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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심리 칼럼] 마음 다스리기
다른 데서도 종종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전에 신학교에 있을 때 매달 신학생을 면담했습니다. 그런데 학기 시작과 마치는 면담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내용이 있죠. 바로 영성 생활에 관한 내용입니다.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많은 학생이 ‘이번 학기에는 영성 생활에 더 마음 써야겠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학기를 마치면서는 ‘이번 학기에도 영성 생활에 소홀했다.’라고 반성을 많이 하죠. 늘 반복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새해가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새해를 맞아 세우셨던 결심을 잘 지키고 계시는가요? 하느님과 함께, 올 한 해 기쁘게 영성 생활을 해 나가야겠다는 다짐도 잘 세우셨나요?
하느님을 향한 갈망과 복음 말씀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늘 있는데, 왜 잘 안될까요? 하느님을 닮고 싶고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자기 모습을 돌이켜 보면 늘 부족한 것 투성이고 제대로 못사는 모습만 잔뜩입니다. 왜 늘 반복일까요? 영성 생활이 뭔지 잘 몰라서 어렵기도 하지만, 때론 잘 아는 데도 왜 그대로 살기가 어려울까요?
심리학을 ‘동기의 학문’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내가 왜 그렇게 선택하고 행동하는지, 생각과 달리 내 마음은 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그 이유와 동기를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라는 뜻이지요. 심리학 하나로 모든 생각과 행동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도움되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심리학적 지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영적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일상생활과 영적인 삶이 별개가 아닌 하나의 삶이기 때문에도 그렇거니와, 일상생활이든 영적인 삶이든 그 삶을 사는 이는 같은 ‘나’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적인 삶에는 성령의 이끄심과 은총의 작용이 더 분명히 드러나지만, 심리학적 지식을 통해 영성 생활을 잘해 나가기 위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도 ‘심리를 통하는 영성’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이지요.
앞으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 볼 요량입니다만 먼저 도움 될 말씀을 하나 드린다면, 많은 경우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어보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일상생활에서든 영적인 삶에서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속상하고 힘들 때, ‘내가 정말로 바라는 것이 뭐였지?’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라고 물어보고 기도 안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면, 출렁이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내가 정말 바라면 좋을 것, 주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주신 것을 찾게 될 마음이 생기죠.
새해 첫 달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또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올 한 해 정말 얻고자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영성심리] 숨은 하느님 찾기
‘영성과 심리’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영성은 곧 하느님과 함께 있는 삶이며 따라서 각자의 삶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영성’이라는 말의 뜻을 잘 몰라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말뜻을 잘 몰라도, 이미 영성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니까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영성을 살아가는 것, 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도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내가 알든 모르든, 혹 때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더라도 어쨌거나 나는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죠. 이것이 영성 생활의 기본입니다. 둘째는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차리는 것’, 셋째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식별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영성이 무언지 잘 모르더라도,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나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지금 나의 상태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는 영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로마 8,5-17 참조)
그런데 이렇게 영성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바라지만, 우리 마음이 뜻대로 안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움직임 중에 자주 만나게 되는 걸림돌이 바로 죄책감과 죄의식입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죠.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숨게 만드는 그릇된 죄책감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다가가게 만드는 건강한 죄책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의 움직임 자체’와 ‘마음에서 비롯된 행위 자체’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구별을 잘하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을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도요.
한 해 동안 주보에 연재했던 내용을 정리해 봤습니다. 어떠세요? 나누어 드린 글이 여러분이 영성을 살아가시는 데에 도움이 좀 되었을까요? ‘아직도 영성이 뭔지 잘 모르겠다.’ ‘영성을 살아간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않는다.’라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맨 처음부터 말씀드렸다시피,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영성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 분이라면 더 그러하시죠.
올해 영성 생활을 잘 못하며 살아왔다고 자책하기보다, 지나간 시간, 기억나는 사건들 안에 늘 계셨던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나와 함께 계셨으니까요. 나와 함께 하셨고 나의 행복을 바라셨던 숨어 계신 하느님을 더 많이 만날수록, 우리 마음에는 감사함이 저절로 우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2023년 한 해를 마무리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며 영원토록 당신 이름에 영광을 드리렵니다.”(시편 86,12)
[영성심리] 마음의 심폐소생술
영성을 살아가는 삶의 모습으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그것을 방해하는 그릇된 죄책감과 죄의식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건강한 죄책감을 만나려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비뚤어진 애착’과 ‘애착에서 비롯된 행위 자체’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드렸죠. 결국, 마음과 연결된 문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 순간 마음의 움직임을 경험합니다. 기쁘고 좋을 때도 있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죠. 밝고 선한 마음은 우리를 건강한 생각, 선한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큽니다. 반면에 어둡고 악한 마음은 우리를 왜곡된 생각, 그릇된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힘이 크죠.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일의 시작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심리학의 용어로 표현하면, 외부의 자극에 대해 우리 안에 먼저 ‘정서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 정서 반응에 더해서 자극에 대한 해석, 기억, 판단 등의 ‘인지 작용’이 이어지죠. 인지 작용은 다시 새로운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 반응과 인지 작용에 ‘의지와 태도’라는 일종의 경향성(습성)이 합쳐져 실제로 구체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자유롭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현세에서 경험하는 구원의 상태죠. 이런 하느님의 바람을 따라 우리 스스로 행복하려면, 먼저 우리 마음을 돌보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행동이 마음의 충동이나 애착을 무턱대고 따라가지 않게 하려면,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잘 다독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부족해 아파하는지를 들어주는 것이 먼저라는 의미입니다. 마음 돌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일상의 삶과 하느님을 생각하는 ‘영적인 삶’을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내 안에서 요동치는 여러 힘든 마음(자책감, 무력감, 실망, 외로움 등)은 별개이고, 하느님 앞에서는 찬미와 감사, 기쁨 등을 ‘마땅히’ 느껴야 하는 마음으로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또 되지 않으니, 다시금 스스로 탓하게 되죠.
처음부터 말씀드렸듯, 영성은 삶이고, 우리 삶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심리’입니다. 심리 차원을 잘 돌보지 않고서는 하느님과의 참된 영적 삶으로 온전히 나아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떠세요? 나의 마음을 잘 돌보고 계십니까?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
[영성심리] 이런 것도 죄가 되나요?
고해소에 있다 보면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어떤 일을 이야기하고는 마지막에 “그런데, 이런 것도 죄가 되나요?” 하는 물음이죠. 때로 “저는 고백할 죄가 없어서 성사를 안 봐요. 그래서 판공 때마다 성사 보는 것이 힘들어요.” 하는 분도 계십니다.
죄란 무엇일까요? 로또 1등에 당첨되기를 너무나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주 복권을 사고 추첨일을 기다리죠. 주간 내내 기다리다가 추첨일이 되면 초조한 마음에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추첨 상황을 지켜보고, 당첨되지 않으면 너무나 실망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복권을 사러 가죠.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이렇게 사는 모습을 생각할 때 어떤 마음이 드세요? 복권을 사는 것이 범법 행위는 아닙니다. 죄가 아니죠. 하지만 복권에 빠져들어 하루 종일, 주간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지낸다면, 그래서 희망하고 실망하는 것을 계속 반복한다면 참 안타까운 일일 터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또는 내 자녀가 이러고 있다면 어떨 것 같으세요? 그 모습을 보는 마음이 너무 안타깝고 속상하지 않을까요? 복권 사는 것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행복하지 않을 그 삶이 안타까워서 복권 사는 것을 말리지 않을까요? 복권에서 자유로워지라고 그를 설득하고 계속 방법을 찾지 않을까요?
죄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교회에서 가르치는 죄의 실체는 분명합니다. 또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 안에 자연스레 일어나는 감정 자체와 그 감정을 따라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 사이의 구별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죄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행복이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선택에서 오는 행복은 물론 아닙니다. 자신에게 집중하여 나만 챙기고 위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 모습으로’(창세 1,26 참조) 창조되었고, 하느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할 때 참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삶을 마무리하시는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일종의 유언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계명을 주신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 각자가 행복하기를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바라십니다.
죄 이야기로 돌아가면, 결국 자기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행복하지 못한 나의 모습을 보고 속상해하시는 하느님께, “하느님, 이런 저를 보면서 많이 속상하셨죠? 당신 마음을 상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하고 말씀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죄가 되는 행위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나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깊이 알아듣는다면, 지금 나의 선택과 행동이 죄인지 아닌지를 식별하기가 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영성심리] 건강한 죄책감을 위해 구별하기
어느덧 가을을 기다리고 있지만, 올여름은 유난히도 더웠습니다. 매일 밤 열대야가 계속되던 때도 있었지요. 더위에 밤잠을 설치고 난 다음 날이면 낮에도 정신이 몽롱합니다. 사무실에서도 멍하니 있기 일쑤고, 쉬고 싶은 마음만 자꾸 듭니다. 이런 마음이 든다면 잘못일까요? 근무 시간임에도 업무에 성실히 임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들어야 마땅할까요?
여러 일로 정신없이 바쁜 날이 있습니다. 일정이 겹쳐서 점심도 못 챙기는 날이죠. 늦은 오후가 되면 배가 고파 옵니다. 회의 석상에 앉아있지만, 머릿속엔 자꾸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릅니다. ‘식탐’일까요? 회의 시간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잘못된 모습일까요?
오랜만에 동창 신부들을 만났습니다. 본당에서 했던 사목 활동이 좋은 열매를 얻어서 이 내용을 동창들과 나누고 내심 자랑도 하고 칭찬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동창 한 명이, 그 활동은 본인이 이미 몇 년 전에 했던 것인데 그걸 이제서야 했느냐며 저를 놀립니다. 뿌듯했던 마음이 초라해지고 무시당한 느낌과 함께 그 동창에게 서운한 마음, 미운 마음이 듭니다. 고해성사 때 고백해야 할 죄일까요?
앞서 그릇된 죄의식과 죄책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계명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보면서 곧바로 죄의식과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죄를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1849항)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자체와 그 애착 때문에 ‘사랑을 저버리는 행위’ 사이의 구별입니다.
열대야로 잠을 설친 다음 날, 몸이 피곤해서 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쉬고픈 마음 자체와, 그래서 말없이 자리를 비우거나 사무실 문을 닫고 잠자는 ‘행위’는 다릅니다.
점심을 굶어 회의 시간에 음식 생각이 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식욕을 느끼는 것 자체와, 그래서 회의 시간 내내 내용에 집중하지 않고 음식 생각만 계속하는 ‘행위’는 다릅니다.
동창 신부에게 무시당한 느낌에 상처받고 서운한 마음, 미워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충분히 자연스러운 움직임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 자체와, 그래서 동창 신부에게 화를 내거나 꽁한 마음으로 앙심을 품고 간직하는 ‘행위’는 다릅니다.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자체와 그 애착 때문에 ‘사랑을 저버리는 행위’ 사이의 구별, 바로 건강한 죄책감을 얻는 데 필요한 중요한 구별입니다.
마음이 빗나간 자도 제 행실의 결과로 채워지고 착한 사람도 제 행동의 결과로 채워진다.”(잠언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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