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耳東風
{S48:10}
[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so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 pe ... citte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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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念根이란 무엇인가?
II-i. 과거에 행한 것이나 말한 것을 기억(saritā anussaritā)하는 자.
단 聰記(nepakka)와 결합된 기억.
II-ii. 이러한 자가
身(受心法)을 지켜보면서 산다(anupassī viharati).
가. 열심인 자(ātāpī)
나. 즉각 알아차리는 자(sampajāno)
다. 기억을 지니는 자(satimā)
라. 세상에 대해서 탐하거나 불만을 操心하고서(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III. 위의 [II-i & II-ii.]가 念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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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에서 사띠(念)가 하는 기능(根)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이외의 정의는 없습니다.
단순히 어떤 과거의 사건을 기억한다고 해서 모두 正念은 아닙니다.
身(受心法)을 지켜보는 것(anupassī viharati)를 말합니다.
또한 가. 정진과 나. 반야지혜와 다. 기억과 라. 戒(혹은 삼매)
즉 精進-念-定-慧의 5根(믿음은 당연히 포함되었다고 봄)의 도움을 받는 기억(念)입니다.
즉 이 기억은 身(受心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말하고
이 기억(念)에 의해서 이러한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作意)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念)이, 즉 주의를 기울이는 것(作意)은 아닙니다.
두 가지 법은 의미도 다르고 기능도 다릅니다.
또한 기억(念)이 精進-定-慧도 아닙니다.
이러한 세 가지 법도 역시 의미도 다르고 기능도 다릅니다.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sati는 기억(念)이라는 의미입니다.
혹자는 결국은 慧, 즉 여실지견을 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만
精進이나 定을 위한 것이라고도 하는 것이 오히려 바를 것입니다.
그 이유는 [身(受心法)을 지켜보면서 산다(anupassī viharati)]는 4念處
혹은 4處(身受心法)에 대한 念은 正念이라고 하고
이러한 正念은 正精進과 正定과 함께 定蘊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의견은 慧(sampajāno, nepakka) 혹은 如實知見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알아차림'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하는데
일단은 正念은 定蘊에 속합니다.
다만 그냥 念이 아니라 正念이 되는 이유가
이러한 慧(sampajāno, nepakka)의 도움을 받은 念이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혜의 도움을 받은 正念에 의해서 內로 三昧에 듭니다.
여기까지가 일차적인 正念의 역할입니다.
이렇게 바른 (색계) 삼매에 혹은 욕계 (찰나) 삼매에 들게 되면
삼매에 드는 만큼 知見이 생겨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경문에서는 [外<他>로 알고 봄(知見)이 생겨난다]고 말합니다.
즉 마치 강 건너 불 보듯이 남의 물건을 쳐다보듯이 그렇게 알고 보게 된다고 합니다.
이때가 正念의 그 다음 순서의 역할입니다.
이 말은 대상으로 향하게 하던 역할을 하던 念이
대상을 여실知見하는 역할을 하는 念이 되었다는 말이고
여기서 念의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이렇게 知見한 사건을 또 다시 念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知見한 내용이 心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지 싶습니다.
이것이 確立이고 待期된 상황입니다.
여기서 더 진행되는 것이
[ sammādiṭṭhikassa, bhikkhave, sammāsaṅkappo pahoti, sammāsaṅkappassa sammāvācā pahoti,
sammākammanto pahoti, sammākammantassa sammāājīvo pahoti,
sammāājīvassa sammāvāyāmo pahoti, sammāvāyāmassa sammāsati pahoti,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를 가진 자에게 바른 사유가 생긴다.
바른 사유를 하는 자에게 바른 말이 생긴다. 바른 말을 하는 자에게 바른 행위가 생긴다.
바른 행위를 하는 자에게 바른 생계가 생긴다. 바른 생계를 가진 자에게 바른 정진이 생긴다.
바른 정진을 하는 자에게 바른 마음챙김이 생긴다.]
sammāsatissa sammāsamādhi pahoti,
sammāsamādhissa sammāñāṇaṃ pahoti,
sammāñāṇissa sammāvimutti pahotī”ti.
바른 마음챙김을 가진 자에게 바른 삼매가 생긴다.
바른 삼매를 가진 자에게 바른 지혜가 생긴다.
바른 지혜를 가진 자에게 바른 해탈이 생긴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띠는 기억입니다. - 이 이외의 설명은 없습니다.
4처에 대한 사띠가 正念입니다. - 이 이외의 설명은 없습니다.
正念에 의해서 正定이 생겨납니다. - 이 이외의 설명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正念 수행에 의해서 바로 색계 선에 들지 못하고
아직 온전하게 初禪에도 들지 못하여 그 경계선에 있는 삼매도 있을 수 있지 싶습니다.
正念수행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내용이 경문에 종종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그 경계지점에서도 알고 봄이 생겨나는 것이
(감각적 욕망을 아직 벗어나지 못한) 예류자의 知見으로 생각되고
이러한 見에 의해서 유신견 등이 제거되는 것으로 짐작합니다.
최종적으로 반복해서 의견을 말씀드리면
- 이 이외의 설명은 없습니다.
사띠는 기억입니다.
4처에 대한 사띠가 正念입니다.
4처에 대한 사띠는 定蘊에 속합니다.
첫댓글
kattha ca, bhikkhave, satindriyaṃ daṭṭhabbaṃ?
catūsu satipaṭṭhānesu — ettha satindriyaṃ daṭṭhabb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마음챙김의 기능은 어디서 봐야 하는가?
마음챙김의 기능은 여기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확립이 아니고 토대/대상에 대한 기억>에서 봐야 한다.
빠알리사전을 봐도 기억, 주의 모두 가능한 해석으로 나오더군요.
기억하려면 주의기울임이 필요하고 그 역도 마찬가지 아닌가 합니다.
사띠에 대해 몇년 째 공들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봄봄님이 올려주신 사띠 자료 잘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공부하신 내공을 공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부분 저도 동의하고 ... 봄봄님의 노력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_()_
// 사띠는 기억입니다.
4처에 대한 사띠가 正念입니다.
4처에 대한 사띠는 定蘊에 속합니다... //봄봄님
봄봄님의 이 말씀은 아래의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지요?
사띠는 기억입니다.
신수심법 4념처에 대한 기억이 正念입니다.
신수심법 4념처에 대한 기억은 定蘊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 우리는 필정도의 正念을 얻기 위해
신수심법 4념처에 대한 기억을 해야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요?
예를 들면 ... 신념처의 호흡수행에서
<이것은 들숨이다>라고 기억하고
<이것은 날숨이다>라고 기억만하면 ...
그것이 바로 正念이고... 그 기억이 定蘊으로 이어질까요?
염처경(M10)에서는
<그는 마음챙겨 숨을 들이쉬고 마음챙겨 숨을 내쉰다>
So sato va assasti. sato passasati>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
Dīghaṃ vā assasanto :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꿰뚫어 안다. >
Dīghaṃ vā passasanto :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자는 기억(sati)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기억(sati)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나온 뒤에
숨을 길게 들이쉬거나 내쉴 때는 <기억인 sati>가 아니라
<분명히 안다는 pajānāti>가 나옵니다.
@해맑은 여기서...
<기억>인 sati는 어떻게 <분명히 안다> <꿰뚫어 안다>는 의미의 pajānāti로 연결될까요?
그리고 필정도의 正念과 定蘊을 얻는데는
기억인 sati만 있으면 될까요?
아니면 pajānāti나 sampajāna도 필요할까요?
우리 모두 함께 연구해보면 좋은 결론이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