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상에서 맞닥뜨린 가슴 먹먹한 순간들, 소소한 기쁨과 삶의 환희, 문득 찾아오는 우울함과 돌이킬 수 없는 후회의 순간, 내재되어 있는 은밀한 욕망 등 가슴 깊은 곳에서 우리도 모르게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들을 대면하도록 안내한다. 작가들이 다루는 일상의 그림을 통해 무심히 흘려보냈을 일상의 한 장면을 비로소 오랫동안 응시하는 시간을 가지며, 익숙한 우리의 공간을 낯설게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하루, 24시를 보낸 삶의 흔적과 그 상처들을 드러낸 그림들은 ‘나도,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고 다독이며 따뜻하게 위로한다.
현실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화가들의 시선을 통해
주어진 하루의 삶을
치유하고 보듬다!
작가란 존재는 자신의 삶에서 유래한 모든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명하는 이들이다. 미술 내적인 문제를 비롯해 여러 주제, 관심들을 다루는 경우도 많지만 특히 자신의 삶, 일상을 주목하고 이를 형상화하는 경우도 무척 많다. 자신의 일상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들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몸이 기울어가는 이들이 예민한 예술가들이다. 화가란 존재는 바라보는 자이고,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그림은 한 작가가 바라본 세계의 단면이고 그를 통해 사유한 결과가 침전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작가들이 다루는 일상은 자신을 둘러싼 삶에 대한 반성이자 주어진 현실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고 동시에 자기 존재를 일정한 거리를 갖고 조망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연유할 것이다.
응시는 많은 생각을 거느리고 반성의 시간을 동반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무심히 흘려보냈을 일상의 한 장면을 비로소 오랫동안 응시하게 된다. 다시 바라보게 된다. 미술작품은 우리에게 일상의 익숙한 곳을 무척 낯설게 보여준다. 그 낯설음을 통해 우리는 비근하고 익숙한 풍경이 내포하고 있는 모종의 진실을 읽게 된다. 한없이 무력하고 일상에 지친 피곤한 눈을 가진 한 개인의 비판적 상상력, 환각으로 인해 그려진 현실의 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조금씩 자신의 일상, 하루의 삶을 치유하고 보듬는 내성을 쌓아갈 것이다. 그게 힘이 되어 다시 생을 밀고 나갈 것이다. 오늘 하루를 눈물겹게 살아갈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떼지어 들어선 사람들은 다소 느리게 온다고 생각되는 지하철을 마냥 초조하게 기다리며 시계를 들여다보고 조바심을 낸다. 다들 예민해져 있다. 모두들 전철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이런 풍경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어딘지 슬픈 풍경이다. 짐짝처럼 실려 갔다가 풀려나는 한순간을 견디면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덮쳐드는 거대한 철로 이루어진 기구에 몸을 의탁해 어디론가 떠나갈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전철이 없는 일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 p.70 「도시의 속도」
슬프다는 것은 일회적 삶을 사는 우리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을 상처처럼 떠올릴 때이기도 하고 내가 본 이 풍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다. 가끔 내 앞에 있는 저 사람, 대상을 다시는 못 보리라고 분명히 예감할 때 조금 슬프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우리는 사라지기 직전에 기적처럼 살아 이렇게 걷고, 보고, 느낀다.
--- p.91 「오전 11시 41분, 기억의 수집」
삶은 자신에게 부여된 공간과 시간을 견디는 일이다. 그로부터의 탈주를 부단히 꿈꾸지만 매번 낙담하고 절망하며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누추한 몸들을 기억해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기다. 이런 식의 삶이 아닌 다른 식의 삶을 격렬하게 품어본다. 더없이 지루하고 권태롭고 그래서 사는 게, 일이 너무 지긋지긋해질 때 잠시 손깍지를 끼고 다른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몽상에 잠겨보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과 잔머리로 무겁고 버거운, 물먹은 솜이불 같은 머리를 몸 밖으로 빼낸 후에 그렇게 텅 빈 눈으로 바라본다. 그 눈으로 누군가의 존재를 간절히 호명해본다. 권태와 고독이 마냥 두려운 가련한 동물인 인간은 그래서 수시로 사랑과 소유의 외피를 두르고자 한다.
--- p.136 「권태에 관한 몇 가지 충고」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태양이 사라지면서 마지막으로 뿜어내는 그 빛에 의해 적셔진 세계의 풍경은 황홀하다. 오로지 그 시간의 풍경만이 아름답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은 찰나적이다. 그 짧은 순간에 세상이 자아내는 색채는 모든 언어와 문자, 이미지를 무력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 시간은 사람들에게 드디어 오늘 하루가 지워지고 있음을 초조하게 알리는 신호와도 같다.
--- p.226 「하루가 지워지는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결국 부처가 아니겠느냐는 메시지로 들린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결국 진정한 보살이라는 의미가 서늘하게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불 속에 누워 잠든 이들 부부가 순간 운주사의 와불처럼 다가온다. 영락없이 닮아 있다. 작가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가난하지만 따스하고 착한 마음을 지닌 민중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본다.
--- p.286 「즐거운 일기」
달은 슬픔과 처량함, 스산함과 적막함과 더 밀접해 보인다. 달은 어딘지 쓸쓸하고 아련하고 슬프고 적막해야 제 맛이다. 지치고 힘들고 고독한 이들이 고개를 들어 저 달을 본다. 거기 위안처럼 달이 떠 있다. 세상에 속하지 못해 세상을 등지고 싶은 이들에게 달은 안식처를 제공한다. 특히나 이런 식의 삶에 대해 저항하고 슬픔의 힘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에 위로의 시선을 던지는 예술가들에게 달은 그 어떤 것보다 영감과 상상력의 근원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도시의 밤에 저 달 하나가 있어 그나마 사람들은 위안을 얻는 것이다.
--- p.309 「거기 위안처럼 달이 떠 있다」
[예스2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