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교황 주일)) 회개와 사랑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큰 두 기둥이다. 그 두 사람이라기보다는 두 사도의 삶이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두 사람은 다르면서 같다. 베드로 사도가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사도 4,13) 바오로는 그 당시 유명한 바리사이 스승인 가말리엘에게 수학한 엘리트였다.(사도 22,3) 하지만 예수님을 부인하고 직접적으로 박해했다는 점에서 둘 다 예수님께 큰 죄인이었고, 또 크게 회개해서 주님을 철저하게 따랐다. 그들의 다름은 회개와 주님을 따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베드로 사도를 으뜸 제자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복음서 곳곳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결정적으로 사도는 죽게 돼도 스승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노라고 굳게 결심했지만 바로 그날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다.(마태 26,35) 하지만 닭 울음소리를 듣고 스승 예수님 말씀이 기억나서 슬피 울었다. 부활하신 주님이 세 번째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울었다. 승천하신 후에 사도는 매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그날 밤 자신의 배반 사건을 떠올리며 울었으며, 낮에도 틈만 나면 송구한 마음에 울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눈자위 주변은 늘 붉게 물들고 짓물러 있었다고 전해진다.
바오로 사도는 스테파노 성인을 죽이는 일에 찬동하였고,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거기서 수백 킬로 떨어진 다마스쿠스에까지 가서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고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사도 9,2) 그렇게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말에서 떨어지며 눈도 멀게 됐다. 그동안 하느님을 위한다고 살기까지 뿜으며 한 일이 모두 그 정반대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도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눈앞이 캄캄해지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게 당연했을 거다. 신성모독은 사형죄인데 바오로 사도의 성정을 생각하면 죽어서라도 자신의 과거를 바로잡고 싶었을 거다. 그런 자신이 하느님을 박해하고 모독했다니 말이다.
두 사람 다 뉘우치고 회개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둘 다 주님을 따라 순교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처럼 똑같이 십자가에 죽을 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개신교 학자는 그리스도교는 바오로 사도가 세웠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두 사도는 참으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고 온 정성으로 주님의 양들을 돌보았다. 그것이 그들의 예수님 사랑이고 참회와 회개의 열매였다. 회개와 이웃사랑은 서로 참 다른 두 사도의 공통점이다. 거기서 둘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두 사도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그리고 세상 마지막 날까지 실천해야 할 것들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 하느님 사랑의 양면이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하느님께로 마음을 계속 돌리고, 이웃을 하느님처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두 기둥이다.
예수님, 오늘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지킵니다. 주님의 충실한 제자, 하느님의 자녀로 행동하도록 오늘도 주님의 은총으로 도와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하느님이 기뻐하실 일을 하게 이끌어주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