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사 오솔길, 모진 병마로 생사의 고빗길을 간신히 돌아 나온 후 1년 만에 해보는 봄나들이다. 억눌린 가슴이 열리는 듯 그녀는 출렁다리에 올라 소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고 휘늘어진 능수매화 향기에 흠뻑 젖는다. 홍매화 붉은 순정에 넋을 잃고 떠날줄을 모르더니 끝내는 하얀 목련꽃 망울망울에 감격의 눈물을 적시고 만다.
꿈에도 그리던 봄 마중이다. 연초록빛 봄의 추임새가 야위어진 아내의 마음을 달랠 수가 있다면 감지덕지다. 이렇게 따스한 햇살로 가슴을 데우고 봉긋봉긋 피어오를 꽃망울에 감격의 눈물을 적신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수술성공률 20%, 수술실 앞 벤치에 앉아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 오직 하느님의 가호만을 염원했었다. 한 가닥 가녀린 생명의 끈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그녀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수술 시간 열두 시간의 꿈같은 기적이다.
출렁다리 건너 쉼터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에 부처님 뵈러 내려오는 길이었다. 꿈같은 나들이에 벅차오르는 가슴을 가누기가 힘이 들었을까 아니면 봄의 향연에 눈이 부셨을까. 화장실을 간다는 사람이 그만 길바닥에 ‘퍽’하고 쓰러진다. 아미에도 콧잔등에도 입술에도 선혈이 낭자하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이런 일이 그녀에게 일어난단 말인가.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묵직한 바리톤 음성이 들린다. “어르신, 차가 있습니까? 할머니 병원 가셔야겠는데요.” 여차하면 자기 차로 병원으로 모시겠다는 배려심, 요즈음 같이 삭막한 세상에 이렇게도 고마운 분이 있을 줄이야.
연령은 나보다 아래인 중년 부부였으나 대인배 같은 사람에게 감읍할 수밖에. “예, 차가 있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라고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비록 피로 물든 상처가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온정의 수혜자가 된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역지사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본다. 내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처신을 하였을까. 과연 핏물 낭자한 할머니에게 구원의 솔길을 내밀었을까. 아마도 모른 척하고 지나갔을 게다. 남의 일에 괜스레 관여했다가 구설수에 오르거나 병원을 모시고 가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낭패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생면부지인 그분의 배려심이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름답다는 말은 정녕 이런 때에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날의 끔찍한 사건이 있은후에 아내의 상처 부위는 쉬이 아물었다. 비록 낙상(落傷)의 아픔음 컸지만 고마운 분을 만나 마음의 위안을 받은 것이 쾌유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분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두터운 인연을 가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비록 도움은 받지 않았으나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해 준 분이기에. “친절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톨스토이의 명두를 가슴에 새긴다.
해맑게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상처의 흔적을 살피게 된다. 돌발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허둥대던 나에게 온정을 베풀어 준 그 사람이 생각난다. 조건 없는 배려, 각박한 세상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 역시 박애 정신으로 깨어나고 싶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서슴없이 손 내밀어 주겠노라고 굳게 다짐을 한다. 나의 정신적 물리적 배려의 에너지가 누구에게 따뜻하게 전달된다는 것은 큰 기쁨이며 세상을 밝게 하는 값진 삶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픔 뒤에 철이 드나보다. 사랑도 작은 배려에서 온다는데 진즉에 알았더라면 후회 없는 삶을 누릴 수가 있을 텐데 만시지탄이다.
세상에는 자기 편의만을 위한 이기적인 사람들이 득실댄다. 하지만 타인의 상처를 내 몸처럼 보살피고 그들의 아픔을 따뜻하게 배려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뭇해지는 봄나들이었다.
“남이 위급할 때는 건져주라.”는 명심보감의 금언(金言)을 명심하게 한 봄나들이, 낙상의 고통 속에서도 한 아름 배려의 꽃을 가슴으로 안는 하루였다. 배려의 꽃이 만발하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지리라.
첫댓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