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화사, 소개령 後 토벌대에 전소
한국전쟁 당시 육군 숙영지 전락
글 : 한금순(제주대 외래교수)
법화사는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조계종 제23교구본사 관음사 말사다.
제주4.3사건 시기 법화사는 소개령으로 법당과 요사채를 비우고 부처님을 모시고 하원 마을 안으로 들어가 초가로 절을 짓고 살았다. 장한택 스님은 하원 마을 성안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한글과 주산을 가르치는 문맹퇴치운동을 했다. 아이들은 법당에서 연극 연습을 해 마을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1948년 10월 소개령 이후 토벌대에 의해 법화사는 전소됐고 1950년 3월 장한택 스님이 허술하게나마 복원했다는 증언도 있다. 법화사는 장한택 스님이 드나들며 관리했다.
1952년 한국전쟁 시기 법화사는 육군 제3숙영지로 사용됐다. 대웅전을 숙영지 본부로 사용했고 법화사 경내 논을 메꾸어 연병장으로 사용했다. 경내에 사병 막사가 지어졌고 법화사 위 지경은 군인들의 사격 훈련 등 훈련 장소로 활용됐다.
당시 숙영지 소장의 어머니가 불자라서 대웅전을 군인들이 쓰는 것을 보고, 새 대웅전을 지어놔야 한다고 해 소장이 장한택 스님을 찾아 새 대웅전 자리를 물색하게 했다. 장한택 스님과 신도회장 등이 모여 새로운 위치를 선정해 기반 공사를 군인들과 함께 시작했다. 기반 공사를 하던 중 소장이 떠나고 다른 사람이 부임하면서 재건은 지지부진해졌다.
후일 장한택 스님과 신도들이 법당과 요사를 다시 재건했다. 원래 법당과 요사채는 현재 경내 법화수 지경에 있었다. 새로 재건된 법당은 현 대웅전 자리이다. 그 법당을 허물고 1987년 다시 현재의 대웅전을 지었다. 현재 구품연지는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1951년 1.4후퇴 이후 전쟁이 격화되며 대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는 1951년 1월 22일 제주도 모슬포로 이동 설치됐다. 전투가 격화됨에 따라 하루에 500명 정도 입소하던 군인들이 8만 명 정도가 입소하기도 했다. 제주도의 제1훈련소에서만 1951년부터 1956년 1월까지 50만여 명의 신병이 배출됐다. 이 시기인 1952년 2월 13일에 법화사에 제3숙영지가 설치된 것이다. 숙영지는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정리됐다.
[제주도 성지순례 관음사-법화사-약천사]
기자명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법보신문 1400호 / 2017년 7월 19일자]
억불과 토벌로 점철된 역사임에도 불심만은 펄떡인 땅
뭍에서 추사를 만나기 위해 바닷길을 건너 제주에 온 초의가 6개월을 머물렀다는 산방산 중턱의 산방굴사. 추사가 이 토굴에서 ‘반야심경’을 사경했다고도 전해져 산방산 찾은 사람들의 발길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노란 유채꽃 만발할 때, 아니 푸른 청보리 익어갈 때, 짙은 녹음 우거질 때, 아니 붉은 동백 필 때, 그 어느 날엔가 산방산 올라 마주하고 있는 한반도 끝 섬 마라도를 바라본다면 산방굴사에 좌복 펴고 삼매에 들었던 고려의 혜일(慧日) 스님을 떠올려봄직하다.
이형기 제주 목사 재임 때
1000개 불상 바다에 던져
‘4·3 항쟁’ 당시 토벌대에
사찰 불태워지고 강제철거
‘3·1운동’보다 1년 빠른
‘무오년 항일’ 법정사가 주도
전통의 관음사·신흥 약천사
제주불교 중흥의 ‘중심 축’
제주의 ‘풍속’과 ‘토산’, ‘과원’ 등을 상세히 담은 이원진의 ‘탐라지(耽羅志. 1653년 간행)’에 따르면 혜일 스님은 거상 김만덕, 명마(名馬) 노정(盧正)과 함께 제주도의 삼기(三寄)로 불렸다고 한다. 행장이 없어 스님의 여정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탐라’가 고려의 ‘제주’로 편입된 직후 이 섬에 걸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머무르며 쓴 시가 전해지고 있는데 법화사를 소재로 한 시 한 편도 남아 있다.
‘법화암 물가 경치 그윽하니/ 대(竹) 끌고 솔(松) 휘저으며 홀로 노닌다/ 만약 세간상이 상주하는 소식을 묻는다면/ 배꽃은 어지럽게 떨어지고 물은 달아나 흐른다 하리라!’(法華庵畔物華幽 曳竹揮松獨自遊 若間世間常住相 梨花亂落水奔流)
노을빛 머금은 구품연지가 고풍스럽게 정좌한 구화루(九華樓)를 안았다. 서산으로 기우는 해가 붉은빛마저 토해내고 나면 물가 따라 둥글게 줄지어 달린 연등에 불이 밝혀질 터! 고즈넉했던 법화사는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해 가겠지만 구화루는 무상법문 한 토막 별빛에 실어 보낼 것이다.
‘그대 머문 이곳이 극락이다!’
법화사 창건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통일신라 후기 중국과 일본을 무대로 활약했던 장보고가 건립했다는 설이 있어 흥미롭다. 장보고는 바닷길 오르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주요 주둔지에 법화사를 세운 바 있는데, 완도 청해진의 법화사와 중국 산둥반도의 법화원이 대표적이다. 제주 법화사 역시 중국과 일본과의 무역로 확보를 위해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법화사는 존자암, 수정사와 함께 제주도 3대 비보사찰이었다. 이 절에는 원나라 장인이 조성한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돼 있었는데, 재밌는 사실은 훗날 명나라가 ‘법화사 아미타삼존상 반환’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중국 사신 황엄 등이 제주도의 법화사(法華寺) 아미타삼존상을 도로 가져 가겠다’하는 ‘조선왕조실록’의 태종연간 기록이 방증하고 있다. 조선의 태종은 아미타삼존불을 숨기기 위해 감실을 만들었는데 높이와 폭이 각각 7척, 약 2m12cm이었다고 한다. 나주로 숨겼던 삼존불은 결국 명나라 사람들에게 넘겨졌다. 법화사가 원나라 황실의 원찰로 세워졌거나 또는 그 역할을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원나라가 제주를 지배했던 역사의 한 단면이다.
조선 태종 때까지만 해도 280여명의 노비가 상주했을 정도로 제주 최대 사찰이었던 법화사는 숭유억불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명맥을 잃어갔다. 뭍에서 사찰을 기생관으로 쓰는 유생들의 악업이 자행될 때, 제주 도량 역시 그들의 손에 헐어지고 있었다. 1530년에는 15개의 사찰이 미미하게나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18세기 접어들며 그 마저도 사라지는 위기에 처해졌다. 1703년 제주 목사(牧使) 이형상은 자신의 저서 ‘남환박물(南宦博物)’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온 섬 500리에 사찰이나 불상이나 승니는 없고, 염불자도 없으니 불도의 액(厄)이라 말할 수 있다. 해륜사와 만수사를 헐어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
이형상의 제주 고을 순찰 상황을 그린 도첩 ‘탐라순력도’에 산방굴사가 묘사돼 있다. 부처님이 앉아 계실 자리에 의관을 갖춘 사람이 유생이나 벼슬아치로 보이는 사람들로부터 술잔을 받으려는 모습이다. 상석에 앉은 인물은 분명 이형상 목사일 것이다. 그의 재임 당시만 해도 1000개의 불상이 바다에 던져졌다.
4·3항쟁 때 중산간 일대의 마을이 불타면서 법화사지가 드러났다. 1982년부터 발굴이 진행됐고 1987년 대웅전이 들어섰다. 발굴 과정에서 조사단은 혜일 스님의 시에 주목했다.
‘법화암반물화유(法華庵畔物華幽)’에서 ‘반(畔)’은 밭두렁, 땅의 가장자리를 뜻해 길가의 ‘가’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반’은 물가를 뜻하기도 한다. 연못이 존재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발굴한 결과 불국사 앞의 ‘구품연지’와 유사한 연못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2001년 구품연지가 조성됐고, 2004년에 구화루가 지어졌다. 2007년부터 일주문, 사천왕, 나한전 등이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뒤 한쪽에 옛 법화사지가 아직 남아 있으니 복원불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라 하겠다.
한라산 동북쪽 기슭에 관음사(觀音寺)가 있다.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관음사 기록이 남아있다. 조선 초기 때까지도 범종이 울렸던 절이었으나 제주 목사 이형상이 끝내 폐사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을 다시 중창한 인물은 비구니 안봉려관(安蓬廬觀). 안봉려관 스님은 떠돌이 무당이었다. 비앙도로 가던 중(1901년) 풍랑을 만나 생사를 헤맸는데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어 살아났다고 한다. 지금의 해월굴(1908)에서 3년 동안 관음정진하며, 불사를 일궈 법당과 요사채를 완공(1912년)했다.
관음사 중건은 제주 불교사에서 한 획을 긋는 불사로 기록될 만하다. 관음사 불사를 시작으로 원당사(현 불탑사)를 비롯해 극락사, 산방사, 용주사, 금봉사, 무관암, 원만사, 용장사, 서림사 등이 연이어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찰 중창은 곧 제주불교협회를 태동(1924년)시켰다. 1940년대에는 승가교육, 선농불교운동, 제주불교 혁신승려대회 등이 전개되며 제주불교가 다시금 펄떡이기 시작했다. 이즈음 관음사와 연관된 사찰만도 70여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관음사 중건 6년 후인 1918년 한국사와 제주불교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발생한다. 항일항쟁의 횃불이 시뻘겋게 타 올랐던 것이다.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스님 등 여덟 명의 스님과 법정사(法井寺) 신도, 주민 등 400여명이 합심해 일본인 관리와 상인 축출은 물론 국권회복을 갈망하며 일으킨 항쟁이었다. 1918년이 무오년이어서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칭하고 있다.
그러나 관음사는 제주 4·3항쟁(1947~1954년) 당시 토벌대에 의해 완전히 전소됐다. 제주를 대표하는 주요 사찰도 그때 대부분 불태워지거나 철거당했다. 고운사, 귀이사, 서관음사, 은수사, 소림사 등은 아직도 복원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1919년 ‘기미년 3·1운동’ 보다 1년 앞서 항일운동이 펼쳐진 고장에, 그 저항운동을 주도한 불교계에서 벌어진 토벌대의 악행은 조선 유생들의 훼불과 비교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토벌대에 의해 피폐해진 황무지에서 새 연꽃을 피워낸 도량 또한 관음사였다. 1969년 대웅전을 시작으로 선방, 영산전, 종각불사가 진행돼 명실상부한 대가람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를 기점으로 산방산에 자리했던 사찰도 다시 일어섰고, 약천사를 필두로 한 신흥사찰이 제주도 땅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법화사를 참배한 후 지근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약천사로 걸음 한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높이 29m 3층으로 구조의 동양 최대 크기의 대적광전 안에 5m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4m의 좌대 위에 안치되어 있다. 좌우 양쪽 벽에는 거대한 탱화가 양각으로 조각돼 있다. 대적광전에 들어선 순간 그 장엄함에 누구라도 절로 일어나는 환희심에 손을 모으고 만다. 이 정도면 대적광전 자체가 보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천사 내 귤나무 길을 걸으며 내려다보는 제주 해안 풍광 또한 일품이다. 제주불교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도량이다.
푸른 바다를 품에 안은 제주불교는 이제 그 바다 빛깔보다 더 맑고 푸른 청사진을 그려내고 있다. 제주로 불교순례를 떠나 보시라! 뭍에서 느끼던 희열과는 분명 다른, 새로운 환희가 충만된 불심을 얻게 될 것이다.
참고자료 : 배연이 논문 ‘제주도의 불교와 불교미술 연구’.
[도·움·말]
길라잡이
제주공항서 관음사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가능한 아침 일찍 참배하는 게 좋다. 일주문과 대웅전을 잇는 숲길에 들어차는 금빛 햇살이 일품이기 때문이다. 보물급 문화재가 있는 산사는 아니지만 사색에 잠겨도 좋을 만큼 길과 숲이 잘 어우러져 있다. 반면 법화사는 오후 늦게 걸음 하는 게 좋다. 구품연지에 떨어지는 저녁노을이 멋지다. 법화사와 이웃하고 있는 약천사에는 귤나무가 풍성하다.
이것만은 꼭!
법화사지: 법화사는 고려시대 비보사찰 역할을 담당했던 제주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 법화사지 발굴을 통해 고려 왕궁지인 개성 만월대와 몽고 왕궁에서 출토되는 것과 흡사한 용과 봉황문 막새가 출토됐다. 법화사 대웅전 뒤쪽에 있다.
관음사 해월굴: 관음사를 창건한 해월당 안봉려관 스님이 정진했었다는 토굴이다. 법화사와 불탑사 중창불사를 이끌었고, 법정사 무오항일항쟁의 중심에도 섰던 비구니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 닿기 직전 오른쪽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관음사 나한전: 미륵대불을 참배했다면 왼쪽으로 길게 난 계단을 올라 작은 오솔길을 걸어보기 바란다. 그 길 끝에 나한전이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제주도 3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법화사(法華寺)
법화사(法華寺)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사찰이다. 1980년대에 지금의 건물들이 재건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3호.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관음사(觀音寺)의 말사이다. 주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이다.
개요
법화사는 수정사(水精寺)와 함께 제주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써,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 길게는 남북국 시대까지도 올라간다는 주장이 있다. 1990년 2월 1일부터 4월 6일까지 법화사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건물터 다섯 곳과 초석 기단터 세 곳이 확인되었고, 발굴 유물은 당초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등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기와가 거의 완전에 가까운 상태로 발굴되었으며, 해무리굽 청자편이나 북송의 화폐인 숭녕중보(崇寧重寶)가 발굴되었다. 발굴된 기와들이 한반도 육지부에서도 황룡사터나 미륵사터와 같은 왕궁급 유적에서 주로 발굴된다는 점에서 법화사는 단순한 사찰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었고, 문명대 교수는 제주의 법화사가 신라 시대에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청해진(淸海鎭)이 위치한 완도(莞島)의 법화사와 같은 시기에 지어졌으며, 두 섬을 거점으로 하는 해상무역의 발달과 관련성을 가지면서 법화사가 세워졌을 것으로 주장하였다.
고려 후기 몽골의 제주 지배기에 법화사는 더욱 중시되었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주도로 1992년부터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 '重創十六年己卯畢', '至元六年己巳始'라는 기와가 발견, 법화사가 원(元) 지원(至元) 6년(1269년)에 처음 중창을 시작해 16년(1279년)에 중창을 마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충혜왕(忠惠王) 때 제주로 유배된 승려 혜일(慧日)이 법화사를 들러 시를 지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 법화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목호의 난(1374년) 당시 목호 지도자들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범섬이 위치해 있다.
조선 초기까지 법화사에 배속된 노비가 280명이었을 정도로 큰 절이었으며, 원의 양공(良工)이 제작한 금동미타삼존불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조선 태종 6년(1406년)에 명에서 사신으로 온 황엄과 한티무르가 명의 황제 영락제(永樂帝)의 명으로 이 불상을 가져가기 위해 제주로 들어갈 것을 청하자 태종은 사신들이 불상을 가져가겠다는 것은 핑계이고 사실은 제주의 사정을 염탐하려는 것이라고 판단, 선차 김도생과 사직 박모를 제주로 보내 불상을 가져오게 하여, 명 사신들이 제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조선 후기 이후 법화사는 폐사되었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 1채 등 부속건물 8채를 복원하였다.
법화사 구품연지
제주도 3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법화사의 8월은 연꽃으로 물든다. 서귀포시 하원동에 위치한 법화사는 신라 때 장보고가 창건했다고 한다.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는 구품연지에서는 홍련, 백련을 만날 수 있다. 구품연지 주변에는 수양버들과 배롱나무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배롱나무에 꽃피는 시기가 연꽃 시기와 맞물려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법화사&약천사] 위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