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조상군의 남편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기단부는 單層基壇으로, 지대석에는 角形 2단의 기단면석받침이 있다. 基壇面石은 4매로 결구되었는데, 탱주는 없고 각각 1주의 우주만 표현되어 있다. 기단갑석은 동면에 구멍을 뚫어 문비처럼 표현하였고, 上面에는 원형사리공이 있다. 특히 2 ․ 3층탑신석보다 비례상 높이가 높으며, 각층 탑신석에는 우주가 있다. 옥개석 낙수면 경사는 다소 급하며, 모두 3단의 옥개받침과 각형 1단의 탑신받침이 있다. 轉角과 合閣線에는 風鐸孔이 있으며, 隅棟이 표현되어 있다. 3층옥개석 상면에는 擦柱孔이 있으며, 높이는 4.4m이다. 특히 이 석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옥개석의 내림마루(隅棟)가 백제석탑 양식인 두툼하게 조각되어 있어서 백제양식의 석탑으로 분류할 수 있겠다.
單層基壇과 탱주가 생략된 面石, 別石의 탑신받침, 1층탑신석의 門扉式 표현, 그리고 3단의 옥개받침과 1단의 탑신받침이 마련된 옥개석 등으로 보아 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탑 북쪽으로는 ‘ㄱ’자형 석축과 石燈址가 있다.
<2006. 6. 11>
첫댓글 남산 탑곡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유산 '경주 남산 탑곡 제2사지 삼층석탑')은 신라의 수도 경주에 위치하지만, 전형적인 신라 양식이 아닌 백제계 석탑 양식을 강하게 띠고 있어 학술적으로 대단히 흥미롭고 중요한 석탑이다.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후반 이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201호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이 조각된 거대한 부처바위 남쪽 정상부에 서 있으며, 이 석탑으로 인해 이 골짜기가 '탑골(탑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통일 이후 백제 지역 유민이나 석공 기술의 교류가 경주 남산 일대까지 영향을 미쳐 신라 석탑 형태에 백제 고유의 건축적 요소가 혼합된 대표적 사례이다.
신라 전형 석탑이 2층 기단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단층 기단 위에 탑신을 올렸다.
얇고 넓은 지붕돌이 전반적으로 얇고 길게 뻗어 나가며 끝이 살짝 들려있어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등 백제계 석탑 특유의 경쾌함과 목조건축적 조형미를 보여준다.
옥개석 밑의 받침 층급이 신라식처럼 두껍지 않고 단수(단 수)가 낮으며 얇게 처리되었다.
1층 몸돌(탑신)이 높고 2·3층으로 가면서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특유의 비율을 가져 통일신라 고유의 엄격한 정형미보다는 백제계 석탑의 자유롭고 목조적인 조형성이 강조되었다.
지붕돌(옥개석)의 경사면 네 모서리 선을 따라 굵고 완만하게 솟아오른 우동마루 형태가 뚜렷하게 관찰된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은 지붕돌 윗면이 밋밋한 평면 경사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반면, 목조건축의 형태를 충실히 반영한 백제계 석탑이나 백제 양식의 영향을 받은 석탑들에서는 지붕돌 모서리의 우동마루를 뚜렷하게 돋아나게 조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동마루를 따라 내려온 지붕돌 끝(전각) 부분이 둔탁하게 끝나지 않고 살짝 위로 반전되듯 들려 있어, 돌탑임에도 불구하고 목조 지붕 특유의 둔하지 않은 경쾌한 미감을 자아낸다.
탑신 남쪽면에서 관찰되는 선명한 자국은 돌을 쪼개거나 다듬을 때 생긴 쐐기 자국(야질, 矢穴 흔적)이다.
야질(쐐기 자국)은 석탑을 새로 만들기 위해 원석을 채석할 때 생긴 것이 아니라, 탑이 도괴되어 넘어져 있던 상태에서 그 석재를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거나 파괴하려고 쪼개려 했던 흔적이다.
석탑이 오랜 세월 도괴되어 방치되어 있었던 당시, 깨지거나 넘어져 있던 초층 탑신석의 부피가 크다 보니 이를 쪼개어 건축 자재나 다른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훗날 누군가가 쐐기 구멍(야질)을 낸 것이다.
다행히 쐐기를 박아 돌을 완전히 두 동강 내기 전에 작업이 중단되었고, 그 결과 쪼개지다 만 야질 흔적이 초층 탑신 남면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훗날 흩어진 부재들을 모아 석탑을 다시 복원하면서, 이 훼손 흔적이 남아 있는 초층 탑신 부재를 그대로 원래 위치에 조합하여 세우게 된 것이다.
단층기단이 백제탑의 요소이긴 하나 이 탑의 단층기단은 백제적 요소라기보다는 신라적 요소가 더 강하게 남아 있다. 특히 이같은 양식의 단층기단이 문경지방에 많이 남아 있다.
백제계 요소(옥개석의 표현 등)와 별개로, 이 탑의 단층기단 구조는 통일신라 후기 신라 석탑의 변화 양식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는 부분이다.
문경을 비롯한 경북 북부 지역은 이러한 '신라 하대 단층기단 석탑'의 대표적인 집중 분포지이다.
통일신라 전형 양식(불국사 석가탑 등)은 2층 기단을 기본으로 하나, 9세기(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지방으로 탑이 확산됨에 따라 구조 단순화·간소화 현상이 일어난다.
이 시기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드는 단층기단화는 백제 석탑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신라 지방 양식의 양식적 수축 및 변화 과정에서 나타난 신라 자생적 현상이다.
남산 탑곡 삼층석탑은 지붕돌(옥개석)의 우동마루 등에서 백제계 목조 조형 기법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단부에서는 문경 지역 석탑군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9세기 신라 지방 석탑(단층기단)의 양식을 결합하고 있다. 백제적 미의식과 신라 하대의 구조적 변화가 절묘하게 융합된 매우 흥미로운 사례이다.
단층기단 석탑의 최초 작례는 남산 용장사지 삼증석탑으로 추정된다.
묭장사탑은 단층기단이지만 남산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세워진 탑이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이 '2층 기단(이중기단)'을 기본 틀로 고수했던 것과 달리,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하층 기단을 과감히 생략하고 자연 암반 위에 바로 상층 기단(단층 기단)을 올린 구조를 취한다. 이러한 시도가 훗날 신라 하대 지방으로 확산되는 단층기단 석탑 양식의 아주 중요한 선구적 작례로 꼽힌다.
인공적인 하층기단 대신 산 정상부의 거대한 자연 암반(바위)을 하층기단으로 대용했다. 이 덕분에 높이는 약 4.4m에 불과함에도, 마치 '경주 남산이라는 산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서 있는 세상에서 가장 큰 탑'과 같은 시각적·종교적 압도감을 갖추게 되었다.
탑곡 삼층석탑을 비롯해 문경 등 지방으로 이어지는 단층기단 석탑의 흐름은,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활용해 신라 석탑의 규범을 조형적으로 파격 전환했던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의 독창적 기법에 그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사학계에서는 경주 및 신라 본토 일대에 남은 백제계 양식 석탑들을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주로 9세기 신라 하대)의 작품으로 파악한다.
백제 옛 땅(충청·전라 지역)과 경주 지역에 백제계 석탑이 나타나는 시기와 배경에는 명확한 역사적 시차가 존재한다.
백제 옛 땅의 백제계 석탑은 고려시대의 '백제 양식 회고(복고)'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며, 경주의 백제계 석탑은 통일신라시대(9세기) 교류에 따른 '양식의 융합과 이식'으로 나타난 결과물이다.
삼국통일 이후 백제 지역의 석공 기술과 조형 기법이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유입되었다.
신라 하대(9세기)에 이르러 경주 남산 탑곡 삼층석탑,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서악동 삼층석탑 등에서 볼 수 있듯, 신라 석탑의 기본 틀(단층기단 등) 위에 백제 석탑 특유의 얇은 옥개석, 전각의 반전, 우동마루 표현 등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나타난다.
통일신라라는 단일 문화권 안에서 이루어진 신라·백제 석탑 양식의 융합 과정을 보여주는 통일신라시대의 유산으로 본다.
백제 옛 지역의 백제계 석탑은 10세기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각 지방의 재능 있는 장인들이 독자적인 지역 양식을 발전시키는 '지방화' 현상이 일어났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나 익산 미륵사지 석탑 같은 '원형 백제 석탑'의 멋을 그리워하던 옛 백제 지역(충청·전라) 주민들과 석공들이 옛 백제 양식을 적극적으로 회고하여 재현(백제석탑의 복고적 계승)했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나 익산 미륵사지 석탑 같은 '원형 백제 석탑'의 멋을 그리워하던 옛 백제 지역(충청·전라) 주민들과 석공들이 옛 백제 양식을 적극적으로 회고하여 재현(백제석탑의 복고적 계승)했다.
이 탑을 순수한 의미의 '백제탑'으로 정의하기보다는, 신라 석탑이라는 큰 뼈대(구조) 위에 백제계의 장식적·조형적 기법(의장)이 부분적으로 가미된 탑으로 파악하는 것이 미술사학적으로 가장 타당하다.
전체적인 탑의 형태와 1~3층으로 올라가면서 일정하게 줄어드는 비례감은 통일신라 삼층석탑 고유의 안정감을 따르고 있다.
9세기 신라 지방 석탑(용장사지 석탑, 문경 지역 석탑 등)에서 확립된 신라 하대의 기단 양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 텁의 백제적 요소는 지붕돌에 반영된 세부 의장
우동마루와 지붕돌(옥개석) 수법이 신라 석탑의 밋밋한 지붕선과 달리, 지붕돌을 비교적 얇게 뻗치고 모서리에 도드라진 우동마루를 조각한 점, 전각(지붕 모서리 끝)을 살짝 들게 한 점 등은 목조건축을 적극적으로 번안하던 백제 석공들의 기법적 잔재이다.
"신라 석탑의 구조적 규범을 기본 바탕으로 삼되, 백제계 목조 조형 감각의 세부적 미의식을 부분적으로 적용한 융합형 신라 석탑"으로 정의할 수 있다.
늠비봉 오층석탑은 "백제 석탑의 공간적·조형적 틀"이
높고 경쾌한 5층의 체감률, 넓게 펼쳐진 지붕돌, 목조 건축의 기둥처럼 수평적·수직적 분할을 보여주는 구조를 통해 백제 석탑 고유의 전체적 비율과 목조건축적 조형미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탑곡 삼층석탑을 통해서는 "백제 석탑의 세부 디테일(디테일의 기술)"을 파악할 수 있다.
신라 삼층석탑의 단정한 몸체 위에서 지붕돌(옥개석) 상면의 도드라진 우동마루, 얇은 옥개받침, 지붕 모서리의 살짝 들린 전각만을 떼어내어 관찰할 수 있다.
즉, "백제 석탑의 지붕돌 표현 기술이 신라 석탑과 만났을 때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를 부분적으로 추출해 보기에 가장 최적화된 예시이다.
'전체 틀을 백제식으로 가져온 탑(늠비봉)'과 신라식 틀 안에 백제적 기법을 포인트로 담은 탑(탑곡)'을 한 무대(경주 남산) 위에서 서로 대조해 보는 것은, 백제 석탑의 본질인 '목조건축의 번안(飜案)과 지붕선의 미학'을 가장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최고의 비교 감상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