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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간증
1999.1.2. 오세휘 장로
우리가 은혜 받기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감사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여러 선생님 하나님께서 그를 성삼위일체가 친히 역사하시고 도와주셔서 그들의 증거가 하나님의 진리 확장하는 또 저희들에게 큰 은혜가 될 수 있는 말만 할 수 있도록 친히 역사하시고 도와주시옵소서. 마치는 시간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 오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오며 그들을 통해서 저희들과 또 믿지 않는 모든 동포들에게 복음의 기회가 되게 하시며 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온 인류에 주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널리 전파하며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 받들어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이 시간에는 오 집사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 오시는 동안에 (성가)
며칠 전에 복 원장님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부탁이 있다고 무슨 부탁이냐고 그러니까 이번 집회는 외부 강사를 모시지 않고 집안에서 식구끼리 보는데 시간을 맡아 달라는 그런 부탁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그러니까 깜짝 놀랐지요. 나 못한다고, 우리 왜 못하냐고 한 시간 돌아가면서 맡아야 한다고, 나 모르겠다고 그냥 수화기를 놔버렸습니다. 그러나 한쪽에 마음속으로는 성령이 역사 하시면 역사하시면 네가 아무리 싫다 할지라도 그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제가 어렸을 때 유년시절 또 소년시절 청년시절 세 부분을 나누어 요약해서 한 토막씩 말씀 드릴까 합니다. 몇 년 전 여름 수양회에 나와서 한번 말씀 드렸지만 또 못 들으신 분들을 위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바로 광주 이지요? 광주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만 유년 시절은 남원 광한루 옆에 천 거리, 예 거기서 지냈습니다. 장로님께서 목공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그 환경 속에서 남부럽지 않게 참 쌀밥에 고기반찬에 아무 걱정 없이 지냈지요. 그러면서 제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드니까 다니는 곳이 어딘가 하면 남원 제일교회 유치원이라는 곳을 다녔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학력이라고는 유치원 다닌 것 밖에 없지요. 무엇을 배웠는지는 몰라요. 지금도 그저 왔다, 갔다한 기억만 납니다.
그리고 나니까 어머니께서 학교를 입학시키려고 갖은 애를 아마 지금 생각해 보면 쓴 것 같아요. 일제 말엽인데 남원 국민하고 지금 초등학교라고 그러지만 입학시험을 치루는 데 내가 워낙 공부에 취미가 없고 머리가 돌대가리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따라 오셔가지고 창문가에서 뭐 어떻게 하라고 해요. 그랬는데 저에게는 그러든지 말든지 무엇을 봤는지 모르지만 색깔 종이 놓고 뭐 색깔을 가려내라는 것 같아요.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 그것밖에 기억이 안 납니다. 그래서 앞문으로 들어가고 뒷문으로 나왔는데 그것이 낙방이 되어서 어머니가 화가 나니까 지게나 져먹고 살라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지게를 벗지 못했습니다. 그러지만 저는 원체 공부에 취미가 없고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공부 못해서 한이 된 적은 없습니다. 어저께 다른 분들은 공부하고 싶어서 그렇게 미칠 지경으로 했다느는데 저는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 그 천 거리에서 일곱 여덟 살까지 살았겠지요? 처음에는 목공소 지금도 그 터는 가면 있지요. 목공소는 헐렸지만 옛날 제가 살던 그 집은 지금도 있더구만요. 처음에는 목공소 문가집이 대문 문간 집 아래채에서 살았습니다. 그 얼마쯤 살고 나니까 안에다가 기와집을 짓고 고리 이사를 들어가더만요. 그러고 나니까 그 문간 집에는 누가 오셨는가 하면 옛날에 돌아가신 서 집사님 식구가 거기 와서 사시면서 목공소를 같이 서 집사님하고 같이 목공소를 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서 집사님 아들 경원이가 제 또래니까 한 친구가 되었지요. 그때부터서 하루는 어떻게 놀다가 싸웠는지 뭣 때문에 싸웠는지 하여튼 싸웠어요. 그래가지고 울고 집에를 들어왔는데 장로님께서 화가 얼마나 났는지 논장위에 톱을 가지고 죽인다고 위협하니까 어머니가 딱 알고서 그러지 말라고 그런 위협적인 그것이 생각이 나고 한번은 또 그 목공을 하니까 나무를 세워서 말립니다. 쓸 것이 있으면 잣대를 가지고와서 재가지고 갔다 쓰시고 했는데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기억을 모르겠습니다만 잣대로 아래 장단 지를 맞아가지고 피가 났던지 어쨋 던지 그런 기억이 나고요. 그런가하면 목공소를 하니까 그 나무에 붙이는 애교가 있습니다. 그러면 요 때 되면 그 남원 지방에서는 그 연을 많이 띄우게 되지요. 그러면 연 싸움을 하려면 애교가 필요해요. 애교를 녹여서 유리를 깨뜨려가지고 가루를 내서 거기다 풀을 넣고 저어서 실에다가 그 애교 물을 입히면 연싸움 하는데 아주 유리한 칼날같이 서슬이 퍼래가지고 아주 유리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동네 큰 애들이 자꾸만 나를 시켜서 그 애교를 가져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몰래 그런 애교를 도둑질하는 그런 것도 생각이 나고 그렇습니다. 또 그렇게 그런 시간도 있었지만 또 한 번은 평화로운 시간도 가졌었어요. 주일인지 모르겠어요. 주일 날 이겠지요? 주일은 쉬니까 장로님하고 같이 그 요천 소에 그 집에서 얼마 안가면 둑에 정자나무가 좋은 정자나무 당산나무가 있습니다. 고기 잡는 삼발이 인가 그 불을 양쪽에 대로 자리 잡아 가지고 이렇게 밀면서 고기 잡는 그물을 갖고 놀러 갔지요. 놀러가서 부자간에 그 맑은 개울가에서 잉어를 잡던 그 시절이 한동안 있어서 그것도 생각이 나는 만요. 잉어를 잡아서 풀 쇄기 뽑아서 거기다 끼어가지고 매달아놓고 장로님은 그늘나무 밑에서 성경인지 뭔 책을 보시다가 석양에 집에 돌아오는 그런 대목이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참 단란한 가정생활을 하다가 언젠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어서 덕모리라는 시골로 홈실 수지가자면 중간에 덕모리 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좋은 살림살이 가구 다 내던지고 철 구루마에 궤짝 솥단지 몇 개 싣고 먼지 나는 그 시골길을 그 철 구루마에 싣고 걸어서 지금 가보면 남원 시내서 멀어야 20리 될 거예요. 지금 가면 얼마 멀지 않은데 그때는 얼마나 먼지, 걸어서 가니까 마을 제일 끝에 집 오두막살이 초가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예, 거기서 봄에 가가지고 가을까지 아마 일 년 산 것이 기억나요. 그 정든 천 거리를 다 청산하고 참 독수리가 날개를 잃은 것처럼 예, 알거지가 되어가지고 그 시골에 가서 한 것이 무엇이냐? 제 밑에 동생하고 날마다 쑥 캐는 것이 저희들 유일한 직업입니다. 하루는 저기 집 앞에 길가에서 쑥을 뜯고 있으니까 오 복희 전도사님 지금 생각하면 그분이 저 아래서 오시더니 저희들을 만나가지고 부모님 계시냐고 안부를 물어요. 척 봐도 아시겠지요? 저는 그때 처음 봤지만 그 안에 몇 번 찾아왔겠지요? 목공소를, 그러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지 말고 오생원이라고 하라고, 그런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참 쑥 캐고 나무 같은 거 하고 그리고 거기서 일 년 지내고는 또 이사를 해요. 어디로 간고하니 지금 생각하면 능주, 지금 사현 양 남원 계시지요? 사현 양 집으로 갑니다. 그 남원서 갈 때는 아마 기차를 타고 갔을 거예요. 내려가지고 그 집 가서 신세를 하루를 졌는지 이틀을 졌는지 모르지만 거기서 신세를 지고 또 거기서 어디를 간고하면 저 도암 이 사무엘 장로님 집에 거기도 가니까 등광리 제일 끝 마을에 제일 끝에 집에 살고 있더구만요. 거기서 또 신세지고 그러고는 거기서 또 인제 청소 청소마을에 가니까 청소마을에서 제일 끝에 집 꼭 어디 가는데 마다 끝에 집만 한 번도 어디 가운데나 첫 번째 집이 아니에요. 가는 곳마다 끝에 집이야. 청소 제일 첫 집 끝머리 대 밭 속에 아래채에 가서 겨울을 났지요. 거기 가서 있으니까 누가 식량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벌어서 먹어야 사니까 애들 서이만 놔두고 부모님들은 어디론지 가버렸어요. 그래 제비새끼 만으로 서이만 있는데 이 선생님하고 이 선생님 부인하고 저희 집에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와 가지고 어디 가셨냐고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디가셨다고 아마 말씀 드렸을 거예요. 그때에 처음으로 이 선생님과 이 선생님 부인을 뵌 것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 겨울을 나는데 일제 말엽이니까 그 공출 그 순경들이 모두 와가지고 밤이면 동네사람들 모아놓고 공출하라고 사람을 막 두들기고 또 공출 안 내려고 동네 사람들은 뒷산에다 감추고 자리를 걷고 자리 밑바닥에다 나락을 펴 놓기도 하고 예 갖은 수단을 다해요. 또 그런가하면 광솔을 캐다가 광솔 기름을 내고 그 무명다래 나무를 아래 하천가에 담궈 놨다가 밤이면 그걸 벗기고 어렸을 때 그 처참함을 목격했습니다. 밤새도록 마당에다 불을 피워놓고 사람을 주리를 트는 거예요.
예, 그래서 거기서 겨울을 나고 봄 되니까 또 이사를 합니다. 도구박골 도구박골을 가니까 빈집 거기는 마을 끝이 아니고 마을 한 중앙에 마을이 일자로 죽 되어있는데 한 중앙에 초가집 초가삼간이 있더만요. 바로 길가 집인데 앞으로 길이 있고 봄에 가가지고 거기서 여름을 나요 그러니까 이 그렇게 쌀밥에 고기반찬에 잘 먹던 그 입인데 그 얼마나 곤란합니까? 그래도 목공소 할 때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다른 농민들은 그렇게 공출에 시달리고 그것뿐 아니라 그때는 비료가 없으니까 농사 지어봤자 지금 반 수확도 안 되지요. 그 농민들이 먹고 사는 거 보니까 그 꽁보리밥에다가 감자새끼 쪼그만 거 껍데기도 안 벗기고 그것을 놔서 밥을 해가지고 점심 새 거리를 해요. 저희 집은 그것도 없지요. 그것도 없어요. 산에 가서 뜸부기라든가 뭐 하여튼 뭔 나물을 뜯어다가 해먹는데 도저히 비위가 맞지를 않아요. 그러다보니까 인제 장로님이 그때 초학(말라리아)을 하셨는지 앓고 누웠어요. 일도 못가고 그래 어머니가 바가지를 긁는 것이지요. 예, 장로님은 이 선생님한테 말씀을 받아서 참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나섰지만 당신 혼자뿐 아니라 다섯이 전체가 알거지가 되어가지고 이 쓰라린 고통을 겪다보니까 어머니로서는 원망이 안 나올 수가 없겠지요. 그러면서 거기서 8.15 해방을 만났습니다. 아 바람이 어떻게나 세게 부는지 그때 가니까 앞뒤로 산에 이런 소나무 아람 들이 나무들이 있어요. 그것이 뽑히고 부러지고 그런 광경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굵은 나무가 있으니까 그 마을 사람들은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그 나무를 베어다가 나무로 물건 푸는 바가지도 만들고 고지도 팔고 그렇게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제 여름이 나고 가을이 되니까 또 이사를 해요. 문바우에서 도구박골을 지나서 박제골 이라는 석양빛이 내려 비추는 박제골 그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골짜기에는 단지 집이 딱 한 채밖에 없어요. 마을도 없고 그 골짜기에 저희 집 한 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인제 그 밑에 소재사람이 살다가 내려가 버렸는가 봐요. 어떻게 얻었는지 샀는지 모릅니다. 그 집 뒤에 앞으로 앞으로는 다랑이, 다랑이 논이 있고 옆으로는 깔끄막 밭이지만 많은 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아마 2-3년 산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 지금으로 같으면 50년도 더됐지 50한 2-3년 되는 시대인데 산짐승이 얼마나 많습니까? 멧돼지 고라니 밤이면 고라니가 울고 밤이면 멧돼지가 내려와서 뭐 심어놓은 작물을 다 뒤져먹고 그런데 부모님들이 하여튼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서 두 분이 다 나가시는 때가 있어요. 그러면 그 깊은 산중에 멧돼지 산짐승이 있는데 참 무정하게도 세 사람을 남겨놓고 며칠씩 비워버려요. 집을 그러면 산 짐승 멧돼지가 해도 안 넘어가서 석양에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어렸을 때 보니까 돼지가 소만이나 하데요. 아 그래 씨 꺼먼 돼지가 산에서 꿀꿀하면서 내려와요. 제가 제일 그래도 크니까 열 살이나 열한 살 그때니까 그 헌 바께스를 문 앞에다 놔두고 돼지가 오니까 그걸 두드려서 쫒았거든요. 제가 그걸 봤기 때문에 제가 선두로 나서서 가서 두들겨야지요. 두들기면 마지못해서 산짐승도 어른이 있다는 거 없다는 거 환히 알고 어른들이 있으면 밤에 오는데 어린애들만 있으니까 해도 안 넘어가는데 오더라구요. 그렇게 깐을 봐요. 예, 그런가하면 또 한 번은 봄인데 인제 해방이 되었지요. 정부수립에 정신이 있었겠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무법천지야 따뜻한 봄에 석양에 어떤 사람이 저 마을에서 뒷짐 지고 올라오더니 집 앞에 논바닥에다 불을 대놓고 내려가 버려요. 그런 무지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 그런데 불이 집으로 올라올 것 아닙니까? 밑에서 갔다 불을 댔으니 아 참 억장 무너지데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산으로 논둑으로 밭둑으로 해서 올라오면 아 뭐 집하고 산하고 연결 되어 있으니까 금방 소실 될 것인데 그래도 그때 그 어떻게 하나님께서 섭리로 하셨는지 지금으로 말하면 119지요. 119를 요청하는 거예요. 집 뒤 재에 올라가서 유일하게 저 도우박골 밑에 이 사무엘 장로님 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수레기 양반이지요. 그 집 뒤 잔등에 올라가서 고함을 질렀지요. 불나서 큰 일 났다고 하여튼 뭐라고 외쳤는지 모르지만 그 외치는 소리가 그 집에 전달이 되었습니다. 조금 있으니까 수레기 양반 노인이 낫을 하나 들고 뒷짐을 지고 쫒아 오시더구만요. 쫒아 와서 솔가지를 하나 쩌 가지고 불을 다 꺼주셨습니다. 만약 그때 바람이 안 불어서 그러지, 바람이 불었으면 그거 여지없이 다 타버렸을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지켜 주셨기 때문에 집을 태우지 않고 무사히 불을 끄게 됐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서 논도 있었어요. 그때부터 농사를 지어가지고 참 스스로 농사를 집안 식구끼리 지어가지고 감자도 해먹게 되고 또 벼농사도 해가지고 수확을 해서 먹었습니다. 그래 밤이면 돼지 보면서 그 모닥불 피워놓고 북 감자 그 모닥불에다가 넣었다가 꺼내먹은 그런 생각이 납니다. 그때 살 때에 제 생각에는 3년간 산 것 같은데 손님이 늘 찾아 오드구만요. 윤환 씨 어머니 오셨지만 윤환 씨 어머니도 저 곡성서 찾아오시고 또 이 선생님 부인도 그때 이 선생님 뒤를 쫒은 거 같아요. 가정불화가 일어나가지고 어찌되었든지 이 선생님을 쫒아 다니면서 하여튼 죽인다고 칼을 품고 다닌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보니까, 뭐라고 하여튼 어머니하고 대화를 하는 것을 어렴풋이 들었습니다. 그래 손님이 올라 면 전달 꾼은 무엇이 있냐하면 그 날아 다니는 까치, 까치가 억세게 울면 손님이 즉시 오지요. 유일한 전달 꾼은 까치였어요. 그런 것을 봤습니다. 그렇게 한 3년 살고는 광주로 나와 가지고 그 뒤로 아마 동광원 이름은 없었지만 그때 모두 사방에서 모여서 식구가 형성되어서 광주 YMCA에서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소년 시절 유년시절 그대로 놔두고 이제 청년시절 넘어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참 여러 군데를 거쳐서 살다가 바로 지금 저 이건너 감나무 동산 저 꼭대기 집에서 남자들이 살았지요. 살았는데 그때 얼마나 참 살기 곤란했습니까? 그러니까 이 선생님 지시에 따라서 그랬던지 청년들을 이렇게 한군데 있을 것이 아니라 산중으로 가서 자립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제가 자진을 했던지 어쨌든지 몰라요. 그러지만 저하고 이 덕호 피난민입니다. 이 덕호라는 청년하고 옛날에 살던 그 도구박골 박제골은 아니지만 이 사무엘 장로님이 사시던 그 도구박골로 다시 육이오 후에 개척을 하고 자립하겠다고 들어갔었지요. 처음 들어갈 때에 구루마에다가 우선 먹을 식량 연장 같은 거 싣고 지금 도암면에 계신 흥오씨 형님 또 목수는 서 경원이 나 이 덕호 그렇게 거기를 찾아갔습니다. 그래 가보니까 쑥대밭이지요. 대충 치우고 나무토막 몇 개 세워서 풀 베어다가 이어가지고 거기서 생활을 합니다.
처음에는 가서 집 짓고 그 다음에는 묵은땅 파가지고 감자 심고 그런데 원장님이 그때 주선을 했지요. 원장님이 전적으로 그때만 해도 원장님 참 건강하셨습니다. 헌 누더기 입고 열심히 우리 청년들을 위해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그 주위에 있는 산에 참나무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것을 베어서 숯을 구우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도저히 자신이 없어요. 기술자까지 다 준다고 하는데도 워낙 못 먹고 사니까 힘이 없으니까 자신이 생겨지지를, 나지를 않아요. 어떻게 해볼 용기가 없어. 그래 그걸 그렇게 해보라는 권유를 했어도 자신이 없으니까 못하니까 결국은 다른 사람한테로 넘겨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다 구워 먹어버렸지요. 그래서 인제 실제 숯을 굽지 않았지만 그걸 구경을 했어요. 어떻게 숯을 굽나? 구더기를 파고 나무를 베어서 넉자 다섯 자, 여섯 자 이렇게 층층 잘라서 세워가지고 풀을 깔고 흙을 쳐며 메로 두들겨 가지고 예, 숯 구덩이를 만들어서 불을 며칠 때면 숯이 된다는 거 그래서 인제 그걸 참 늘 구경을 하고 쫓아다니는 바람에 숯 굽는 것을 배웠지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다 구워먹고 남은 쳐질 거리 베어다가 해봤어요. 하니까 숯이 되더군요. 그래서 참 몇 번을 그렇게 구워먹고 나니까 자신이 생겨요. 아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그러니까 나는 인제 숯 굴을 만들지도 안하고 남이 쓰던 다 구워먹은 숯 굴을 빈 숯 굴을 거저 돈도 안내고 그냥 이용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동안 거기서 한 3년 살았는가? 인제 숯 굽기 전에 지금 옆에 계신 김 원장님 한번 찾아오셨어요. 그 중우 씨라는 어떤 친구 분 한분하고 찾아오셨는데 내가 그때 식사 당번이지요 뭐 있어요. 있는 대로 꽁보리에다가 북 감자 캐가지고 그걸 껍데기 벗겨서 밥을 해가지고 치대서 한 그릇 주시면 참 꿀맛으로 잡수시데요. 그러면서 또 큰 가마솥에다가는 칡을 캐가지고 그걸 잘라서 삶아서 그걸 한 그릇씩 먹으면서 한동안 며칠 동안 살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만나면 그때 일을 얼마나 참 감동이 깊었었든지 모르지만 늘 그 말을 몇 번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어저께던가 그저께도 말씀하셨지만 이 동광원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어요. 왜 이렇게 해야 하냐 좀 확대해서 크게 해야지. 그 역설을 저희들한테 막 하는 거예요. 그러지만 저는 뭐 콧등도 안했지요. 그 뒤로 보니까 아마 곡성 삼산도 넘어 다니시고 한참 아마 어디 자리를 잡으시러 다니시는 것 같아요. 그 뒤로 들으니까 저기 가막골 골짜기에다 청년들하고 같이 살았다는 말 들었습니다만 그런 것을 봤을 때에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생각해 보면 섭리하시고 주장하시고 모든 위험과 시련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해 주셨다는 것 이지요.
예, 한 가지 빠졌네요. 중요한 참 것인데 한번은 장로님께서 한천 돈들메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먹거리를 구해야 하니까 목수 일을 하셨는데 하루는 저더러 가자고 그러는데 가서 식사당번 하라. 그 말이에요. 데리고 갔어요. 그래가지고는 제가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니고 식사를 했지요. 그런데 하루아침에는 밥을 하라는 말도 안하고 깡통을 하나 추겨 들더니 마을로 데리고 들어가요. 마을 저 중간쯤 가서는 날보고 가서 밥을 얻어오라고, 아니 같이 들어간다 해도 내가 들어 갈동 말똥 한데 저 어귀에 서서 날보고 가서 밥 얻어 오라고 해요. 아이고, 참 억장이 무너지데요. 어째 밥을 얻어갖고 왔겠습니까? 못 얻었겠습니까? (못 얻었지요.) 아, 이 부끄럼 많이 타는 사람이 어디 가서 밥을 얻습니까? 암말도 안하고 꼼짝 안하고 서있었지요. 둘이 장승처럼, 몇 분 동안을 서있었는지 모르지만 할 수 없으니까 가자. 아 못 얻고 도로 집으로 와 버렸지요. 도저히 죽으면 죽었지, 어디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도 도암을 가면 그리 가끔 지나가고 지나옵니다. 거기를 지나올 때마다 그때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요. 아 내가 과거 어렸을 때에 그 일은 생전 잊지 않지요. 그런 때도 있었지요. 이만 마치겠습니다.
일찍 이야기 끝내시니까 본인이 하셔야 할 말씀을 제가 보충하겠습니다. 제가 언젠가 했지요? 요새 오신 분은 못 들었을 턴데, 아까도 말씀했어. 그 당시 왜 이렇게 뜨문뜨문 산속에만 있는가? 저희는 좋은 정신을 확대해서 많은 사람을 모아서 교육을 시키고 하면 좋겠다고 해본 거예요. 그래 가니까 이 오 집사님이 덕호 씨하고 둘이 살아요. 저는 보리쌀 한 되나 들고 갔어. 가니까 아까말로 밥을 하데요. 생전 처음 봤어요. 옹기솥에다 밥을 하는데 순 보리인데 참 기술이 좋아. 속으로, 보리를 어떻게 먹나 했더니 감자를 놔가지고 탈탈 깨데요. 주걱으로, 집사님이 깨서 이렇게 비비니까 찰밥이 되어버려. 그놈을 해가지고 한 그릇 퍼줘요. 반찬은 뭐 했는데 고추 산에다 고추 심어가지고 풋고추 몇 개 따오데요. 소금 소금도 좋은 소금이 아니야. 뭐랍니까? 큰 거, 요만한 소금 한 되 갖다놓고 보리밥 비벼서 풋고추 넣고 밥 비벼 먹는 거예요. 얼마나 밥이 맛있는지, 그렇게 먹고 또 일하시고 밥을 해줘서 얻어먹어서 인제 그러니까 아까 말한 대로 집사님은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입학하다가 그때부터 가버렸거든요. 그래 그때 내가 산수를 기억나시오? 산수를 밥값 한다고 뭔 보답을 해야지. 그래서 곱셈 나눗셈 이렇게 하고 살았어요. 그랬는데 이 이야기 할라고 하는 게 아니라 요즘에 사 제가 깨달았어요. 늘 오 장로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래서 남원에 남반 있고 있는데 왜 좀 교육을 시키지, 훈련을 시키지 저렇게 놔두십니까? 그랬더니 오 장로님 말씀이 교육한다고 되는 것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나님께서 하셔야지. 사람이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 아니다. 그랬어요. 그때까지 항복이 안 됐어요. 사람은 교육을 시켜야지. 뭔 교육을 시키느냐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오 장로님 말씀이 옳아요. 다시 말하면 오늘날 교육은 지식 기술 그건 됩니다. 그건 가르쳐야 되요.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야 되는데 영성 인간의 참 인간을 만드는 영성의 변화, 성화 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 장로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그 말씀 드리려고 온 거예요. 왜 저는 성경보고 강의를 들어서 아는 것 이 아니라 증거를 보고 오 집사를 보고 그 말씀을 깨달은 겁니다.
방금 들었지요? 학교 안 갔어. 그러나 지금 말씀 하셨지 않아요? 사실 이번 집회에 서울서 어떤 강사 안 모셔도 오 집사님 모시고 성경말씀 하시면 미안하지만 전도사님 저리가라에요. 하여튼 그러시면 이 앉아계신 전도사님이 간증하는 시간이니까 무든 말씀을 오 집사님보고 오 장로님 보고 다 옳구나. 증거를 보고 나 같은 사람은 만져보고 증거를 봐야 믿지. 말로는 못 믿는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요. 예수님께서 그랬지요? 누구보고 그랬지요? 내 도마가 예수님 창구멍 만져보고 믿는다고 하니까 너는 만져보고 믿느냐? 안 만져보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 그랬지요? 내가 그래요. 만져보고 증거를 봐야 믿지. 증거를 안 보면 못 믿어. 그러나 이제 증거를 보고 믿는 거야. 아하,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되는 거란 말이야. 그래서 긴 이야기 않고 본인 앉은 데서 죄송한 말씀이지만 오 집사님 집에가 보면, 아 진짜 마음으로 탄복해요. 제가 사람 많이 만나는 거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인데 대한에 나만큼 많이 사람 아는 사람 없어요. 많이 알아요. 지금까지 보던 중에서 이렇게 참말로 진실하고 어저께 말했지요? 힘 정직과 진실 속에서 자립생활 하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가지고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최고의 삶을 산다 말이야. 하늘나라로, 그런 분이야.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말이지. 그리고 오 집사님만큼 효자가 없어. 아까 말씀 들으니까 오 장로님한테 맞았다네. 난 오늘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오 장로님은 사심이 없어. 이 현필 선생님도 사심 없어. 당신이 혼자 잘하고 살았어요. 그래도 지금 보면 오 집사 님 만큼 부모에 효도 하는 사람도 없어. 그걸 보고 뭘 느꼈냐? 아하 욕심으로 자기 자녀 길러서 덕을 보려고 키운 부모는 헛것이고 그야말로 하나님께 효하니까 하나님께 효 하니까 효자가 나오는 구나. 이걸 또 깨달았어요. 오 장로님이 얼마나 하나님께 효 했습니까? 효자가 뭐입니까? 아버지 말씀 순종하는 게 효자지. 오 장로님만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사람 어디가 있어요? 버리라니까 탁 버려버리고 하루아침에 거지되어 가지고 그렇게 순종하시고 순종하시니 효자 아니요? 하나님 앞에 효자니까 또 이런 효자가 나온단 말이야. 아하, 어릴 때 들었어요. 우리 어머니한테 ‘왕대밭에 왕대 나고, 신우 밭에 신우 난다.’ 들었는데 효자 밭에서 효자 나와. 인간적인 욕심을 교육해서는 효가 나오지만 하나님께 효를 하니까 효자가 나온다. 그런 말씀을 느꼈기 때문에 제가 이제야 늦게 말씀을 믿게 되었는데 그 증거를 보고 했다는 것을 죄송스러운 말씀인데 본인이 있는데 앉혀놓고 증거를 내가 간증 합니다. 옳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