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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한국고대사 : 왜왕조(倭王朝)
고대에 남방 인도계 종족이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거주했다. 이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족인 관계로 일본 땅과 한반도에 걸쳐 왜국(倭國)이 자연적으로 세워졌다. 왜왕이 한반도에서 살면서 한반도와 일본 땅을 다스렸는데 그 행정체제가 원시 수준이라 일본 땅은 실제적으로 다스리지 못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북방 몽고민족이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세웠다. 이에 왜왕국의 영토가 한반도 남부로 줄어들었다. 단군조선을 멸망시킨 중국 한(漢) 나라가 그곳에 자기나라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그 전에 단군조선 왕족이 남쪽으로 내려가 왜왕실을 남해안으로 몰아내고 한(韓) 나라를 세웠다. 한왕이 한반도 남부를 마한, 진한, 변한 세 부분으로 나눈 다음 마한 땅에 살면서 삼한을 다스렸다.
한왕조(韓王朝)를 세운 단군 왕족은 본래 북방 몽고민족으로 수백 명 무리였다. 그들로서는 수만, 수십만 왜 백성을 다스릴 수가 없는 관계로 형식적으로나마 자신들이 몰아낸 왜왕실을 섬기게 되었다.
몽고 부여민족 한 무리가 한반도 북부에서 한(漢) 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다. 또 한 무리가 남부에서 한(韓) 나라를 무너뜨리고 백제(百濟)를 세웠다.
백제를 세운 부여민족은 수백 명 소수 무리라 다수 왜 백성을 다스릴 수가 없어 한왕실이 그랬듯이 왜왕실을 섬겼다. 그러나 왜왕실이 원시인 수준이라 백제왕실의 통제 아래로 떨어졌다. 한반도에 들어온 중국, 인도, 만주시베리아(북부일본) 여러 무리가 가야, 신라 등 여러 왕국을 세웠다. 이들 왕국들도 왜왕실을 형식적으로나마 섬겼다.
한반도 남부에 이민족 국가들이 들어서자 비록 그들이 왜왕실을 섬겼지만 신변의 위협을 느낀 왜왕실이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일본 야마토 정권의 모태가 되었다. ― 이에 미루어 판단하건대, 일본에서 수십년간 살면서 유형무형(有形無形) 유물을 토대로 연구한 한국인 학자가 일본 천황은 본래 한국옷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다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 연구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백제, 가야, 신라 등 왕실이 왜왕실이 다스렸던 남해안 땅을 그대로 두었다. 이에 그곳에 임나, 마한, 진한 왜국의 군현이 존속하게 되었다. 왜국 행정이 원시 수준이므로 그 군현은 독립 국가라고 할 수 있었다. 마한, 진한은 한(韓) 나라 관리 집안이 다스리고, 임나는 왜(倭) 나라 관리 집안이 다스렸다. 가야의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형식상으로나마 존재하던 한반도의 왜국 군현이 줄어들어 결국 모두 소멸하였다. 임나가 유명무실하여지자 백제가 남쪽으로 진출하여 전라도 땅을 자기 영토로 편입시켰다.
선비족 모용씨 무리가 신라를 정복했다. 그 집단은 선진 문명 집단이라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경기도 땅을 점령하고 가야를 병합하였다. 왜왕실 지배권을 놓고 백제왕실과 신라왕실이 싸웠다. 이 싸움에서 백제왕실이 왜왕실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관계로 이겼다. 이에 신라왕실이 왜왕실(倭王室)과 손을 끊고 당왕실(唐王室)과 손을 잡았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의하면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가 아니라 남방인도계 언어이고 한국민족은 북방몽고계 종족이 아니라 남방인도계 종족이다. 한국어가 남방인도계 언어이고 한국민족이 남방인도계 종족이라는 것은 언어학자, 생물학자들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소수 외래 민족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왕실은 다수의 왜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형식적으로나마 왜왕실을 섬겼다. 당시 인구 구성에 있어서 왜인이 백제, 신라, 가야는 90% 이상이고 고구려는 60% 이상이었다. 고구려 왕실은 그 백성 30% 이상이 ― 그들은 지배계층이었다 ― 왜인이 아니므로 꼭 왜왕실을 섬겨야 할 필요는 없었다. 고구려가 광개토왕, 장수왕, 문자명왕 전성시대가 지나가고 내리막길에 들어섰는데 수당한테 압박을 받자 왜왕실을 받들어 왜, 백제와 연합해 자국을 보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신라왕은 스스로 고구려 수도로 가 고구려왕에게 엎드려 절했다. 고구려왕과 백제왕은 서로 잡아 죽였다. 고려, 조선 시대에는 적국의 왕이 항복한 한국의 왕조차도 깍듯이 예우했다. 적국의 왕이 한국의 왕을 잡아 죽인다거나 한국의 왕이 적국으로 들어가 엎드린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실을 밝히건대 삼국시대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왜왕만 들어 있는 관계로 고구려와, 신라왕, 백제왕은 왕다운 왕이 될 수가 없었다. 이민족 무리가 한반도에 들어와 고구려왕이니 무슨 왕이니 하고 자칭한 것으로 백성들이 그들의 무력 때문에 어쩔 수없이 복종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왕, 백제왕, 신라왕 그 왕들을 잡아 죽이거나 그 왕들한테 항복을 받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한사군의 위치
한국역사학계에서 한사군인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은 각각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남부, 황해도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잘 못 본 것이었다. 중국에서 군 개념은 국가이고 현 개념은 수만 명의 인구를 가진 지역 그러니까 우리나라 옛날 도와 군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당시 중국에서 고조선 영토를 요하 동쪽 모든 지역으로 보았다. 그래서 고조선 수도 평양을 함락시킨 다음 요하 동쪽 전지역을 네 개 군으로 그러니까 요하에서 압록강까지는 현도군, 평안북도와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는 낙랑군, 함경도와 북간도는 임둔군, 황해도 남부부터 남쪽 지역은 모두 진번군으로 편성했다. 요하지역은 기름진 지역이라 한 조정이 그 지역 자신의 영토와 고조선의 영토를 합해 한 개 군을 만들고 그 군의 북동쪽 지역을 현도군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고조선의 행정력은 원래 평안도와 황해도 그리고 요하에서 압록강까지만 미쳤다. 따라서 임둔군과 진번군은 유명무실하고 현도군과 낙랑군과 존재했다. 함경남도 남부에 임둔군의 한두 개 현, 황해도 남부와 경기도 북부에 진번군의 한두 개 현이 한동안 존속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한 조정이 함경도 땅과 남한 땅을 자기 영토로 여김에 따라 두 지역을 조사, 기록하게 되었다. 당시 한(韓) 나라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므로 그것에 대한 것이 한(漢) 조정 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기록에서 왜(倭)가 한(韓)의 남부에 붙어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당시 왜왕실이 남해안 귀퉁이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왜왕조는 원래 한반도 국가였다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 민족이 형성된 것은 십 세기 이후 그러니까 한국 고려시대 이후였다. 그 이전에 세 나라 땅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오늘날 세 나라 그들의 조상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같은 민족은 아니었다.
중국, 일본에 십 세기 이전에 기술한 역사서에 한국고대사 관련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는 중국, 일본 민족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 아니므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본서기’는 일본 땅에 천황의 나라가 들어선 뒤에 그 나라에서 자기 나라를 미화하기 위해서 편찬한 역사서이다. 하지만 그때 일본 민족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관계로 그 책에 민족적 편견이 별로 들어가지 않았다.
야마도 정권 이전의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걸쳐있던 왜국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서기’의 그 부분은 허황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야마도 정권은 그 문화 수준이 낮았으나 일정 수준에 달한 백제 문화 아래 있었던 관계로 기록다운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야마도 정권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백제 근초고왕 시대부터의 한국고대사 관련 내용은 비록 그 정권 ‘미화’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지만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는 십 세기 이후에 편찬한 역사서이므로 그 역사서를 연구할 때는 민족적 편견에 유의해야 한다. 두 책에 한반도의 왜, 임나 이야기가 없는데 이것은 한국민족 입장에서 서술했기 때문이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는 한반도 왜국에 관한 기록이 간접적인 것이나마 많이 있었는데 모두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그 기록을 보면서 편찬한 관계로 무심코 기재하기도 했다. 김부식은 왜왕국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백제, 신라 상인의 중국 대륙 지배 이야기도 빼버렸다. ― 오늘날 장보고의 그 지배가 밝혀진 것은 전적으로 그 시대 일본인의 일기 덕택이었다. 그것은 그가 삼국사기를 중국 역사가들처럼 ‘왕조 중심, 정식 기록 중심’으로 편찬했기 때문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한국민족을 몽고 단군조선계로 보고 서술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반도 토박이 왜인(倭人)의 이야기는 모두 빼버렸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편찬할 때 그 이야기가 많이 있었던 관계로 그 이야기를 무심코 수록하기도 했다.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걸쳐 있던 왜왕국의 이야기는 오늘날 삼국사기 등 역사기록에는 없지만 향가 등 민간기록에는 많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추어 고대사 연구가가 그 민간기록을 평생에 걸쳐 연구하여 그 왜왕국의 실체를 밝히었다. 언젠가 그 연구물이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다. 그 연구가는 그 왜왕국 명칭을 ‘왜’라고 하지 않고 ‘가락’이라고 했다.
한반도 왜왕국은 원시인 수준이었고 그 때는 문자다운 문자도 없었다. 왜왕실이 ‘왜국(倭國)’이라는 한자어를 사용한 것은 일본 땅에 터를 잡은 뒤였다. 필자가 고대에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걸쳐 있는 왕국의 명칭이 ‘왜’에 가까운 발음이었다고 보는 것은 중국 고대 기록에 ‘왜국(倭國), 왜인(倭人)’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한반도 남부의 왜왕국은 자기 나라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았다. 한반도 남부에서 자기 나라 이름을 최초로 한자로 표기한 나라는 한(韓)이었다. 그래서 중국, 한국, 일본 고대 기록에 한반도 왜나라는 없고 한나라만 있게 된 것이었다. 중국 고대 기록에서 자의적으로 한반도의 ‘왜’ 국명을 ‘진(辰)’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앞에서 말한 아마추어 연구가가 그 왕국을 ‘왜’라고 하지 않고 ‘가락’이라고 한 것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왜’에 대한 거부감이 새겨져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물론 필자 개인 견해이다. 한반도 왜국 땅에 세운 나라를 ‘가야’라고 했고 또 삼국유사에 ‘가락’이라는 나라가 있는 것에 미루어 본다면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걸쳐있던 왕국의 명칭은 ‘왜’가 아니고 ‘가락’이었을 수도 있다.
‘왜’는 원래 중국인들이 붙여준 국명인지도 모른다. 고대에 일본, 한국 및 중국대륙 해안에 키가 작은 남방계 사람들이 살았다. 그들은 중원(황하지역)을 차지한 사람들에 비하면 난쟁이들이었다. 그래서 중원인들이 그들을 ‘난쟁이’, ‘난쟁이들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걸쳐있던 나라의 본래 이름은 그들 스스로 ‘난쟁이들의 나라’라고 했을 리가 없으므로 ‘왜’일 리가 없고 중국 고대기록이나 앞의 아마추어 연구가의 주장처럼 ‘진’이나 ‘가락’이었을 수가 있다.
고대에 황하지역의 사람들이 그 지역 밖의 사람들을 모두 반쪽 인간으로, 천하를 모두 자기 나라로 보았는데 황하지역 문명 수준이 그 밖의 지역보다 열배 이상 높았으므로 잘못 보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시대에 황하지역의 사람들이 일본, 한국 지역을 조사, 기록하는데 착오는 있어도 ― 문명수준이 높아 큰 착오는 일어나지 않았다 ― 편견은 없었으므로 그 기록은 일본,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 아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연구는 중국고대기록과 한반도와 일본 땅의 유형무형(有形無形) 유물을 토대로 해야만 한다. 그 고대기록에 의거하면 일본 땅의 왜국이 한반도 국가를 다스렸고 그 유형무형 유물에 의거하면 한반도의 국가가 일본 땅의 왜국을 다스렸다. 상반되는 그 두 가지 여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답안을 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인 것이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걸쳐 있는 왜국의 본거지가 본래 한반도였는데 나중에 일본 땅으로 옮겨졌다고 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 이것에 대해서 여태껏 생각도 해보지 못한 한국과 일본의 역사연구가들은 반쪽짜리 뇌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漢)이 고조선을 병합한 다음 한반도와 일본 땅을 조사, 기록했다. 이때 왜왕실이 한반도에 있었지만 한(漢) 입장에서 볼 때 남해안 귀퉁이에 있는데다 한(韓)의 속국이라 가볍게 기록되었다. 왜왕실이 그때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과 교접을 하지도 않았다. ― 중국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함에 따라 붓 등 중국 문물이 당연히 한반도 남부에 들어갔겠지만 왜왕실이 아직 한자를 익혀 사용하지는 못했다. 왜왕실이 일본 땅에 터를 잡은 뒤에야 한자를 사용하고 중국과 교접했다. 그래서 중국고대기록에 일본 땅의 왜왕실이 한반도를 다스린 것만 있게 된 것이다.
김부식, 사마천은 수준 낮은 역사가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백제 근초고왕 재위 중요한 시기 그러니까 그가 한반도를 주름잡는 시기가 빠져있다. 이것은, 21세기 역사연구가 입장에서 볼 때, 김부식이 사마천을 포함한 중국역사가들처럼 수준 낮은 연구가임을 나타내고 있다.
근초고왕은 삼국시대 첫번째 두번째를 다투는 위대한 제왕이다. 훌륭한 역사연구가라면 그런 제왕 편은 만약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면 자신의 추측 이야기로라도 채웠을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사마천 등 저명 역사연구가들을 흉내 내, 근초고왕 기록이 남아있는데도 그 기록을 진실성이 없는 것이라며 무시해버렸다. 필자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집필할 때 근초고왕에 관한 기록이 있었는데 그 기록을 무시해버렸다고 보는 것은 그 삼국사기에 한반도 왜국에 관한 직접적인 것이 한구절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근초고왕에 관한 기록이 분명이 있었는데 김부식이 이런저런 이유로 무시해버린 것이었다.
김부식이 진실성이 없는 것이라고 판단을 내린 근초고왕 기록은 어떤 내용의 것인지는 ―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 시기에 백제와 왜가 연합해 한반도 남부를 평정했다는 기사가 기재되어 있다 ― 대략 추정할 수가 있다.
“근초고왕이 한반도를 평정했다. 이뿐만 아니라 군대를 중국으로 보내 요서와 산동반도를 점령했다.”
김부식이 근초고왕에 관한 기록을 보건대, 그가 왜왕한테 명령을 받기도 하고 왜왕에게 명령을 내리기도 하면서 한반도를 횡행했고, 요서와 산동반도를 점령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백제정부 기록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 기록들을 무시해버린 것이었다. 훌륭한 역사가라면 근초고왕이 삼국시대 첫번째 두번째 가는 위대한 제왕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기록은 어떤 내용이라도 ― 터무니없는 내용이라도 ― 싣고 말미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였을 것이다.
근초고왕 시기 백제의 행정 수준은 미개한 것이었다. 근초고왕이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횡행한 것은 그 개인이나 그 행정체제 덕택이 아니라 다수의 이름 없는 사람들 덕택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제대로 기록할 수가 없었다. 후세 역사연구가의 구미에 맞는 기록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한국왕은 중국황제와 대등한 신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역사학계에서 고려는 왕의 나라가 아니고 황제의 나라라고 보고 있는데 한국과 중국의 고대역사기록 어디에도 그것에 관한 기록이 없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한국 역사학자들이 무식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몽고가 고려를 점령한 다음 태조, 태종 그런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ㅇㅇ왕, ㅇㅇ왕 그런 명칭을 사용하게 했다는 역사기록 한 구절을 보고 역사학자들이 고려가 왕의 나라가 아니고 황제의 나라였다고 판결을 내린 것이었다.
중국에서 원래 황제는 농사짓고 초가집에서 살며 백성을 다스린 사람이고 왕은 면류관을 쓰고 궁궐에서 살며 백성을 다스린 사람이다. 백성들 잠재의식에는 황제는 없고 왕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초로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스스로 ‘황제’라고 하였다. (자신은 아프리카 토인들의 추장과 동급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지식인 입장에서 보면 우스꽝스럽고 한심하지만 절대권력자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진시황제가 ‘왕’이란 말을 ‘황제’란 말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여겼다.
어쨌든 중국에서 최초로 통일왕조를 세운 사람이 황제라고 하매 그 후임 지배자들도 황제라고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이란 말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 백성들이 황제를 모르고 왕만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제가 자신의 형제를 왕으로 봉하여 자신이 왕보다 높음을 내외에 알렸다. 무식한 백성들은 여전히 황제와 왕을 구별 못했지만 그래도 왕이 된 사람들이 아무 실권이 없는 존재이므로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황제가 건국과 체제유지에 결정적 공헌을 한 신하도 왕으로 봉했다. 이 경우 백성들이 왕과 황제를 구별 못하고 그 신하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만 그 신하의 공이 워낙 커서 황제가 어쩔 수 없이 그 신하를 왕으로 봉했다. 이에 왕이 된 그 신하가 어김없이 황제를 몰아내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그래도 쫓겨난 황제가 억울해하지 않은 것이 그를 왕으로 봉할 때 자신이 쫓겨나는 것을 각오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황제가 한국, 일본, 몽고, 베트남 자신이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는 지역의 실력자도 왕으로 봉했다. 대신 그들에게, 자신을 형님 왕으로 대우하기를 요청했다. 한국 등의 실력자의 입장에서는 백성들이 왕과 황제를 분간 못하고 또 자신 나라의 힘이 중국의 백분의 일에 불과하므로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구미의 역사연구가들이 한국, 몽고, 베트남은 중국에 조공하는 속국이었다고 보고 있는데 실수한 것이었다. 진실을 말해도 한국 등은 중국과 대등한 나라였다. (구미 역사연구가들이 일본은 천황이라고 칭했으므로 중국과 대등한 나라였다고 보고 있는데 실인즉 일본지배자들이 진시황제처럼 자신은 아프리카 토인들의 추장과 동급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들 나라들이 해마다 중국에 조공한 것이 아니라 선물을 보낸 것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만약 그들 나라들을 속국으로 만들려 했으면 한(漢)이 한반도에서 그랬듯이 왕 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으로 편성했을 것이다. 중국이 한국 등의 나라에게 ‘왕’이란 명칭을 허용해준 것은 자신과 동등한 나라라고 인정해준 것이었다. 고려를 점령한 몽고가 ‘왕’ 칭호를 사용하게 해준 것은 고려 지배를 포기한 것이었다.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께 바친 것이었다
한국역사학계에서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것도 무식해서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었다. 백제왕이 명목 상 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다면 하사한 것이지만 실질 상 왕에게 주었다면 바친 것이었다. 왜왕에게 주었다면 이것은 바친 것이었다. 물론 왜왕이 백제왕에게 준 것도, 중국황제가 백제왕에게 준 것도 ‘바친 것’이었다. 외교상 문구는 그렇게 번역해야 하는 것이다. 칠지도에 쓰여 있는 ‘후왕’은 중국황제에 대해 말한 것이었다. 당시 백제왕도, 왜왕도 모두 중국황제한테 임명을 받은 후왕이었다.
백제왕이 여러 차례 태자를 왜국에 보냈다. 이것은 백제가 왜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려, 조선 시대에 외국의 군대가 쳐들어와 태자를 잡아간 적은 있어도 한국의 왕이 스스로 태자를 외국에 내보낸 적은 없었다. 이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 아버지는 원래 귀한 아들은 집밖에 내보내는 것도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백제왕이 태자를 인질로 내보내 외국으로부터 침공을 방지하고자 하거나 지원을 받고자 한다면 당연히 중국황제도 두려워하는 강국인 고구려에 태자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태자를 이웃 나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바다 건너 먼 나라 왜국에 보냈다. 당시는 일본 땅에서 한반도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 공격을 하거나 지원을 할 수가 없는 낙후된 시대였다. ― 삼국사기와 광개토왕 비문에서 고구려가 왜군과 싸웠다고 했는데 이 왜군은 남해안의 나라인 임나, 가야의 군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시대에 백제왕이 금지옥엽 귀한 아들을 일본 땅에 보낸 것이었다. 이런 일은 백제왕실이 왜왕실을 직접 감독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백제에서 지방 유력자들이 왜왕실을 받들고 있어 백제왕이 왕 행세를 하려면 왜왕실과 몸과 몸이 부닥치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재해석
광개토왕 비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이 있다.
“광개토왕 즉위 전에 백제,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즉위 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왜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이에 광개토왕이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토벌했다. …왜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광개토왕이 군대를 파견해 왜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했다.”
광개토왕 즉위 전에 백제왕이 고구려왕을 잡아 죽였으니 고구려가 속국이었다고 해야 할 것인데 거꾸로 백제가 속국이었다고 했다. ‘즉위 후에 왜가…백제, 신라를…속국으로 만들었다’는 문장은 그렇게 잘못된 문장에 이어지는 것이니 옳은 내용이 결코 될 수가 없을 것이었다. 광개토왕 즉위 후에 왜가 임진왜란 같은 큰 전쟁을 일으켜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실을 밝히건대, ‘즉위 전에 백제,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느니, 즉위 후에 왜가 백제, 신라를 왜의 속국으로 만들었느니’ 하는 것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토벌한 것에 정당성을 주기 위해 지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백제, 신라가 비록 형식적이지만 왜의 속국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실이었다. ‘왜군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왜군을 격파하고 신라를 구했다’는 내용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왜왕국의 군현이 한반도에 있었다. 그들은 실제적으로는 독립 국가이었지만 형식적으로는 왜 영토, 왜 군대였다. 이 군대가 신라를 압박하자 광개토대왕이 그 군대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한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이 격파시킨 군대는 왜가 아니라 가야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가야는 왜의 군현인 임나 땅의 나라이고 가야 백성은 본래 임나 백성이었으므로 고구려에서 가야 군대를 왜 군대라고 표기한 것은 꼭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당시 국제정세로 볼 때 가야가 왜왕 명의로 군대를 일으켰고 이에 신라, 고구려가 가야 군대를 왜의 군대라고 일컬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 신라 편에 왜인, 왜병에 관한 이야기기 무수히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걸쳐있는 왜국의 사람들이다. 그 왜국은 그때 그 행정수준이 원시적인 것이었으므로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 편 전반기의 왜는 세 나라 그러니까 남해안에 있는 왜왕실의 나라 그리고 일본 땅에 있는 해적의 나라와 여자 무당의 나라이고 중반기 이후 왜는 두 나라 그러니까 일본 땅에 있는 왜왕실의 나라와 남해안에 있는, 형식상 그 군현인 임나, 가야이다.
백제와 신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남방 인도계 한국인은 해양민족이고 북방 몽고계 한국인은 반해양민족이었다. 백제, 신라 지배계층은 몽고계 한국인이지만 그 백성 90% 이상은 인도계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두 나라가 해양국가가 되었다.
해양국가 백제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에 북방 야만인들이 중국 대륙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이었다. 중국인들이 야만인들 때문에 어쩔 수없이 바다와 강으로 교역하며 살았다. 그래서 백제상인들이 중국 대륙의 부를 거머쥐게 되었다. 양자강 이북에 통일왕조를 세운 야만인들이 국가경제를 위하여 백제상인들의 활동을 용인해주었다.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난 중국인들의 통일왕조는 당연히 국가경제를 위하여 용인해주었다. 그래서 백제가 대륙 남북 넓은 땅을 조차지 형식으로 차지하고 다스렸다. 중국 땅에 수백년간 분열을 끝내고 통일왕조가 들어섬에 따라 중국인들이 백제상인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황하, 양자강을 넘나들며 교역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에 백제의 대륙 지배가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잔존세력이 일시에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 해양국가 신라가 중국 당나라 시대에도 대륙에서 위세를 떨쳤다.
백제(百家濟海 : 백가가 바다를 다스린다)는 원래 중국인들이 붙여준 국명이라고 한다. 백제인들이 중국대륙을 횡행했음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그 시대에 그들이 대륙 경제를 요리했다. 그들은 세 불리하면 한반도의 백제로 건너갈 수가 있으므로 대륙 중앙정부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수당(隋唐)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그들을 중국 땅에서 몰아낼 수가 없는 것이 몰아내면 중국의 부(富)가 몽땅 한반도로 옮겨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의 백제를 멸망시켜 대륙에서 살고 있는 백제인들로 하여금 복종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당나라가 한반도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신라에게 패배해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지 못했다. 이에 따라 대륙 백제계 한국인들이 당나라 정부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중국경제를 거머쥐고 있는 그들은 당나라 정부가 자신들을 압박하자 그 정부와 어깨를 나란히 한 강대한 국가(이정기 왕국)를 세워 대항했다. 이정기 왕국의 몰락 뒤에는 장보고를 지원하여 대륙 경제를 요리했다. 당나라 정부로서는 한반도에 해양국가가 있는 한, 대륙의 백제계 한국인들을 복종시킬 수가 없었다. 한반도를 거점으로 해서 중국대륙 경제를 지배하던 백제계 한국인들이 한반도에 반해양국가가 들어서고 일본 땅에마저 그러하매 할 수없이 중국에 흡수되었다.
고구려는 약소국이고 신라, 백제는 강대국이었다
오늘날 ‘고구려는 강대국이고 백제, 신라는 약소국이었다’고 보고 있는데 이 견해는 옳지 않은 것으로 실인즉 국력에서 고구려는 백제, 신라 저 아래의 나라였다. 영토에서 고구려가 백제, 신라보다 몇 배 컸지만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한국보다 백배 큰 나라인 러시아의 경제규모가 한국의 그것보다 작았다는 데에 미루어 알 수가 있다. 농경시대 북한의 경제규모는 남한의 절반의 절반에 불과했다. 만주지역은 넓고 기름진 땅이지만 날씨가 혹독하게 추워 그 경제규모가 한반도의 절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북한과 만주 지역을 차지한 고구려의 경제규모는 백제, 신라의 그것보다 작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요하 지역을 평정했다. ―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요하 지역을 모두 차지하지 않고 그 절반은 백제가 차지했다. 농경시대에 요하 지역의 경제규모는 한반도의 그것보다 컸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하 지역의 백성이 중국인이고 그 지역을 중국군대로부터 방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정부에서 요하에 정규군을 주둔시키지 않고 행정요원만 파견했다. 그 행정요원도 자국의 정부에서 그 지역을 영토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다스렸다. 이에 요하 지역 백성이 고구려보다 중국과 교역을 하여 요하의 경제가 고구려의 경제에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
백제와 신라의 국력은 영토 면으로만 보아도 고구려의 그것보다 컸다. 게다가 두 나라는 해양국가라 일본, 중국과 교역을 했다. 그러므로 신라, 백제의 국력은 고구려의 그것보다 몇 배 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가 수당과 싸워 이겼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국력의 큼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 몽고와 만주가 자기들보다 백배 큰 국력의 중국과 싸워 이겼기 때문이다.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는 중국 측 기록은 ‘요서에 있던 부여족 무리가 바다를 건너 경기도 땅으로 들어가 백제를 세웠다’는 한국역사가의 연구에 미루어 볼 때 옳은 기록인 것 같다. 요서 땅으로 들어온 부여족 무리가 중국인한테 박대를 받다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왜인들한테, ‘바다를 건너가면 기름진 땅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바다를 건너 경기도 땅으로 들어가 백제를 세웠다. 한반도 남부에서 기반을 잡은 백제 부여족이 자신들이 있었던 요서로 가 보니, 북방 야만족이 중원을 휩쓸고 있는 관계로 요서와 산동반도에 중국 정부 군대가 전혀 없어, 백제 부대를 파견해 두 지역을 점령한 것이었다.
그 시대에 요하와 산동반도에 왜인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지역의 왜인이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인의 노예가 되었는데 장보고가 그들을 결집하여 당나라 정부에 맞서는 큰 세력을 이루었다.
중국황제를 조롱하는 백제상인들
‘북위가 수십만 기병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다가 패배했다’는 중국 측 기록이 있다. 북위가 자신들이 조차지로 허용해준 백제를 침공한 것은 백제가 자신들 원수 나라인 남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북위와 관계를 끊고 남제를 받들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 싸움에서 백제가 이겼다는 것은 당시 중국의 경제권을 쥐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왜왕이 (페르시아 왕들에 버금가게) 사치스럽게 살았다’는 일본 고대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일본학자들도 당시 왜의 재정이 원시 수준이었으므로 냉소적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의 부가 페르시아에 버금갔고 그 백제가 왜왕실을 받들었으므로 왜 재정이 빈약하다고 할지라도 그 왕만은 페르시아 왕 버금가게 사치스럽게 살 수가 있었을 것이다.
‘왜왕이 수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가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편지를 보내노라라고 말했다’는 중국 측 기록이 있다. 수나라가 대륙의 백제계 한국인들을 탄압하자 그들이 왜왕을 앞세워 조롱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또한 일본왕을 천황으로 올려 중국 황제를 조롱했다.
대륙의 백제계 한국인이 수당 중앙정부의 탄압에 여유를 갖고 있었다. 수당 정부로서는 스탈린 식 공산체제를 수립하기 전에는 백제계 한국인들의 대륙 지배를 막을 길이 없었다. 따라서 한반도 백제, 신라를 멸망시켜 그들로 하여금 체념, 복종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바다 건너 나라인 백제, 신라를 공략하려면 먼저 이웃국가인 고구려를 멸망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수당이 자국의 운명을 걸고 고구려와 대결을 벌인 것이었다.
신라, 백제 지배계층은 원래 반해양민족인 몽고계 한국인이었다. 신라가 쇄국정책을 실시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신라 왕실이 자국이 해양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또 자국을 좌지우지하는 해양세력을 제한시키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백성 90% 이상이 해양민족인 인도계 한국인이라 쇄국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서 통일신라시대 후반기에는 지배계층인 몽고계 한국인의 수효가 늘어난 데다 발해의 멸망으로 그 지역의 몽고계 한국인이 대거 들어와 몽고계 한국인이 명실상부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래서 반해양국가 고려가 해양국가 후백제와 신라를 병합시켰다.
통일신라가 일본, 중국, 인도, 아라비아와 교역을 하여 그 부가 페르시아의 부에 버금가게 되었다. 이에 자본주의 문명을 잉태했다. 통일신라 후반기의 지방호족세력 대두 및 농민 반란은 망국 징조가 아니라 발전 과정 그러니까 자본주의 출산을 가로막는 기득권층의 체제를 깨뜨리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 역대 기득권층이 그랬듯이 신라 기득권층이 저급의 북방세력을 끌어들여 그 호족 및 농민을 진압시켜 자본주의 맹아를 짓밟아버렸다. 그 신라 기득권층은 중국 기득권층이 그랬듯이 자기 나라가 망한 뒤에도 기득권을 유지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지배자는 백제왕실이 아니라 백제상인이었다. 중국 땅의 백제 영토는 백제왕실의 것이 아니라 백제상인의 것이었다. 중국 땅의 백제군대는 한반도의 백제군대와 이렇다 할 관계가 없었다. 백제왕실의 군사력은 상인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관계로 대단한 것이 될 수가 없었다.
모용씨 왕족 덕분으로 강성해진 신라가 백제를 압도했다. 그러자 중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백제상인들이 일어나 백제왕실을 지원하여 주었다. 이에 백제가 다시 신라를 제압했다. 그러나 대륙의 백제인이 통합하지 못하고 각개 행동한 관계로 백제가 신라, 당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백제 세력과 연합해,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는 당과 싸웠다. 그러자 대륙 백제인들이 다시 일어나 신라를 도왔다. 이에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가 있었다.
* 여기의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기록을 포함한 모든 역사 기록, 유형무형 유물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유의할 점이 있다. 가령 중국 역사 기록에서 A 사건을 흑색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백색이라고 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백색이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역사 그 기록을 바탕으로 나온 결론이었다. 유형무형 유물의 경우에도 유의할 점이 있는데 가령 남해안에서 고대의 붓 유물이 발견된 것은 고대에 한자를 광범위하게 사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강 이북에 한사군이 설치됨에 따라 중국 문물이 남해안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즉, 그 붓은 원시문자를 쓰는데 사용하거나 한자를 익히는데 사용했음을 의미하지 일반적으로 사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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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허접한 글이군요.
친일적인 글 같은데 .ㅎ 소견이 짦은 관계로 .. 식견도 짧고 .. 왠지 그런데 왜 왕조설을 말씀하시니 혼돈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이 답답한 사람아 논리 전개 이전에 자네 치열구조좀 보게나 ////
송곳니와 뻐드렁니의 차이좀 알아 보시게 그럼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알게 될거네 ///
그리고 턱부터 목윗부분 차이도 알아보고 /// 그뿐인가 튀어나온 광대뼈에 째진눈은 어찌 할건가 ///
경상도 애들이 치열이 고르지 못하고 뻐드렁니가 많은 이유는 아는가 ///
우리 땅에 이중턱이 얼마나 있던가 남방계를 찾게 /// 게놈지도는 보지도 않는가 ///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고 하는것 보다 더 어이없는 글일세 <<< >>> 우리는 예 맥 한
현재 혼혈 되지 않고 보존된 민족은 없다지만 /// 확실한 것은 배달민족
무슨 한국이니 스탄이니 안 하더라도 기마민족 후예들은 다
동족일세 /// 한마디로 배달민족 이 표현이 민족 구분이라고 보면 될거네
분명한 것은 흉노족은 동족이라 할 것이나 /// 일본 애들은 일부만 국물이 튀어 동족이라 할수 있지
대다수 일본인은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동족이라 할 수 있다고 보네
우리가 일본인과 다르게 진화 했다고 보려면 말일세 /// 인간의 변형은 1~2 천년에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거
남방계와 북방계의 차이중 두드러진 것은 째진눈과 이중턱 이라는거 잊지말게
역사 공부는 인간의 체형에 기초를 둔다는거 잊지 말게
물론 우리 민족이 다혈질에 냄비다 보니 짬뽕 국물처럼 뒤섞여 있지만
두드러진 특징은 북방계 것두 흉노족 그리고 몽골인과 가깝다네
우리 현재 민국인들 중국에 풀어 놓으면 혼란을 야기할 정도로 다혈질 이라는거
즉 조선에 와서야 좀 조용해지고 병신짓들 했지만 엄연히 싸우기 좋아하는 민족 이라는거
한마디로 거주지에 따라 체형이 변하고 적응하며
식문화의 차이가 생긴다는거
이것이 역사이면 민족의 구분이 된다는거
다시강조하지만 몽골 ( 동호의 갈래는 ) 사촌이라 하지만 일본은 더 거슬러 올라가도 접점이 없다는거
신체구조의 차이가 정말 2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도 접점이 없다는거 잊지 말게
고조선의 역사는 우리 대한 민국 만의 역사가 아니며 모든 북방계 기마민족의 역사라 보면 될거네
즉 다시 말해서 민족의 울타리는 여기까지 중국 ( 지나족 ) 일본 ( 왜 ) 는 근본이 다르다는거
물론 일부는 국물이 튀었겠지 인접 민족 이니까 단군 이나 신시 이정도에서 민족을 나누길 바라네
민족의 개념도 없었던 시절에 민족 강조 해 보아야 한계가 있는 것이니
마치 우리가 고조선의 종주국이라 떠드는 것처럼 ( 물론 우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
지킬 생각도 없으며 /// 내것이라고 떠들 용기도 없는 것들이 종주국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겠나 ///
자긍심도 없고 배부른 돼지들이 현재의 대한민국 지배층이라 생각하는 나의
생각 이네 /// 명예나 자긍심 보다는 이런 저런 핑게를 늘어 놓고 재물만 탐하는 이 국가에 욕하는 걸세
배좀 고프면 어떤가 고구려가 백제가 멸망 하였다하여 그 자취가 사라 졌는가 그기상이 지워 졌는가
신라가 통일 아닌 통일을 하고 얻은게 있는가 /// 지배층에 장단에 놀아나고 현상 유지에 급급한
세월에 더하여 /// 이씨왕조가 들어서고 사대하고 이런 700년이 남긴게 있다고 생각 하나
뜨거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면은 억지 보다는 진정한 꿈을 기상을 살리어 보세나
먼저 진시황의 영역과 홍산문화의 영역을 탐구해 보게나
우리 민족이 얼마나 호전적이고 많은것을 이루었는지 알수 있으리라 보네
승자의 논리로 혼란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렇다 하여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네
현 시대에 나누는 역사나 민족의 개념에 분개하여 억지를 쓰는것 같은데
그러지 않아도 우리의 선조들은 호전적 이었고 개척자 였으며 찬란한 문화 유산을 남기었고
그증거가 유럽 땅에도 왕실에도 /// 아메리카 대륙에도 있지 않은가
지나인과 왜인도 차이가 있지만 우리와는 더 많은 차이가 있다는것은 부정 못한다네
우리 혈통에는 뜨거운 냄비는 있을 지언정 ///
면전에서 부끄러운 행위를 하는 쥐새끼는 없다고 ( 요즘은 그런넘들이 늘어 나기는 했지 )
이런 변화는 지배층이 되어있는 배부른 돼지들이 교육에 있어 가치관 형성에 힘쓰지 않았고
이승만 같은 개잡놈이 국가 건설 기초에 외세를 업어서 건국하고
요즘 박근혜가 설치고 있든걸 보면은 아무리 부모라 하나 /// 쿠테타가 사람 죽인게 불가피 했다고 염병할
나 또한 조선 건국 개국공신 일등녹권을 이화 이분의 자손이지만 ////
고려가 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 하지만 /// 건국후 조선의 흐름은 역사적으로 인정하기 싫고
대한 민국이 건국 될수 밖에 없었다 생각 하지만 조선보다 더 좋지 않게 시작 되었다고 생가 한다네
즉 역사의 흐름속에 불가피성은 인정하나 ///
신라의 개같은 통일도 엮겹고 현재 박근혜의 개 소리도 엮겹지만 ///
구성원의 다수가 이기심에 탐심에 헤어나지 못한다고 진실이 사라지며 ///
그러한 현상이 지속될수 없다는건 역사가 증명하고 /// 그러한 때에도 의로운 자들에 의하여
정화되어 가며 그러함이 없다면은 /// 구성원 모두의 고통으로 다가오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만고 불변의 법칙이 행해짐을 안다네 /// 나쁜것은 버리고 좋은것은 찾아내어 주위에 퍼트리길 노력 하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