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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기도를 길게 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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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누가20:45~21:6
당신의 승천기약이 임박해져옴을 분초를 다투듯 카운트다운하고
계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서기관들까지 삼가라 하십니다
이미 바리새인들(외식)과 사두개인들(불신앙)의 누룩을 조심하라(마태16:6)하셨는데
끝내 서기관들까지 삼가라하십니다
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외식으로 기도를 길게 하니 더 엄중한 심판을 받는다 합니다
이 말씀 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에 관한 사연을 이야기해주십니다
이 과부에게 주님께서는 상대적 가난을 뜻하는 말이 아닌 절대적 가난을 뜻하는 말을 썼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두고 가장 많이 헌금했다고 설명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하는 자들을 보셨다는 것은
사람의 잣대나 측량법 아래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도록 만드는 생생한 표정입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생활비 전부인 그 두 렙돈을 드리도록 하였을까요?
예수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쳐주심에 감사해서 드렸을까요?
아니면 사렙다 과부와 상관하셨던 하나님을 전적 신뢰해서 드렸을까요?
과연 그렇게 순수한 믿음의 감격으로 드렸을까요?
아니면 성전의 최소한의 비둘기 제물값이 두 렙돈이니
최소한의 헌금으로 두 렙돈을 규정했기에 그 법을 준수하기 위해
한 렙돈도 힘든 그녀가 두 렙돈을 다 드린 것일까요?
만일에 최소한의 헌금을 정한 이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이였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것이였을까요?
헌금조차 물량기준으로 제도화시킨 저들을 너희들은 삼가야 한다는 말씀이셨을까요?
아니면 너희도 가난한 과부처럼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드려야 한다는 걸까요?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린 말씀을 가지고
남에게 그렇게 하라고 적용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러다가 서기관들처럼 과부의 가산을 삼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허나 내가 내게는 적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날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님께서 얼마든지 내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분이시고
또한 그분께서 내게 요구하시지 아니하셔도 언제든지 나는 나의 모든 것의 주되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뿐이라면 그러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때가 단축되었으므로
있어도 없는 것 처럼 살라고 하셨습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것 처럼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것 처럼
아내가 있는 자들은 아내가 없는 것 처럼
매매 하는 자들은 매매 하지 않는 것 처럼 등등~^^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상대적 가난이 아닌
절대적 가난을 복있다고 하셨으니 사도 바울의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다가오는지요~^^
가게서 일하며 틈틈히 본문을 거듭 거듭 읽던 중
마음의 울림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내게 묻는 소리였습니다
언어로 표현하자면 "너라면 생활비 전부를 드린 가난한 과부를 어찌하겠니?"
기록된 말씀에 미루어 생각해본다면 고아와 과부에게 헌금을 받아내는
하나님은 상상이 되지 않네요.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생명값(속전세)을 동일하게 매기시는 분이십니다
고아와 과부라하여 생명값을 깍아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은
그들을 동일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게 사는 약자들에게 율법 자리에 앉아 그들을 돕는 제도를
몸소 실행시키지는 못할망정 그들에게까지 최소한의 헌금액을 부과했다면
<그 엄중한 심판>이 오죽할까 싶습니다
저들은 분명히 그렇게 드릴 때
하늘의 복이 주어질 것이라고 위선과 외식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특히 기도를 길게 하면서까지 말입니다
저들에게 부와 명예와 성공은 율법을 지킨 보응으로서 받게 되는 복이라고 입 발린 소리를 할테니깐요
우연인지 성령의 필연적인 개입인지,
아니 우리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거라며 믿는다면
우린 왜 성령님께서는 하필이면 생활비 전부를 드린 헌금 이야기 뒤
헌물로 꾸민 성전이 파괴될 것을 기록하도록 만드셨을까 성령님께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성전 파괴야말로 성전과 율법을 자신들의 철옹성으로 삼았던 서기관들을 향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고 선포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돌아보면 내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가운데 이런 일이 없었다는 건 없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옛 성전으로서의 옛 사람이라면 반드시 있어야하는 일로
그 무너지는 강도와 충격의 크고 작음에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이 외식한 자들에게는 더 클 것이며 덜 외식한 자들이라면 덜 클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속에 새롭게 창조되어지는 성령의 전으로 인해
우리는 모든 시험 환란이 오면 오는대로 온전히 기뻐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 생활비 전부였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던 제자들이 기여코 초대교회를 섬기며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일곱 집사를 세운 이야기를 말씀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건축을 명하실 때 나를 위하여 건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보니 나도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지만
나를 위하여 성전건축하고 보존 유지하려고 많이 수고한 자였습니다
어찌해서든지 한 푼이라도 더 십일조와 주정헌금과 감사헌금과
선교헌금 하기 위해 스페설 하는 매장들을 일일이 찾아가 2리터 드링크를
비롯한 물건들을 카터 수북히 사서 차에 실을 때마다 허리가 휘고 진땀이 나곤했습니다
그러던 2010년 초가을 교통사고 나기 바로 전 날,
그 오후는 너무 힘든 나머지 이런 힘겨운 노동의 반복이 언제 끝날 것인가?
우울하기까지 했었는데 그 다음 날 감사하게도 교통사고가 나더라고요~^^
교통사고 난 직후 나는 더이상 이렇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결단했고
한 두 달 쉬는 동안 그동안 제대로 파헤치지 못했던 말씀의 궁금증을 찾아
골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감사한 일이죠
주님께서 과연 어떤 걸 더 기뻐하셨을까요?
말씀이 정녕 그러한가 성경을 상고함으로서 얻는 즐거움이야말로
주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인 것입니다
이 복음의 젖과 꿀을 소자들에게 흐를 수 있도록
주께서는 내게 얼마든지 헌금을 받아 낼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일하시기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감동으로 드리는 걸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문에 나는 과부의 두 렙돈을 헌금 독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고 봅니다
오히려 과부를 삼키지 말고 도와주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인애의 독려로 말씀하시고 계시다고 봅니다
우리는 헤롯성전이 하나님을 위하여 지은 성전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압니다
결국 그 성전은 파괴되었고 예수님께선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몸 드려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성전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렇게 날마다 증거하도록 만듭니다
자꾸만 뭔가 믿음의 가시적인 것들을 요구하는 오늘날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증거한다는게 참으로 어렵습니다
심지여 내가 나에게 복음을 증거하는게 젤 어렵습니다~^^
나도 자꾸만 눈으로 보여지는 걸 듣고 싶어하니깐요~^^
나도 귀가 근질 근질할 때가 많거든요~^^
이러니 되었다함이 없는 것이지요
참으로 그러합니다.
첫댓글 큐티본문(3/20)-누가복음21:5~19
아멘~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