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마경 제 14강>
有無二邊에 無復餘習하며 演法無畏가 猶師子吼하며
유무이변 무부여습 연법무외 유사자후
其所講說이 乃如雷震하며 無有量이고 已過量이라
기소강설 내여뢰진 무유량 이과량
集衆法寶하야 如海導師하며 了達諸法의 深妙之義하야
집중법보 여해도사 료달제법 심묘지의
세상의 모든 잣대와 편견들을 떠나 중생의 습성을 말끔하게 모두 버린 분들이며(有無二邊
無復餘習)
바른 가르침을 전할 때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할 줄 아는 분들이며
(演法無畏 猶師子吼)
강설을 시작하면 마치 천둥번개 치듯 순식간에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분들이며
(其所講說 乃如雷震 無有量 已過量)
마치 물길을 잘 아는 선장처럼 부처님 가르침을 잘 모으고 정리해서 전해주는 분들이며
(集衆法寶 如海導師)
모든 가르침의 심오한 묘미를 모두 알아 마친 분들이며(了達 諸法深妙之義)
유무이변 무부여습(有無二邊 無復餘習)에서 ‘有와 無라고 하는 두 측면(二邊)’을 중요하게
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중생들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선택하려는 치우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맞다 아니면 틀렸다, 옳다 아니면 그르다,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 영원한 것 아니면 영원하지 않은 것, 등등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결정해야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중생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마경에 나오는 대비구분들과 보살마하살분들의 경지에서 보면, 이것이다. 저것이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등으로 보이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5신통으로 그 일, 그 관계, 그 인연, 그 사건들이 왜 시작되었는지, 왜 생겨났는지를
볼 수 있고,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와 보는 눈이, 판단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연기법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 분들의 눈으로 보면 먼 과거 생부터 다음 생까지 훤히 볼 수 있기 때문에 결정지어 말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값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등등의 근시안적인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음 문구인 무부여습
(無復餘習)이라고 합니다. 다시 되풀이 할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하라. 정진하라. 참회하고 기도하고, 보살행을 하라. 고 하는 바른 가르침만을
전해 줄 뿐입니다. 결국 현재의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내일 우리들의 결과값이 될 것
이기 때문에, 지금의 눈으로, 현재의 결과로 옳다 그르다, 등등의 판단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 나는 나. YOLO. 등등의
말들입니다. 우리도 늘 말하죠. 내가 부처님. 당신이 부처님. 내 마음이 부처님이 될 씨앗.
이라고 말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우리 중생은 지금. 현재 일어난 일. 나와 연관되고, 나에게 손해 혹은
이익, 나에게 이로운 혹은 해로운, 내 마음에 드는 혹은 들지 않는.......이러한 자기결론에만
집착해서 더 큰 안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자기방어적인 혹은 이기적인 자세로
무엇인가를 결정지어 선택하려는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러 탐.진.치의
‘치(痴)’라고 하는 겁니다. 욕망과 감정에 휘둘려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안다. 나는 배웠다. 나는 들었다. 나는 읽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등등의 자기과시의
욕망과 본능들에 휘둘려서 한걸음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빙빙도는 어리석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법무외 유사자후(演法無畏가 猶師子吼)의 ‘연법’은 부처님 가르침을 자세하게 알려주다.
라는 말입니다. ‘연출’이라는 단어를 아시죠? 연출은 한 극이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들, 배우의 연기 및 무대장치ㆍ의상ㆍ분장ㆍ조명ㆍ음악 등의 여러 요소를 종합하여
효과적으로 자세하게 빠짐없이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연법’은 한 중생이 자신
안에 있는 佛性을 찾아내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배려하면서 자세하게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연법’을 함에 있어서 일말의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뭘까요? 바로 확실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망설이거나 남들이 나에게 어떤 질문을
하고 공격할지 두려워 한다는 건 자신이 아직 확실히 모른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마경에 나오는 모든 대비구분들과 보살마하살분들이 법문을 하실 때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 당당하고 우렁차다는 것입니다.
사자가 한 번 포효하면 모든 동물들이 다 꼬리를 내리고 조용하듯, 이 분들이 한번 법문을
하시면 각자의 모든 삿된 견해들이 마음속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세상의 삿된 견해를 가르치는
무리들이 다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기소강설 내여뢰진 무유량 이과량(其所講說 乃如雷震 無有量 已過量)이라는 이 문구도 위의
문구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 분들께서 강설을 하시면, 마치 천둥번개가 치듯 마음속에 빛이
번쩍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로 충격을 줘서 단번에 ‘아하’하고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이 한량이 없을 뿐만 아니라(無有量)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已過量)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집중법보 여해도사(集衆法寶 如海導師)의 ‘집중법보’는 모은다는 뜻의 집 +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의 중법보를 떼어서 읽어야 합니다. 아무리 귀한 구슬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가르침을 다 알고 전하는 분이 있어야 그것이
가치를 상실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 모든 대비구분들과 보살마하살들께서는 다 그런 역할들을
하시는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해도사’ 여 + 해도사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부처님 가르침을
모으고 정리하고 전하는 것이 마치 물길을 잘 아는 선장 혹은 항해사와도 같이 잘 이끌어준다는
것입니다. 잘 이끌기 위해서는 본인이 분명하게 잘 알고, 분명히 알아야 가능합니다.
요달 제법심묘지의(了達 諸法深妙之義) ‘요달’은 쉽게 말해서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입니다. 어떤 부분에 달인의 경지에 올랐을까요? 모든 부처님 가르침(諸法)에 담긴 심오한
메시지(深妙之義)를 이해하는 수준이 이미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은 참으로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여러분 법성게 아시죠? 법성게의 네 번째 문구가 ‘증지소지비여경’입니다.
쉽게 해석하자면,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 수도 없고 알려
줄 수도 없는 것이다’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이라고 하는 절대의 경지를 경험하신 분이고, 그 경험을 토대로 가르침을
설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의 경지에서 우리 중생의 삶을 바라보면서 그들에게 적당한, 이해되는 단어를
찾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용시킨 말씀이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들이 부처님께는 당연한 것이지만, 중생들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 직후에 바로 열반에 드시려고 했습니다. 당신께서도
중생들이 절대 이해 못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부처님은 포기 않으시고,
이 중생들 중에 분명 당신이 그랬듯이, 오랜 과거생을 통해 깨달음에 들기 위해 수행해 온
인연들이 있음에 위안을 얻으시고 45년간의 길위의 삶을 걸으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대비구와 보살마하살들이 탄생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 가르침의
심오한 메시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세 부류 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는 깨달음에 이른 존재
들입니다. 두 번째는 과거생부터 깨달음을 추구하며 살아온 존재들입니다. 세 번째는 지금
그 깨달음을 알고 추구하고자 발원을 세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부디 여러분. 어렵다. 어렵다만 하지 말고,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어렵다고 딴 길
걷지 마시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우리도 저 경지에 올라서서 한 번 우리들 살았던
이 중생의 삶을 내려다보면 좋지 않겠습니까?
앙코르 왓을 가 본 사람은 그곳의 아름다움과 대단함을 알지만, 가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아무리 설명하고 보여줘도 그 참 맛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노력하고 준비만하면 앙코르 왓을 갈 수 있듯, 저 깨달음의 세계도 준비하고 노력하면 분명
갈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는 당부하셨습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지금 이 순간에도 ‘언제 될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할까?’하고 의심을 하는 분이 계신다면 이
이야기는 어떠신지요?
현생인류의 근원이 약 7만 년 전쯤이라고 합니다.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소유하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지금과 전혀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해서 그때도 호모사피엔스들은 지금의 우리처럼 글을 읽고, 운전을 하고, 컴퓨터를
사용하고, 맛집탐방을 했을까요? 침팬지와 다를 바 없었던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호모사피엔스들이 7만년 후에 우리가 이렇게 살 것이라고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지금 우리도 몇 생 후에, 아니면 몇 겁 후에 부처님의 경지에 올라 있을 수 있습니다. 단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 의식을 놓지 않았던
호모사피엔스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무엇인지를 알고야 말겠다는 의식의 끊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가능 할 수 있을까? 했던 일이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변화로
다가올 것입니다.
저는 삶도 진화한다고 믿습니다.
삶의 진화에는 반드시 유전자化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바로 業識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속가능하게 그 의지와 약속과 희망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서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도 너무 길어졌습니다. 지루하다 생각마시고, 두 시간짜리 강의를 십 오분짜리 글로
읽는다. 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ㅎ
<반드시 알고 봐야하는 유마경 핵심주제>
첫째, ‘현실의 국토가 불국토(정토)’라는 것입니다.
불국토라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곳이라는 것입니다.
「불국품」에서 “직심(直心), 심심(深心), 보리심(菩提心)이 보살의 정토이다.” “이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도 청정하다.”라고 하여 정토(불국토)라는 것은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보살(사람들)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실천하고 표현해서 마음과 행위를 같게 한다면
현실국토(고통의 땅)가 바로 정토(불국토. 행복의 땅)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둘째, 자비정신의 실천입니다.
「문질품」에서 “어리석음과 탐욕, 성내는 마음으로부터 내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일 모든 중생들의 병이 나으면, 그때 내 병도 나을
것입니다.”라는 유마거사의 말은 중생과 고통을 함께하는 보살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즉 보살(우리들)의 병은 자비로운 마음에 의해서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우리들)의
병은 이 자비를 실천하여야 치유되며, 타인의 치유에 의해서 보살(우리들)도 함께 치유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번뇌에
싸인 중생(병든 중생)들을 깨달음(치유)에로 인도하는 것이 보살입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병을
치유해주기 위해서는 5무간죄. 지옥, 아귀, 축생의 3악도. 탐, 진, 치의 3독에 몸을 던지면서도
주저하거나, 망설이거나, 비하려하거나, 무서워하거나 하는 마음 없이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옥을 갈지언정, 이것이 자비로 누군가를 치유해 줄 수 있다면, 그 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보살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평등과 존중의 불이사상(不二思想)입니다.
출가, 재가. 부처와 중생. 정토(행복의 땅)와 예토(불행의 땅). 보리(깨달은 즐거운 마음)와
번뇌(힘들고 지친 중생마음)와 같은 이분법적 구분으로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는 불이(不二)사상을 통해 절대 평등의
경지에 들어가야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장 이상적인
‘진리’는 사실 볼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글로 적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자신의 확실한
신념과 의지에 달려 있다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넷째, 중생들에게 모두 깨달음의 가능성이 있음을 말합니다.
유마거사는 현실의 인간이 비록 번뇌를 가지고 악을 행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악인줄 알고,
번뇌인줄을 알아서 바꿀수만 잇다면,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일체의 번뇌가 곧 부처의 씨앗이다.”라고 하여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중생의 번뇌에
기인하고, 그것을 고쳐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