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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쁨이 너희 안에
말씀: 요15:11.
오늘은 “주님의 기쁨으로 우리 안에 충만함”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몇 차례 “기쁨”에 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성경에는 “행복하라, 부자가 되라, 성공해라.”는 명령은 없으나 “기뻐하라.”는 명령은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너희는 주를 기뻐하라. ...”(시33:1, 37:4), “주 앞에서 기뻐하라.”(시98:9), “....네가 젊은 때 취한 아내와 더불어 기뻐하라.”(잠5:18), “...항상 그녀(아내)의 사랑으로 인해 기뻐하라.”(잠5:19), “오 청년이여, 네 젊은 때를 기뻐하라.”(전11:9) 등등 기뻐하라는 말씀은 성경어디를 펴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승리에 찬 놀라운 간증을 쏟아내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들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이 일로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으므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하셨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자기 친구와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하자.”(눅15:6)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기뻐할 일만 있으면 좋겠지만 인생이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근심, 걱정, 초조함, 불안으로 마음이 짓눌리고 답답할 때 낙심이 되고 괴롭습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몸은 지금 교회에 와있지만 마음은 무엇인가에 메여 있고 짓눌려서 신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일은 허다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기뻐하라는 말은 쉽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뻐하라](살전5:16)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감사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님은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해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나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습니다. 기쁨은 주님의 선물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속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포도즙이 불어날 때의 기쁨보다 더 크니이다.](시4:7).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주께서 내 마음 속에 두신 기쁨”입니다. 기쁨은 내 안에,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자신의 평강과 자신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왕국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롬14:17). 우리 속에 하나님의 왕국이 있다면 ‘의와 화평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유언을 쓰거나 고별인사를 하면서 슬픔을 담담히 억제한 것이 아니라 크게 기뻐했습니다. [참으로 그러하며 또 너희 믿음의 희생과 섬김 위에 내가 헌물로 드려질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노니 바로 이런 까닭으로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내가 헌물로 드려질지라도”란 말은 자신의 죽음을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나는 기뻐하고 너희 모두와 함께 기뻐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냥 해 보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참으로 자신의 죽음을 기쁨으로 맞았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재산이나 옷이나 신발이나 성경책, 심지어 그의 생명까지 모두 빼앗을 수 있지만 그의 속에 있는 기쁨은 빼앗지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는 것을 사는 것보다 이득이요(빌1:21) 훨씬 더 좋은 것이요(빌1:23) 기뻐하는(빌2:17) 이들이 있는데 바로 크리스천들입니다.
솔직히 우리의 현실이나 환경이나 자신의 처지를 볼 때 절망스럽기만 합니다. 기뻐하라, 주를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외치는 목사들 중에 절반이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그맨이나 코메디언들 역시 다른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자신들은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그들은 기쁨에 찬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 주님은 우리의 충만한 기쁨을 위해 자신의 기쁨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기쁨에 찬 삶일지 고난으로 충만한 삶일지는 여러분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그 이유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라고 합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 기쁨” 즉 주님 자신의 기쁨을 우리 속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과 환난을 당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받게 될 고난, 환난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서 그런 것들로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꿈꾸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뭔가를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아무도 고난을 받기 위해 주를 따른 이는 없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가올 세상에서 받게 될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셨지 현 세상에서 영광을 누린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들이 받게 될 고난에 대해 반복해서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러합니다. 그럼 주님이 이 세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자신의 기쁨입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제자들은 주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남기노니 곧 내 화평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방식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주님은 돈이나 권력이나 조직이나 명예를 주시지 않은 대신 주님 자신의 기쁨과 자신의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 기쁨과 화평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것들을 말하는 것은 그들이 내 기쁨을 자기들 안에서 성취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3). 잘 보십시오. 주님께서 “내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내 기쁨을 자기들 안에서 성취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17:13).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우리의 기쁨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속에 두신 “주님의 기쁨”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주를 기뻐하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성도의 삶은 불평, 불만의 삶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고난이 없는 평안한 삶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은 고난 가운데서도 평강과 기쁨이 충만한 삶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기쁨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 속에 이 기쁨이 머물러 있어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고 우리 안에서 성취하게 하려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 주님이 주신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너희에게 근심이 있으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볼 것이요, 그러면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니 아무도 너희에게서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느니라.] (요16:22). 제자들은 주님이 고난 받고 죽으시고 묻히셨을 때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부활했을 때 그들에게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볼 것이요, ....아무도 너희에게서 너희 기쁨을 빼앗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은 부활의 주를 만난 기쁨입니다. 부활의 주를 믿는 이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데 이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친구들, 가족들, 형제들, 심지어 마귀도 내 속에 있는 이 기쁨을 빼앗지 못합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으리니 이로써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우리가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비결이 나옵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하고 구한 것을 받을 때 기쁨은 충만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항상, 언제나 누릴 수 있습니다. 기쁨이 없는 삶은 참된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 주의 얼굴은 우리에게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들을 내게 알려 주셨으니 주의 얼굴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이다, 하느니라.](행2:28). 주님은 사역의 기간 동안 고난의 사람이요 슬픔의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한 충만한 기쁨으로 넘친 분이셨습니다. 참으로 모순과 역설의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삶, 제자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기쁨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생명의 길들을 내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생명의 길들을 알 때 기쁨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생명의 길입니다. “주의 얼굴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이다.” 성도들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주의 얼굴을 보고는 살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나를 보고서는 살 자가 아무도 없으므로 네가 내 얼굴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출33:20).
실제로 기드온이나 마노아는 주의 천사를 보고 나서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했습니다. 이사야는 주의 얼굴을 본 후 망하게 되었다, 내게 화가 있도다고 외쳤습니다(사6:5). 주의 얼굴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는 주의 얼굴로 기쁨이 충만했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주께서 그를 영원토록 지극히 복되게 하셨으며 주의 얼굴 표정으로 그를 심히 즐겁게 하셨나이다.](시21:6). 이는 메시야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주의 얼굴을 마주 대하며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 얼굴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주께서, 너희는 내 얼굴을 구하라, 하셨을 때에 내 마음이 주께 이르기를,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구하리이다, 하였나이다.](시27:8).
우리는 주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주의 얼굴을 구한다, 얼굴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직접 대면한다는 말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너희 동생이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창43:3,5)고 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만나서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좋도다.”(창46:30)라고 했습니다. 파라오는 모세에게 “......너는 나를 떠나고 스스로 조심하여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그 날에 죽으리라.”(출10:28)고 위협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 앞에서 “...... 너희 모두가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줄 이제 내가 아노라.” (행20:25)고 했습니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직접적인 대면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주의 얼굴을 대면하고 주를 알게 됩니까?
욥은 자신의 눈으로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 욥과 같은 식으로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봅니다(고전13:12). 성경은 이것을 일컬어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알리라.”(고전13:12)고 합니다. 주를 보는 것은 주를 아는 것입니다.
주를 아는 지식에 자라나는 것이 주의 얼굴을 구하고 그분을 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영이요 생명이신 그분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듯 성경 기록은 말씀이 성령으로 주어진 말씀들(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 그것들은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주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요 주님은 자신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심으로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성경은 말씀합니다. [{주}와 그분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계속 그분의 얼굴을 구할지어다.](대상16:11, 시105:4). 우리는 주의 얼굴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이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고 자기들의 사악한 길들을 버리고 돌아서면 그때에 내가 하늘에서부터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며 그들의 땅을 고치리라.](대하7:14).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구하고”란 말씀대로 자기를 낮추고 기도하여 주의 얼굴을 구하면 됩니다.
• 주의 말씀을 전할 때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기쁨이 없는 세상에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지닌 사람으로 드러나고 그 기쁨을 증언할 수 있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님]으로 충만하더라.](행13:52).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때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그 도시에서 유대인들에게 쫓겨난 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그들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그것들을 대적하여 말하고 반박하며 신성모독했습니다(행13:45). 이방인들 중에는 주를 믿는 자들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독실한 귀부인들과 도시의 주요 인사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하고 그들을 자기들의 지역에서 쫓아냈습니다(행13:50).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이고니움으로 가면서 “기쁨과 성령님으로 충만” 했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쫓겨나고 핍박을 받을 때 절망하거나 낙심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으로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 속에 두신 주의 기쁨입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억지로 기쁜 척 하거나 자기를 세뇌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 속에 두신 기쁨으로 충만하라는 말씀입니다.
• 주님은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너희가 믿는 가운데 모든 기쁨과 화평으로 너희를 충만하게 하사 [성령님]의 권능을 통해 너희에게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가운데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充滿)입니다. 기쁨, 평강은 주님께서 친히 우리 속에 두신 것으로 넘쳐야 합니다. 결핍이나 부족은 주님의 속성, 성품이 아닙니다. 충만, 넘치는 것이 주님의 성품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1:23). 여기서 예수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진리는 우리가 기쁨과 평강과 확신과 소망과 은혜와 성령이 충만해야만 하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9). 성경은 성도들이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평불만으로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걱정, 염려, 두려움으로 충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 어둠으로 가득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한다고 하십니다.
[내려가신 그분께서 또한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시니 이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엡4:10). 주님이 모든 하늘들보다 훨씬 위로 올라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들 위로 승천하신 이유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그분께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기쁨으로, 평강으로, 소망으로, 확신으로, 넘치는 안위와 위로로, 성령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들, 성령의 열매들로 충만하게 하려 하시는 것이 주님이 모든 하늘들 위로 올라가신 목적입니다.사도 바울은 믿는 신자들의 본으로서 자신이 어떤 경우에도 위로와 기쁨이 충만하고 넘쳤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향해 심히 담대히 말하며 너희를 크게 자랑하노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도 내게 위로가 충만하고 기쁨이 크게 넘치는도다.](고후7:4).
바울은 “모든 환난 속에서도 내게 위로가 충만하고, 기쁨이 크게 넘치는도다.”(고백문)라고 합니다. I am exceeding joyful in all our tribulation. 마치 “내 잔이 넘치나이다.”란 고백을 연상케 합니다. 어떤 특정한 한 순간의 경험이 아니라 항상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은 견딜만하고 어떤 환난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속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평생은 힘들고 어려웠고 고난과 환난의 연속이었지만 그 속에서 기쁨이 넘쳤다는 간증입니다. 성도들에게 이런 위로와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고난을 기뻐하고 환난도 환영할 것입니다.
• 성도의 교제는 우리의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네 눈물을 마음 깊이 생각하며 너 보기를 몹시 원하노니 이것은 내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려 함이라.](딤후1:4). 바울은 디모데를 몹시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했지만 정말 보고 싶은 사람, 교제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로마의 감옥에서 디모데 보기를 몹시 원했는데 그 이유를 “내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키지만 믿음의 교제, 성도의 교제, 사랑의 교제, 빛 가운데서의 교제는 언제나 기쁨을 충만케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지만 종이와 잉크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며 너희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 대하고 말하기를 바라노니 이것은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이1:12). 사도 요한 역시 성도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고 교제하기를 원했는데 바울 사도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매주 우리는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도들 간의 영적 교제도 중요합니다. 설교는 라디오나 인터넷이나 T.V로도 얼마든지 듣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제는 모여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교제를 통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로마로 가고자 하는 목적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함은 내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려 함이니 이것은 곧 너희와 나 사이의 공동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와 함께 위로를 받으려 함이라.](롬1:11,12).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간절히 보고자 함은 첫째,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굳게 세우고자 함입니다. 둘째, 로마 교회 성도들과 바울 사이의 공통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함께 위로를 받으려 함”입니다. 저 역시 누군가를 만나고 누구 집이나 어느 지역을 방문할 때 이런 목적이 있습니다. 커피 마시고 밥 먹고 노닥거리며 놀자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선물(받은 말씀의 은혜)을 나누어 주는 것, 공통된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는 것,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함이 전부입니다. 이런 교제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여야 합니다.
또 하나는 각자 성도들이 빛 가운데서 걸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서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7)고 합니다. 빛 가운데 걸어야 영적 교제, 믿음의 선한 교제가 가능합니다. 빛 가운데 거한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것”(요일2:10)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빛 가운데 거하는 자이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 성경은 우리에게 충만한 기쁨을 줍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일1:4). 여러분들은 성경이 주는 위로와 힘과 기쁨을 얻기 바랍니다. 저는 힘들 때마다 성경을 통해 위로를 얻고 이겼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 성경을 읽으면 고요와 평강이 오고 시간이 흐르면 다 잊고 말씀 속으로 들어갑니다. 요한은 성경을 쓰면서 “이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눈물의 대언자로 불린 예레미야는 이르기를, [내가 주의 말씀들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먹으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사오니, 오 {주} 군대들의 [하나님]이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불리나이다.](렘15:16)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기쁨이 충만해 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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