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장덕진의 퍼스펙티브
나토 정상회의 참여한 한국, 러·중 눈치 볼 때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2023.07.20 00:52
요동치는 국제질서, 한국의 전략
“칸이 용골대에게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중략) ‘조선 국왕이 무리를 거느리고 명을 향해 원단의 예를 행하는 것이옵니다.’ (중략) 대청 황제 칸이 이역만리 조선 땅에 와 일월성신의 신년을 영접하는 봉우리 아래에서, 갇힌 성안의 조선 국왕이 명에게 예를 올리고 있었다. (중략) ‘지금 포를 쏴서 헤쳐버릴까 하옵니다.’ (중략) ‘냅둬라. 저들을 살려서 대면하려 한다.’ (중략) 행궁 마당이 조용해질 때까지 칸은 성안을 내려다보았다. 임금이 무도를 마치고 다시 북경을 향해 절했다. 종친과 신료들이 임금을 따라서 절했다.” (김훈, 『남한산성』)
미·중 충돌 등 신냉전 시대, 안보·경제·기술 블록화 가속 우크라 전쟁은 남의 일 아니야…러·중·북 견제에 공감대 경제·군비 10위 국가 한국, 더 이상 지정학 탓할 수 없어 국제 무대서 주요 플레이어로 뛰며 글로벌 외교 펼쳐야 |
400년 전 인조의 삼전도 굴욕
지난 11일(현지시간)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 대통령궁에서 열린 나토 동맹국과 파트너국 만찬에 앞서 각국 정상 및 배우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
조선의 왕은 청나라 군대에 포위된 상황에서도 망해가는 명나라를 향해 예를 올렸다. 그는 청나라 황제가 쉽게 거둘 수도 있었던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줄도 몰랐다. 그의 무지는 며칠 후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찧는 삼전도의 굴욕으로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350년이 지난 1987년 미국 시카고 대학의 역사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는 한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일부 국가들이) 세계 경제에서 빠르게 부상한 것은 두 개의 헤게모니 시스템 속에서 상품 사이클을 잘 탔기 때문이다. 1945년까지는 일본 제국주의, 그리고 그 이후에는 미국 헤게모니를 말한다.”
이러한 평가 속에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산업화의 기적은 없다. 한국의 성공은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헤게모니의 철저한 종속변수일 뿐이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의 약한 고리”
그로부터 다시 35년이 지난 2022년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시니어 펠로인 앤드루 여(Andrew Yeo)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고, 군비지출 세계 10위이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을 가지고 있고, BTS와 블랙핑크, ‘오징어 게임’과 ‘기생충’을 만들어낸 나라이다. 그럼에도 인도태평양의 다른 나라들은 한국을 이 지역의 중요한 플레이어라고 보지도 않고 다자간 안보협력의 파트너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일부 전문가들은 한국을 민주주의 파트너 국가 중에 ‘가장 약한 고리’라고 보기도 하며, 한국이 지금까지처럼 인도태평양 이니셔티브로부터 계속 거리두기를 한다면 ‘2류 동맹(second-tier ally)’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요한 플레이어가 되기를 원한다면 한국은 전략적 모호성을 극복해야 한다.”(원문에서 일부 요약)
병자호란부터만 따지더라도 좁게는 한반도에, 넓게 봐도 동북아에 갇혀 지낸 지 400년이다. 거슬러 올라가자고 들면 몇백 년을 더 올라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터이다. 우리가 늘 한탄하는, 강대국 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위치 때문일까. 아니면 분단 때문일까. 동북아에 갇혀 지내는 것의 필연적 결과는 국제정세의 종속변수가 된다는 점이다.
인도태평양 개념 제시한 일본
그런데 국제정세는 다시 한번 요동치고 있다. 신냉전은 단순히 미국과 중국 간의 경쟁이 아니다. 안보적이고 군사적인 대립만도 아니다. 러시아·중국·북한이 밀착하고 있고, 미국은 인도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동맹을 규합하고 있다. 냉전이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안보 차원을 넘어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블록화까지 동반하고 있다.
국제질서의 규칙이 새로 쓰이고 있는 이 시점에 우리는 여전히 종속변수로 남아 있어야 할까. 지정학이나 분단 탓만 할 일이 아니다. 한때 우리와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던 일본은 지난 30년간 치열한 노력 끝에 이제는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당당한 서방의 일원으로 대우받고 있다. 오늘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인도태평양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베 전 일본 총리가 만들어서 미국에 전파한 것이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일본의 동의가 없이는 한국은 인도태평양의 주요 플레이어로 인정받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우리가 국제정세를 대하는 태도는 지난해 4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국회 화상 연설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300명 국회의원 중 달랑 60명만 참석해서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드렁한 모습을 보였다. 그때까지 젤렌스키는 23개국 의회에서 화상 연설을 했는데, 미국·영국·일본을 비롯해 대부분 나라의 의회는 의원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 기립박수를 보냈다. 다른 나라의 불행에 무관심한 나라가 국제무대의 주요 플레이어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더구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남의 일이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다음으로 대만해협과 한반도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더욱 강력하게 재탄생한 나토
이번 나토 정상회의의 의미는 누가 뭐래도 나토와 아시아태평양 4개국(AP4)의 연결이고, 그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러시아, 중장기적으로는 중국과 북한을 억제하는 것이다. 냉전 종식 이후 쇠락하는 것처럼 보였던 나토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더 강력하게 재탄생했다. 대서양의 나토와 태평양의 AP4를 한 자리에 끌어모으는 리더는 미국이다. 비록 유일한 수퍼파워의 지위가 일정 부분 쇠락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동맹을 규합하는 데 더 절박하고 ‘뜻을 같이하는(like-minded)’ 국가들이 모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심지어 영세중립국 스웨덴조차 나토에 가입했다.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의 정상들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은 사진은 이런 변화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미국 중심 국제질서에 종속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세계의 양극은 미국과 중국이고, 미국을 중심으로 모인 나라들 사이에 유럽·아세안·인도 등을 상대로 한 수평적 다자 관계를 충실히 해나가야 미국에 대해서도 지렛대를 가질 수 있다. 혼자만 빠지면 왕따가 될 뿐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우리를 적대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도 한국이 적극적인 글로벌 전략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중국·러시아의 미래 예측 어려워
시진핑 3기의 중국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예측하기도 어려울뿐더러 한국이 중국의 눈치를 보는 동안 북한의 핵 능력은 수십 배 증가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한 첫날부터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음을 시사했고, 이미 벨라루스에 핵탄두 배치를 끝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와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이 모스크바를 향해 하루 1000㎞를 진군하던 날 미국은 푸틴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한다.
그나마 핵무기가 푸틴의 통제하에 있어야 최소한의 합리성을 기대할 수 있는데, 그가 갑자기 끌려 내려온다면 어느 정신 나간 강경파가 핵무기를 손에 넣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극적인 글로벌 전략을 포기한다고 해서 중국이나 러시아가 언제까지나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순진하다.
경제적인 효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세계 6~7위권으로 평가되는 한국의 방위산업은 탄탄한 제조업 역량의 뒷받침과 빠른 제조공정, 최상위를 점하는 미국산 무기와의 호환성 등 여러 장점에 힘입어 올해 200억 달러 수출을 가뿐히 넘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년 전에 비하면 무려 120배 성장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각국은 군비를 강화하고 있어서 시장이 더 커지고 있고, 이번 나토 정상회의 이후 그간 회원국들의 규범적 기준이었던 GDP 대비 2% 군비지출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커서 시장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새로운 질서, 용감하게 신중하게
최근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집속탄(소위 ‘강철비’라 불리는 무차별 살상 폭탄) 제공 논란에서 보듯이 살상용 무기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윤리성 논란이 없지 않으나, 어차피 군비 생산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국제적인 규범 아래서 이루어지도록 관리해나가야 할 일이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말이 맞는다면 한국은 지독하게 운이 좋았던 셈이다. 우리에게 아무 발언권도 없이 만들어진 국제질서가 우연히도 우리에게 유리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고, 한국은 뒷전에 물러날 수 없는 국제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국가의 명운을 걸고 용감하고 신중하게 나서야 한다.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글로벌 전략을 논한 적이 있었던가.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