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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6-12
약속의 성취! / 홍정길 목사
어렸을 때 여러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마음의 영웅을 바꿔가며 그 분들을 표상으로 삼으며 많은 꿈 을 꾸었었습니다. 지금도 젊은 사람 들이 제게 읽을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반드시 읽으라고 권하는 책 중 의 하나가 <플루타크 영웅전>입니 다. 동양의 영웅전하고 조금 다른 것은 그 영웅들의 객관적이고 사실 적인 기술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영웅들의 약점까지 잘 기술해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우리 나라의 이순신 장군에 대 해서는 자신이 없는 것이 이순신 장 군의 기록에는 약점은 전혀 없습니 다. 그렇니까 참 존경스러운데 어디 서부터 존경해서 어디로 끝나야 될 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와 너무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순신 처 럼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잘 모릅 니다. 여기에 비해서 성경의 인물들 은 잘한 것 뿐만 아니라 잘못한 것 까지 낱낱이 기술했기에 우리에게 친근한 인간상으로 다가섭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경의 인물 중 제가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사모하고 사는 한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분은 갈렙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이 이름은 잘 들어볼 수 없는 이름입니다. 성경에도 그 이름이 기술된 것은 10회 미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기록 속에서 그 사람이 보여준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 때문에 언제 부터인가 제 마음의 진정한 영웅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갈렙은 믿음의 사람이었고 그 믿음의 약속의 성취를 자기 발로 밟고 산 사람 이었습니다.
45년 전 가데스바네아에서 였습니다. 열 두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복지에 스파이로 들어갔다 왔습니다. 그들이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할 때 10명의 정탐꾼이 회중들에게 말합니다.
"정말,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축복의 땅입니다." 그리고 '아멘' 했으면 끝났는데, '그러나' 가 붙었습니다. '그러나'가 늘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는 불 신앙입니다.
"그 땅의 성은 하늘까지 찔렀고 그 땅 거민은 얼마나 장대한지 그 앞에 우리가 서 보니까 메뚜기 같더이다. 하물며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얼마나 하챦게 보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의 전 회중들은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울면서 그들은 외칩니다. "우리에게 애굽에 묻힐 땅이 없어서 여기까지 데려와서 죽이려고 했던가?" 이제 일주일이면 들어갈 그 복된 땅 앞에서 그들은 방성대곡 했습니다. 이 때 믿음의 사람, 갈렙은 "아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반드시 저들을 이길 수 있다. 정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원망하면서 돌로 이 믿음의 사람을 치려고 덤벼듭니다. 그 때 믿음의 사람 갈렙은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반드시 저들을 이길 수 있다. 놀라지 말라. 두려워말라.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믿음으로 취 하자." 외쳤습니다.
45년이 지났습니다. 자기를 메뚜기로 믿었던 사람들은 이곳 저곳 광야를 뛰어다니면서 메뚜기처럼 흩어져 다 죽었습니다.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사람, 갈렙은 믿음대로 지금 산지에 우뚝서서 그 땅 분배의 첫 번째 영광의 특혜자로 서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11:1) 우리에게 있는 살아있는 믿음은 앞으로 10년 후를 오늘처럼 살 수 있고 영원한 천국 생활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게 만듭니다. 믿음에는 이런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아직 당도하지 않은 일을 우리는 믿음으로 살 수 있단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청년 때 잘 믿었던 사람이 장년 때 바빠서 믿음을 파산한 사람을 많이 봅니다. 장년 때까지 교회 봉사를 잘하다가 교회 직책을 그만두면서부터 믿음의 결격사유가 생겨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이 인정해줄 때는 혼자 믿는 것처럼 힘차게 살더니 사람들이 자기를 주목해주지 않으면 그 믿음이 안개처럼 사라져버리는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메뚜기로 믿었던 사람은 메뚜기 처럼 그 생애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신뢰했던 사람은 산지에 우뚝 서서 그 산지의 풍요를 평생 누렸을 뿐 아니라 지금 그 땅에 당도해서 영광을 붙잡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도 천국에 입성해서 천국의 부요와 천국의 평안과 천국의 영광스러움을 반드시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땅에서 구속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고 천국의 백성된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도 천국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고통, 이 땅의 아픔, 이 땅의 어려움에 함몰 당하지 않는 인생을 삽니다. 이것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그런데 때로 이 약속의 성취의 믿음을 생각하면서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다해주신다."고 손발을 다 묶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갈렙의 믿음은 확실한 약속을 믿은 열정이 담긴 믿음이었습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예수믿으면 나약해집니다. 예수 믿으면 선한 생각을 갖습니다만 그 선한 생각이 어려움을 당할 때 쉽게 무너지는 창백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 악을 이루기위해서 수단, 방법, 모든 것을 가리지 않고 자기 생애를 쏟는 열정을 다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악착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선착같다는 말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열정을 쏟아야될 것인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에게 지지않는 것으로 끝나면 안된다. 선으로서 악을 이겨라."(롬12:21) 믿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미워할 때 내가 그 사람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정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까지 하라고 말합니다.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돌로 치려할 때에도 갈렙은 하나님의 위엄이 무너진 것을 보면서 자기 옷을 찢으며 "아니라,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싸움에서도 열정을 다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약해지고 실패해서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신앙이라는 그늘 속에 자기를 숨기려고 드는 유약함을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믿음은 경제 원칙과 다릅니다. 경제 원칙은 최소의 투자를 해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마지막 결과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과정에서 정말 열정을 쏟았는가입니다. 젊은 목회자들을 볼 때도 열정이 없는 창백한 목회자를 보면 답답합니다. 나를 다 쏟아버릴 정도로 열정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 그것이 낭비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사건의 한복판에 계신 주님 앞에는 아무리 많은 것을 쏟아 부어도 잃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낱낱이 기억하십니다. 허실되는 것이 없습니다.
20세기 후반에 위대한 이름 하나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헨리 뉴엔이라는 사람입니다. 예일대학 철학과 교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정신 박약아들을 보면서 '내가 가르치는 고담준론(高談 峻論)의 멋진 이론들이 이 장애아로 태어난 아이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들의 고통앞에 무엇인가 사물을 논리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그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예일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정신박약아 몇 아이들과 함께 나머지 생애를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바보같은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 좋은 학문을 버리고 그 몇 아이에게, 아무리 가르쳐도 개선의 여지가 없는 아이들에게 인생을 쏟는 것이 낭비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몇 아이만 평생 품에 안고 살다가 제작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확신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넘버로 만 남을 거예요. 요한 바오로 나 비오 11세, 그 사람도 열한 번째라는 넘버 밖에 없습니다. 이 분도 똑같은 신부입니다. 그러나 천 년이 지나가도 백년이 지나가도 헨리 뉴엔이라는 이름은 사람들 마음 속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계속 깨우치고 가르칠 것입니다. 낭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열정을 쏟는 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투드라는 영국의 백작,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중국의 내지 선교사로 가서 선교의 일을 감당 했었습니다. 그리고 선교 텀(term) 을 마치고 돌아와서 자기 가문의 일을 보기 시작하다가 하나님께서 "스투드, 내가 너를 통해 아직도 할 일이 있다." 하십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까 아프리카에 복음을 전할 일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 내지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를 모집하러 이곳 저곳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스투드, 네가 가면 안되겠니?" 묻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제가 젊은 날에 한 텀을 끝낸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니, 그리고 나이가 벌써 54세 아닙니까?" "그래서?" "알았습니다.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54세에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납니다. 옆에 있는 친구들이 만류하면서 "스투드, 그것은 너무 큰 희생 아닌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화를 벌컥 내면서 "큰 희생이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큰 희생이라는 것이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회복해야될 것 있습니다. 열정을 가져야 겠습니다. 선의 의지가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 하나님께서 주시는 목표에 내 생애를 쏟아부어 놓을 열정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 남서울은혜교회 성도들만이라도 이 땅의 장애인들을 위해서 열정을 바친다면 또, IMF로 실직당한 무수한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우리의 열정을 쏟는다면 그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을지라도 전능하신 주
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영광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밀알 학교가 여기까지 지어지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설명 못할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고통스러워서 도무지 잠 못 잘 밤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마다 주의 성령께서 마음 속에 얼마나 큰 열심을 다시불러일으켜 세워주셨는지, 그 결실로 이 건물이 우리 주님 앞에 드려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열정을 수반합니다. 어떤 불가능도 열정은 도전합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태에도 절망하지 않는 열정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바로 믿음의 역사입니다. 또 이 믿음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을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고 ' 독불장군'으로 '내가 믿음 가졌으니까, 나 외에는 하나님 사랑 받는 사람이 없다'고 착각하는, 간혹 잘못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믿는 사람들 중에 내 의견만 옳고, 내 믿음만 믿음이고, 내 봉사만 봉사고, 다른 사람 봉사는 봉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음으로 불러서 사용하신 것 처럼 그 형제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부르셔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부르신 그 부름, 그것은 내게 국한된 일입니다. 그것을 철저하게 알았던 사람이 바로 갈렙입니다.
여러분, 두 시대가 있습니다. 모세의 시대와 여호수아의 시대입니다. 모세는 어떤 사람입니까? 당시의 최대 강국, 문명의 5대 발상지 중의 하나인 이집트, 그 거대한 나라가 막대기 하나든 모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 앞에 역사상 한번도 없었던 바다가 갈라지고 고속도로를 놔주어서 육지처럼 건넜던 능력의 사람, 기적의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그 앞에 쓴 물은 단물로 바뀌었습니다. 그 앞에서 반석은 샘물을 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에 병참기지를 두어서 움직일 때마다 하늘에서 식량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해준 민족의 지도자는 역사상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가면 원망이고 두 걸음 가면 불평이었던 것이 모세 시대의 백성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모세의 시종이었던 보잘 것 없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있었을 때에는 단 한번의 불평도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그것은 열쇠는 갈렙에게 있었습니다. 갈렙은 전 민족 앞에서 "좌로 가자" 그러면 반 이상은 그를 쫓을 만큼 영향력이 컸던 사람입니다. 그가 옷을 찢으면서 하 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을 꾸중하고 나갈 때 여호수아는 오히려 그의 등 뒤에 가만히 서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니까 그 뒤에 굳건히 서서 여호수아가 지도자 되는데 자기 생애를 쏟고 있는 갈렙을 봅니다. 그는 지도자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지도자를 배출해낼 줄 아는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호수아는 어쩌면 큰 거인 갈렙이 껴안아서 굳건히 세워놓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 갈렙,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믿을 줄 아는 사람이 었고 하나님께서 세워놓은 지도력을 충성으로 뒷받침했던, 사람을 키울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이것은 이와 같습니다.
저희 9남매의 위계질서가 상당히 분명합니다. 그런데 동생들이 맏형인 저에게 순종을 잘할 수 있었던 시작이 어디냐면, 제 바로 아래 동생, 지금 볼티모어에 살고 있는 둘째가 어렸을 때부터 제말이라면 그렇게 순종을 잘 했어요. 그러니까 그 다음 동생들은 군기가 잡히더라구요. 사실, 모세는 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의 영광을 시기했습니다. "모세, 너만 하나님께 영광 입었는냐?" 또 그의 형 아론은 동생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평생 반역의 기회 만 있으면 반역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뒷받침하지 않으니까 원망과 불평의 마음들이 계속 번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갈렙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같이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인물로 안 볼 수 있습니다.
"야, 내가 돌에 맞아 죽으려고 앞서 나섰을 때 너는 내 뒤에 서 있는 놈 아니었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도력으로 세우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면 그것이 옳다. 그리고 나는 그 분을 섬기고 그 분이 위대한 지도력을 행사하는 데 뒷받침 해야될 책임이 있다."하고 지도자와 함께 똑같이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시대 한국 교회에 필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갖춰야될 덕목입니다. 조금만 능력 있으면 다른 사람 능력을 멸시하기 좋아하고, 조금만 기도 잘하면 기도 못하는 사람을 깔보고, 조금만 성경을 많이 알면 성경 모르는 사람을 깔아 뭉개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모든 것으로 다른 사람을 높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드러내는데 전심전력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여호수아를 큰 이름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민수기에 보면 "여분네의 아들 갈렙,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나를 전심으로 쫓았은 즉..."(민 32:12)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순서대로 말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나를 청종하였은즉"이라고 순서를 바꾸어 놓습니다. 하나님의 소중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주께서 어디로 어떻게 부르셨는지 모릅니다. 그 부르심 앞에서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을 힘껏 뒷받침하는 갈렙의 믿음이 우리 속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칠줄 모르는 진취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85세라고 그랬습니다. 그 때는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아야될 때입니다. 그런데 모든 땅을 분배할 때 보면 다른 사람들은 이미 얻은 땅을 나눠받는 데 갈렙은 제일 앞서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헤브론을 달라고 합니다. 헤브론은 거인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함께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를 기뻐하시면 반드시 그것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에게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입니다. 그분이 나를 기뻐하시면 입니다. 어떤 것을 달라고 해도 여호수아는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이 겁을 내는 그 땅을 달라고 노년에 자기 생애를 힘껏 경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쉬운 것을 좋아합니다. 안일에 자리를 펴고 눕기를 좋아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려운 땅을 달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여러분,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설교자가 설교했던 제목을 생각했습니다. "나이 많은 젊은이, 갈렙" 그런 제목으로 설교를 했더라구요. 제가 이 말에 공감했던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28세 되었을 때 C.C.C.총무하면서 전국 민족 복음화 운동의 실무를 맡아 책임질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 어른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박사를 만났습니다. 그분이 72 세 될 때였습니다. 제가 그분과 한 두 시간 이야기 해보고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왜냐면 젊디젊은 저는 다 늙은 할아범이고 그 분은 16세된 소녀더라구요. 사실 저는 멍청해서 웬만하면 열등감을 별로 안느끼고 삽니다. 내게 주신 은혜만 해도 풍성한데 뭘, 누굴 보면서 열등감을 느끼고 삽니까? 그런데 그 분의 설레는 가슴, 주님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 그리고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꿈, 마지막 순간까지 경주하는 그 열정을 보고 '야, 참 부럽다!' 싶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믿음이 나이가 가면 갈수록 더 청청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 분 중의 한 분이 김용기 장로님이십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자신을 농사꾼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어른은 여기서 땅을 개간하다가 그 땅이 기름져서 다른 사람이 살만하면 또 다른 곳에 가서 땅을 개간했습니다. 이것을 서너 차례 하니까 아들들이 모두 도망갔습니다. 언젠가 김용기 장로님께 물었습니다."장로님 생애 중에 어느 때가 가장 고통 스러웠습니까?" 그랬더니 그 어른이 그러시더라구요. 황산에 농군학교를 개척할 때라고 합니다. 그래도 믿을만한 큰 아들은 군대갔고, 지금 김종일 목사입니다. 아내는 왜 살만하면 또 이렇게 황량한 땅에 와서 개간을 해야 하는가 하고 불평을 하고 둘째 아들은 집을 도망나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내는 계속 불평하지요. 그리고 의지했던 아들은 도망갔지요. 주민들은 이상한 영감쟁이 왔다고 욕하고 비난하지요. 데리고 있었던 모든 일꾼들이 다 흩어져서 혼자 곡갱이를 잡았답니다.
"어떻게 이기셨습 니까?" 여쭈니 '하나님께서 나를 농삿군으로 불러주셨으니까 이것은 내가 이탈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곡갱이질 하면서 그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곡갱이질 하는 이 순간에 내 목숨을 거둬가 주소서. 내 아내도 이해 못하는 이 일, 내 아들은 싫다고 도망간 이 일, 나도 싫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왜 이 곳으로 부르셨습니까?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둬가소서." 새벽 4시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느날 울면서 다섯 시간, 여섯 시간 기도 하고 있는데 아침 한 9시 쯤 뒤에서 울음 소리가 들리더래요. 눈을 떠보니까 도망갔던 아들이 자기 아버지가 기도하는 뒤에서 울고 있더랍니다. 그 아들을 껴안고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른답니다. 그 때가 인생의 큰 고비였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도 그 분은 또 이 땅이 개간되면 또 다른 땅을 찾아갔습니다. 그 분이 마지막 원주의 신림에서 그 생애를 마칠 때까지 계속 개간하시다가 주님 앞에 갔습니다. 그 분은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한국 100년 역사에 사람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라면 저는 주저함 없이 이 어른을 꼽습니다. 그 분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참으로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그 분입니다. 그 분만 계시면 안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서 만나뵈어도 얼마나 많은 꿈에 젖어있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남서울교회에서 그 어른을 모시고는 집회를 하니까 "홍 목사, 지금 원주의 신림에 개척하고 있는데 한 번 오게. 홍목사 오면 나도 한번 못간 가까이에 있는 단양의 고수동 굴을 같이 갈테니까." 그 어른이 저 때문에 고수 동굴도 못가시고 세상을 뜨셨어요. 여러분,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새로워지는 인생, 시편 103편은 이런 인생을 노래합니다.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5) 날마다 새로운 인생 말이에요. 늙음에 함몰 당하지 않은 인생 말입니다. 우리 주께서 주신 사명을 향해서 더 큰 열정을 바치는 인생을 갈렙은 살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갈렙처럼 주께서 주신 믿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천국이 가슴에 있어야 됩니다. 이 땅에서 그 천국을 가슴에 누리고 사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10년 후에 하나님께서 내 생애를 향해서 놀라운 계획을 펼치실 것을 믿으십니까? 10년 후에 나를 붙잡아 사용하실 것을 지금 내가 믿고 그것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어느날 우리는 그 땅에 도달할 것입니다. 갈렙 처럼 그 복지에 서서 가는 도중에 사람들을 키우고 섬기면서 사람들과 함께 동렬의 믿음으로 나아가되 늙음에 정복당하지 않고 육체적인 나이를 넘어서서 청춘처럼 독수리같은 삶으로 믿음이 날마다 펼쳐나가는 능력의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인생으로 성도들의 삶을 축복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