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잉(Knowing)>을 봤습니다.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더군요. 영화를 본 사람들 가운데 "별로"라고말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스토리로 보자면 헛점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허점 외에 강점으로 느껴지는 부분들이 많았고, 그런 부분 때문인지 지루하지 않게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영화가 혹평을 받을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종말의 날’이라는 테마가 실은 기독교인과 반기독교인들 양쪽에서 공격받을 만한 소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종말의 날’이라는 테마 자체는 기독교적인 게 맞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루더라도 기독교적인 문제 의식을 완전히 탈피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물론 그 동안 ‘종말의 날’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도 꽤 있었습니다. 가령 <인디펜던스 데이>이나 <아마겟돈> 등이 그런 영화이지요. 그리고 이런 영화들이 다루는 주제는 기독교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영화는 ‘종말의 날’을 다룬 게 아닙니다. 그저 지구라는 행성을 위협하는 어떤 물리적 위협을 다룰 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그런 위협을 극복하지요. 사실상 이것은 ‘종말의 날’이 아닙니다. 일종의 해프닝일 따름이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의 날’이란 지구를 위협하는 물리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완전히 뒤집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는 그런 변화까지 포함하는 개념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인류가 그 동안 지속해온 삶에 대한 총체적 결론과 심판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시간과 공간 자체의 개념 자체가 완전히 뒤집히는 새로운 질서의 도래라는 개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애초에 인간의 지혜나 능력, 노력 따위로 극복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인디펜던스 데이>나 <아마겟돈>은 아마 이러한 ‘종말의 날’의 도래를 암암리에 느끼면서도 그런 ‘종말의 날’의 성격을 희화화(패러디화)하는 데 그 본래의 목적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장 두려운 것을 실은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의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실은 ‘진짜 종말의 날’을 의식하면서도 의식의 표면에서는 “사실 종말의 날은 기껏 이 정도야... 그러니 별로 걱정할 필요 없다구...”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노잉>이 다루는 ‘종말의 날’은 그런 속물화된 종말의 날과는 분위기가 좀 다릅니다. 말 그대로 ‘정말’ 지구가 끝장이 나지요. 거기에는 어떤 여유도, 낭만도, 조크도, 패러디도 먹혀들 여지가 없습니다.
사람이 결코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다고 하지요. 하나는 태양이요, 또 하나는 죽음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논리적 포장도 먹혀들 수 없는, 그냥 압도적인 현실이 갖는 힘을 묘사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결코 자신이 처한 비극적인 현실을 직시할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허용된 것은, 그리고 인간들이 가장 즐기는 것은 그 현실을 포장하고 미화하고 덮어두는 것입니다. 철학이나 예술, 과학 등등...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한 이후 쌓아온 모든 지적 자산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종말의 날은 이러한 모든 노력에 대해 한마디로 ‘쓸데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반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적대감을 이끌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디펜던스 데이>나 <아마겟돈>을 보면서 종말의 날을 우습게 봤던 사람들에게 이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은 매우 불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는 대중들의 지성이나 감성의 집단적인 성숙도와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60~70년대만 해도 영화 관객들이 ‘해피엔딩’이 아닌 영화에 대해 엄청난 거부감을 표시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지금도 그런 성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만...
반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불쾌감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기독교인들도 이 영화에 대해 불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 ‘사이언톨로지적’이라는 지적도 있는데,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톰 크루즈가 신봉하는 것으로 알려진 사이언톨로지는, 굳이 표현하자면 유사종교의 하나이지요.
인류는 우주에서 온 앞선 외계 문명에 의해 창조됐고, 그들 외계인들은 지금도 지구를 관찰하고 개입하고 있으며, UFO는 바로 그들의 존재에 대한 증거라고 믿는 입장이지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지적 설계론’인데, 저야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논리입니다만, 나름대로 상당한 잠재적 지지층을 갖고 있는 논리라고 봐야 합니다.
아무튼, <노잉>이 표현하는 종말의 날은 바로 이 지적 설계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외계인들이 종말의 날과 관련하여 계속 ‘선택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결국 종말의 날을 앞두고 그들 선택된 사람들을 지구 밖으로 데려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그런 설정이니까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이상하게 생긴 외계인에게 있다는 설정이니 독실한 크리스찬들이 불쾌해할 만도 합니다.
게다가 이 친구들은 성경의 내용조차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새롭게 해석합니다. <노잉>에도 나타납니다만, 구약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생물’들이 실은 외계인의 우주선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사이언톨로지니 뭐니에 대해 전혀 몰랐던 당시에 에스겔서를 처음 읽으면서 “만약 요즘 유행(?)하는 UFO가 옛날 사람들 앞에 짜잔~ 하고 등장한다면 이런 식으로(에스겔이 표현하는 식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이런 접근방식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노잉>은 기독교의 종말론을 차용하면서도 실은 그 내용은 완전히 반기독교적인 메시지로 채우고 있으니, 당근, 기독교인들로서 불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쨌든 재미있게 봤구요… 상당한 감동도 느꼈습니다. 감동이라… 나름대로 기독교적 입장에 충실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기독교적인 장치에 반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에서 감동을 느끼다니… 하지만 사실입니다.
우선, 아무리 반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으려 했어도, ‘종말의 날’이라는 테마 자체가 우리의 정신에 주는 충격과 각성이 있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부대끼며 쌓아온 모든 노력과 결실과 실패와 좌절, 슬픔과 기쁨과 분노와 증오와 사랑과 연민… 이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거창한 테마를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장면 앞에서 아무 감동도 없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것 아닐까요?
감독 알렉스 프로야스의 연출력도 이런 감동에 상당한 기여를 합니다. 찾아봤더니, 이 감독, <아이 로봇>을 만든 감독이더군요. 깊은 철학이 있는 감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기술적인 점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기본적으로 판단력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행기 추락 사고의 묘사나 지하철 사고 등이 상당히 리얼하고 박진감이 있더군요. 스토리를 끌고 가는 힘도 괜찮고, 무엇보다 영화 전체의 분위기와 색조(tone)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집중력이 있다고 봤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 종말이 코앞에 닥친 지구에서 길거리를 메운 군중들이 난동을 벌이는 장면에서 그렇게 슬프고 서정적인 음악(무슨 곡인지는 모릅니다만^^)을 선택한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괜찮았습니다.
아들을 외계인들에게 떠나 보내고 남은 니콜라스 케이지가 그 다음날 아침 그 자리에서 잠에서 깨는 장면도 참 좋았습니다. 어떠한 비극, 어떠한 사건, 경천동지할 사건이 벌어져도 일상은 일상대로 흘러가는 것이지요… 이 장면을 만든 감독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점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 자리에 또 비가 내리고… 바로 코앞에 지구의 종말이 다가왔는데, 일상은 일상이더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자리에 비가 내리구요. 음… 옛날 <무기여 잘있거라> 제일 마지막 장면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감동과 비교하면 제가 지나치게 오버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하고 싶은 얘기가 남았습니다. 실은, 바로 이 부분이 내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일 니콜라스 케이지의 입장이라면, 외계인들이 아들을 데려가도록 허용했을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별로 길게 생각할 것 없이, 결론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계인들이 우리를 구원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도대체 뭘 믿고 사랑하는 아들을 그들에게 맡긴단 말입니까? 그들이 마귀의 세력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 동안 외계인과의 접촉 경험을 보고한 자료들을 보면(이 자료들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일단 별개의 문제로 하구요), 외계인들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증언도 많더군요. 저로서는 여러가지 근거로 봤을 때, 외계인(이 만일 존재한다면)은 인간에게 가공할 적대감을 지닌, 악마적인 존재일 가능성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제 생각을 부인할 수 있는 그런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차라리 지상의 교회와 함께 남겠습니다. <노잉>에서도 니콜라스 케이지의 아버지가 목사로 등장하지요. 이 목사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받아들이겠다”며 지하로의 도피도 거부하고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아들과 함께 떠나지 못한 니콜라스 케이지 역시 결국에는 가족들과 함께 하구요.
저 역시 저 교회와 함께 지상의 종말을 맞을지라도 교회에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아들과 딸을 위해서도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렇게 권면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외계인들이 아무리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고 약속해도, 나는 그들과 함께 가지 않고 차라리 예수님이 약속을 주신 교회와 함께 하겠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그것은 육신을 소멸하는 차원의 문제일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의 재림과 심판이 임하시는 종말의 날이 언제일지, 어떠한 형태일지 저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만, 시험에 들 경우에도 그 시험을 이겨내고 끝내 구원에 이르는 그 약속을 결코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영화 <노잉>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망외의 소득이라고나 할까요? 영화를 보고 나서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첫댓글 이 영화에서 니코라스 케이지의 아들과 예언자의 손녀가 손잡고 달리던 마지막 부분의 어느 별이 지구와 똑같은 모습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저는 했었습니다. 그것이 지구에 종말이 오더라도 지구와 같은 행성이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아마 상상력의 한계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나온 그 미지의 별은 실은 지구의 짝퉁입니다. 지구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실패한 것이죠. 지구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면서도 지구만큼 또는 지구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런 이상한 모습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와 다른 모습이면서도 지구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말씀하신대로 지구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지구와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종말이란 결국 지구라는 별 그리고 그 위에서 살아온 생명의 질서가 근본적으로 뒤집힌다는 의미가 있을 텐데... 지구와 똑같은 모습이라면 지구에서 벌어진 그 온갖 비극과 어리석음과 실패가 되풀이된다는 의미가 되지 않을까요? '종말의 날'이란 조물주의 계획이기도 하겠지만 현재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의 소망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이루 말할 수 없나니... 구약 전도서이던가... 거기서 나오는 표현이죠.
이 영화의 지하철 충돌 씬은 정말 압도적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선 태양 폭발에 의한 전 지구의 멸망보다 더 파괴적이고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주인공의 '우주론'에 대해서 첨언하고 싶습니다. 그는 우주가 '신의 섭리' 즉 필연 아니면 우연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과학자답게 우연 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연을 극복하는 길은 과학 뿐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외계인이라는 것도 결국 과학적 상상력의 연장 아닐까요? 그러나 우주가 섭리 아니면 우연이라는 그들의 이원론적 사고에 반대합니다. 우주는 전연 다른 차원, 즉 자연일 수 있습니다.
자연 안에는 섭리와 우연이 모두 포괄될 수도 있습니다. 종말론보다는 덜 드라마틱하지만 우리의 해결책은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현대문명에서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지루한 종말을 맞을 겁니다. 어쨋든 지루한 종말보다는 지루한 회복이 낫겠지요.
자연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결국 말씀하신 '우연'이라는 입장에 수렴되는 것 아닐까요? 이원론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원론이나 삼원론 또는 일원론 등으로 반박하지 않으면 즉, 또다른 시스템을 갖고 반박하지 않으면 아무리 용을 써도 기존 이원론의 한 부분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음과 양, 암컷과 숫컷, 섭리와 우연... 모든 것은 대립하는 이항(二項)의 하나로 수렴됩니다. 체계 자체를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