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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산서원(屛山書院)
- 지정번호 : 사적 제260호 (1978. 3. 31)
- 소 재 지 :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1
- 시 대 : 1614년(光海6년 癸丑)創建, 1863년(哲宗14 癸亥)賜額.
- 제 향 : 류성룡(柳成龍: 號西厓 領議政兼都體察使 諡文忠 豊原府院君).
류 진(柳 袗: 號修巖 成龍子 持平 贈吏叅).
이 서원은 풍산현(豊山縣)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이 그 전신인 병산서원이다. 1572년(선조 5)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이 지금의 병산동으로 이건하였다. 1604년(선조 37) 서애가 타계하자 후학들이 1614년(광해군 6)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봉안하고 병산서원으로 개칭했다. 1620년(광해군 12)에 서애 위패를 여강서원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에 다시 현 위치로 옮겨와 주향하고 있다. 철종때 사액을 받았다.
안동시 서남쪽에 있는 화산(花山)의 동남쪽 경사지에 남향하여 낙동강 건너의 병산 절벽을 바라보고 있다. 경사지 아래쪽의 외삼문(復禮門)을 들어서면 왼쪽에 연못이 있고 건너편에 높은 석축이 있는데 이 석축의 계단을 오르면 보기 드물게 큰 만대루가 동서로 길게 놓여 있다. 루 밑을 지나 계단을 다시 오르면 마당 건너편에 강당(立敎堂)과 그 앞 양측에 동․서재가 마주보고 있는 강학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동재 뒤편 담장 밖에는 주소(廚所)인 口자형 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강당 뒤편에는 사당(尊德祠)을 앉힌 사당공간이 전체의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난 오른쪽 높은 곳에 별도로 일곽을 이룬다.
전면 담장 가운데에 내삼문이 나있다. 사당영역 좌측에는 장판각을, 우측에는 전사청을 두었다.
중심 축선상에 외삼문-루각-강당-내삼문-사당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달리 도산서원처럼 사당공간이 중심축에서 벗어나 있다.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에 무익공 3량가 팔작지붕으로 꾸민 루각이다. 2층 루마루를 통칸 우물마루로 꾸미고 그 주위에 계자각난간을 돌렸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 3칸에 대청을 두고 그 좌우측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두었다. 좌측방 앞에는 쪽마루를 두고 우측방 앞과 뒤에는 각각 툇마루와 벽장을 시설했다.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5량가 팔작지붕의 굴도리장혀수장 집이다.
동․서재는 구조가 크게 다르지 않은 대칭적 구성의 건물로 각기 정면 5칸, 측면 1.5칸 크기의 납도리 5량가 맞배지붕이다.
서재는 동재와 달리 큰 방 앞과 대청 뒤의 쌍창에 각기 오래된 기법의 영쌍창과 그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내부를 통칸 우물마루로 꾸몄다.
화강석 기단 위에 정평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운 5량가 맞배지붕의 초익공계 건물이다.
내․외삼문과 장판각 그리고 전사청의 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의 3량가 맞배지붕인데, 내삼문은 무익공으로 나머지 세 건물은 납도리장혀수장 집으로 꾸몄다.
○ 봉암서원(鳳巖祠)
- 소 재 지 : 안동시 풍산읍 매곡1리 559번지
- 시 대 : 1802년(純祖2 壬戌)創建, 1861년(哲宗12 辛酉)陞爲書院.
- 제 향 : 남응원(南應元: 號許영<?+穎>亭 贈司僕寺正).
남융달(南隆達: 號懶齋).
남 급(南 급: 號由軒).
남천한(南天漢: 孤巖 大司諫).
1802년(순조2) 10월 봉암사를 창건하여 허영정, 난재, 유유헌, 고암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 일을 주장한 사람은 귀와 김굉, 임여재 류구, 과재 이진동, 남범구 등이었다. 매년 3월과 9월 중정일 향사를 봉행해 오다가 1868년(고종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8년신안, 안곡 양문의 협조로 강당과 주사를 복설하고 당장 및 유사를 선임해 오다 1962년에 유림의 발의로 묘우를 복설하였다. 이때에 묘우 6칸과 문간 3칸 전사청 2칸 등의 건물을 완성하고 1964년에 도회를 열어 봉암서원으로 복향하여 허영정 남응원 선생을 주향하고 난재 남융달, 유유헌 남급, 고암 남천한 선생을 배향하였다. 서원의 건물 구성은 묘우인 상현사, 강당인 현휘당, 숭덕재, 광업재, 전사청, 고직사로 이루어져 있다. 묘우인 상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풍관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전면 중앙에 주향인 허영정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좌측에 유유헌 선생, 우측에 난재, 고암 선생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강당인 현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인 승 덕재와 서재인 광업재는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유생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전사청은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주소는 구자형 외가로 이루어져 있다. 주향으로 모셔진 남응원(1539~1661) 선생은 영양인으로서 자는 인중이며 호는 허영정이다. 선생은 효성이 극진하여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6년동안이나 시묘를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알려져 선조 13년(1580)에 여강서원등 고장 사림의 천장으로 감사 유흥, 정지연 등이 차례로 공의 효성과 행검을 조정에 알려 임금이 포상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숙종 원년 (1575)에 정려가 내리고, 숙종 5년 통훈대부사복시정에 증직되었으며 영조 18년 사림에서 봉암사에 제향하였다. 배향인 남융달(1565~1652) 선생은 영양인으로서 자는 현언이며 호는 난재로 남응원의 아들이다. 공은 일찍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실패하여 한창 나이에 과거공부를 버리고 자질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영양남씨 족보를 처음 편찬하였다. 부모 상사에 3년을 여묘했으며 노인 우대의 특전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에 임명되었다. 남급(1592~1671) 선생은 영양인으로서 자는 탁부이며 호는 유유헌으로 난재고의 아들이다. 인조 2년(1624) 사마시에 합격, 동왕 8년, 학문으로 천거되어 참봉을 역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옹원봉사의 신분으로 왕을 호종하면서 정황을 소상히 적은 <<병자일기>>를 남 겼다. 효종 3년(1652), 의흥 현감에 임명, 현종 12년 수직으로 정삼품에 이르렀다. 숙종 17년 (1691)에 남한산성에 호종한 공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남천한(1607~1668) 선생은 영양인으로서 자는 장우이며 호는 공암으로 난재공의 손자이다.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합격, 동왕 24년(1646)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좌랑, 사헌부지평을 거쳐 현풍현감, 청도군수를 지냈다. 숙종 때에 공조참의를 지낸 뒤 임천에 마음을 붙여 조정의 부름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공은 시비사정을 가리는데는 의연하고 당당했지만, 온화한 성품에 성실 겸허하여 사람을 대함에 귀천을 가림이 없었으며, 깨끗한 인품 뚜렷한 조해으로 아는 이들이 정송경죽에 견주기도 했다.
○ 분강서원(汾江書院)
- 소 재 지 :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 시 대 : 1700년(肅宗26년 庚辰)創建.
- 제 향 : 이현보(李賢輔: 號聾巖 知中樞 諡節孝).
이 서원은 1613년(광해군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현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향현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후 1700년 (숙종26)에 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고종5)년에 훼철 되었으며, 1967년 옛터 서쪽에 복원하고 영정을 봉안하고 석채례를 행했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게 되어 도곡재사의 옛터에 서원을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승덕사, 8칸의 흥교당, 6칸의 극복재, 6칸의 경서재, 유도문, 12칸의 주소, 협문 등이 있다. 사당인 숭덕사에는 이현보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흥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등에 사용되며 동쪽 협실은 재임과 별유사의 방으로, 서쪽 협실은 헌관실로 사용하고 있다. 극복재와 경서재는 각각 동재와 서재로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이며, 정문인 유도문은 향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만 사용하고 있다. 이현보 선생(1467, 세조13~1555, 명종10)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로 본관은 영천이며 자는 비중, 호는 농암, 설빈옹으로 참찬 흠의 아들이다. 1498년(연산군4)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춘추관사, 예문관봉교를 거쳐, 1504년 38세때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에 유배되었다. 그후 중종반정으로 지평 에 복직되어 밀양부사, 안동부사, 충주목사를 지냈고, 1523년에는 성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받았으며, 병조참지, 동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 경주부윤, 경상도관 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다. 1542년 76세 때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만년을 강호에 묻혀 시를 지으며 한거하였다. 홍귀달 선생의 문인이며, 후배인 이황, 황준량 선생 등과 친하였다. 조선시대에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 국문학사상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전하여오던 <어부가>를 장가 9장, 단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 농암가>,<생일가> 등의 시조작품 8수가 전하고 있다. 저서로는 <<농암문집>>이 전해지며 시호는 효절이다.
○ 사빈서원(泗濱書院)
- 지정번호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9호 (1985. 8. 5)
- 소 재 지 : 안동시 임하면
- 시 대 : 1685년(肅宗11 乙丑)創建, 景賢祠 1708년(肅宗34 戊子)陞爲書院.
- 제 향 : 김 진(金 璡: 號靑溪 生員 贈吏判).
김극일(金克一: 號藥峯 璡子 牧使).
김수일(金守一: 號龜峰 克一弟 生員).
김명일(金明一: 號雲巖 守一弟 生員).
김성일(金誠一: 號鶴峯 明一弟 監司 贈吏判 諡文忠).
김복일(金復一: 號南嶽 誠一弟 司成).
이 서원은 청계 김진(靑溪 金璡)과 그의 아들 5형제의 유덕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685년(숙종 11)에 사림과 자손들의 공의로 세워진 사빈서원이다.
묘호는 '경덕사'라 했다. 1709년(숙종 35) 동구밖 사수가로 이건하여 '사빈서원'이라 하였다가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고 1882년(고종 19) 사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복설되었으나 현재는 강당과 주사만 남아있다. 임하댐 건설로 인해 임하면 사의리에서 1987년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강당은 정면6칸, 측면2칸의 제법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그위에 원주와 각주를 혼용해서 세웠는데 중앙 대청은 정면 4칸으로 매우 넓게 하였다.
대청을 중심으로 해서 좌우에 통칸 온돌방이 드리워져 있어 일반적인 강당 평면형식이다. 우물마루 상부는 5량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박공지붕이다. 건물 정면에는 '경덕사'라는 편액이 있는데 이것은 묘우의 현판을 강당에 옮긴 것으로 보인다.
주사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ᄆ자형 와가로서 전체는 남서향하여 배치하였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이 되는데 대문칸이 중앙에 배치되지 않고 좌측으로 한칸 물려 배치시키고 있다.
정면 좌측 협칸은 위치와 출입문으로 보아 마구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우측협칸도 좌측과 동일하게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나 우물마루를 깔아 현재 수납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어 그 방의 위치가 특이하다.
안마당 뒤쪽에 안채에 상당하는 공간이 있는데 정면에 대청을 두고 대청 좌우에 안방과 웃방을 모두 2통칸으로 하여 대칭으로 배열하였다. 안방 머리쪽에는 도장방인 듯 싶은 방을 설치하여 출입은 대청에서만 가능케 하였다.
안방과 웃방은 마당쪽으로 한칸 늘여 마당에서 직접 출입도 가능케 하였고, 우측 웃방 아래에는 부엌을 두었고 우측도 좌측과 동일하게 배치시키고 있다. 안채 대청 상부는 5량가로 종량위에는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았다.
강당은 많은 변형과 중수 등의 흔적이 있으나, 주사는 안동지방의 평면양식인 ᄆ자평면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변형이나 개수의 흔적은 보이지 않아 원형보존이 양호한 편이다.
○ 서산서원(西山祠(牧隱影堂))
- 지정번호 : 경상북도기념물 제43호 (1983. 9. 29)
- 소 재 지 :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외7필
- 시 대 : 1771년(英祖47 辛卯)創建.
- 제 향 : 이 색(李 穡: 號牧隱 韓山伯 諡文靖).
이홍조(李弘祚: 號睡隱)
이 서원은 1771년(英祖 47)에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위해 목은영당인 서산사를 세웠고, 서원철폐시에 훼철되었던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다시 개원한 서산서원이다. 1976년 유림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선생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인 수은 이홍조(睡隱 李弘祚)선생을 종향했다. 현재 목은선생의 사진영정, 별본영정과 목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매년3월,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건물은 강당, 숭덕사, 내삼문, 강수재, 존양재, 외삼문, 전사청, 주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 5칸 중 중앙 3칸을 대청으로 하고 양 측칸이 통칸의 온돌로 꾸며져 있다.
대청상부는 대량위에 첨차형 부재를 직교하여 짜고 주두형 부재를 놓아서 대공삼아 장혀, 중도리와 종보를 결구하였다 종보 위에는 제형판포대공을 세웠다. 대청상부에 있는 2본의 대량은 보간의 전면에서 1/5가량되는 지점에 각각 원주를 세우고 기둥머리에 주두를 놓아서 받쳐져 있다.
주두로 받쳐진 부분의 대량하단에는 직교하는 횡가재와 결구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마루 상부 전체 가구의 구성 및 균형상태로 보나 목재의 풍화변색상채르 볼 때 후대에 대량이 개체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대청 뒤쪽 판벽에는 매칸 중앙에 양개판문을 달았는데 문틀의 아래 윗면의 중앙에 중간창설주를 세웠던 홈이 3개소의 문틀에 남아 있다. 근년에 판문을 신작하고 문틀에 나무를 덧대어 보수하는 과정에서 중간창설주를 뽑아 버린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러한 2연독창형식의 흔적이 1700년대 건물에 남아 있는 예는 흔치 않은 것이다.
강당 뒷면에 단청칠한 내삼문과 토석 담장으로 둘러쌓인 방형 부지내의 숭덕사는 높이 1m가량의 건칫돌 축대쌓은 위에 서있는 초익공계의 5량가 건물인데 판대공위의 2중량에 파련대공을 세워 마루대와 장혀를 받았다.
강수재 및 존양재는 강당 전면에 대칭으로 배치된 동재와 서재에 해당하는 건물인데 그 평면도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쪽으로 2통칸의 온돌방과 툇마루가 병렬로 꾸며져 있고 외측 2칸은 루마루형식으로 되어 있는 건물로 근년에 건립한 것이다.
○선원강당
- 지정번호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5호(1985. 8. 5)
- 소 재 지 :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544
- 시 대 : 1843년(憲宗9 癸卯)重建
이 건물은 화산 권주(1457~1505)선생이 수학한 지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이 지은 강당이다. 확실한 창건년대는 알 수 없고 1843년(헌종 9)에 중건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성종 11년(1480)에 급제하여 도승지를 거쳐 충청 경상감사를 지냈으며 의정부 우참찬에 증직되었다.
정면4칸, 측면 2칸, 팔작지붕 홑처마집으로 가운데 4칸은 대청이고, 좌우의 각2칸은 방으로 꾸몄다.
막돌로 허튼층을 쌓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각주를 올렸다.
○ 세덕사당
- 지정번호 : 경상북도민속자료 제37호 (1982. 12. 1)
- 소 재 지 : 안동시 길안면 구수 2리 695
- 시 대 : 1699년(肅宗25 己卯)創建
- 제 향 : 탁순창(卓順昌)
탁광무(卓光茂: 號경렴정)
탁 식(卓 植)
이 건물은 탁순창(卓順昌)이 낙향하여 1699년(숙종 25)에 건립한 사당이다. 여기에 그의 6대조 경렴정 광무(光茂)공과 5대조 식(植)공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정문과 강당인 추원당(追遠堂) 및 사당인 세덕사 3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추원당은 민도리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一자형이며 세덕사는 납도리 겹처마의 一자형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추원당은 세덕사 주축선 전방에 있는 강당으로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정면5칸 측면2칸으로 가운데 마루를 깔고 좌우 퇴칸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이다. 5량가로 도리의 단면이 8각이다. 고종때 사묘, 서원을 훼철할 때 향리들이 기둥에 도끼질한 흔적이 남아있다.
세덕사는 방형의 담장 내에 건립하였는데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여 돌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었다. 전퇴가 없으며 흙바닥인 점이 고식이다. 측벽에는 광창을 설치하였으며, 전면의 문비는 전부 교체가 되었다. 3량가의 맞배지붕으로 가구에는 별다른 특색은 없다.
임진왜란 때 훈련대장을 지낸 탁순창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조상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6대조 경렴정 탁광무와 5대조 탁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87년 임하댐 건설로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 역동서원(易東書院)
- 소 재 지 : 안동시 송천동 391(안동대학내)
- 시 대 : 1570년(宣祖3년 庚午)創建, 1684년(肅宗10년 甲子)賜額.
- 제 향 : 우 탁(禹 倬: 號易東 高麗祭酒 諡文僖).
박충좌(朴忠佐: 咸陽府院君 諡文齊)
안동 지방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역동서원은 1570년(선조 3)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우탁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1684년(숙종 10)에 "역동"이라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대개 서원의 명칭은 서원 건립 지역의 명칭이나 혹은 봉향되는 그 명현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인데 본 서원의 경우에는 지명이나 호와 관계없이 "역동"이라 붙여지고 있다. 이는 퇴계 선생께서 우탁 선생이 역을 해득하여 이 땅에서 강학하여 교수 하였는 데서 명명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서원의 위치는 낙동강 상류인 "오다머"에 창건하였으나 1868년에 훼철되었고 1966년 지방 유림의 발기로 구계서원 당회와 도산서원의 당회에서 중간을 결의하고, 1969년 현 위치에 서원을 복원하였다. 서원의 옛터인 지삼의는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그 옛날 존 현양사의 전당이 창건되었던 역동 그 자리에는 유허비만이 이건되어 남아 있다. 경내의 건물로서 묘우인 상현사에는 고려성균관좨주단야우선생이라 쓰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묘우의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 집이며, 지붕은 와가로써 맞배지붕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묘우 앞에는 신문이 설치되어 있고 묘우 내부에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으며 제사, 교의, 향상 이 놓여있다. 서원의 강당으로 쓰이는 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동서 양쪽에는 1칸 의 협실을 내고 중앙 3칸은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 역동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전사청은 제수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으로 1칸 건물이며, 주소는 서원을 수호하는 고지기가 거처하는 곳이다. 동,서재는 원생들이 기숙하면서 강학하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지붕의 형태는 맞배지붕이다. 동재는 사물재, 서재는 삼성재로 명명하고 있다. 이 서원에 위패를 모신 우탁(1261~1342) 선생은 단양인으로서 본명은 탁이며 자는 천장 또는 탁부이다. 호는 단암 또는 백운당이며 세칭 역동선생이라 부른다. 단산현 품달리 신원에서 출생하시니 시조 우현의 7대손이고 남성전서 문하시중으로 추증된 천규의 자이다. 고려좨주우선생유허비명에 의하면 선생은 강대 정직한 지조로 군을 다스림에 요망한 사당을 철거했고, 조정에서는 도끼를 짊어지고 바른 말씀을 간하였다. 성균관의 책임을 맡고서는 고도를 시행하려 했으나 시대가 그렇지 못함을 알아차리고서 예안현 지삼리에 물러나 자연과 벗하며 생활하였다. 여러번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으니, 그 때는 명이(어진 사람 이 암군을 만나 해를 입는 괘)요, 그 점은 가둔(의를 지키고 뜻을 굽히지 않을려 세상을 피 해 숨어사는 괘)이었다. 그 뜻은 크나 홀로 서서 삼가지 않고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며 번민 하였던 것이다. 마을 이름이 '지삼'이라는 거은 선생에게서 비롯되었는데, 도학, 예의, 절조였다. 17세인 1278년(충렬 4)에 향공진사가 되었으며, 곧 발탁되어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다. 그 뒤 1290년(충렬 16) 병과에 급제하여 영해사록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감찰규정, 진현관직제학 등 직을 역임했다. [주역]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월여동안 연구하여 해득하였다하며, 선비로서 충선왕이 실덕을 충간하기도 하였다. 역동선생은 정주의 의리학을 정연하여 통달한 학문적 바탕을 가지고 천도와 인륜을 밝히고 사회적 폐풍을 개혁하고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 뜻을 버리 고 치사한 뒤에 복주의 예안현(안동시 와룡면 선양동, 안동댐 건설로 수몰)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충숙왕이 역동의 충의를 높이 사 여러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1342년(충혜왕 3)에 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희공이다. 조선조에 들어와 역동의 학문과 덕행을 흠모하였던 퇴계 선생이 주창하여 구택 근처에 역동서원을 창건하였다. 그 뒤 역동의 본향인 단양에 단암서원, 최초의 사관지였던 영해에 단산서원, 그리고 안동에 구계서원 등이 창설되어 향사하였다.
○ 용강서원(龍岡書院)
- 소 재 지 : 안동시
- 시 대 : 1671년(顯宗12 辛亥)創建.
- 제 향 : 최치원(崔致遠: 字孤雲 贈內史令 諡文昌侯 文廟配享).
이 서원은 1671년(현종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후 1975년에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모덕사, 10칸의 숭문당, 신문, 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정문, 2칸의 전사청, 6칸의 주소 등으로 되어있다. 사우인 모덕사에는 최치원 선생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강당인 숭문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와 서재인 양지재와 근수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고, 전사청은 제수를 마련한 곳이며, 주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사용하고 있다. 최치원(857, 문성왕19~?) 선생은 신라 말기의 학자이며 문장가로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고운 혹은 해운으로 경주 사량부 사람이다. 견일의 아들로,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 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가운데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 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선생은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당나라의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2년간 낙양을 유랑하면서 시작에 몰두하였는데, 그때 지은 작품이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 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등이다. 그 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 표수현위가 되었다. 이때 공사간에 지은 글들을 추려 모은 것이 <<중산복궤 집>> 1부 5권이다. 그 뒤 887년에 표수현위를 사직하고, 얼마 후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었다. 그러나 문명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과 도통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으면서 부터였다. 그 뒤 4 년간 고변의 군막에서 표, 장, 서계, 격문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879 년 승무량전중시어사내공봉으로 도통순관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를 하사받았으며,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공사간에 지은 글이 표, 장, 격, 서, 위곡, 거첩, 제문, 소계장, 잡서, 시 등 1만여수에 달하였는데, 귀국 후 정선하여 <<계원필경>> 20권을 이루게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은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29세로 신라에 돌아오자, 헌강왕에 의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문명을 떨쳐 귀국한 다음 해에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문> 등 의 명문을 남겼고, 당나라에서 지은 저작들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진헌하였다. 894년에는 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에 올랐으나 선생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 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 질리는 만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아니되어 실정 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퇴위하고자 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하여 각각 대리 작성한 상표문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을 박진감나게 묘사하였다. 이에 이르자 선생은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세 장년의 나이고 관직을 버리고 소요 자방하다가 마침내 은거를 결심하였다. 선생이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 강주(지금의 의 성)의 빙산, 합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합포현의 별서 등이 었다고 하는데, 이 밖에도 동래의 해운대를 비롯하여 선생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러 곳 있다. 만년에는 모형인 승 현준 및 정현사와 도우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해인사에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선생이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에 의하면 908년(효공 왕 12) 말까지 생존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 뒤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물외인으로 산수간에 방랑하다가 돌아가셨다고도 하며 혹은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도 있다. 1020(고려 현종 11)년 현종에 의하여 내사령으로 추증되고, 다음 해에 문창후에 추시되어 문묘에 배향 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의 무성서원, 경주의 서악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영평의 고운영당, 대구 해안현의 계림사 등에 제향되었다.
○ 용계서원(용계서원)
- 소 재 지 :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
- 시 대 : 1778년(正祖2 戊戌)創建
- 제 향 : 김언기(金彦璣: 號 惟一齋)
권대기(權대기)
1778년(정조 2) 김언기 선생의 문도와 후손들이 보덕사를 세워 선생을 제향했고, 뒤에 인재 권대기 선생을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현재는 단소를 세워 용산 보덕단이라 하고 매년 3월 초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김언기(1520~1588)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중온이요, 호는 유일재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구봉령 선생과 함께 청량산에 들어가 10년을 기약하고 글을 읽다가 연고가 있어 구봉령 선생보다 1년 앞서 돌아왔다. 산에서 내려오며 암애와 초목이 모두 읽던 책의 글자로 보였다 한다. 도산 근처에 살면 서서사를 지어 '유일'이란 편액을 걸어 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문하에서 남치리, 정사성, 권위, 박의장, 신삼제, 권태일 선생과 같이 훌륭한 인재들이 배출되어 당시 안동의 학문 진흥의 창도자로 알려졌다.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는 여강에 서원을 세우고, 백련사를 철거하여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데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유일재집>> 1권이 있다.
김언기 金彦璣 1520∼1588(중종 15∼선조 21)
조선시대의 학자. 자는 중온(仲溫), 호는 유일재(惟一齋). 본관은 광산(光山). 1567년(명종 22) 생원에 합격, 도산(陶山) 근처에 살며 서당(書堂)을 마련하고 후진을 가르쳤으며, 날마다 학자들과 더불어 강설(講設)하여 성공하는 자가 많았다. 학문의 태두로 알려진 남치리(南致利)·정사성(鄭士誠)·신제(申悌)·권태일(權泰一) 등은 모두 이 서당 출신으로, 당시 안동(安東)의 학문진흥 창도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황(李滉)이 죽은 뒤 여강(廬江)에 서원을 세웠고, 백련사(白蓮寺)를 헐고 불상을 강물에 던지는 등 유학의 전수(傳授)에 노력하였다.
첫댓글 제춘님. 퍼 갑니다. 고맙습니다.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 주셔서~~~. 참고로 매일 한개씩 퍼 갑니다 꼬리말 달지 않더라도 서운하게 생각지 마시구요. 출처는 반드시 밝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