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작가와 함께> 창간호 출간을 축하한다. 문학의 빛을 찾아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사랑과 열정을 존경하며, 졸필 연재를 덧붙인다.
무의도/차용국
영종도를 지나 잠진도 선착장에서 무의도행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큼 가깝게 보이는 거리였지만, 배만이 섬을 오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붕’ 하고 뱃고동 소리가 나면 갈매기 떼가 몰려와 배를 맴돌며 따라왔다. 사람들은 하늘에 새우깡을 던지며 즐거워했고, 갈매기는 익숙하게 그것을 덥석덥석 받아먹었다.
국사봉과 호룡곡산에서 내려온 자잘한 능선이 바다와 닿은 곳에 조그만 포구를 만들고, 사람들은 그곳에 마을을 이루었다. 집은 대부분 시멘트벽돌로 지은 단층의 지붕 없는 구조여서, 마치 산 능선과 능선 사이의 자락에 납작 엎드려 바다만 바라보는 모양새였다.
마을 앞으로 차선 표시 없는 도로가 있고, 도로 건너 바다 쪽으로 그물을 쌓아놓거나 빨래처럼 생선을 걸어 말리는 터가 있었다. 그 공간이 삼각뿔 블록 모양의 테트라 포트 위에 설치된 방파제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박한 배를 묶어 놓는 둥근 철심이 박혀있었다. 멀리 물러난 바다는 운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알몸을 그대로 들어낸 갯벌은 멀고 흐릿했다. 갯벌에 쓰러진 작은 고깃배는 밧줄에 묶여있었다.
호룡곡산과 국사봉 산행을 마치고 난 후라 속이 출출했다. 식당을 찾아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영종도에 가서 해물칼국수를 먹자고 생각하면서 선착장으로 걸어갈 때였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 쪽에서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흰머리에 흰색 남방셔츠를 단정하게 입은 초로의 남자는 해물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섬사람인지 나와 같은 객지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근처에 식당이 있는지 물어보자는 생각으로 말을 걸었다. 그는 잠시 나를 살펴보다가 갑자기 해물 꾸러미를 들어 보이며, “마침 이것으로 요리하려는데 같이 먹겠느냐”고 대뜸 말하는 것이었다. 적잖이 당황했지만, 선해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우수에 젖은 듯한 눈빛에 이끌려 그의 호의를 받았다.
그의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산 아래에 있었다. 마당과 텃밭이 있는 아담한 전원주택이었다. 그는 마당 한쪽에 드럼통 화덕에 불을 붙이고, 들마루에 접이식 식탁을 폈다. 그는 커다란 양푼 냄비에 바지락, 홍합, 새우 ...... 텃밭에서 막 딴 애호박과 방금 뽑은 골파를 넣어 해물칼국수를 뚝딱 만들었는데, 나는 그렇게 맛있는 국수를 먹어본 적이 없다.
그는 선착장에서 인천 가는 아들 내외를 배웅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자식에게 주려고 해물 꾸러미를 준비했는데, 아들네가 가져가지 않겠다고 극구 사양해서 도로 가져오는 중이었다고 덧붙였다. 나는 직장 다니면서 집 요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사 먹는 일이 편하기도 하다고, 나도 웬만하면 밖에서 해결한다고 말했다. 위로의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그는 선뜻 이해한다고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랬다고.
그는 인천에서 사업을 했다. 맨손으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다. 술을 마시는 것도, 골프를 치는 것도, 다 일이었다. 몇 번의 시련도 있었고, IMF 때에는 위기도 맞았지만 견뎌냈다.
가정의 대소사는 다 아내의 몫이었다. 한창 성장할 아이들과 속 깊은 얘기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이들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하다고. 다행히 아이들은 큰 탈 없이 자라 직장을 갖고, 결혼도 해서 살만해졌는데 아내가 쓰러졌다. 아내의 몸은 말이 아니었다. 당뇨, 고혈압, 뇌경색에 치매도 왔다. 약을 한 주먹씩 먹어도 좋아지지 않았다. 그가 오십 중반을 지날 때였다.
아픔은 아픔 그대로 떠나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달래거나 치유되지 않고 결국 남는 것이었다. 사랑이나 행복이니 하는 것도 그때뿐. 나중에 사랑하고, 나중에 행복한 삶은 없는 것이었다. 그는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이곳에 왔다. 아내를 위해 상을 차리고, 산책하고, 음악을 들으며 이곳에서 오 년을 살았다. 그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도 이곳에서 오 년을 더 살았고, 죽을 때까지 살 거라고 했다.
그가 말했다. 그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고마웠다고,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어서.
나는 당시 그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찡한 연민을 느꼈다. 돌아보면, 그때 그의 이야기는 현대 사회에서 일을 우선하고, 본의 아니게 가족을 소홀히 하다가 어떤 불행한 계기로 뒤늦게 후회하는 많은 사례와 유사한 것일 수도 있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가족을 위해서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시대의 집단 믿음처럼.
하지만, 그의 삶, 그의 이야기는 그만의 유일한 사연이고 기억이어서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특별하다. 삶은 집단의 관계망에서 고정된 기준과 잣대로 측량할 수 있는 기억일 수 없다. 사람의 삶의 의미와 추억은 각자의 개별성으로 소중하고 아름답다.
갈매기는 떼 지어 살아도 그들의 소리는 제각각이다. 우리의 삶의 소리도 그러하다. 그 소리는 섬세하다. 주의 깊이 들어야 울림도 크다.
그 소리를 듣고 싶다.
비 그친 국사봉길
해무에 취한 길
물 빠진 갯벌에 남겨진 배여
누구를 기다리나
한적함과 쓸쓸함마저 다 비우고
오히려 평화로운 무의도 앞바다
그 바다에 가고 싶다
가서, 그 옆에 누워 그의 말을 듣고 싶다
- 시, 「바다」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