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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허물을 통해서도 주님은 선을 이루십니다.
사도행전 15:36~16:5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 속에 한 주간도 건강하게 잘 지내셨는지요? 이번 달 「생명의 삶」에 이런 내용이 소개되었습니다.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타트니가 1982년에 발표한 노래가 있는데, 노래 제목이 ‘에보니와 아이보리’(Evony and Ivory)라는 곡입니다. 에보니는 인도나 아프리카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단단하고 무거우며 검은 광택이 나는 나무입니다. 아이보리는 하얀 코끼리 상어입니다. 검은 색의 나무와 흰 색의 코끼리 상아가 합쳐진 악기가 무엇일까요? 네. 피아노입니다. 에보니와 아이보리는 각각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흰색 건반을 지칭합니다. 이 노래는 폴 매카트니가 시각 장애를 가진 흑인 가수 스트비 원더와 듀엣으로 불렀습니다. 검은 색 건반과 흰색 건반이 어울린 피아노처럼, 검은 색 피부와 흰색 피부가 서로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노래인 거지요. 가사는 이렇습니다.
에보니와 아이보리/ 완전한 화음을 이루며 함께 살아가지요./ 내 피아노 건반은 나란히 놓여서/ 오 주님, 우리는 왜 안 되지요?/ 모두 압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을 똑같고/ 모든 사람에게는 선함과 악함이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생각하라」. 정한조, 홍성사, 2015/ 「생명의 삶」, 두란노, 2018, p. 85에서 재인용.
하나님의 나라는 나 혼자 이루어 갈 수 없습니다. 나와 너, 우리가 하나가 되어 함께 이루어가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요즘 묵상하고 있는 사도행전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동역했던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마다 출신배경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동역했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본문은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방선교의 전초기자라고 할 수 있는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고 갈라디아 지방에 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일행은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마치고 다시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36절에 보면, 그들이 안디옥에 머무른 지 며칠 후에, 바울은 바나바에게 두 번째 전도여행을 제안합니다. 자, 바울이 바나바에게 두 번째 전도여행을 제안했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한 음성으로 36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두 번째 선교여행의 동기는 첫 번째 선교여행 지역을 재방문하여 세워진 교회들을 둘러보고 성도들의 믿음을 돌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동기를 가지고 출발한 선교여행이었지만, 이 여행은 출발부터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문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의견다툼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두 번째 선교여행에 자신의 생질이었던 마가 요한도 함께 데리고 가기를 원했지만, 바울은 첫 번째 선교여행에서 중도하차했던 마가 요한과 함께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첫 번째 전도여행에서 왜 마가 요한이 중간에 하차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기 때문에 그 이유를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나바와 바울의 성품을 예측해 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나바는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존경받던 사람일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기피하던 바울을 안디옥교회에 불러 말씀을 가르칠 수 있도록 세워주었던 사람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원칙에 충실했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보기에 마가 요한처럼 유약한 사람이 두 번째 전도여행에도 동행한다면 전도여행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 중에 누구의 생각이 더 옳았는지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갈라서게 됩니다. 바나바는 생질이었던 마가 요한을 데리고 고향이었던 구브로 섬으로 돌아갔습니다. 홀로 남겨진 바울은 또 다른 일행으로 실라를 택했고 나중에는 디모데까지 전도대에 합류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로 구성된 두 번째 전도대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과 결별을 다음과 같은 견해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 어떤 분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결별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둘의 결별은 매우 실용적이었고, 하나님의 선교에 적합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혹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이 교회의 분열에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될 때 세상에 온전히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다 하나가 되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님을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주님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을 보면서, 연약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의 바나나도, 원칙에 충실하고자 했던 바울도, 저와 여러분도 모두 연약한 인간입니다. 제가 보기에 바나바는 어린 마가 요한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상당히 컸던 것 같습니다. 또 바울은 불타는 세계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가 요한은 그 비전을 이루는데 부족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생각과 판단이 어떠하건, 중요한 것은 우리 인간은 모두 부족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 가운데, 바울은 루스르라 성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하였는데도 그가 왜 다시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더군다나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곧바로 안디옥으로 돌아가지 않고 왜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지역의 교회들을 재방문하려고 했는지도 살펴보았습니다.
솔직히 저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루스드라 성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번하다 깨어났으면, 저 같으면 트라우마가 생겨서 아마 루스드라의 ‘루’자만 나와도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을 것입니다. “왜 내가 그 딴 성에 들어가? 또 죽으려고? 아니야. 난 그럴 수 없어. 난 오래 살아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돼.” 아마 저 같으면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저 같은 심정이지 않겠습니까? 저에게도 살면서 몇 번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이 두려움 때문에 그 장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을 때가 몇 번인지 모릅니다.
이번 달 생명의 삶을 읽다보니까, 어느 교회 부목사님이 그 교회 담임목사님께 많이 혼이 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읽어보니까, 새로 교회에 등록한 신자 가운데 룸살롱을 개업하는 신자가 있어서 부목사님에게 개업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가 이 부목사님이 그런 곳에서는 도저히 개업예배를 인도해 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얼마나 강심장이시던지, 그 사실을 알고 그 영혼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인데, 왜 개업예배를 드리러 못하느냐고 부목사를 혼내시더랍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님이 직접 개업예배를 드리러 갔더니, 룸에 대기하고 있던 열댓 명의 아가씨들이 사장님의 VIP가 오셨다고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그 아가씨들을 내보내고, 롬살롱 사장인 교인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를 괴롭혀 왔던 인생의 이야기들을 다 들어주고,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감수하며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예수님을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분이 룸살롱을 정리하고, 신문사 지국을 인수해 땀 흘려 일하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모범적인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에 붙잡힌 전도자」, 김인중, 규장, 2011/ 「생명의 삶」, 두란노, p. 77에서 재인용.
여러분, 제가 이 목사님 이야기를 듣고 그 담임목사님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저 같으면 그렇게 못할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솔직히 그 목사님과 같은 담대함과 영혼 사랑의 마음이 부족합니다. 성도가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가야 한다는 믿음의 야성을 가진 목사님의 생각도 귀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담임목사께 혼나는 부목사의 마음도 공감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믿음의 야성을 가진 분만 사용하시는 분도 아니고, 그렇지 못한 부목사님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모두 부족한 자들입니다.
과연 부족한 우리를 들어 사용하시는 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왜 바울과 바나바를 귀하게 사용하셨을까요?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을 특별히 귀하게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사람은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결별한 후 새로 파트너로 뽑은 사람은 실라였습니다. 이 둘은 첫 번째 전도여행지였던 더베와 루스드라를 방문하였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젊은 디모데를 만나 전도대 멤버로 합류시킵니다. 너무나 파격적인 스카우트 아닙니까?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바울은 젊은 디모데를 뽑았을까요?
사도행전 16장 1,2절에 보면, “그의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2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이 육신적으로 디모데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낳아 아들을 삼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첫 번째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성 밖으로 던져질 때, 그 일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이 디모데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영적 아들이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디모데는 성도들에게 그의 믿음과 인품이 칭찬받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난지 팔일 만에 언약의 자녀라는 증표로 남자 아이의 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이 아닙니까?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의 자긍심을 율법과 할례에서 찾을 정도로 할례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알았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바울은 오직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선언하였습니다. 오히려 할례를 행하여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이 왜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했을까요?
디모데의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였지만,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디모데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만약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디모데의 무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오히려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여 복음전파의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바울은 판단한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의 문제를 구원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전략으로 유연성 있게 접근한 것입니다.
바울은 바나바에 비해 원칙을 더 강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더 원칙주의자였다는 말은 바나바에 비해 사람을 포용하는 일에 더 인색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바울보다 바나바가 훨씬 더 사람을 잘 세워주고 인정해 줍니다. 그래서 바울보다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면 훨씬 더 자존감도 높아지고, 모든 일이 한 결 수월해 집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사람은 원칙을 강조하기에 인기가 없어 보이지만, 바울의 원칙은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원칙이었습니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으로 대두될 때에는 목숨을 걸고 싸워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수호했습니다. 그러나 할례가 구원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 전략적 문제라면, 과감히 헬라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여 유대인 전도의 접촉점을 마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중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마가 요한이 싫어서 그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은 더 원대한 세계선교의 비전 때문에 그를 반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바나바보다 사람을 품는 포용력이 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노년의 바울은 마가 요한을 인정하였습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서, 바울은 바나바의 생질 마가를 언급하면서, 마가 요한이 이르거든 그를 영접하여 잘 대접할 것은 부탁합니다. 또 바울이 가장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고 당부할 정도로 마가 요한에 대한 애정의 마음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 비전과 원칙을 강조하던 분들이 노년에는 더 넓은 포용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보통 말 한 마리가 끌 수 있는 짐은 3,175kg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계산을 해 보십시오. 두 마리의 말들이 끌 수 있는 짐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두 배인 6,350kg 정도 되겠지요? 그러나 조련사들이 말 두 마리를 묶어서 잘 훈련시키면 네 배가 되는 11,340kg의 짐을 끌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내 생각만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주변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물론 하나님 앞에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결단했던 바울의 열정이 있었지만, 그의 주변에는 묵묵히 그를 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나바, 마가 요한, 실라, 디모데와 같은 소중한 동역자들이 바울과 함께 팀으로 일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또 어떤 결단이 듭니까? 여러분의 삶을 이끄는 원칙은 무엇입니까? 또 여러분이 더욱 품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각자 생각해 보시면서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시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