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관점주의, 세계를 구성하는 해석의 힘
내 서재 속 고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음 장희창 옮김/민음사 펴냄(2004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지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사람들보다 더 자유롭다고 확신한다. 물론 현재 우리의 삶이 외관으로 보아 과거보다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본과 권력이 동거를 지속하는 지금, 우리의 자유는 사실 자연농원에 갇힌 동물들의 자유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물론 과거처럼 답답한 철창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철창이 확장되고 철창 내부를 자연 상태와 유사하게 꾸민다 한들 철창은 철창일 뿐이다. 자유로운 것 같지만 여전히 갇혀 있다는 사실. 제한된 것만을 하도록 허락된 자유의 상태. 자유정신이 어떻게 이런 허구적인 자유를 긍정할 수 있겠는가? 살아 있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이 자유정신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지성사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사람, 역으로 말해 주어진 사회를 가장 답답한 구속으로 느꼈던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라는 철학자를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갇혀 있지만 갇혀 있는 줄 모르는 이웃들, 혹은 갇힌 줄 알지만 그것에 익숙해진 이웃들의 정신을 깨우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철학자이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우상의 황혼>에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방법’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것도 우연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니체는 살아 있는 존재가 억압되고 구속되어 위축되어 있는 것을 제 일처럼 고통스럽게 생각한 철학자였다.
그의 <유고>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좋은 것은 무엇인가? 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인간 안에서 힘 그 자체를 증대시키는 모든 것. 나쁜 것은 무엇인가? 약함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 행복이란 무엇인가? 힘이 증대된다는 느낌, 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
여기서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누군가를 억압하려는 권력욕이라고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힘에의 의지는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표현할 수 있는 생산력, 혹은 유쾌하고 쾌활한 삶의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니체가 원했던 것은 단순하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생산력과 생명력을 억압하는 일체의 구속과 저항을 극복하는 것이다.
니체에게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수많은 저서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 적지만 대중적인 명성을 부여한 책은 뭐니뭐니해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자신의 철학을 논문이나 잠언 형식으로 노골적으로 표현했던 그의 책들은 대중에게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문학적 형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피력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의 예측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뒤에 대중의 관심을 받았고 그 결과 지금도 중요한 고전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만약 이 책이 없었다면, 니체는 지금처럼 영향력을 자랑하는 철학자로 기억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의 생명력을 보존하기 위해
그에 해당하는 해석을 부여한다
인간은 가치 평가를 수행하는
창조자로 정의되었던 것이다
창조자만이 삶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기존의 해석 체계를
끊임없이 파괴할 수밖에 없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관통하는 근본 정신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시 그의 유고 한 대목을 읽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세계의 가치는 우리의 해석 속에 있다는 점;
지금까지의 해석들은 우리가 힘을 증가시키기 위해 생명, 즉 힘에의 의지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관점주의적 평가들이라는 점;
인간의 모든 향상은 편협한 해석들의 극복을 수반한다는 점;
힘의 강화나 증가는 새로운 관점들을 열어놓고, 새로운 지평들을 믿게 한다는 점.
이런 생각이 나의 저작들을 관통하고 있다.”
자신의 생명력, 즉 힘에의 의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에 해당하는 해석을 자신과 세계에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니체 철학의 핵심이다. 결국 그에게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두 가지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하나가 개체의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해석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것을 강화시키는 해석일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전자를 해체하고 후자를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니체의 유명한 관점주의(perspectivism)다. 자본주의 문명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력은 1.5면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렇지만 수천년 전 인간의 시력은 거의 10에 가까웠다고 한다. 현재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과거 인간들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면서 “나뭇가지에 벌레가 있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10의 시력을 가진 사람의 세계가 1.5의 시력을 가진 사람의 세계와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지만 10의 시력을 개인이 요구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다. 그건 오랜 진화의 결과로 개인의 힘을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이 한 가지 소망스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간 개체들마다 새로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해석의 힘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다른 생물들과 달리 인간의 세계, 혹은 인간의 관점은 단기적인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서만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킬 수 있는 다른 생명체들과 달리, 오직 인간만은 자신의 생애 내에서도 수차례의 관점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사실. 이것만큼 인간에게 다행스런 일도 없을 것이다. 이런 능력 때문에 생물학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해도, 인간은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양한 해석 체계들의 변화가 바로 역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새로운 해석 체계, 혹은 관점들을 창조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기존의 해석 체계가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힘에의 의지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새로운 해석 체계를 꿈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다음 구절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그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에 가치를 부여해왔다. 먼저 사물들에 그 의미를, 일종의 인간적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들 자신을 ‘사람’, 다시 말해 ‘가치를 평가하는 존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 평가, 그것이 곧 창조행위다. 귀담아듣도록 하여라. 창조하는 자들이여! 평가된 모든 사물에게는 가치평가 그 자체가 가장 소중한 보물이요 귀중한 물건이니. 평가라는 것을 통하여 비로소 가치가 존재하게 된다. 그런 평가가 없다면 현존재라는 호두는 빈껍데기에 불과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사물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니체의 말이 중요하다. 사물에 부여한 가치는 새로운 해석 체계, 혹은 새로운 관점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가치 평가를 수행하는 자”, 다시 말해 “창조자”로 정의되었던 것이다. 오직 창조자만이 자신의 삶을 보존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기존의 해석 체계를 끊임없이 파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에 창조자가 현실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자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니체는 반문할 것이다. 진정한 허무주의자란 자신이 힘에의 의지가 약화되는지도 모르고 기존의 해석 체계를 답습하는 일반 사람들 아니냐고 말이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세계에 대한 해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자다. 만약 제대로 새로운 해석 체계를 창조했다면, 우리는 자신이 가진 힘에의 의지,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표현을 빌리자면 코나투스(conatus)가 증진되었다는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해석 체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해석 체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해석 체계를 창조하려면 주변의 질시와 동시에 고독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면에서 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일종의 철학적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남의 해석 체계로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이 자신만의 해석 체계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 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