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곡(耘谷)께서는 은둔(隱遁) 생활을 하시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며 직필(直筆: 정권에 굴하지 않고 바르고 정의로운 글을씀)로 역사를 남기시니, 오늘날 학자들은 운곡(耘谷)을 당대 제일의 우국지사(憂國志士)이시고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을 철저히 증오(憎惡)한 의인(義人)이시며 비분강개(悲憤慷慨)의 애국형(愛國型) 인간 지상주의자(至上主義者)이시고 철두철미(徹頭徹尾)한 애국자(愛國者)로 평가(評價)하고 있다.
운곡(耘谷)께서는 조선(朝鮮) 태조(太祖)의 셋째 아들인 방원이 등극하기전 정안대군(靖安大君) 시절에 글을 가르친 스승이므로 태종이 스승이신 운곡(耘谷)의 인품(人品)을 잘알고 있어 태종대왕으로 등극한 후 옛 스승을 찾아 벼슬을 내리고자, 여러차례 사람을 보내어 벼슬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그때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의 선비정신을 굽히지 않으시며 벼슬을 거절 하신다.
태종은 운곡(耘谷)께 수차 사람을 보내어 출사를 권유하였으나 거절하자 태종께서 직접 운곡(耘谷)께 출사를 권유코자 耘谷을 찾아 원주 치악산(雉岳山)에 행차하시였으나, 운곡(耘谷)께서는 벼슬의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의 선비정신을 굽히지 않으시며 치악산 상봉에 위치한 변암으로 피하여 태종을 만나지 않으시니, 운곡의 그 고절(高節)을 삼은(三隱:圃隱 정몽주. 牧隱 이색. 冶隱 길재) 보다 더 휼륭하고, 백이숙제(伯夷叔齊) 후 일인(一人)이라 하였다. 운곡께서는 생전(生前)에 야사 6권을 직필(直筆)하여 궤속에 깊이 감추었고 자손에게 유언하기를 자신과 대등한 인물이 아니거든 절대로 궤를 열지 못하도록 간절히 일렀으나, 후손 때에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열어 보았다고 한다. 궤 안에는 고려때 직필기록(直筆記錄)이 들어 있어 새로이 들어선 이씨 왕조에 들키면 멸문지화를 당할까 두려워 불태워 버리고 시사(詩史) 5권에 시(詩)1144수를 남겼다. (그러나 근래에 忠益 公 김시양(1581-1643)이 쓴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김시양은 "원선생은 원주 사람으로 문장에 능하고 절조가 있었다. 세상의 어지러운 때를 만나 숨어 살면서 벼슬하지 않고 글을 지어 자신의 생각을 나타냈다. 그가 혁제간(革除間)의 일을 쓴 것이 미묘하고 완곡하여 사필(史筆)의 바른 법을 얻었다. 자손이 그의 저서를 대대로 비밀히 간직하고 남에게 보이지 않았는데, 유계(遺戒)가 있어서 라고 한다. 금년 12월에 나는 부형을 따라 임진의 병화를 피하여 치악산 대승암(大乘庵)으로 갔는데 사문(斯文) 元경명(元警鳴)도 거기 와 있었으니 바로 운곡의 후손이였다. 때로 유고를 내 놓와서 나도 일찍이 그 일단을 대략 엿볼 수 있었는데 상세히 보지는 못하였다. 원공(元公)이 권양촌(權陽村)을 두고 욾은 절구(絶句)가 하나 있는데 한 구는 기억하지 못하겠다. 라고 하여 후손이 태워버렸다는 야사가 지금 어디인가 묻쳐있을 가능성이 있어 앞으로 조선의 역사가 주목된다.)
이 퇴계(李退溪)선생은 詩를 읽고 원주(原州)에 신사(信史)가 있다고 하였고 춘추제문(春秋祭文)에서는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이며, 영세 (永世)의 무강(無疆) 이라고 까지 극찬(極讚)을 하였다.
운곡(耘谷)의 후학들과 백성들은 광해군4년(1612년), 원주시 호저면 산현리에 사우(祠宇)를 창건하여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칠봉서원(七峰書院)이라 명명한다. 그후 현종대왕 14년(1673.12.16) 현종께서는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사액(賜額)을 내리시고 예조정랑 송정렴(宋挺濂)을 보내 고유제(告有祭)를 올린다.
◇ 칠봉서원 사적 大明萬歷 四十年壬子 合辭齊會 彰建祠宇於原州北三十里 七峯 越十三年 甲子奉安高麗國子進士耘谷先生位版 (대명만력 40년 임자에 여러 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원주 북쪽 30리 칠봉북쪽에 사우를 창건하고, 13년 뒤인 갑자년에 고려국자진사 운곡 원선생 위판을 봉안하였다.)
◇ 春秋祭享 祝文
伏位 學傳洙泗 道屯首陽 一部詩史 萬古綱常 斯文之享 永世無彊 謹以 牲幣 자盛庶品 式陳明薦 顯宗大王四年 癸丑十二月 特命賜額 七峯書院 (삼가 아뢰오니 선생의 학문은 洙泗(수사)를 전해 받고, 道(도)는 首陽 (수양)에 자리에 두었습니다. 1부 詩史(시사)가 만고의 綱常(강상)이니,斯文(사문)의 祭享(제향)이 영세토록 끝이 없으리라. 삼가 牲幣(생폐)와 ?盛 (자성)의 여러 제물을 갖추어 정성껏 바치나이다).
현종대왕 께서는 춘추제향 축문에 "시사(詩史)가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이니 사문(斯文)의 제향이 영세토록 끝이없다."고 하였으니 운곡(耘谷)이 역사적인 위인임은 의심에 여지가 없다. 선조29년(1596) 한강 정구 선생은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운곡 묘소에 제향하였고, 선조36년 (1603년)에는 박동량이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여 고유제를 올리고 "운곡시사(耘谷詩史)"를 간행하였는데, 시사서(時史書라는 서문(序文)에 선생의 대절(大節)을 담은 글이라서 빨리 세상에 퍼드려야만 백성의 표식을 삼아야 할 것이라 시사 하였으며 (서문 아래 붙임). 지난 2008. 3. 6일 현 金振善 도지사께서 운곡 사당과 묘소를 찾아 奉享하였다.
현종11년(1670)에는 신도비가 건립되는데, 신도비는 통훈대부 전 사헌부 장령 양천 후인 허 목 선생이 비문을 짓고, 외예손 완산 후인 이명은 선생이 쓰셨다. 1920년(광무23년) 운곡 선생과 복애 범세동이 쓴 운곡 원천석 총단 화해사전이 발본되어 간행되면서 운곡에 대하여 더욱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운곡 선생은 칠봉서원을 비롯하여 두문동서원, 사양서원, 경백서원, 경현사, 창의사에 배향하고 매년 봉향하고 있으며, 지난 2008. 5. 26일에는 횡성군민이 횡성군 서원면 창촌리에 매봉서원을 창건하고 운곡 원선생 위패를 새로 봉안하였다. 또한 강원도에서는 운곡묘역을 문화재로 지정, 묘역을 정화하고 사당(彰義祠)을 창건(彰建)하여 영정을 모시고, 매년 4.23일 원주 석경촌 창의사(사당)에서 운곡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뜻있는 학자들은 운곡학회를 만들어 운곡의 학문적 가치관과 정신문화에 대하여 연구 발표하고 운곡 선양을 위한 전국 규모의 다체로운 행사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후손들은 절의의 명문 문중임을 잊지 말고 선조의 유지를 명심하고 받들어 백세에 보전하여 자손된 도리를 다하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
원주(原州)에는 운곡(耘谷)에 대한 많은 설화(說話)가 육백여년의 역사(歷史)를 간직하여 현세에 전해지고 있으니 운곡(耘谷)께서는 자신(自身)을 찾아 태종(太宗)께서 치악산(雉岳山)으로 오시는 것을 미리 아시고 노상의 강변에서 노구(老구)가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부탁하기를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거든 나는 왼쪽의 변암 (弁岩)으로 가겠으니, 그대는 내가 바른쪽으로 가더라고 말하라 부탁하셨다. 과연 잠시후 태종(太宗)의 행차가 나타남에 노구는 놀라 운곡(耘谷)에 대한 의리(義理)를 지켜 결국 태종(太宗)에 대해 거짓을 드린 커다란 죄과(罪過)를 저질렀다. 노구(老구)는 황공무지(惶恐無地)하게 생각하고 그 깊은 물에 투신하여죽음으로 사죄(赦罪)하였으니 바로 그곳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연(?淵) 또는 노구소(老?沼)라 이름지어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곳으로 전(傳)해 지고 있다. 또한 노구가 향방을 잘못 가르킨 곳에 바위를 횡지암(橫指岩)이라한다. 태종(太宗)은 비로서 운곡(耘谷)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돌릴 수없슴을 알고, 한 정자에서 귀하신 몸을 칠일(七日)간이나 묵으면서 운곡(耘谷)을 경모(敬慕)하시니, 이곳이 바로 그 유명(有名)한 태종대(太宗臺)이다. 태종대는 현재 횡성군 강림면 치악산 기슭에 태종대(太宗臺)라는 현판과 정자한동이 옛 역사를 간직한체 사적으로 보존되고 있어 현세에 이르기까지충절의 교육장(敎育場)으로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끈키지 않고 있다. 태종대에서 위로 바라보면 치악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구연을 에워싸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데, 태종이 운곡(耘谷)을 만나시지 못하고 이물길을 걸어 올라 치악산을 넘어 한양(漢陽)으로 돌아가시게 되는데, 귀성길 산봉우리에서 뒤를 돌아보며 운곡(耘谷)이 계시는 쪽을 향하여 배례(拜禮)를 하니, 그 산은 배향산(拜向山)이라 불리워지고, 또 한 고개를 넘어 곤용포를 벗어 나무에 걸고 심히 침통하게 생각하셨으니, 이 고개는 현제까지 원통(怨痛)재라 하며, 귀성(歸城)길에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신 곳은 대왕재(大王)라고 명명(命名)되어 오늘날까지 치악산(雉岳山)에 관한 역사를 한 몸에 지니고 지명(地名)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운곡(耘谷)께서 태종을 피하여 그 길로 치악산(雉岳山) 1288고지 높은 산 준영에 위치하고 있는 변암(弁岩)으로 향 하시였다. 변암(弁岩)은 험준한 바위로 굴이 형성되어 있으며 그 굴 안에는 족히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지라 운곡(耘谷)께서는 속세을 떠나 굴 안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며 기거하셨으니, 지금도 변암(弁岩) 암반에"우물을 파서 갈증을 면하고 산채를 걷우어 시장기를 달랬다". (開穿石井常요渴收捨山황具慰貧)라는 글귀가 변암(弁岩)벽에 새겨져 있다.
태종(太宗)이 아들 세종(世宗)에게 왕위(王位)를 승계하고, 다시 운곡(耘谷)을 찾으시니, 그제서야 비로소 운곡(耘谷)께서는 정중(正中)히 태종(太宗)을 만나시니 태종(太宗)은 운곡(耘谷) 앞에 손자(孫子)들을 불러 놓고 운곡(耘谷)에게 "우리 손자들이 어떠하오" 하고 물으시었다.
운곡(耘谷)은 태종(太宗)의 손자중 한 아이를 기르키면서 "이 아이가 조부(祖父)를 많이 닮았으니 모름지기 형제(兄弟)를 사랑하라" 고 타일렀으니 그 아이가 바로 훗 날의 수양대군(首陽大君)이요, 곧 세조(世祖)이며,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뒤로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참혹하게 처형하고 왕(王)위를쟁탈하여 권좌에 올랐으니 나라의 운명(運命)을 내다 보시는 耘谷 선생의 식견(識見)은 진실로 선견(先見)의 명(明)이 있으셨씀이다.
운곡(耘谷)의 묘소는 운곡이 생존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잡아 주었는데 한곳은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수 있는 곳이요, 또 한곳은 백대(百代)의 자손(子孫)이 번영(繁榮)할 수 있는 곳이라 했다.
충절(忠節)의 은사(隱師) 운곡(耘谷) 선생께서는 물론 권세(權勢)와 부귀영화(富貴榮華)를 택하지 않으시고, 백대(百代)의 자손(子孫)이 번영(繁榮)하는 자리를 택하셨으니, 바로 그곳이 원주시 행구동 석경촌에 소재하는 耘谷 묘소이다.
운곡(耘谷)의 묘소(墓所)는 봉요혈(蜂腰穴)에 위치하고 있어서 자손(子孫)이 묘전에 서서 제축(祭祝)을 올릴만한 여유가 없게 하였다. 사후(死後)에도 비석(碑石)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遺言)하셨으나 후대에와서 그럴 수야 있겠느냐고, 비석(碑石)을 세웠더니 비석의 전신에서 항상 땀이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석에 직함을 삭제하고 다시 세웠으니, 그 비석이 바로 운곡(耘谷) 묘소(墓所)에 묘비(墓碑)다.
치악(雉岳)에 운곡(耘谷)이 있어 綱常(강상)을 부식(扶植)하니 그 향기 골마다 서리어 600년 原州의 얼이 되었다. 고도(高蹈)의 은둔(隱遁)으로 세상을 버리지 않고 직필(直筆)로서 후세(後世) 역사(歷史)를 바로 세우셨으니, 그 기상(氣像)과 고고(孤高)함이 천봉(千峯)에 솟아 빛난다.
先生의 思想과 精神은 萬古의 불역(不易)일지니, 백세(百世)의 스승이시며 운곡(耘谷)의 충절정신(忠節精神)은 우리 민족의 민족정기(民族正氣)로 이어져 영구히 만세(萬世)에 전하여 지리라.
이제 늦은 감은 있으나 강원도와 원주시에서는 운곡 선생을 선양하기 위하여 운곡 묘역의 정비는 물론 원주시 행구동 산37번지에 창의사(彰義祠)와 관리소, 화장실, 주차장을 준공하고 4월 23일을 운곡제(耘谷祭)날로 정하고 창의사(彰義祠 :운곡 선생 사당) 에서 원주시 주관으로 운곡제를 올리고 있음은 물론, 뜻있는 학자들은 "운곡학회"를 조직하여 운곡사상(耘谷思想)을 연구하고 "운곡시사집". "운곡정신문화"등을 편찬하였으며, 매년 운곡 정신문화 계승 행사로 "운곡 원천석 선생 추모 전국 한시(漢詩) 백일장 " "전국 학생휘호대회 "등 전국 규모의 다체로운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원주 횡성지역에 전하여지고 있는 운곡(耘谷)에 대한 설화(說話)는 너무도 많아 일일이 기록하지 못하니 대종보(大宗譜)등을 참조하여 익히도록하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이어 오고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운곡(耘谷)의 시(詩) 한수를 소개한다. 회 고 가 ( 懷 古 歌 )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눈마저 휘어진 대(竹)을 뉘라서 굽다던가 구불 절(節)이면 눈속에 굽을 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高節)은 너 뿐인가 하노라
부춘산(富春山) 엄자능(嚴子凌)이 간의대부(諫議大夫) 마다하고 소(小) 정에 낙대싫고 칠리탄(七里灘) 돌아나니 아마도 물외간객(物外間客)은 너뿐인가 하노라 聞都統使 崔公 被刑寓歎 (문도통사 최공 피형우탄) - 최영 장군이 사형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함. - 獨立朝端無敢于 독립조단무감우 충성과 의리로 온갖 어려움 이겼네
直將忠義試諸難 직장충의시 제난 조정에 홀로 섰을 때 감히 덤빌자 없었고
爲從六道黔藜望 위종육도검려망 육도 백성들이 소망대로 률 따르고
能致三韓社稷安 능치삼한사직안 삼한의 사직을 편케 했네
同列英雄顔更厚 동렬영웅안경후 동렬의 영웅들 얼굴이 더욱 부끄러워지고.
未亡邪 영骨猶寒 미망사 영골유한 아직 죽지않은 자들은 뼈가 서늘해 젔으리
更逢亂日誰爲計 경봉난일수위계 어지러운 때다시 만나면 누가 계책내려는지
可笑時人用事姦 가소시인용사간 이 [출처] 원주원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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