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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육주일
자비의 공동체
호세아 6장 4-6절, 누가복음서 7장 36-50절
육성한 전도사
[신학생의 고민]
오늘은 신학교육주일입니다. 신학교육주일을 맞이하여 잠시 지금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신학생들의 고민을 나눈 뒤 설교를 시작해보려 합니다. 교회에서 자라오고, 교회에서 일을 하고, 또 교회에 대해서 배우는 신학생들이 모이면 그 이야기의 주제는 언제나 교회이야기입니다. 함께 교회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신학생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과 교회현장의 간극에서 오는 괴리감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며 새롭게 알게 된 성서, 하나님, 교회, 사회에 대한 이해들을 교회 현장에서 말하거나 맡은 영역에서 가르치고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년 전 목사님들이 모여 강의를 듣는 자리에 참석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날 강의를 하신 강사 분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이셨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한 목사님이 기다리셨다는 듯이 손을 들고 발언할 기회를 요청하셨고, 교수님에게 간곡한 요청과 당부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말의 요지는 신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교회에서 말하지 않게 잘 교육시켜달라는 얘기였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배운 대로 두고, 교회 현장에서는 교회가 원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게 교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것을 충분히 체화시키지 못한 채로 정돈되지 못하고 거친 언어로 표현했을 때, 기존의 신앙을 고수하시는 성도 분들에게 상처가 되고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참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신학교 1학년 때 새롭게 배우는 내용조차 교회 현장에서는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려면 신학적 지식은 필수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 새로운 신학과 신앙을 받아드리기는 과정 가운데 생기는 혼란과 고민이 생겨날 수 있지만 이는 신앙이 성장해나가는 하나의 성장통일 뿐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 목회자들이 전문적인 신학적 지식은 신앙의 혼란을 가져 올 수 있고, 교회 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지나치게 이것을 피하고 덮어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습은 때때로 한국교회 성도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신앙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신학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와 관점을 가지게 하며 또한 신학을 통해서 더 깊은 신앙의 차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불어 올바른 신앙의 관점을 가지게 되니 자연스레 기존의 신앙과 교회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적인 사고도 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신학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모두를 위한 학문이지 목회자, 성직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교회의 위기라고 말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적인 실력도 갖추고, 교회와 세상을 위한 헌신을 몸으로 보여주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고, 이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사랑교회에서 신학생이자 목사후보생으로써 이 자리에 서있는 저는 다른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교우분들은 목사님의 설교와 다양한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독서모임들을 통해 올바른 신학을 배우고 계시고, 이것이 몸의 헌신과 더불어져 더욱 성숙한 신앙인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제 교회청소를 하러 오신 1남신도 집사님, 장로님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던 중에 듣게 된 대화는 저를 아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집사님, 장로님들께서 복음서의 저자와 그들의 신학적 관점에 따른 서술의 차이, 성경 각 책의 저작 연대 등에 대한 수준 높은 신학적인 대화를 나누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대화였습니다. 저는 그 순간 앞으로 어떻게 실력 있는 좋은 목회자, 성숙한 신앙이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지금처럼 열린 마음과 자세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교회와 세상을 위해 헌신하며 더 깊은 신앙의 단계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이러한 노력이 한국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괴물]
지난 주 한문덕 목사님이 설교 중에 언급하셨듯이,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의 성폭력과 그것을 조직적으로 은폐한 사실을 폭로한 일로 자신도 성폭력의 피해자였다고 용기 내어 말하는 #ME TOO 운동이 계속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난 6일 화요일에는 JTBC ‘뉴스룸’에 최영미 시인이 출연해 문단 내 만연한 성폭력 문화와 이를 비판하는 자신의 시 ‘괴물’ 대해 언급하여 큰 파장이 일었습니다. 시인은 시 ‘괴물’에 자신이 경험한 성폭력 사건들과 특정 가해자를 투영했는데, 시 속에서 성폭력 가해자로 등장하는 En이라는 인물이 한국 문학계의 큰 인물인 특정 원로시인을 연상시켜서 더 큰 논란이 일었습니다.
최영미 시인의 뉴스룸 인터뷰 이 후에 문단에 대한 비판과 En으로 추정되는 시인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었습니다. 이 일로 문단 내에서는 최시인을 격려하고 함께하고자하는 목소리들과 또 반대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나타났습니다. 전 한국문화평화포럼 사무총장인 이승철 시인은 SNS에 최시인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했다” “한국문학의 상징, 우리 En시인은 어찌할꼬냐”라는 식의 글을 써 올렸습니다. 긴 세월동안의 고통을 감내하고 자신이 성폭력의 피해자라고 용기 내어 말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폭력으로 2차 가해를 하고, 최영미 시인이 마치 잘못된 행동을 한 것 마냥 몰아붙이는 모습은 또 한명의 괴물을 보는 듯 했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교회 목회자들의 성폭력이 크게 화두가 되었고, 교회 내에서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폭력의 당한 이들은 자신이 성폭력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를 두둔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오는 분위기 때문에 그 아픔과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거나,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성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것입니다.
이 사회의 괴물들은 권력의 윗자리에 자리에 앉아 약자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그들의 피를 빨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이들입니다. 또 그들 편에 서서 함께 동조하고 침묵하는 이들입니다. 이 사회의 괴물들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자신의 뜻대로 따르지 않는 이들을 사회의 주변부로 밀어내고 되려 피해자를 가해자, 또는 죄인으로 낙인찍곤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폭력의 피해자가, 힘에 눌려 고통 받는 약자가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가 그들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들어주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과 죄인]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서에서도 죄인 취급을 받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온 그간이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눈물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죄인이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세리, 강도, 목자, 창녀 등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눈에 보이는 장애나 큰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죄인의 부류에 속했습니다. 또 십일조를 내지 않는 사람이나, 안식일에 휴식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죄인에 포함되었습니다. 죄인으로 규정되었고, 규정될 상황에 놓인 이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죄인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고통을 준적이 없음에도 종교-사회적 규정에 의해서 부당하게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에 가까웠습니다. 죄인에서 벗어나기 위한 종교적 절차가 있었지만 하층민의 계급으로 분류되었던 그들이 율법의 세밀한 규정을 알기도 어렵고, 그 절차를 알았다 하더라도 더러운 죄인들의 돈은 받지도 않으니 그것을 시행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즉 그 어디로도 벗어날 수 없게 죄인으로 묶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죄인들은 언제나 좌절과 죄의식을 달고 살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이런 삶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더욱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삶에는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뜻을 가르치며 치유의 기적까지 보여주는 이가 나타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눅7:34). 하나님의 뜻을 담보한 이가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 자신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는 것은 어두웠던 그들의 삶에 한 줄이 빛이 비치는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찾아오지 않을 것 같던 하나님의 자비가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도 그러한 경험을 한 여인처럼 보입니다. 여인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를 느끼게 하신 분, 새 희망을 주신 분 그녀에게 예수님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예수님의 등 뒤로 걸어와 그의 발 곁에 서서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춥니다. 자신이 가져온 귀한 향유도 발에 바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행동에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죄인이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자신도 함께 부정해지는 것을 의미했고,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이들은 죄인이 그 식사 자리에 온 것만으로도 몸서리치며 부정하다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시고 함께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보한 이가 그녀를 허락했습니다. 그녀를 내버려두신 예수님의 행동은 이 사람은 죄가 없다하신 무죄선언과 같았습니다. 이미 그녀는 하나님의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쥐고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다른 이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준 이를 두둔하고 그를 간증의 자리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사회의 괴물들로 인해 고통 받고 되려 죄인을 옷을 입고 있는 이들과 이 사회에서 배제되어 주변부로 밀려나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선물하는 일입니다. “당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뜻은 저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가운데 있다고” 말 주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곁으로 가서 짐을 함께 져주고, 죄의 멍에를 벗겨주고, 죄의 굴레를 끊어뜨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보여주신 죄 사함,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무엇으로 사랑을 이끌어 낼 것인가?]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본문에 등장하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리새파 사람도 여러분들처럼 열심히 배우려하고, 새로운 것에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오늘 바리새파인 시몬이 예수님을 집으로 초청하고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해석자이자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회당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모세오경을 준수하셨고, 회당을 중심으로 많은 사역을 펼치셨으니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경계하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유대인들은 집 주인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나 당시 명성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식사에 초대했는데, 예수님은 비슷한 관심사와 계급을 가진 사람이고 많은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으니 바리새파 시몬이 예수님을 식사의 자리로 초청한다는 것은 크게 무리가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식사 자리에 함께 있었던 다른 이들은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오늘 시몬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하는 덫을 놓고자 식사자리에 초청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전문가였던 바리새파 사람이 예수님을 식사 자리에 초청하고,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봤을 때 시몬은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고 열린 자세를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시몬은 예수님이 혹시 예언자는 아닐지, 자신에게 큰 가르침을 주시진 않을지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시몬에게 오늘 예수님은 중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가 진정 깨달음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오경, 즉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지키고자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으며, 종교지도자의 위치에 서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토라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며 보여준 모습들로는 하나님 말씀이 진정으로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 알 수 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끌어 낸다고 말하며 보여준 것은 사회적인 약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함께 읽은 호세아 본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복잡한 율법의 규정들이 아니라, 제사가 아니라, 사랑(헤세드)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 이 본문을 언급하십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먹었는데, 이를 보고 비판하며 정죄를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오늘 호세아서 본문을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함께 읽은 호세아서의 ‘나를 사랑하는 마음’, ‘변함없는 사랑’, 즉 히브리어로 ‘헤세드’라는 단어를 ‘자비’로 번역하십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에브라임과 유다가 가지고 있지 않았고, 하나님이 제사보다도 더 원하셨던 것은 이웃을 향한 자비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낙인찍힌 한 여인의 손길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면서, 두 빚진 자의 비유를 들려주시면 시몬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치시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끌어 내는 것은 바로 복잡한 율법의 규정들이나, 심판이라는 두려움을 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씌어 놓은 죄를 벗겨주는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돈놀이꾼에게 큰 빚을 진자가 큰 빚을 탕감 받고 더 큰 사랑을 하게 된 것처럼, 너희들의 이웃을 향한 큰 자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큰 사랑을 이끌어내라고 요청하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너는 이 여자를 보고 있느냐?” 시몬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온 몸으로 표현되는 큰 사랑이었습니다. 큰 자비가 큰 사랑을 이끌어낸 증거가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불어 이 여인의 행동과 그의 행동을 비교하시며 시몬 자신을 성찰하도록 하십니다. 율법은 잘 알고 있고,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지만 정작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잃어버린 시몬에게 잊지말아야할 본질을 다시금 깨우쳐 주셨습니다.
[어떤 자비를 보여주시겠습니까?]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주변에 하나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보이십니까? 자신이 피해자이지만 오히려 죄인의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들, 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좌절하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자책하는 이들,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이들을 위해서 어떤 자비를 보여주시겠습니까?
한 노인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다 망가져가는 우산을 꼭 쥐고, 추위에 떨리는 입술로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집을 가야하는데 차비가 없습니다. 천원이라도 좀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 성도분이 얼른 지갑을 열었습니다. “제 지갑에 만원 밖에 없네요. 비도 많이 오고 추운데 먼 거리가 아니라면 택시를 타고 가셔요.” 또 다른 노인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조심스럽게 그는 교회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한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문을 두드립니다. 한 성도분이 나와 묻습니다. “어쩐 일이시죠?” 노인이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배가 많이 고파서 그런데 먹을 것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노인의 말을 들은 성도분은 헐레벌떡 교회를 뒤지며 먹을 것을 찾습니다. 어쩐 일인지 교회에 라면하나가 보이지 않았고 겨우 찾은 것이 초코파이 다섯 개 정도였습니다. 이 성도는 지금 당장 허기진 배를 채울 초코파이 다섯 개와 함께 흰 봉투에 만원짜리 한 장을 넣어 정중하게 노인에게 건넵니다. “지금 당장 드릴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네요. 나가셔서 따뜻한 식사라도 좀 드셔요.” 제가 지금 들려드린 이 이야기는 모두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수많은 죄인을 만들어 냅니다. 돈이 신이 되고 돈과 권력을 쥔 이들이 왕처럼 군림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갖지 못한 이들은 실패자, 패배자로 여겨집니다. 또 무한경쟁 사회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기준의 사람, 그리고 특정한 자리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능력이 없는 사람, 게으른 사람으로 치부해버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은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이 실패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교회를 찾아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이던 노인들처럼 말입니다. 밥 한끼 사먹을 돈이 없어 교회를 찾아온 사람이 왜 죄인이 되어합니까. 왜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집에 갈 차비가 없는 사람이 왜 죄인이 되어야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이들에게 밝은 미소로 화답하며, 대접하기에 힘써야합니다. 이 세상은 그들의 미안함을 원할지 몰라도 우리는 그들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그들의 죄의식을 벗겨주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죄 사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작은 자비로 그들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불씨가 켜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자비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끌어 내시겠습니까?
[자비의 공동체]
아빌라의 테레사 성인의 짧은 글귀로 설교를 마칠까 합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몸이 없습니다, 당신의 몸밖에는.
그분에게는 손이 없습니다. 당신의 손밖에는.
그분에게는 발이 없습니다, 우리의 발밖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눈을 통하여
연민 가득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발로 뛰어다니시며 선을 행하십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손으로 우리를 축복하고 계십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필요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가십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는 이들은 우리의 몸을 통해서 그 자비하심을 입습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그리스도의 자비의 몸이 됩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 뜻으로 모여 자비의 공동체를 이룹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 설교 후 기도
자비의 주님, 우리에게 큰 자비를 베풀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크신 자비로 인해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의 지어 주는 죄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넘쳐납니다. 억압과 고통들에 신음하며, 좌절에 휩싸여 있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가 주님의 자비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 당신을 향한 사랑이 가득히 피어나게 하소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감사기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쁨의 소식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한문덕 목사)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명주실처럼 강하고 섬세한 사랑의 실로 우리들을 묶어 주시고, 가족과 친구들을 엮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에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넘치게 하셨습니다. 충만한 삶을 허락하시고, 풍성한 소망을 지니게 하시고,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을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가 올 한해 주님께서 베푸신 경기장에서 선한 싸움을 잘 마치게 하시고, 오직 우리가 배운 진리의 말씀으로 승리하게 하소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가며 잘 익어가는 신앙이 되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드린 이 예물을 받아 주소서. 이 예물이 쓰일 때에 온전히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소서.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언제나 나의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하듯이,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때, 주님께서 채워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한문덕 목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세상으로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자비가 넘치게 하십시오. 사랑의 노래가 들리게 하십시오.
* 축도 (캘틱 아일랜드 축복기도)
(한문덕 목사)
여러분 손에 일거리가 항상 있기를
여러분의 지갑에 언제나 돈이 좀 남아 있기를
여러분의 창가에 햇살이 늘 비치기를
비가 온 후에는 꼭 무지개가 뜨기를
친구들의 손길이 늘 여러분 가까이에 있기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 마음에 가득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May there always be work for your hands to do
May your purse always hold a coin or two
May the sun always shine upon your window pane
May a rainbow be certain to follow each rain
May the hand of a friend always be near to you
May God fill your heart with gladness to cheer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