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사와 유관순, 그리고 인천 여성
발간일 2021.03.11 (목) 13:32
인천의 아침 - 칼럼
신문사에 근무하던 2015년, 초로의 남자가 자료를 잔뜩 들고 찾아왔다. 하란사란 여성 독립운동가의 친정 조카손자라고 소개한 그는 “고모할머니의 성은 하 씨가 아닌 김 씨이며, 본관도 김해가 아닌 전주인데 잘못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의 주장대로 기록이 중구난방이었다. 몇 차례에 걸친 보충 취재 뒤 이듬해 초 특집 기사를 출고했다. 6년이 흐른 지난 2월, 그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행정안전부, 국가보훈처 등 정부 부처와 포털사이트 등의 기록을 바로잡고 훈장도 새로 받았다고 했다.
1872년 평양 출신인 김란사가 인천에 정착한 때는 1893년 인천별감 하상기와 결혼하면서다. 이때 김란사의 남동생이 함께 중구 유동 2번지에 뿌리를 내렸는데 제보자 김용택(74) 씨는 남동생의 친손자로 인천 사람이었다. 김란사 일가는 지금도 인천 시민으로 살고 있다.
김란사는 교육을 향한 열정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결혼 이듬해인 1894년 김란사는 이화학당을 찾아간다. 공부를 하고 싶다는 김란사를 마주한 미국 선교사 출신 룰루 프라이 학당장은 그러나 입학을 불허한다. 금혼 학칙에 따라 미혼이어야 하는데 김란사는 기혼인데다 딸(하원옥)까지 있던 터였다. 김란사는 이때 하인이 들고 있던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며 “우리가 캄캄하기를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습니다. 어머니들이 무언가 배우고 알아야 자식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호소, 마침내 학당 학생이 된다.
그로부터 21년 뒤 유관순이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생으로 들어온다. 김란사는 이때 이화학당 총교사(교감)로 재직 중이었다. 학생자치단체 이문회以文會를 이끌던 유관순에게 스승은 “조선을 밝히는 등불이 되어라”며 독립의식을 심어준다. 스승의 가르침을 깊이 새긴 유관순은 열사가 되어 마침내 ‘3·1운동’의 횃불로 훨훨 타올랐다. 국가와 민족의 등불이 되어 암울한 조국을 밝히고자 했던 김란사는 1919년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김란사와 함께 인천에선 여성들의 독립운동 활약이 적지 않았다. 3·1운동 당시 김유의와 조인애는 강화도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강화 출신 권애라는 개성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인천 출신 최선화는 1936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지원했고,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신포동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천주교, 기독교, 성공회 등 1883년 개항을 전후해 들어온 서양 종교는 여성들에게 전근대적 차별과 핍박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다. 선교사들은 교리 전파와 함께 신식 교육을 병행했는데 룰루 학당장처럼 신식 교육기관의 책임자는 대부분 선교사였다. 가부장적 남편과 혹독한 시집살이 속에서 사랑과 평등을 이야기하는 서양 종교에 여성들은 동화된다. 강제합병 이후 인천을 병참 기지화하며 악랄한 탄압을 자행한 일제에 맞서며, 인천 여성들의 저항 의식은 더욱 견고해진다. 그렇게 종교와 신식 교육을 통해 깨어난 여성들은 마침내 독립운동가로 피어났고, 조국의 산하를 지키려 불꽃처럼 살다 갔다.
얼마 전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인천 송도고등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73인이 새롭게 발굴됐다. 여성 독립운동가 역시 드러난 인물들보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아직도 빛을 못 보는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는 작업은 후손들의 숭고한 의무이다.
원고출처 : 굿모닝인천 웹진 https://www.incheon.go.kr/goodmorning/index글·사진 김진국 굿모닝인천 총괄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