 이야기이다. 세계가 아무리 글로벌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경쟁에 기반을 둔 세계이다. 상업적인 경쟁은 상황적 필요에 따라 냉전과 열전과 같은 군사적 경쟁이 된다. 상황이란, 권력의 손실, 경제 위기, 시장의 손실 혹은 잠재적 이득을 말한다. 우리는 인간의 필요와 야만적인 충돌을 일으키는 체제 속에서 살아간다. 시스템은 그 자체로 행성과의 전쟁, 생명과의 전쟁터다. 자본주의 체제를 물리치고 싸우는 것이 이치에 맞는 유일한 전쟁이다.
냉전은 끝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잠깐 멈춘 것이다. 바르샤바 조약은 사라졌지만, 나토는 그러지 않았다. 러시아도 나토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옐친이 제시했으나, 당연히 그것은 불가능했다. 나토의 존재 이유가 러시아를 제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역시 자본주의 민주국가가 된 현재, 나토의 필요성에 관한 격렬한 논의가 이어졌다. 실로 논의에 대한 답변은 긍정적이었다. 나토는 애초의 약속을 깨고 러시아 국경까지 진출했다. 전(前) 바르샤바 조약 14국이 반(反)러시아 동맹에 통합되었다.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미국 미사일 기지가 설치되었다. 우크라이나 점령은 공세 중 가장 최근의 것이었다. 이익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더욱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아직은 나토의 회원이 아니지만, 서방과 군사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나토의 확장은 미국(및 다른 서방국)을 위한 거대한 시장의 확대를 의미했다. 새로운 회원국이 그들의 무기를 나토 기준에 따르도록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에 충족하기 위해 폴란드는 2011년부터 2020년까지 60%, 헝가리는 2014년부터 2020년까지 133%의 군비 지출이 증가했다. 계산대가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토의 확장은 또한, 군사력, 특히 핵무기를 보유한 러시아가 아메리카제국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남아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반(反)전면적 파괴의 위협 없이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유일한 나라다. 냉전 시기를 그대로 닮았다. 그리하여 그것은 끝나지 않았다. 견제.-워싱턴 전략은 그대로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다. 영향력을 낮추기 위함이다. 러시아와 직접적 충돌에 개입하지 않고 힘을 약화하기 위함이다. 냉전 시기에 이러한 충돌은 쿠데타, 민족해방운동으로 드러났다. 이제 우크라이나는 “자유로운 서방”을 위해 열렬히 자발적으로 죽음을 무릅쓰고자 한다. “동정심” 많은, 호전적인 백만장자 젤렌스키로 인해 벌어진 일이다. 마치 쿠바미사일위기 당시의 체 게바라처럼, 필요하다면 세계대전이라도 일으키기를 바란다. 나토와 러시아의 공중전인 “비행금지구역”에 대한 요구가 받아들여진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그는 체 게바라처럼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정면 대결은 금기시되고 있다. 그것이 핵전쟁 이전과 평행선을 그리는 것이 오해의 소지가 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다.
적은 더는 “코뮤니스트 위협”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러시아를 우리와 같은 평범한 자본주의 국가로 만들지는 않는다. 부자들은 우리와 같은 자본가들이 아닌 “집권층”이다. 집권층. 그들은 누구인가? 부패, 착취, 투기로 부자가 된 억만장자들, 화려한 사치 소비로 그들의 재산을 과시하는 이들이다. 다시 말해, 자본가들이다. “막대한 부 이면에는 엄청난 범죄가 있다.”는 격언은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엄청난 범죄”는 여전히 새롭다. 러시아의 새로운 자본가계급은 대부분이 구 자본가계급, 즉 사이비 코뮤니스트 (구)소련의 공장장, 정당의 의장, 관료였으며 국가 재산이 사유화되었을 때 도적처럼 돌변했던 계급이었다. 특권 계급은 현재의 민간 자본가처럼 특권 계급으로 남았다. 민간 자본가들의 이윤은 현재 푸틴의 손아귀에 확고하게 놓인 국가 기구에 얽혀있고 종속되어있다.
구소련의 해체, '중앙지휘부'의 친자본주의 경제의 사유화는 우선 제국 유지에 드는 심각한 비용, 노동자들이 적은 임금으로 더욱 열심히 노동하는 것을 꺼리는 것에서 야기되었다. 그러나 지배계급 구성원의 갈망 역시 중요한 요소였는데, 자본의 관리자뿐 아니라 개인 자본소유자들에게 전 세계 자본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표준생활기준이 돌처럼 가라앉는 동안 경제는 급격히 침체했다. 1998년 러시아의 GDP는 (구)소련의 붕괴 직전 해의 1/3을 조금 웃돌았을 뿐이었다. 산업 생산은 60%로 감소했다. 그러나 1999년을 기점으로, 석유와 가스 같은 러시아의 주요 수출품의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는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며, 빠르게 회복되었다.
치안 기구를 중심으로 국가 기구가 통합되었다. 전 KGB 대령이었던 푸틴이 왕좌를 이어받자, 러시아는 회복하기 시작했다. (250만 명 이상의 러시아인을 고용했던) 군수산업이 과잉생산으로 곤란할 지경에 처할 때까지 군사부분이 재정비되었다. 이 군대는 (조지아와 카자흐스탄) 국경 지역의 내륙과 (시리아) 외곽 지역이 “질서”를 유혈로 회복시켰다.
그러나 2015년의 산업 생산은 여전히 1990년 수준 이하였다. 유일하게 석유와 가스 영역만이 민영화 이전의 생산 수준을 넘어섰을 뿐이다. 그 해에, 석유 가격이 급하락하여, 러시아 경제에 타격을 입혔다. 2020년 GDP는 2013년 2조 2900억이었던 것이, 1조 4800억으로 하락했는데, 텍사스보다는 낮은 수치다.
따라서 러시아 자본의 도전은 여러 가지였다.
- 석유, 가스 같은 주요 수출 산업의 시장 지위를 유지할 것:
- 그것에 대한 의존을 낮출 것 : 물가 폭등 및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무너진 경제에 대해 그것은 신뢰할 수 없는 목발이다.
- 군수산업의 초과생산을 축소할 것 혹은 해당 상품 사용을 증대시킬 것
- 노동계급에 제공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숨길 것, 프롤레타리아를 비참한 환경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킬 것(생존 조건 파괴에 책임이 있는 외부의 적에 대해 국가적 자부심을 강조하는 캠페인에 개입시키도록 한다.)
이는 제국주의 침략의 조건이다.
우크라이나는 매력적인 전리품이다. 세계 최대의 철강 산업 보유국이며, 가스 및 기타 광물 자원과 함께 비옥한 토지와 산업, 조선, 항구 ... 또한 러시아와 견줄만한 현대 군수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크라이나는 “무장해제 되어야” 한다고 모스크바가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다음으로는 러시아의 가스와 석유를 우크라이나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동하는 관이 있다. 물론 러시아가 그것을 통제하기를 바란다.
러시아는 이들 관을 통해 유럽의 가스 수입의 45%를 제공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에서 시장을 조금씩 점유해갔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천연가스 생산국이다. 미국이 최대의 가스 산업국이자, 성장 속도가 가파른 데에는 새롭고도, 생태계에 손상을 입히는 (수압파쇄법) 추출방식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과잉생산으로 신규 시장을 공격적으로 개척하느라 고군분투 중이다. 2018년 이래 대부분의 유럽 연합국 및 영국에 대한 수출은 가파르게 증가했다.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발트해 하부에 새롭게 내장된 노드스트림(Nordstream)2 가스 수송관의 종점이었던 독일은 예외다. 그것은 아직 사용하지 않았고, 지금으로서도 전혀 사용될 것 같지 않다. 이는 독일 자본의 안정적인 비용 효율적인 에너지 공급 및 러시아와의 통상 관계 확대를 위한 희망이었다. 현재 독일은 미국으로부터 액화 가스를 공급받기 위해 새로운 터미널에 투자함으로써 한 편이 되었다. 심각하게 오염된 화력 발전소는 새 시대를 열었다. 유럽연합위원회는 이듬해까지 러시아 가스 수입을 3분의 2로 감소시켜 2027년에는 중단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심지어 그 목표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한다 해도, 방향은 분명하다.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유럽 에너지 시장을 둘러싼 전쟁인 만큼,-또한 그것이 분명한 그림의 일부인 만큼-미국은 이미 승리자다.
현재의 전쟁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다.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다툼은 2008년부터 지속되었다. 2014년, 이 다툼이 전쟁이 된 것이다. 그때부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애국적인 전쟁 선전으로 넘쳐났다.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도 워싱턴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 살기 힘든 나라다. 두 여성이 서로가 한 아기의 엄마라고 주장했던 솔로몬 왕의 판결을 떠오르게 한다. 솔로몬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 아기를 둘로 잘라 각자에게 나누어 주겠소. 진짜 엄마가 주장하기를 “안 됩니다. 아기에게 손대지 말고 그를 그녀에게 주십시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두 엄마는 “자르시오.”라고 한 것이다.
폐허!
현재 가짜 뉴스와 진짜 뉴스가 너무도 뒤섞여 있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보기로, 2월 27일 “뱀 섬”의 13명의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조국을 위해 죽겠다고 결심했다 들었다. “엿 먹어라.”는 표현은 항복하려면 러시아 숭배를 요구했던 것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준다. 우크라이나와 모든 서방 미디어에서 그들의 영웅주의가 하늘로 울려 퍼졌다. 말하자면, 그들의 조각상이 이미 주문된 것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저 군인들이 부질없는 죽음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는 선전에 중독되었단 말인가? 자살폭탄처럼, 사후에 보상이라도 받기를 바랐는가?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을 영웅으로 추앙도, 애국적 광기의 희생자로 애도해서도 안 된다.
불행히도, 군인들은 무엇보다도 지혜롭게 항복한 것으로 상당히 빠르게 드러났다. 어휴. 심지어는 러시아 방송에서 그들의 생존과 안녕이 보도된 이후에도, 서방의 여러 미디어에서는 그것을 보도할 수가 없었다.
고향과 싸우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인구 대다수의 관심 사안이 아니다. 나토와 유럽연합으로 일치된 국가가 얻는 삶의 이점이 무엇이든, 전쟁의 불이익보다 크지 않다. 몇 주 후, 몇 달 혹은 몇 년 후, 총소리가 잦아들고 폭탄이 터진 도시 위의 연기가 사라질 때, 우크라이나는 폐허와 무덤 더미로 가득히 오염된 도시가 될 것이다. 또한 서방 국가들은 그들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무기보다 재건을 위한 비용에 덜 관대할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사람들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국가의 영예인가?” “자유인가?” 전쟁이 젤렌스키를 끝장내고 나면, 우크라이나만의 “집권 세력”은 여전히 부유하겠지만, ‘평범한’ 우크라이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뿌리 깊은 비극이다.
전쟁에 관해서 우리가 접한 최고의 소식은 러시아 군인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파괴하여 내다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불투명한 일인가. 우리는 무기 유기가 더욱 커지기를 바랄 뿐이다. 양국 모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군인이 서로 화해하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자신들의 지도자들에게서 무기를 돌리기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이 전쟁 반대를 선언하기를. 국민이 전쟁과 그 모든 결과를 계속해서 인내하고자 한다면, 평화 선언만으로는 전쟁을 멈출 수 없다. 거대한 대중이, 노동계급이 전쟁으로부터 등을 돌릴 때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처음은 1917년 러시아에서, 이듬해 독일에서 노동계급의 전쟁 반대 투쟁으로 중단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오래전 일이다. 오늘날 러시아에는 대규모 폭동의 기류가 없으나, 전쟁의 파괴적 결과는 잠자는 거인을 깨울지도 모른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에서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격차가 가파르게 벌어졌다. 양국의 “집권 세력”(푸틴과 젤렌스키를 포함해서)은 해외 조세 도피처에 재산을 숨기고, 세금을 거의 지불하지도 않는다. 반면 물가가 급상승한 한편, 12년간 우크라이나의 실질 평균임금은 변동이 없었다. 성공적인 우크라이나 정부가 사회적 비용을 2014년 예산의 20%에서 현재 13%로 축소시켰다. 이미 가난한 우크라이나 인구의 대다수는 전쟁 이후 더욱 빈곤해질 것이다. 지배계급의 관심과 그들의 관심은 같지 않다.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은 그들이 가진 적대적 이해로 인해 서로를 살육하고 있다.
우연이라고?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우리는 모른다. 아마도 양국의 승리를 인정하는 일종의 현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상 이는 다음 전쟁을 예고하는 숨 고르기에 지나지 않는다. 2008년의 “대침체” 이후, 세계 경제는 급격한 위기를 겪었다. 세계의 이윤이 거의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내고 엄청난 금액을 차입함으로써만 붕괴를 피했다. 세기 전환기에, 세계 부채는 84조에 달했다. 2008년 위기가 시작되었을 당시 수치는 173조였다. 2021년에는 71% 상승하여 296조였다. 모든 국가의 연간 총수입을 합하면 353%가 되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솟구쳤고, 어떤 “정상적” 의미에서든 구덩이에서 나올 계획도 전망도 없다. 세금의 증감, 소비의 진작, 화폐공급의 축소 또는 확대, 성장과 가치 축적에 의존적이지만, 그것을 점점 더 성취할 수 없는 이 체제의 위기에 대적할 수 있는 노동자가 없다. 가치 축적에 유리한 조건을 세우기 위해서는 존재하는 자본의 가치 하락을 요구한다. 거대한 규모로 “죽은 나무”의 근절을 요구한다.
같은 기간에 경제 불안전성의 증대와 희망 없는 위기, 글로벌 군비가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한 것, 무력 충돌 횟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이 우연인가? 거의 모든 대륙에서 전쟁이 격렬해지고 긴장이 긴박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명목상 군비 확충 노력을 가속화 했다. 글로벌 군비는 지난 10년간 경상 달러로 9.3%까지 증가했으며, 현재는 매년 2조를 경신하고 있다. 지금까지 최대 수요는 미국(2020년 7780억, 매년 4.4% 상승)은 러시아(2020년 610억, 2.5% 상승)를 포함한 그 외 국가를 월등히 넘어선다. 2020년 유럽의 총 군비 지출은 2011년보다 16% 높았다. 심지어 대유행으로 촉발된 침체조차 이러한 경향을 멈추지 못했다. 2020년 세계 GDP가 4.4%까지 하락했지만, 글로벌 군비 지출은 3.9% 증가했고, 2021년에는 3.4% 증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를 가속화하고 있다. 내년이 되면 무기 생산 업체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다.
유럽은 다시 한번 세계의 용광로가 될 수 있다. 지난 세기의 역사적 순간과 비교하여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째: 핵 요인이 상승에 제동을 걸고 있다. 두 번째 차이 : 글로벌 경제가 이전보다 심화하고 있다. 이해관계들이 서로 얽혀있다. 자신의 살점을 베지 않고서는 경제적으로 적을 벌할 수 없다. 러시아는 11번째 경제 대국이며, 현재 석유와 가스와 같은 주요 수출품은 제재에서 대부분 제외되었다. 유럽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우크라이나로 무기를 대량 보내는 동안,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는 지금도 우크라이나를 통해 유럽으로 흐른다. 이 상호적 의존성이 상승을 제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승에 대한 이들 억제 사항은 철통같이 보장되지 않는다. 군사 권력이 넘어서서는 안 되는 경계선이, 문제, 특히 패자 측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2020년, “군사적 행동의 촉발을 피하고, 러시아와 다른 동맹국이 인정할 수 없는 조건들에 그러한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잠재적 핵 사용을 줄이는 핵 억제력에 대한 대통령의 새로운 지시를 발표하였다. 화학적 생물학적 무기인 “지저분한 폭탄”(기존의 폭발물에 방사능물질을 결합한다.)을 사용함으로써, 이는 감소되었다. 거기에서부터 전술적 핵무기 증가가 그렇게 큰 진전처럼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더 있다. 그러한 과정을 피하고자 지배계급의 분별력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경제적 이해가 얽혀있는 것이 각각을 보증하지 않는다. 이것이 현 순간을 명확하게 하는 지점이다. 전쟁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모두의 경제에 치명적이다. 양국의 자본가계급은 결과적으로 이윤이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세계 경제 전반은 고통을 겪을 것이다. 특히 경제 제재의 심각성은 놀라웠다. 그것 모두는 이윤이 되지 않지만, 이윤을 쫒는 것이 그것을 움직이게 한다. 전쟁과 제재가 어떤 식으로든 피할 길 없는 미래의 침체를 가속화하고 심화시킬 것이다. 지금은 그것 때문에 전쟁이 비난받는다. 바이든은 그것을 “푸틴이 일으킨 침체”라고 명명할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에 대한 서방 경제의 전쟁을 비난할 것이다.
전후 제재 정권의 강화는 미래의 분쟁을 위한 준비를 뜻할 것이다. 현 자본주의의 변화무쌍함 속에서 이윤은 승전을 위한 희생양이다. 보호주의자가 됨으로써, 제재는 이윤 추구의 세계화 경향에 반대할 것이다. 무역 관계가 무너졌고, 물류의 연결이 단절된다. 그러나 전쟁 경제 속에서 그것들이 인식될 것이다. 제재의 목표는 (러시아, 이란, 북한,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중국이) 공공의 적에 대항해 뭉칠지도 모르겠다. 전쟁에 대한 지정학적인 함축이 또 다른 기사의 표제어가 될 것이다. 요지는, 세계화 속에서 우리는 세계 경제에서 우리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는, 과거 이전의 세계대전 순간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의식에 관한 것이다. 지배계급이 국민에게 전쟁에 총력을 기울도록 필요한 것은, 의식의 파괴이며 개인의 원자화, 그리고 거짓된 국가 공동체 속에서의 통합이다. 푸틴은 아직은 거기까진 가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와 독일인들처럼 러시아인들을 자신의 호주머니에 담지 않았다. 러시아 내부에서의 항전을 외치는 수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저항은 현재로서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많은 이들이 참여하도록 강제된 하나의 대규모 집회를 제외하고는, 푸틴을 지지하는 국수주의적 표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군사력을 제외하면, 푸틴은 전쟁을 히틀러만큼 확대할 수 없는데, 그의 이데올로기적 통치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반면 확대해야만 하는 이유라면, 승리 없이는, 포클랜드 패전 이후의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처럼 그의 버팀목이 무너져 내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것은, 사회 투쟁의 전통을 가진 대부분의 다른 국가도 이데올로기 통치가 취약한 나머지 국민을 대규모의 전쟁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진행되고는 있다. 우리는 틀에 박혀있다. 우리는 또다시 군인을 영웅으로 숭상하도록 학습한다. 우리는 또다시 전쟁터에서 승리를 응원할 것을 학습한다. 우리는 전쟁의 노력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학습한다. 또한 우리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 국가적 해결책이 없지만, 경제 위기, 기후 파괴, 대유행, 기근, 등 국경을 지키기 위해 전투하는 것, 고향을 위해 죽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배운다.
그것이 여러분을 규정하도록 놔두지 마라. 1915년 칼 리프크네히트가 혁명적 패전주의에 대해 그의 호소를 결정했듯이, “살육은 넘치도록 충분하다! 국내외 전쟁 선동자들을 타도하라! 대학살에 종말을 고하라!”
2022년 3월 23일
샌더(Sander)
국제주의자 전망(IP)
<자료 출처>
군사 데이터 : Sipri, IISS, 루트 레거 시바르.
경제 데이터 : IMF, 세계은행, 블룸버그지, 매크로트렌드
옮긴이 : 지나
<원문출처>
https://internationalistperspective.org/dont-fight-for-your-coun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