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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하느님을 노래할 때] 버림받은 여인 안의 생명수
동서양을 막론하고 버림받은 여자에 관한 내용의 문학작품이나 방송 드라마가 아주 많다. 실제로 그러한 체험이 있든 없든 누구나 여기에 관심이 많고, 이를 접하며 때로는 자기 일처럼 분노하기도 한다. 요즈음은 세태가 달라져 가끔 부인이 남편을 버리는 일도 있지만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남편이 부인을 버리는 일이 더 많다.
버림받은 여자는 자신의 존엄성을 잃게 되어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닌지 자책도 하며 부끄러움에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린다. 그녀는 광야로 쫓겨났다고 느끼며 외로워하고 사랑을 목말라한다. 언젠가 돌아올 보은을 생각하며 온갖 것을 참아가며 희생해 왔기에 그 상처는 더욱 깊어, 하느님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고 믿기에 이른다. 과연 하느님께서도 버리시는 걸까?
구약성경에서
안셀름 그륀 신부의 저서 “여왕과 야성녀”에서 버림받은 여자를 하느님이 어떻게 대하셨는지 설명하고 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남편에게 자기의 몸종 하가르에게서 아기를 얻으라 한다. 하가르는 임신한 것을 알고는 사라를 업신여겼고 사라는 이를 아브라함에게 불평하였다. 남편은 하가르가 그녀의 여종이니 마음대로 하라며 내어주었다.
사라의 구박을 피해 도망간 하가르가 광야의 샘터에서 만나게 된 주님의 천사는 여주인에게로 돌아가 복종하라고 말했다. 그때 천사는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네가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님께서 들으셨다.”(창세 16,9-11 참조)고 하였다.
하느님의 약속이 있었기에 그녀는 고초를 당할 줄 알면서도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자신 안에는 세상이 훼손하지 못하는 신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진가를 알게 되면서 더 이상 억울해 하는 희생양이 되지 않아도 되었다.
사라는 그 뒤 이사악을 낳았고 여종의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가르를 다시 아들과 함께 광야로 쫓아낸다. 가지고 간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져 하가르가 아기를 덤불 밑으로 내던져 버렸을 때, 하느님은 천사를 다시 보내셨다. 그제야 하가르는 눈을 뜨고 우물을 보게 되어 아기에게 물을 먹였다(창세 21,19 참조).
이로써 하가르는 자신과 아기를 포기할 뻔했으나 그녀의 울부짖음을 들은 천사의 도움으로 눈이 열려,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은 여자가 아님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자기 안에 누구도 없애지 못하는 끊임없이 샘솟는 우물이 있으며, 이 내면의 물과 접촉할 때 포기하지 않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 물을 먹고 더 나아가 새로운 생명을 꽃피우며 세상에 우뚝 서게 된다.
신약성경에서
한편, 신약성경인 요한 복음서에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과는 상종을 하지 않는 유다인이었지만 우물가에서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다.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닌, 말하자면 창녀 신분의 여자였기에 누구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부끄러운 처지이므로 다른 여인들이 물을 길러 가는 시원한 시간이 아닌 뜨거운 대낮에 남들 눈을 피해 물을 길러 갈 수밖에 없어서 거기엔 그녀 홀로 있었다.
그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생명수에 관한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다. 세상이 주는 물과는 달리,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그 말씀에 그녀도 물을 청하니, 예수님은 그녀가 세상이 경멸하는 외로운 존재임을 알고 있다 하시며, 그녀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그녀는 그 순간 예수님이 비난하신 게 아니라 축복해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기쁨과 자유로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녀 안으로 생명수가 힘차게 흘러들어 왔고, 자신을 받아주고 기쁨으로 채워주신 분의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달려가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알렸다(요한 4,29).
그녀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찮은 사마리아 여인인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주님께서 부탁하셨고,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죄인인 그녀를 선택하여 기쁨으로 채워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첫 번째로 목격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자긍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이란?
이렇게 자신의 잘못으로든 남의 잘못으로 든 버림받아 휘청거리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생명수’와 관련된 ‘물’은 어떤 성질을 가졌는가. 물은 1기압에서 어는점은 0℃이고, 끓는점은 100℃이므로 상온에서는 액체 상태이다. 물 분자는 수소 2개와 산소 한 개로 이루어져 그 분자식은 H2O이고, 산소 원자를 중심으로 2개의 수소와 굽은 형의 구조를 갖고 있다.
기체 상태에서 물 분자는 한 개씩 멀리 떨어져 있으나 물과 얼음 상태에서는 분자들이 훨씬 가까이 함께 있다. 이때 수소 원자는 부분적으로 ?전하를 띠고, 산소 원자가 ?전하를 띠어서 서로 다른 분자의 산소와 수소 사이에도 인력이 작용하여 수소결합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결합력은 비교적 강해서 물 분자 사이의 인력을 끊으려면 높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물질에 비해 온도가 쉽게 올라가거나 내려가지 않는다. 만일 수소결합이 없다면 온도가 조금만 높아져도 물 분자는 하나씩 뿔뿔이 흩어져 기체로 날아가고 지구상에는 물이 한 방울도 남지 않을 것이고, 또 낮아지면 모두가 얼게 될 것이다.
우리 몸의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으니 그 물이 빨리 끓거나 얼게 된다면 우리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또한 물이 얼 때는 수소결합을 한 육각 고리 모양의 결정을 형성하며 빈 공간이 많아진다. 이 때문에 물은 다른 물질과 달리, 고체인 얼음이 되면 부피는 증가하고 밀도는 감소한다.
만일 얼음의 밀도가 물보다 컸다면 얼음은 강 아래로 가라앉고 이것이 계속되면 강은 순식간에 모두 얼음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얼음이 물 표면에서 찬 공기를 막아주기에 물은 더 이상 얼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겨울에도 얼음 밑의 물고기들이 살 수 있어 지구의 생태계가 보존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렇게 자연현상은 모든 생물이 그 생명을 유지하고 또 꽃피우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를 돌보시는 창조주의 숨결이 느껴진다.
어떤 모양을 하더라도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물의 특성은, 액체 상태에서는 다른 물질과 섞여서 녹일 수도 있고, 그릇이 어떤 모양을 하더라도 자신의 모양을 바꾸어 그 속에 담길 수 있지만 고체일 때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는 물에서와 얼음에서의 수소결합 방식에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인데 분자 내의 이 작은 차이는 외부적으로 매우 큰 차이를 일으킨다.
액체 상태에서는 고체 상태보다 온도가 높아 물 분자들의 움직임이 활발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수소결합이 부분적으로 끊어져 있다. 이와 같이 자유로운 부분이 있어 물 분자는 유연성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물은 어떤 모양의 그릇에도 담길 수 있고, 흐를 수 있고, 다른 물질이 물속에 들어오게 되면 융통성 있게 자리를 내어주어 그들과 섞일 수 있다.
이에 반해 얼음은 모든 분자들이 수소결합으로 연결되어 꽉 묶여있는 셈이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도 그 속에 포함된 물이 있기에 몸속에 용이하게 전달된다. 수증기는 따로 흩어져 있기에 다른 물질을 품을 수 없고, 얼음은 분자들이 경직되어 있어 그 사이를 다른 물질이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다.
생명의 원천
이렇게 유연하고, 다른 물질을 품을 수 있는 물의 성질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 되는 요인이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음이나 수증기가 아닌 액체 상태의 물을 준다고 하셨다.
이 물에는 물질의 경지를 뛰어넘어 그 유연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며 함께 어울리고 또 그들을 품어 세상의 고통을 녹여내어 영혼에 생명을 준다는 의미가 담겨있으리라.
비단 남녀간의 경우가 아니라도, 회사에서 어느 날 갑자기 해고 통지를 받는다거나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로부터 비난을 받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포기하고픈 마음이지만 상대방은 우리의 본질까지 훼손시킬 수는 없다. 우리 안에 솟아오르는 생명수가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다.
그 샘물을 찾아가다보면 먼저 다가와 우리를 이미 돌보고 계시는 그분을 만나게 되고, 그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소중함과 존엄성을 찾게 되니까. 이제 우리에겐 사마리아 여자처럼 그런 주님을 전할 일만 남은 셈이다.
[과학이 하느님을 노래할 때]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하였나니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5.14)
‘살아있다’는 것, ‘생명’이라는 것, 그 차갑고도 깊은, 저 캄캄한 암흑에, 억겁의 세월 속에서 태초부터 있어왔던 그 캄캄함에 한 줄기 말씀의 빛으로 생명이 창조되었다. 말씀이 우리의 육신 속으로, 영원이 시간 속으로, 빛이 어둠 속으로 들어왔다는 전 우주적 선언이다.
한국 사회에서 성체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특히 지난 몇 년 동안 한국과 온 세계를 쓸고 지나간 줄기세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버티며 마주해야 했던 필자에게 이 성경 말씀은 유달리 깊은 감동을 전해주는 구절이다.
생명의 출발점으로서의 수정란에 대한 감회
지난 몇 년 동안은 줄기세포와 관련해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창조주와 생명의 신비에 가장 커다란 도전이 있었던 시기로 생각된다. ‘건강과 장수’의 기치 아래 21세기의 불로초로 각광받기 시작한 줄기세포가 마치 모든 질환에 ‘넣기만 하면 바로 치유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면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난치병 치료를 위해서라면 수정된 배아를 파괴해서 배아줄기세포를 얻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정란이나 배아가 무엇인가? 태초부터 억겁의 세월을 기다리며 조상 대대로 보존되어 온 정자와 난자가 드디어 먼 길을 떠나, 영원 속에서 시간의 축으로 진입한, 하느님의 생명이 육화되는 순간인 것이다.
수정되면서부터 출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도 태초부터 생명이 탄생하면서 걸어왔던 역사들이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고스란히 재현된다. 수정 그 자체로 태초부터 준비되어 있던 모든 탄생의 에너지에 불이 당겨지며 창조주 하느님의 역사하심이 생생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배아가 파괴되는 것도, 건강과 치료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 입을 모았다. 배아가 그냥 세포덩어리일 뿐, 생명체는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와 같이 그 어떤 이유로도 말릴 수 없는 길을 가는 듯했다.
복제에 의한 인류사적 위기와 인간 정체성의 위기
배아줄기세포의 활용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고 ‘복제’라고 하는 필연적 모순을 잉태하고 있었다. 배아줄기세포와 환자의 유전형을 동일하게 맞추려면 환자의 ‘체세포핵’을 이식한 복제배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들 배아를 자궁에 착상시키게 되면 그것이 바로 복제양 돌리가 탄생한 것과 똑같이 복제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제인간!’,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들이 귀한 것은 창조주 하느님을 통해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인데, 복제에 의해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제조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다. 또 그렇게 해서 제조된 인간은 누구인가? 나 자신은 결코 아니고, 내 형제가 될 수도 없고, 내 자식이 될 수도 없는, 인류의 가족관계라는 축이 무너지면서 전혀 다른 종류의 ‘클론’들이 세상에 출현하게 되는 인류사적 위기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난치병 환자들을 돕기 위한 절체절명의 유일한 수단인 양 사람들이 당위성을 노래하고, 그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노라면 적지 않은 대가를 치르게 되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인간의 난자를 대량으로 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동물의 난자에 사람의 체세포를 주입한 이종체세포 핵이식을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과정에서 탄생할 동물과 인간의 혼합생명체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게 될 혼란, 곧 절반이 사람인 이 존재가 과연 세상에 태어나기는 할 것인가? 또 태어난다면 이들의 존재를 얼마나 동물로 인정하고 사람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그냥 캄캄한, 끝도 없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과학에 대한 오만이 빚어낸 창조주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고, 그렇게 답답한 시간들은 끝도 없는 터널처럼 지나만 갔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는 말씀의 선언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극적인 반전
그런데, 그토록 앞으로만 치달리던 그 어둠의 행진들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들이 발생했다. 우선, 어떤 첨단의 기술로도 인간의 복제된 배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몇 천 개의 난자를 동원하더라도 단 1개의 인간 복제배아도 만들어질 수 없도록 미리 ‘차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간은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같은 인간끼리의 배아복제도 이러한데, 하물며 이종 간의 복제는 어떻겠는가? 이종 간의 핵치환은 인간끼리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단호한, 아예 시작부터 세포들이 살아남기도 힘들게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었다. 몇 년 전 이런 기술로 소의 난자와 사람의 체세포를 통해 콩팥을 만들 수 있다고 하여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던 생명공학 회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허구였음이 드러났고, 그 기업에게는 결국 좌초라는 운명이 주어졌다. 이종 간의 교잡을 결코 원하지 않으셨던 창조주의 뜻을 인간이 모르고 있었던 것뿐이다.
새로운 깨달음들
이렇게 인간의 무모한 시도들이 좌초되고 있을 바로 그때, 세상의 또 다른 구석에서는 성체줄기세포 연구가 한창이었다. 성체가 된 우리의 몸의 곳곳에 생명과 소생을 위한 불꽃들이 간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 몸의 온갖 종류의 장기마다 골수, 뇌, 간장, 지방조직, 근육에 이르기까지 이들 성체줄기세포가 없는 곳이 없고, 우리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그 줄기세포가 있었다는 것이다.
백혈병에 걸렸을 때 골수이식을 통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환자의 몸에 이식된 성체줄기세포이며, 뇌 손상을 받은 뒤 회복된 사람에게서 부단히 그 ‘기적’을 만들어낸 것도 성체줄기세포였던 것이다.
또한 우리 몸의 체세포를 거꾸로 분화시켜 만든 ‘유도 역분화(iPS)’라는 것이 만들어져서, 배아줄기세포에 비해 ‘분화능’에 있어 손색이 없으면서도 자기의 유전형과 동일한 맞춤형 줄기세포가 나오게 되었다. 전분화능 줄기세포를 얻으려고 배아를 계속해서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 명분도 실리도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명들아, 노래하라
이렇게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생명의 씨앗을,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인간은 알고 있었을까? 이토록 우리의 생명 안에는 창조주의 사랑이 숨쉬고 있었다는 것을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인간은 알고 있었는가?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그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긴 적이 없었다.
보라, 다 말라버린 고목나무에서
피어나는 새싹의 기적들을,
나누고 또 나누어도 피어나는
창조주 하느님이 주신 소생의 힘을,
하늘이 있고, 별이 있고
그 아래 창조주의 생명이 있었다.
생명들아, 노래하라,
창조주의 영광을!
[과학이 하느님을 노래할 때] 사실에서 진실 찾기
벼락 · 난기류 · 테러 … 하늘의 진실은?
승객과 승무원 228명을 태우고 대서양 상공을 비행하던 에어프랑스 소속 여객기 한 대가 감쪽같이 사라진 적이 있다. 그 사건을 보도하는 신문 기사의 제목이 사고 원인, 곧 하늘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여객기의 실종이라는 ‘사실’에서 사고 원인이라는 ‘진실’을 찾고자 한다. ‘사실에서 진실 찾기’는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에도 ‘사실에서 진실 찾기’가 그대로 들어있다. 청마 유치환의 단 한 줄짜리 시 ‘낙엽’을 보자. 김경미 시인은 청마의 독백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를 두고 “이 한 줄짜리 우주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 읽고, 언제 다 얘기해 대나. … ‘지금도’ 그대를 추억하는 그 현재형은 너무 아프고 아름답고 서럽다.”고 했다.
청마의 ‘낙엽’에 주어진 하나의 사실인 ‘쓸고 있다’에서 김 시인은 ‘현재진행형’의 진실을 찾아냈던 것이다. 현재진행형이 담긴 진실은 ‘너무 아프고 아름답고 서러운’ 얘기였다. 김 시인이 찾아낸 진실인 ‘서러운 얘기’가 독자에게는 하나의 사실이 된다. 그리고 그 사실에서 찾아낼 수 있는 진실은, 유치환과 시조시인 이영도의 ‘사랑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에서 진실 찾기는 이렇게 진실 너머 진실로 이어진다.
사진 예술에서의 ‘사실에서 진실 찾기’
나는 김아타의 2006년 작품 ‘On-Air’를 보면서 한동안 멍해진 적이 있다.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의 야경이 분명한데 어쩐 일인지 그 사진에는 움직이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휘황한 네온사인이 그대로인 채 괴괴한 고요만이 전면에 그득하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카메라의 셔터를 장시간 열어둠으로써 움직이는 광원의 영상들은 서로 중첩되어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뭉그러진 것이다. 하지만 고정된 광원의 영상은 아주 생생한 모습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진에 드러난 ‘없음’이란 사실에서 ‘있음’이란 진실을 알아보라고 나를 윽박지르는 듯했다. 눈앞에 드러난 현상(現象)에서 그 내면에 켜켜이 쌓여 있을 중층성(重層性)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진실, 진실 너머의 진실, 그 너머에 있을 또 다른 진실, 그리고 또 …. 진실에서 진실로 이어지는 저 심연의 밑바닥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계시’, 너 깊고 무서운 침묵의 바다여!
통(桶)장사의 봄철 돈벌이
이야기가 너무 무겁게 흘렀다. 우스개를 하나 하겠다. 필자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공동 목욕탕엘 가면 얇고 긴 사다리꼴의 나무 조각들을 이어 붙여 만든 나무통이 오늘의 플라스틱제 바가지를 대신했다. 옛날에는 동네마다 통을 만들어 파는 전문인이 있었다. 그런데 이 통장사가 봄철만 되면 어김없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통장사의 봄철 돈벌이’라는 사실에 숨은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봄철이면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봄에 눈병이 걸린다. 선비가 안질이 걸리면 바깥출입을 삼가게 마련. 집안에 틀어박혀 거문고만 뜯다보니 거문고 줄이 자주 끊어진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거문고 줄은 고양이의 힘줄로 만든다. 그러니 고양이가 수난을 당할 게 뻔하며, 쥐의 수가 급증한다. 쥐가 나무통을 마구 쏠아서 구멍이 나니까 통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통의 가격이 따라서 오른다. 이렇게 해서 봄이 오면 통장사가 한몫을 톡톡히 챙길 수 있었다.
이 우스개에서 우리는 논지의 전개를 1차원으로 제한했다. 곧 단선적이다. 분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서양 과학에서의 ‘사실에서 진실 찾기’는 단선적이며 단면적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매일의 삶에서 다양한 사건과 인물, 그리고 늘 변하는 환경과 만나게 된다. 예를 들어 쥐약을 준비해 둔 약방도 봄이 오면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약방에 돈이 많이 쌓일수록 통장사의 수입은 준다.
사실에서 진실 찾기가 평면이나 입체로 전개되게 마련인 우리네 삶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이 내포하는 진실의 중층성뿐 아니라 그 다면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교통사고 한 건이 수십 종의 직업군에게 직 · 간접의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중층성과 다면성이 증가할수록 신의 영역이라 할 우연과 사람의 몫인 필연의 구별이 점점 더 모호해진다. 가벼운 우스개가 무거운 우연과 필연의 관계로 이어졌다.
과학에서 듣게 되는 ‘진실 너머의 진실’ 이야기
문학과 예술은 물론이고 경제활동 역시 ‘사실에서 진실 찾기’의 큰 틀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이제 과학에서 ‘사실에서 진실 찾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둘러볼 차례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튀코 브라헤(1546-1601년)는 일생을 걸고 행성의 천구상 운동을 관측했다. 이 방대한 자료가 하나의 사실로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년)에게 주어졌다. 거기서 케플러가 찾아낸 진실은 행성 운동에 관한 그의 세 가지 경험 법칙이었다.
뉴턴(1642-1727년)은 케플러의 경험 법칙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여 거기에서 진실을 찾아냈으니,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의 세기가 둘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면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는 만유인력 법칙이다. 뉴턴의 중력을 아인슈타인은 하나의 경험적 사실로 받아들여 중력의 실체를 시공간의 곡률로 해석한다.
시인 김춘수의 ‘꽃’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자면, 브라헤의 방대한 관측 자료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케플러가 브라헤의 자료에 ‘이름’을 불러주자, 곧 타원 궤도의 가능성을 열어놓자, ‘행성 운동의 세 가지 경험 법칙’이란 ‘꽃’이 되어 케플러에게 돌아왔다. ‘몸짓’과 ‘이름’과 ‘꽃’의 관계는 케플러와 뉴턴 사이에서 다시 성립한다. 그러고 뉴턴과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진다.
나는 몸짓이 꽃으로 되는 과정을 미사에서 면병이 사제의 축성으로 성체로 변하는 성체성사에 대비하곤 한다. 사실에서 진실이 밝혀짐은 계시의 열림이다. 신앙인으로서 나는 계시의 열림이 나를 하느님께 데려다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나는 또 과학도로서 계속 찾아지는 진실의 궁극에 하느님이 자리하시리라 믿는다. 믿기 위해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 믿어야 하는 이유가 ‘사실에서 진실 찾기’의 반복에 있다.
종교와 과학의 언어
과학이란 이름의 ‘청동 거울’은 하느님의 모습을 희미하게만 비춰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앞에서 ‘증명한다’나 ‘이해한다’가 아니라 ‘믿는다’는 표현을 썼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과학의 힘으로 증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사실에서 진실이 찾아질 때마다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므로 사실의 단계에서 유용했던 표현은 계시의 열림과 더불어 그 효력을 잃는다. 새로 찾아진 ‘진실’도 언젠가는 ‘사실로 변할 운명’이므로 그 ‘진실’마저 힘을 잃기는 앞 단계에서의 ‘사실’과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에서 삶의 구석구석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실에서 진실 찾기’가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여기가 언어의 맹점이다.
시로 돌아가 보자. 낙엽 = 추억 ; 깃발 =소리 없는 아우성 ; 몸짓 +이름 ⇒ 꽃. 이렇게 써놓고 보면 시인의 언어가 모순과 억지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순과 억지 덕분에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내면세계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모순과 억지는 시인에게 허락돼야 할 특권이다. 시는 이렇게 언어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과학은 수학을 포함한 언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과학이 늘 증명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자에게는 모순과 억지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과학도로서 나의 두 발을 언어의 맹점에 올려놓을 때마다 하느님께 조금씩 다가설 수 있었다. 나의 신앙은 언어의 맹점, 다시 말해서 과학의 한계에서 비롯한다고 하겠다. 구체적 통계 자료를 본 적은 없지만 자연과학대학에 신자 교수들이 의외로 많다. 연구를 깊이 해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과학의 한계를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나는 ‘가톨릭 성가’ 2번, ‘주 하느님 크시도다’를 좋아한다. 나의 종교적 경험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종교적 경험과 종교를 이렇게 정의했다.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인가의 이면에 우리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 [무엇인가가 지닌]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오직 간접적으로만 또 희미하게만 우리에게 도달한다고 느껴질 때, 그것이 바로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
위의 내용을 ‘사실에서 진실 찾기’의 틀에서 분석하면, ‘경험할 수 있는 무엇’이 사실이고,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 진실이며, ‘아름다움과 숭고함’, 곧 성스러움이 진실 너머 진실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종교 정의에서 자신을 ‘종교적’이라 했지만 그는 우리가 지향하는 ‘신앙인’은 아니었다. 신앙인이라면 ‘성스러움’을 ‘초월적 실재’의 현현(顯現)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실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주 인용되는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았다.”는 그의 언급도 아인슈타인이 초월적인 존재를 믿어서 한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확신하는 자연법칙의 결정론적 특성을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하나의 수사였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의 종교 정의는 하늘, 곧 자연에서 하느님을 찾으려는 우리에게 좋은 안내자가 된다. 문제는 ‘진실 너머 진실’을 찾아 그 무엇을 초월적 존재의 현현으로 받아들일 것이냐에 달려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는 현실적 제약이다. 그 선택은 누구도 나를 대신해 줄 수 없다.
나는 천문학도로서 “경험할 수 있는 무엇”으로 현대 천문학이 찾아낸 우주의 오늘과 어제의 모습을 알고 있다. 현대 천문학은 우주의 내일 모습도 점친다. 나는 우주의 모습과 진화상에서 성스러움을 느끼며, 그 성스러움에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하고 고백한다.
[과학이 하느님을 노래할 때] 결국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과학적인 관점으로 판단하면, 생물학 안에는 하느님께서 계실 적절한 자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의 하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탕에 두고 하느님의 존재를 논의해 온 서구의 종교가, 자연 현상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현대의 서양 과학보다도 선행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류 문화의 일반적인 전개 과정일 터이다.
오늘 나는 이 글에서 ‘수학이라는 언어로 설명되는 과학’과 ‘신학의 언어로 구술되는 종교’의 ‘논쟁’을 되풀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결국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라는 지혜의 말을 전하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에 내가 겪은 경험을 추가하여 글을 시작하고, 이어서 현대 과학문명이 봉착한 위기 문제에 대한 환경 생태적인 진단과 그에 대한 돌파구의 하나로서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이라는 논어의 한 구절에 나의 소박한 생각을 얹어 소개하고자 한다.
시애틀 추장의 연설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다. 그때 나는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뉴욕 주의 ‘이타카’라는 조그만 도시에 있는 코넬 대학에 교환교수로 파견되어 있었다. 1991년이었으니 아메리카 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1992년)를 앞두고 많은 행사가 열렸다. 그 해 초겨울 저녁, 학교 인근의 한 강의실에서 영어회화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날 강의에서는 아메리카 대륙발견 500주년에 대한 짧은 글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아메리카 대륙은 백인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침략한 것이라는 취지의 내용으로 짧은 영어 실력을 동원하여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서구의 백인들이 미국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최소한 5만 년 전에 베링해를 건너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한 홍인(紅人)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상당한 문화수준에 대한 사실을 우리는 ‘세계사’라는 과목을 통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세계사라는 동일한 과목의 교과서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을 역사적 사실로 또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평소에 갖고는 있었지만, 미국의 역사를 결코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지만 부강한 미국의 역사 속에 내재되어 있는 ‘큰 것이 아름답다.’거나 ‘흰 것이 우월하다.’는 것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만심에 대해서는 연민의 정을 감출 수 없었다.
미국의 건국 과정과 팽창 건설 과정 그리고 1 ·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미국 중심주의(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하여는 결코 찬양하기 힘든 측면이 많다. 이러한 나의 편견에 불을 붙인 것이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다. 이 연설문에는 새겨볼 만한 지혜의 한 자락이 깔려있다고 생각되기에 녹색평론사의 김종철 선생이 번역한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
“워싱턴 대추장(대통령)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대추장은 우정과 선의의 말도 함께 보내왔다. 그가 답례로 우리의 우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는 그로서는 불친절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대들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것이다. 우리가 땅을 팔지 않으면 백인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의 땅을 빼앗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중략)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대들에게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 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들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말, 큰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 가족이다.”
같은 내용의 철학이 담겨있는 인디언 추장의 연설문의 중간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마지막 자락을 이어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 보겠다. 우리가 거기에 동의한다면 그대들이 약속한 보호구역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날들을 마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홍인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가 다만 초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구름의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기억될 때라도, 이 기슭과 숲들은 여전히 내 백성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고동을 사랑하듯이 그들이 이 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을 팔더라도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달라. 우리가 돌본 것처럼 이 땅을 돌보아 달라. 당신들이 땅을 차지하게 될 때, 이 땅의 기억을 지금처럼 마음속에 간직해 달라. 온 힘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대들의 아이들을 위해 이 땅을 지키고 사랑해 달라.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한 가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을. 이 땅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다. 백인들도 이 공통된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한 형제임을 알게 되리라.”
이상의 내용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그들의 피부색이나 성별이나 민족이나 계급이나 나아가서 재산의 많고 적음이나 지식, 심지어 지혜의 많고 적음을 초월하여 모두가 한 조상에서 유래한 형제들임을 우리는 생물학을 통하여, 또한 진화학을 통하여 알고 있다. 시애틀 추장은 이러한 사실을 당시의 미국 대통령에게 준엄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나아가서 우리들이 인식의 지평을 조금만 확대하여 관조해 본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을 생물학과 진화학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렇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일한 기원에서 유래한 모든 생명체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현대 생물학의 가르침의 하나이다.
이 지구상에는 수천만 종류의 생물들이 각자의 환경 조건에 적응하여 그들의 생명현상을 제대로 발현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생식을 통하여 자신의 다음 세대를 생산하여 끊임없이 지구의 표면을 공간적으로 채우며 시간적인 영속성을 유지시키고 있다.
이러한 무수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데 적절한 환경과 생태적인 조건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처럼 다양한 환경에 서로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이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은 오묘하고 신비스러운 생명현상의 특성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논어 계씨편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
그런데 19세기 후반, 전기와 석유의 이용에 따른 중화학 공업의 발달로 초래된 제2차 산업혁명과, 원자력의 이용으로 촉발된 제3차 산업혁명은 이른바 ‘에너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현대인들의 삶을 안락하고 풍요롭게 한 측면이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환경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특히 화석연료를 과다하게 사용하여 초래한 지구온난화의 문제는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들 인간을 포함하여, 뭇 생명에게 커다란 재앙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최근에야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재앙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연기시키거나 완화시키는, 또는 재앙의 근본적인 원인을 구명하여 이에 대비하는 인류 전체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지지부진하기만 한 것 또한 사실이라는 진단이다.
이러한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태도에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해 볼까 한다. 현대 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환경과 생태계의 변화는 서서히 침몰하는 거대한 배와 같지 않은가.
이 배에는 에너지를 과도하게 소비하는 초선진국인들도 타고 있고, 에너지를 적게 소모할 수밖에 없는 후진국들의 주민들도 동승하고 있다. 선진국을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온 국민들도 함께 타고 있다. 나아가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전해지는 북녘의 동포들도 함께하고 있다.
이 배는 초만원이다. 60억을 상회하는 인류가 동일한 배를 함께 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배에는 100일 동안 60억 명이 먹고 마시는 데는 부족하지 않은 만큼 충분한 식품과 물이 저장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돈이 많아 다른 사람보다 몇 배를 충분히 구입해 먹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이 없거나 적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먹을거리를 충분히 구매할 수 없다면, 이 배가 과연 100일 동안 안전하고 행복한 그리고 즐겁고 희망찬 항해를 할 수 있을까?
이는 배를 타고 가는 60억 명이 갖고 있는 관습적이고 법률적인, 나아가 윤리적인 판단과 선택에 따라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들의 미래, 나아가 이 지구에 살고 있는 뭇 생명의 운명은 결국은 우리 인류가 판단하고, 선택하고, 실천하는 데 따라서 충분한 가변성이 있지 않을까?
우리들이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여 행동하는지에 따라서 그 배에 함께 타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문명의 미래는 결국은 우리들의 가치판단과 윤리적인 실천에 따라서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나의 주변 사람들이나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 구태여 풀어 쓴다면 ‘부족하거나 가난함을 걱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등하거나 균등하지 못함에 관심을 더욱 쏟아라.’이다. 이 말씀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작고한 지 15년이 넘은 김남주 시인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이 말씀의 출전이 논어의 계씨편(季氏篇)임을 최근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에서 나아가 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명다양성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을 화두로 삼고, 자신이 전공하는 학문, 특히 과학이나 또는 자신이 받아들이는 종교의 모습에 구애받지 말고, 서로 다른 문화, 다른 생각들을 어떻게 상호 이해하고 초월하며 수용해야 하는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함께 걱정하는 것이 현재를 숨쉬고 있는 이 시점에 필요한 화두의 하나가 아닐까?
[과학이 하느님을 노래할 때] 우주를 창조한 물리법칙?
21세기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린다는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이 최근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라는 책을 출판하여 과학계와 종교계를 비롯한 지성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우주는 중력이라는 물리법칙에 의해 만들어졌지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호킹 박사의 무신론적 주장은 종교계를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그의 주장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선 오만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책의 진지한 내용보다는 언론에서 표제로 사용하는 제목이 더 문제인 것 같다. 영국의 ‘더 타임즈’가 그랬듯이 우리나라의 모 일간지도 “스티븐 호킹, ‘우주는 신이 아니라 물리학 법칙이 만들었다.’” 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려 했다.
‘어떻게’와 ‘왜’
가톨릭 사제인 나는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대학원에서 이론물리학(입자물리)을 전공했기에 여러 과학도들과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이 있었다. 나도 그랬지만 막상 자연과학자들은 성경이나 신앙의 진리와 과학적 진리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 않는다.
흔히 과학은 ‘어떻게(how)’라는 물음으로 자연세계의 현상들에 관해 연구하고, 종교는 ‘왜(why)’라는 질문으로 세상과 인간의 의미에 관해 탐구하기에,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고 단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진리에 접근해 간다고 한다. 그 반대는 있을지언정 과학자들은 보통 자신들이 탐구하는 과학적 진리의 범위를 종교적 또는 철학적 진리의 범주와 혼동하지는 않는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관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정리한 이언 바버(Ian Barbour)라는 학자는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이라는 네 가지 이론 유형으로 둘 사이의 관계 양상을 분류했다.
‘갈등이론’은 과학과 종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서 양 극에 각각 성서 문자주의와 과학적 유물론이 있다.
‘독립이론’은 종교의 교리나 과학적 주장은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기에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두 가지 언어로 취급되지만, 각각 이 세계에 대한 상호 보완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곧 종교와 과학이 서로 다른 영역을 다루기에 그 경계를 넘지 않는 한 서로 충돌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대화이론’에서는 연구 영역의 한계에 이르러 과학 자체가 답할 수 없는 극한 질문들이 제기될 때 비로소 종교와 대화가 가능해질 수 있고, 아울러 특정 과학 이론과 종교적 믿음 사이의 개념적인 유사성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관한 더욱 깊은 이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 ‘통합이론’은 말 그대로 과학과 종교 간의 좀 더 체계적이고 폭넓은 동반자 관계를 찾아 두 원리의 긴밀한 통합을 모색한다. 현대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업적을 바탕으로 기존의 교리적 체계와 사고 구조를 재정립해 나가려는 노력이 신학자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갈등이론
이러한 분류를 적용해 보면, 호킹의 책은 분명 갈등이론에 속한다. 그는 책을 시작하면서 이전에는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제기할 만한 질문들을 제기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우주는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 실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모든 것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과연 이 우주는 창조주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통상 이러한 질문들은 철학에서 상대해 왔지만, 현대의 과학 특히 물리학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한 철학은 이미 죽어버려 더 이상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줄 수 없기에, 이제는 오직 과학자들만이 지식을 추구하는 인간의 탐구에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다고 선언한다.
우주의 신비를 더 깊게 이해하려면, 우주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왜 무(無)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을까? 왜 우리가 존재할까? 왜 다른 법칙들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등의 생명과 우주에 관한 ‘왜’의 질문을 과학자들도 상대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런 ‘어떻게’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창조주가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끝이 없고 시간적으로도 시작과 끝이 없는 우주 그 자체에서 찾는다.
하지만 나의 견해로는 호킹 자신도 “위대한 설계”에서 대답하고자 하는 ‘왜’도 결국은 ‘어떻게’를 수사학적으로 ‘왜’라고 쓰고 있을 뿐 의미에 대한 질문인 ‘왜’에 대하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교황청과 호킹 박사 사이에 전해지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1981년 바티칸에서 현대 우주론에 관한 학회가 열렸는데, 그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자연과학자들이 우주의 근원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지만 늘 해결되지 않는 질문, 곧 궁극적 미해결점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질문이 요구하는 것은 물리학이나 천문학적 지식이 아니라, 이를 초월한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진리일 것이라 믿습니다.”
곧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은 과학자들의 몫이지만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종교인들이 고민할 문제이니 과학자들은 입을 다물라는 뜻이 담긴 말씀이셨다.
호킹은 이 학회에서 기조강연을 했는데 교황님을 알현하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했던 강연의 주제가 우주에는 시초나 창조의 시기가 없었을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음을 교황님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신다는 것을 아주 다행으로 여기고 기뻤습니다.”
“위대한 설계”를 통하여
호킹은 앞에서 ‘왜’라고 제기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우주의 양자역학적 본성을 바탕으로 탐구한다. 양자역학적 본성은 필연적으로 불확정성 원리를 수반한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하나의 물리량이 정확하게 측정되면 다른 하나는 필연적으로 덜 정확하게 측정될 수밖에 없다. 공간이 비어있다는 것은 장(場)의 값과 그 변화율이 둘 다 정확히 0이 된다는 말인데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빈 공간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양자역학적인 무(無)는 가상의 입자쌍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양자적으로 요동치고 있는 진공이라는 최소 에너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양자요동에 따라 양자역학적인 무(無)의 상태로부터 무수히 많은 미세한 우주들이 창조되고 소멸될 것이다.
이들 미세 우주들 중 일부는 임계점을 넘어서 각자 다른 물리법칙을 갖는 어떤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발생적으로 탄생한 수많은 ‘어느’ 우주들 중 하나는 급팽창을 겪고 별과 은하를 만들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양자요동의 산물인 셈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물리계의 초기 조건이 미리 주어진 상태에서 예측되는 미래는 결국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과정으로서, 모든 역사의 경로를 따라 서로 간섭을 일으키며 최종 상태에 이른다. 이에 따르면 우주는 단순히 하나의 과거나 역사만을 갖지 않는다. 이로부터 호킹은 “이 역사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이 측정되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존재한다. 역사가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을 통해서 역사를 창조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끈 이론’에 바탕을 둔 일종의 네트워크 이론인 ‘M-이론’을 들어 물리법칙에 따라 지배되는 우주 창조, 곧 자발적 우주 창조를 설명한다.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있는 이유,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자발적 창조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우주의 운행을 시작하려고 신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는 우주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된다. 이 우주는 철저히 물리법칙에 의존해 만들어지는 세계인 것이다.
“위대한 설계”를 통해서 호킹이 근원적인 ‘왜’라는 논의를 과학의 영역에 끌어오려 시도하지만 결코 성공하지는 못한 듯하다. 과학적 인식 체계를 통해 과학이 ‘왜’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하지만, 결국 그가 상대하는 ‘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의 왜곡된 표현일 뿐이다.
갈릴레오 시대의 과학과 종교의 갈등을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둘 사이의 마찰은 제도적 교회가 진리를 독점해서 사회에 일방적으로 제공하려는 역할을 하려 했기 때문에 빚어졌을 것이지만, 그만큼 종교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온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과학이 진리를 독점해서 사회를 통제하는 시대가 왔나 보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시소놀이라고나 할까, 이 과정은 마치 한 어린이가 차츰 성장하면서 조금씩 나름대로의 상식과 진리의 범주가 확대되어 가고, 나름대로 어릴 때 지닌 신화적 요소들을 배척하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단순하고 유치하게 보였던 그 신화적 요소들이 다시금 다른 의미로 파악되고 이해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롭게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 속으로 융화되는 과정과 비슷할 것이다.
신학자들은
진리에 대한 인식도 역사의 흐름 안에서 과학과 문화가 확대되면서 차츰차츰 변하게 된다. 다른 체계의 진리와 다른 차원의 도덕적 개념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고립된 가치와 진리의 체계에서 벗어나고, 그러면서 더 확실하게 자신이 위치한 진리의 범주를 알게 되고 더 분명하게 새로운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신앙의 진리와 실증 과학이 밝혀낸 진리는 결코 모순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 대중들이 철학적으로 세련된 진리관을 가지기를 요구할 수는 없다. 과학적 입장과 새로운 정보는 우리가 지닌 가치관과 세계관을 수정하도록 요구한다. 하지만 어떤 새로운 과학적 정보가 인간의 삶에 즉각적이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신학자들은 좀 더 진지한 인내심과 노력으로 새로운 과학적 증거들을 이해하고 성찰하면서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느님에 관한 의미들을 밝히려 애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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