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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박사모 -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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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성명/공지) 스크랩 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
역사학도 추천 0 조회 186 09.03.16 12:32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지금 5.18측이 광주사태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해서 감추거나 속이고 있지만 광주의 사기꾼들이 1980년 5월 21일 제작하여 22일 전국에 뿌린 삐라, 특히 아래의 사진에서 보이는 그 결론 부분이 5월 22일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유래였다.  아래 삐라는 본래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가 5월 21일 작성한 것인데,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날까지도 김대중은 조선대학교 운동권을 자택으로 불러들이며 지원했던바, 이렇게 조직된 홍위병들이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리고 그 삐라를 그대로 삽입하여 일명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제작하는 역할은 서울대비상학생총회가 하였는데, 서울대 학생총회 역시 김대중이 금품을 뿌려 키운 홍위병들의 아지트였다.  



   광주사태라는 용어는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 제2의 부마사태를 일으키자는 의미로, 둘째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5월 22일에 서울대비상학생총회가 "광주사태"라는 신조어를 제조하여 사용하자 언론이 그대로 따라 사용하여 그 명칭이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것이 있었는가?  당시 서울대비상학생총회 미개인들은 조선대 사기꾼들이 전한 유언비어를 그대로 맹신하였다.  제목이 거창한 이 삐라에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의 유일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부마사태 때에는 전라도 출신 군인들을 진주시켰고, 금번 광주살육작전에는 경상도 출신의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지역감정을 유발시키고 잔인하게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 속셈을 채우려고 하는 전두환 일파"이다.

   그러나 광주의 사기꾼들이 5월 21일 급조한 이 픽션소설과 달리 5월 18일 광주경찰서의 요청으로 광주향토사단이 동원한 7공수는 전북 금마 병력이었다.  그런데, 7공수가 폭동을 진압하기에는 너무 숫적으로 열세였고, 시위진압 경험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부마사태 때 진압해본 경험이 있는 부대를 착출하여 그 다음날 추가동원하였던 것이다.  물론 광주향토사단 정웅 사단장은 1980년대 중반 이래 확실하게 김대중 일파로 구분되는 인물이다.  그러면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전두환 일파였는가?  심지어 5.18사기꾼들조차 그런 억지 주장은 할 수 없지 아니한가.



   5월 18일 광주경찰서의 요청으로 전북 금마의 7공수가 동원되어야 하게 했던 사건은 순경 45명이 시위대에 납치된 사건이었다.  만약 한국 기자들이 한국인들을 납치한 소말리아 무장단체를 학생들이라고 부르면 소말리아 무장단체에 대하여 독자들이 가지는 이미지는 아주 달라진다.  그리고 그런 호칭은 소말리아 무장단체가 학생이었을 때 가능하다.  폭동선동 선무방송을 하였던 전옥주나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는 바로 이점에서 크나큰 과오를 범했다.  그들은 5.18무장단체를 학생들이라고 불렀다.  자, 윗 사진의 무장폭도가 학생이었는가?  정말로 전남대생의 모습이 이런 무장폭도의 모습이었는가?

   5월 21일 광주의 사기꾼들이 가져온 삐라를 서울대비상학생총회가 그 다음날 일명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로 재출판하였을 때 몇가지 멘트를 끼워놓으며 편집했는데, 그 골자는 지금 광주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멘트가 있다.  "미친개 같은 유신잔당의 손에 우리 형제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남의 일처럼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  실로 선동적인 문구이다.  그리고 그때 99% 이상의 국민이 그런 유언비어에 깜쪽같이 속았으며, 지금껏 광주청문회며, 5.18재판이며, 미디어의 방송들이 그런 거짓말을 맹신하게 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객관적 진실은 엄청나게 사뭇 달랐다.

   서울대비상학생총회가 "미친개 같은 유신잔당의 손에 우리 형제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남의 일처럼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를 끼워넣어 전국에 뿌린 날은 5월 22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광주에는 군인은커녕 그림자조차 없었다.  5월 20일의 시위 구호는 "전남국을 세우자"였다.  5월 21일 시민군이 기관총 등을 발사하자 계엄군은 모두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였으며, 5월 21일 오후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된 이래 광주경찰서는 시민군 명령을 받게 되었다.  군인이 있기는커녕 경찰조차 시민군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였던 김영택 기자는 당연히 광주시민군 옹호 기사를 쓰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을 "광주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자, 서울대비상학생총회 사기꾼들에게 속은 전국 국민 머리 속에 새겨진 5월 22일~26일의 광주상황은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죽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5월 22일 촬영된 위 사진에서 실제 장면은 얼마나 다른가.  그 안에 있었던 김영택 기자가 본 5월 22일~26일의 "광주공화국" 상황은 그가 복면부대라고 부르는 5.18무장단체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던바,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서술한다:

<독자들은 광주사태 당시 복면을 한 이른바 [시민군]들이, 탈취한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는 광경을 텔레비젼 화면이나 신문의 사진에서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이 [복면부대]는 18일과 19일의 시위, 특히 21일 시위대가 계엄군의 정면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만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이 등장한 것은 계엄군이 철수하고 도청이 학생들의 수중에 들어가 이른바 [광주공화국]시대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이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이 과연 [민주화]를 외치는 순수한 시위대원들이었을까. 이것이 기자가 갖는 네 번째 의문이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208.html 에서 작은 제목 <[복면부대]의 정체> 이하 세 단락.)

   "광주공화국" 기간 동안에 죽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5.18무장단체의 과실로 발생한 윤화사고로 인한 사망자들 수가 많았다.  "광주공화국" 상황의 한 목격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당시 자가용운전기사였으며, 훗날 전남대 총무과에 근무했던 오병길씨의 증언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5.18측은 그들이 차량사고 일으켜 죽게 한 사람들을 가리켜 전두환이 학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질문은 아직 시운전도 안하고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던 군용납품차량들을 탈취하여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몰고 다니게 한 책임의 소재가 과연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다.



   5월 21일 오후에 도청광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그러나 그 요란한 총성은 시민군 기관총이 내는 소리였다.  그날 시민군이 발사했던 기관총 사진이 위에 있는바, 그 사실을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屋上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軍헬기를 향해 사격을 했다.

14시 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 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 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 (http://blog.daum.net/sionvoice/11045264 )

   본래 그날 헬기가 뜬 것은 광주경찰의 요청에 의해서였다.  어떤 불순세력이 끼어있는지 모르는 5.18무장단체가 도청을 점거하기 전에 도청기밀서류를 안전한 곳으로 수송하는 작업이 시급했던 것이다.  위에 오병길씨는 헬기가 뜬 이유에 대한 이런 증언을 한다:

<도청 안에서는 군인들이 무엇인가를 들고 나와 대형 군용 헬리콥터에 싣고 있었다. 군인들이 접근을 막아 멀리에서 얼핏 보았는데 전날 저녁에 시위대와 충돌로 인한 사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사상자들은 시민이 아니라 공수부대원이나 경찰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때의 살벌한 분위기로 보아 사상자가 시민이었다면 군인들이 도청 안으로 가져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공수부대 초급장교로서 현장에 있었던 채수봉씨 역시 도청 바로 앞에 군 모포에 덮인 4~5구의 시신은 시민군 시신이 아니라, 전경 시신이었다고 증언한다 (http://cafe.daum.net/518cafe/IEVu/18 ).  그 전날밤 시위대가 버스로 깔아죽인 경찰 시신 4구가 어째서 그 다음날 오후까지 병원으로 후송되지 못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시민군 편 오병길씨와 계엄군 채수봉씨 두 현장 목격자의 증언이 일치한다.  그리고 늦게나마 시신들이 후송되려 할 때 시민군 기관총이 헬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쏘아대었으니, 실로 그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던가!  도대체 시민군 기관총 사수는 누구였는가?  분명 그는 불순세력이었거나 적어도 국가관이 이상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시민군 기관총 사수가 전남대생이었는가?  아니다.

   5.18무장단체는 군인만 총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시민도 총으로 죽였다.  탈북군인들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뒤에서 시민에게 총을 쏘았다고 증언하는바, 시민군 증언 내용들 중에서 그런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이 많이 발견된다.  예로써, 시민군 김용균은 "계엄군들은 동신고에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 학생이 총을 맞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렇다면 건물 맞은 편 광주상고나 광주교육대학교 부근에도 계엄군들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직까지도 나에게 있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라고 증언한다 (화순 동면의 무기고를 부수다  에서 작은 다섯번째 작은 제목 "도청 사수와 새로운 충돌" 이하.)

   5.18측은 그 누명도 전두환에게 뒤집어 씌우지만, 시민군 김태헌 역시 광주공화국 기간 동안의 사건 현장에서는 계엄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무장시민군들만 우글거렸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계엄군이 완전히 나간 시간은 오후 6시쯤으로, 나는 시민들과 함께 도청에 들어갔다. 그러나 도청에 계속 남아 있기에는 나이도 어리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머무를 수가 없었다. 도청을 나오면서 나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청이 탈환되었으나 계속 투쟁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총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시위대 차량을 타고 어느 사이엔가 헤어진 두암동 친구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두암동에 이르자 교도소가 있는 문화동 쪽에서 치열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친구가 먼저 집에 와 있었다.

나는 저녁을 먹고 모두들 만류했지만 저녁 10시쯤 혼자서 집을 나왔다. 동신전문대 부근에서 총기를 소지한 20여 명의 시민군을 만났다. 나는 20여 명의 시민군과 함께 근처 독서실이 있는 3층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려 할 경우를 대비하여 10명씩 교대로 경계근무를 하기로 했다. 일부는 옥상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일부는 독서실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01.html  에서 세번째 작은 제목 "화순 무기고 습격" 마지막 두 단락.)

   광주청문회 때는 5.18사기꾼들의 발언권만 우대받고, 군인들의 진실한 증언은 발언권이 안주어지거나 묵살되거나 무시되었다.  그런데 김일옥(金一玉) 당시 7공수 35대대장은 5.18무장단체가 21일 도청광장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대 인근 지역에서도 집단발포하였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대대는 일단 조선大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하고 차량제대와 육로 철수제대로 구분하여 준비한 후 19시부터 1차 차량제대가 정문을 출발해 화순 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 중 2km 지점 건물지역에 무장폭도가 집중 점거하여 차량 대열에 무참히 사격을 가해 대대는 5명이 관통상을 입는 등 부상자가 발생했다.

폭도의 사격으로 차량 2대 및 운전병이 낙오되어 보급품을 포함해 큰 손실을 보았다. 결국 낙오된 차량 및 보급품은 폭도들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실종되었던 운전병 중 1명은 폭도들에게 잡혀 광주 사직공원에서 온몸이 찢겨진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육로철수제대는 야음을 이용해 야산을 따라 주답마을로 철수하는 도중 폭도들이 사격을 하며 조직적인 철수를 방해하기도 했다.> (http://cafe.daum.net/518cafe/8yGb/70 )



   자, 5.18무장폭도들의 집단발포로 군인이 죽었다는 이 엄청난 증언은 사실로 입증될 수 있는가?  그날의 시민군 집단발포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시민군들의 증언이 한결같이 그 사실을 입증하는바, 시민군 김행주는 그때 시민군이 발사한 총은 LMG 기관총이었으며, LMG 실탄만 해도 1천5백 발을 쏜 집단 발포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쪽으로 가지 않고 시외곽을 돌아보기로 했다. 백운동 철도를 거쳐 화순 가는 길목으로 갔다. 그렇게 차를 타고 다니다가 도청 점거 소식을 들었다. 어둡고 추운 밤이었지만 이 소식은 우리의 사기를 충천시켜 주었고 우리는 모두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때는 너무 컴컴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학동쯤에서 우리가 타고 있는 차 안에 LMG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차 안에서 누군가가 계엄군이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해서 그 산에 대고 LMG 1천5백 발을 공포탄으로 쏘았다. 물론 위협사격이었다.> (고교생의 무장항쟁 에서 다섯번째 작은 제목 "도청 접수 소식에 사기충천" 이하.)
  
  이 사건에서도 시민군 기관총 사수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어떻게 시민군 차  안에 LMG 및 그 실탄들이 탑재되어 있었으며, 누가 쏘았는가?   우리가 현역 제대해도 대개의 경우 LMG 다루는 법을 모른다.  전남대생이 그 LMG를 쏘았는가?  아니다.  이 고교생도 그의 정체를 모른다.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대한민국 국군을 향하여 LMG를 쏜 자라면 그 정체가 의심스럽거나 국가관이 의심스로운 자임에는 틀림없다.  시민군 김여수에 따르면 그 차 안에는 수류탄도 있었다:

<언젠가 학운동에 있는 배고픈다리에서 계엄군과 격전을 벌였다. 산등성이에서 군인들이 3, 4명씩 넘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 쪽에서 먼저 발사를 했다. 우리는 다리 부근의 주택에서 주로 총을 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총을 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총을 쏘는지 모르기도 했고 또 이동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반응이 없자 우리는 총 쏘는 것을 중지했다.>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28.html 에서 두번째 작은 제목 "특수기동대차에 탑승하여" 이하.)

   보라!  5.18사기꾼들이 그날 작성하여 그 다음날 22일 전국에 뿌린 유언비어 삐라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읽은 국민은 군인들이 학살하고 시민들이 도망다니는 장면을 상상했으나, 객관적 진실은 정반대였다.  5월 21일 오후 군인들은 결사적으로 도망쳤으며, 도망치는 군인들을 향한 시민군 편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  위의 김일옥 중령은 "운전병 중 1명은 폭도들에게 잡혀 광주 사직공원에서 온몸이 찢겨진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증언하는바, 그의 증언이 사실임이 시민군 최인영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다음날 아침에는 걸어서 황금동에서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에는 커다란 광주리에 밥이 쌓여있었다. 3일간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한 터 라 정신없이 먹어댔다.

바로 그때 젊은 청년 2명이 군복 입은 사람의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어왔다. 자세히 보니 군인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총에 목이 관통되었고 이미 죽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밥이 넘어가지 알았다.> ( 남평 무기고를 털다 에서 일곱번째 작은 제목 "군복 입은 시체" 이하.)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 삐라는 전두환이 당시 광주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던 것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에서 아직 광주시민 그 누구도 전두환이란 인물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던 때였으며, 시민군 대다수는 전두환이 광주시청 직원이려니 여기고 있었다.  위의 최인영도 그 사실을 이렇게 시인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나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 (위의 같은 글 다섯번째 작은 제목 "남평 무기고를 털다" 마지막 단락.)


BBC International

☞  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  

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

정웅 사단장은 김대중처럼 얼굴마담이었는가?

5.18광주사태 연구사료

역사학도의 영어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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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3.16 15:54

    첫댓글 아주 광주인민공화국이란 말이 실감 나는군요. 순찰차... 여기가 캄보디아 킬링필드와 다를기 뭐가 있고. 설상가상으로 全統이 죽을 죄를 지었다 칩시다. 순박한 광주시민들을 선동해서 교도소 습격하고 총으로 사방 발포 맞으면 죽고 민주투사 되고 민족의 미래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허네유. 통일후 내전이 없다고 누가 장담 하리오 ㅠㅠ

  • 09.03.16 16:47

    아니..무기를 탈취한 무장세력을 일반시민이라 칭할수 있는가? 또한 김대중 이 천하에 을사오적보다 더한 악적은 길가다 자빠진놈까지 민주투사로 둔갑시켜 혈세를 쏟아붓고 천문학적인 돈을 북에 상납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광주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광주폭동이며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 09.03.17 02:04

    어찌됐던 역사 앞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쯤에서 양심선언 할자 없나? 슨상부터 하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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