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1995년 아마도 여름.
친구 한 명 없는 중딩 생활을 하던 저는 꿀꿀하게 극기훈련 버스에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시 꼴찌에서 두번째 순위를 자랑하던 저의 모교는 사치스럽게 수학여행 따윈 가지 않았죠.
매 해 강원도 인근 유스호스텔을 빌려서 전교생에게 기합을 주는 기이한 학교였습니다.
뭐 그래도 밤엔 춤추고 놀지만.
그렇게 울적하게 앉아있던 제 귀를 면봉처럼 파고드는 아름다운 소리에 문득 저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뭐랄까요. 짜장면을 처음 먹어본 장금이의 마음처럼 설레이고 두근거리더군요.
하지만 그건 MSG 때문이지
그때도 지금처럼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라 벌떡 일어나 "이 곡이 무엇이냐!"라고 외칠 용기는 없었고
저는 반복해서 나오는 그 곡을 하나하나 기억하기만 했어요.
그리고 무려 극기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옆에 앉아있던 아이에게 물어봤죠.
'이 테이프 누가 가져온거야?'
두둥.
이 노래 누구꺼야도 아니고.. =ㅁ= 그야말로 소녀감성.
똘망똘망 잘생긴 부반장이 가져온 테이프였더군요. 학교로 복귀해 비루한 일상으로 돌아온 저는
몇 일을 또 작정을 하고서야 부반장에서 말을 걸 수 있었습니다. 널 사랑해!
"저번에 극기훈련 갈 때 틀었던 테이프가 네 거라며?"
"응? 응." (그는 창 밖을 보고 있었다)
"노래 엄청 좋던데.. 누구야 그거?"
"아~ 이승환이라고.. 이번에 새로 나온 앨범이야."
"이승환..?"
-이 대화는 심각하게 미화가 됐다는 점을 알립니다-
절 뒤흔든 노래는 바로 '천일동안' 이었습니다.
이승환 4집. 휴먼.
우리기획의 대성공으로 부유해진 이승환이 본격적으로 앨범에 재산을 털어넣기 시작한 앨범.
당시 매 앨범마다 새로운 뮤지션과의 협업을 하던 그가 선택한 프로듀서는 '정석원'.
사실 이 앨범에서 정석원의 작곡참여는 적은 편이지만 훗날 복잡한 구성이나 겹겹이 쌓은 사운드등을
한국에서 가장 잘 활용하는 프로듀서가 된 점을 봐서 많이 배우고 또 많이 관여한 듯.
(이 때이 노하우를 다시 쏟아부은 것으로 생각되는 앨범이 바로 박정현의 4집. 이 또한 명반)
이 앨범은 특히 유명 뮤지션들을 세션으로 마구마구 부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승환은 가난의 길로..)
당시 노하우가 전혀 없어 돈이 더 들어갈 수 밖에 없었는데 녹음하던 스튜디오 주변에 동양의 갑부가
녹음을 하러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이야기가...
참고로 천일동안의 편곡은 그래미 수상경력에 빛나는 데이비드 캠벨. 무려 벡의 아빠다.
저는 그 길로 음반가게에 달려가 휴먼을 테이프로 샀습니다.
나는 문제없어를 내 인생의 노래로 꼽던 그 시기에 그 앨범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처음 접하는 장르의 음악들도 많았고 처음으로 음반 속지를 보며 아 이소리가 이거구나~라고 감탄하며
듣게 됐지요. 당시 첫 '빠돌이'가 된 저는 완전히 인생이 바뀌어서 이승환에 대한 모든것을 수집하려 했습니다.
인터뷰 기사가 나온 잡지를 구하고 티비에 나오면 녹화를 해서 소중히 보관하곤 했죠.
또 새로운 음악을 하려는 이승환의 욕구가 저의 중2병스런 태도와도 궁합이 잘 맞아서
정말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가 됐지요... 그 때 지누, 유희열, 정석원에게도 빠져서
그 주변 앨범들을 몽땅 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도 가난의 길로...)
그리고 이승환 테이프를 사고서야 접할 수 있었던 신세계,
너의 나라를 듣게 됩니다.
사실 이승환의 포지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이런저런 의견이 있습니다.
쌈싸페 등에 등장한 이승환의 팬덤이 가수가 퇴장하자 함께 퇴장하는 광경을 보여줘서 비난을 받기도 했죠.
하지만 그의 락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어느정도의 결실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언급한 너의 나라는 6집에 수록된 나의 영웅과 대구를 이루는 곡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다소 너무 나가는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락이라는 세계에 대한 나쁘지 않은 입문곡이 될 수 있었어요.
1편에서 언급한 1997년에는 CYCLE이라는 세련된 팝앨범을 들고 나와
또 한번의 즐거움을 주기도 했죠. 사실 이때부터 대중적 성취(그러니까 얼마 벌었냐)로서는
하락세이긴 합니다만 저는 4-5-6 요 라인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특히 좀 '아 난 돈이고 뭐고 하고싶은 거나 해야겠다' 싶은 막나가버린 5집이 가장 좋아요.
컨셉앨범으로서의 구성도 단단한 편이고 타이틀곡이 아닌 곡들의 완성도도 굉장하죠.
저는 이 앨범에서 '사자왕'과 '아침산책'을 꼭 권하고 싶네요.
이승환 5집, CYCLE
초호화앨범. 그리고 더블 타이틀로 붉은낙타라는 락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리고 망..)
4집의 대성공을 자신감을 얻은 이승환이 대중성에 대한 고민을 거의 하지 않고 만든 듯 한 앨범.
시대적으로 보면 괴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완성도 높은 앨범이긴 하다.
앨범 초회판은 위 사진과 동일한 디자인의 홀로그램판을 주기도 했었다. 여러모로 호화!
크레딧을 확인하면 전작에서 재미 좀 본 데이비드 캠벨로 거의 뽕을 뽑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쨌거나 반토막도 안 돼는 앨범판매성적을 보고 이승환은 많은 고민을 했다고...
그리고 앨범명에서 알 수 있듯 이승환 본인은 정교한 종교적 관점을 가지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불자에 가깝단다.
이승환은 당시 5집을 발매하며 드림팩토리라는 우리기획의 다음단계 회사를 세웠고
이를 기념하기라도 하듯 드림팩토리 투어라는 이름의 콘서트를 진행합니다.
당연히 빠가 된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콘서트를 가게 되지요.
그리고 콘서트의 음량이라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가슴을 울리는 저음, 귀를 뚫고 나가는 듯한 기타소리.
공연장의 흥분과 거대한 음압이 몸을 밀고 나가는 쾌감에 눈을 뜬 것이죠.
이런 준비과정을 마친 저에게 화끈한 그린데이의 바스켓 케이스는 당연히 쌍수들어 환영할 아이템이었습니다.
아직까진 가요멜로디에 친숙한 저에게 바스켓 케이스의 달달한 멜로디는 잘 차려진 밥상이나 다름 없었죠.
전편에 등장한 황모군에게 저는 좋은 곡들 있으면 좀 들려달라고 했고,
그 친구는 너바나를 추천해줍니다. 그리고 우린 항상 데생을 하며(그 쪽 나왔습니다)
자신이 녹음해서 만든 짜집기 테이프를 경쟁적으로 틀어놓게 되었죠.
사실 너바나는 그저 그랬지만 스멜스 라잌 틴 스피릿츠는 대단했습니다.
이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죠 +_+
정교하게 맞는 시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당시 저는 일요일 심야에 방영되던 케이비에스의 팝-락 전문 방송을 즐겨 봤습니다.
진행은 지금은 수염이 덥수룩한 음반제작자가 되신 박은석씨였죠.
흥미로웠던 게 당시 박은석씨와 여자진행자셨던 손미나씨가 툭탁거리면서 진행을 하는데
그 캐미가 대단했습니다. +_+ 여자 놀리는 재미랄까요...
훗날 남자진행자가 윤상으로 바뀌며 영미의 팝-락에서 월드뮤직으로 보폭을 넓히게 됩니다만
윤상은 손미나를 너무 잘 챙겨줘서 그 툭탁거리던 재미는 상실되고 말았죠 ㅜㅠ
암튼 그 방송을 그냥 무의식적으로 틀어놓던 저에게
두 번째 바스켓 케이스급의 여파가 들이닥칩니다.
저를 다시 한 번 뒤흔든 그 곡의 제목은...
Virtual Insanity였습니다.
첫댓글 아. 미치겠네ㅋㅋ 저랑 경로가 비슷하시네요. 전 이승환광팬 누나 영향으로 이승환 신해철 015b 유희열 등등 교실 구석에서 맨날 혼자 듣다가 그런지->브릿팝으로 갈아타려는 찰라 Virtual Insanity 뮤직비디오를 보고 충격을 먹었었죠. KBS뮤직타워도 맨날 녹화해서 봤었고.ㅋㅋ 거기서 오아시스, 핑크플로이드 라이브 처음으로 봤구요.ㅎㅎ
아무래도 우리 또래면 다 엇비슷한 경로를 밟는 거 같아요 :-)
와 저도 이승환 저 두 앨범은 아직도 가끔 폰에 넣어서 듣고 다녀요ㅎ 추억돋네여. 만나뵈면 할 얘기 많을듯ㅌ
ㅎㅎ 저는 술 마시기 전엔 엄청 낯 가려요 :-) 저는 9집도 꽤 좋아해용
@루 쿠루쿠루 음주 전 낯가림은 저도 심해요^^
KBS 뮤직타워! 그 방송 보면서 뮤비들 녹화한 비디오테잎들 아직도 갖고있어요. ㅋㅋ 이거 완전 응답하라 1997 영팝버전이네요. ㅠㅠ
어휴 과찬이십니다. 제가 올린 허섭한 글에 많은 분들이 살을 붙여주셔서 좀 게시물다워지고 있네요 ㅎㅎ
영팝에 뮤직타워 보시던 분들이 꽤 있네요 ㅎㅎ 3편이 더욱더 기대됩니다. 빨리빨리 올려주세요~!!
주말은 쉴 거 같아요 ㅎ
ㅋㅋㅋ 이런얘기 넘 잼있다는~ 글고보니 당시 홍대앞 지나다 보면 길에서 꼭 볼수있었던; 박은석씨.. 요즘 모하시나 몰겠네요.
요즘 뭔가 빅이슈 있으면 인터뷰 할 때 보는데..와우 그 때 그 핸섬하던 모습과 완전 달라지셨어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채널븨 기억나네요 천일동안 히트칠 때 중딩인건 저랑 같네요 저랑 비슷한 또래신가봐요. 말씀하신 가사는 '천일이 훨씬 지난 후에 라도 역시 그럴테죠~"겠죵? 실은 훗날 저도 이 수법(?)을 응용해서 가사를 쓰기도 합니다. 저도 이승환 최고의 발라드는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라고 생각해요
뮤직타워 지구촌영상음악 진짜 즐겨봤었는뎅.. 더군다나 우리집은 위성이 안 잡혀서 위성방송 나오는 친구한때 공테입 주면서 니네집 티비서 채널브이 잡히거든 뮤직비디오 녹화 오케? 이랬는데 그때 친구가 녹화해준 뮤비가 ㅋㅋㅋ 94 우드스탁 이였네요. 레드핫 칠리페퍼스하고 블라인드 멜론 녹화한걸 들고와서는 니 취향에 딱일것 같더라.. 이랬던 기억 ;; (사실 전 그때 레드핫히고 블라인드 메론이고 다 몰랐음..온니 건스앤로지스 빠순니였씀..ㅋㅋㅋ)
그것도 즐거운 기억이네요 ㅎㅎ 제가 본 우드스탁이 몇년도 꺼인지 모르겠네요 가물가물~
저도 뮤직타워랑 채널브이 녹화했었는데 ㅋ 참 졸리게 보이는 진행자와 손미나씨 ㅋㅋ 전 ratm에 빠졌었죠 ㅋ
알에이티엠 좋죠 +_+
이승환의 천일동안. 저도 몇 좋아하지않는 한국가수 중 한명이에요~ 뒷이야기로 계속 이어지는거죠?ㅋㅋ
언제 끝날지는 미정이지만 일단 스매싱 펌킨즈는 언급할때까지 하려구요 ㅎ
이승환의 천인동안은 정말 명곡인것 같아요 ㅎㅎ 저도 중고등학교땐 그렇게 입문을 했더랬죠. 그러다 고2때 영어공부한답시고 외국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시작된거죠 ㅋㅋ
그런 관문들이 중요한 거 같아요 :-) 천일동안은 정말 지금도 좋아요.
최고의 낚시성 제목이네요. ㅎㅎㅎㅎ 저도 스펌 빠돌이 인지라. ㅎㅎㅎ
펌킨스 언제 나와요 ㅎㅎㅎㅎ
입문은, 멜랑인지, 쌍둥인지, 기쉬인지 도 나오나요? ㅋㅋㅋ
앗. 2편쓰신걸 못보고. 1편에서 2편 독촉을...... 스매싱펌킨스는 언제쯤 나오나요? 쿨럭.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