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사 가는 길 / 이미옥
봄은 어김없이 온다. 그러면 꼭 해야 하는 일처럼 선암사에 간다. 시작은 겹벚꽃이었다. 선암사에는 거리의 벚꽃이 지기 시작하면 봉오리가 맺히는 겹벚꽃이 있다. 워낙 유명해져 요즘은 평일에도 사람이 많다. 처음 본 해에는 시기를 잘 맞춰 만개한 꽃을 여유롭게 즐겼다. 후로는 매번 개화 시기를 못 맞춰 한지를 또르르 만 것 같은 봉오리만 보고 오거나 꽃보다 잎이 더 많은 나무 아래서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사람이 점점 많아지니 그마저 피곤한 일이 되었다. 그래도 해마다 그곳에 간다. 선암사의 연두를 보러.
주말 내내 비가 내렸다. 월요일부터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다음 날 멈췄다. 검은 구름은 여전히 하늘에 낮게 깔려 있었다. 그런 아슬아슬한 날, 선암사로 향했다.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은 이들이 많은지 주차장은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 눈 두는 곳마다 연두다. 주차장을 둘러싼 커다란 은행나무에 맺힌 자잘한 잎도 언제 노란 빛을 띠었나 싶다. 자그락거리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보이는 모든 봄에 시선을 주며.
절 안에는 꽃나무마다 사람 서넛은 매달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원색의 연등 사이로 떨어진 꽃잎이 마당, 연못 위를 분홍빛으로 물들여 놓았다. 같이 간 동생 사진을 몇 장 찍어 주고는 운수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발견한 이곳에서는 선암사의 연두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언덕을 오르자 커다란 느티나무가 보인다. 나무 옆 바위에 앉아 숲을 바라보는데 암자 쪽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암자에 노스님이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만난 적은 없었다. 툇마루에 앉아 남자와 얘기를 나누던 스님이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어정쩡하게 툇마루 한 귀퉁이에 앉았다. 어디서 왔는지 묻는다. 그러고는 관음전 벽화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끈한 배롱나무 아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숲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꾀꼬리 소리 때문이었을까? 스님의 은근한 삼배 제안을 받고 우리는 불당에 들어가 어설프게 절을 했다. 스님은 절 값으로 차를 내주려 했지만 시간이 없어 마시지 못했다. 다음에 들르겠다고 하고는 서둘러 내려왔다.
며칠 후 다시 들른 암자의 댓돌에는 털신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툇마루에 호두과자 한 봉지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언덕을 내려가는데 누빈 옷을 입은 스님이 지팡이를 느리게 찍으며 올라온다. 멈춰선 스님은 함께 간 지인과 나를 바라보며 또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기억이 안 나시냐고 물으며 웃었다. 차 한 잔 마시고 가란다. 또 시간이 없다고 답했다. 스님은 아쉬워하며 길을 오르고 나는 연두를 가득 담아 내려왔다.
스님, 절 값 받으러 언제 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