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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회상하며 죄를 자복하다
느 9:1-8
1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3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4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5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8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느 9:1-8 / [금식과 참회의 성회]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을 지킨 다음 23일은 쉬고, 24일에는 하루 동안 금식하고 회개하는 특별 성회를 열었다. 그들은 모두 베옷을 입고 머리에는 흙을 끼얹었다. 2) 그들은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고 모여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자기 조상들의 죄도 고백하였다. 3) 그들은 모두 제자리에 서서 세 시간 동안 그들에게 낭독되는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여호와 앞에 엎드려 또 세 시간 동안 자기들의 허물을 고백하였다. 4) [민족적인 참회의 기도] 온 백성이 통성으로 기도를 드릴 때에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또 다른 바니와 그나니는 연단으로 올라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큰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5) 그러고 나서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와 같은 레위 사람들이 연단으로 올라가 온 백성에게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모두 일어나 영원 전부터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시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대표 기도를 드렸다. `주님의 영화로우신 이름을 저희가 모두 찬양합니다! 주님의 성호는 아무리 찬양하고 노래해도 여전히 부족할 따름입니다! 6) 여호와여, 주님만이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하늘을 지으시고 그 한없이 먼 하늘의 모든 별들을 지으셨습니다! 주께서 땅과 바다를 지으시고 그곳에 사는 모든 생물을 지으셨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살리시오니 천군 천사들이 주께 경배합니다! 7)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해 내시고, 그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8) 주께 향한 그의 진실한 마음을 보시고 그와 계약을 맺으시면서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이 사는 땅을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겠다고 그에게 약속을 하시고 그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은 변함없으십니다!
유대 백성들이 초막절의 절기를 마친 후에 매일 율법 책을 듣고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드러난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합니다.
죄를 자복한 백성들(1-5)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의 절기를 마치고 이틀 후 초막절과는 별개로 모여 금식합니다(1).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죄를 자복합니다(2). 왜냐하면 그들은 에스라가 율법책을 낭독할 때 말씀에 집중했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민으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이방인과 절교하였습니다(레 20:22-26). 초막절(7월15일~22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던 때를 기억하며, 광야에서 지켜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감사의 절기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고 죄를 회개하며 여호와를 송축한 것입니다(5).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지고, 마음에 심겨지면 행동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회개와 헌신의 기도(6-8) 이스라엘의 회개는 금식과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흙이나 티끌을 무릅쓰는 것이었습니다(창 37:34; 삼하 3:31; 21:10; 왕상 21:27; 삼상 4:12; 삼하 1:2; 욥 2:12). 이러한 행동은 극한 슬픔과 죄를 뉘우치는 행동입니다. 이처럼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는 일상은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의 현장입니다. 한편 에스라를 보좌하며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있습니다(8:7-8). 이들은 백성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께 회개와 헌신의 기도를 드립니다. 또한 언약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며 만물을 보존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며,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와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찬양합니다(시 19:1-6; 95:3; 롬 1:19-20). 이처럼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적용: 하나님을 만나는 첫 번째 단계는 생명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입니다. 메마름이 없는 샘가에서 공급되는 영생의 말씀을 얼마나 공급받고 있습니까?
잘 짖는다고 좋은 개가 아닌 것처럼 말을 잘한다고 현명한 사람은 아니다.-장자. 그럴듯한 말은 누구나 꾸며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그럴듯한 말에 넘어가곤 합니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말로 현혹시키지 않습니다. 일부러 떠들지 않아도 그의 우직한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것이 알아서 드러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자 회개를 시작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단순히 죄지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끊는 결단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한 회개와 실천이 있는 하루하루의 삶이 되어가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느 9:6 / 김영규목사(정윤교회)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계속 보존하고, 유지하고, 움직임에 간섭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섭리는 두 가지 면에서 이교도들이 말하는 의미와는 아주 다릅니다.
첫째로, 섭리는 피조물에서 멀리 떨어져 방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초월자로서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을 인정하면서도 신의 섭리는 부정합니다. 신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자연법칙에 맡겨두시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창조를 말하면서 진화론을 얘기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물질의 기본 요소인 원소들이나, 혹은 생명의 기본만을 창조하시고, 나머지는 자연법칙에 맡기셨다고 합니다. 진화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법칙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연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자연 만물은 이 법칙대로 존재합니다. 자연 법칙 아래서 사물 하나하나가 서로 연관성을 맺고 상호작용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자연법칙에만 맡겨 두지는 않으십니다. 모든 피조물에 항상 관여하시되, 직접 간섭하십니다.
둘째로, 섭리는 범신론자나 자연신론자들이 말하는 만물 속에 내재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인도나 네팔 사람들은 자연 만물 자체를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천체들, 산과 바다, 짐승들, 돌덩이 하나, 나무 하나도 신이라고 합니다. 신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속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물질세계는 신으로부터 유출되어 나온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높은 신으로부터 하등한 신이 유출되고, 또 그보다 낮은 신이 유출되고, 맨 마지막에 존재하게 된 것이 물질 세계라는 생각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고,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피조물의 존재 속에 개입하십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만물의 존재에 깊이 관여하시는 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만드셨지만 자연법칙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직접 간섭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 하나하나에 관여하시지만 사물 속에 갇혀계시지 않습니다. 물질세계에서 초월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 가지 방면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피조물의 보존이고, 둘째는 피조물과의 협력이고, 셋째는 피조물의 통치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 방면의 섭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피조물을 보존하심
하나님 섭리의 첫째는 피조물의 보존입니다. 보존(Divine Preservation)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전체, 혹은 사물 하나하나를 계속 존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은 그 존재를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십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의탁해야만 합니다. 의존적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계속 존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보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태양계 행성들은 공전과 자전을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위치를 지켜갑니다. 지구는 대략 365일에 한 번씩 공전을 합니다. 타원형 궤도를 돌고 있기 때문에 근일점과 원일점을 돌 때에 속도가 다릅니다. 근일점에서는 초속 30km정도, 원일점에서는 초속 29km정도입니다. 만일 지구의 공전 속도가 들쭉날쭉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는 하루에 한 번씩 자전을 합니다. 지구의 적도 반경은 6388km이고, 원둘레는 대략 4만 km입니다. 지표에서 계산한 자전 속도는 대략 초속 463m입니다. 만일 우주 공간에서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들이 갈 길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가 자전을 멈추거나, 불규칙하게 자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달리던 자동차가 급정차만 해도 우리는 곤두박질칩니다. 하물며 음속 이상으로 회전하면서, 초속 30,000m로 움직이는 행성이 짐짓 속도를 높이거나 늦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태양과 달을 만드시면서 날짜와 연한, 계절을 두셨습니다.(창1:14) 행성의 움직임이 제멋대로라면 인간은 지구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생체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십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인체는 신비한 생체입니다. 100kg의 바벨을 들어 올릴 수 있고, 시속 40km로 달릴 수 있고, 200도 이상의 시야각까지 볼 수 있고, 계산기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보다 빨리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을 분석해 보면 산소, 수소, 탄소, 질소 등이 주성분이고, 인, 나트륨, 염소, 칼륨, 황, 철, 불소, 철, 실리콘 등 10여개의 원소에 불과합니다. 특히 인제의 67%는 물입니다. 물은 산소와 수소의 결합물입니다. 물은 비열(물체 1g을 1도 C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이 높습니다. 인체를 구성하는 대부분이 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정온동물(定溫動物)이 될 수 있습니다. 물은 가장 좋은 용매(溶媒)입니다. 물질을 쉽게 녹입니다. 인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화 작용이나 흡수 작용은 인체가 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만일, 인체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와르르 분해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분이 빠져나가고, 뼈의 구성 물질이 사라진다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십니다.
나는 청소년기에 문득 이런 생각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봤습니다. 나는 어제 밤에 잠자리에 들어간 나일까? 아니면 어제의 나와 다른 나일까?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잘 안 합니다. 철학자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얼마 후에 생각해 보니 어제의 나가 틀림없는 나인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나를 알아보고,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니까! 고등학교 때 헤어진 친구를 반백이 지나 만나서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의 모습은 고유합니다. 사람마다 그 고유함이 보존된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특성까지 보존하십니다. 지구상 70억 사람 개개인의 혈액의 인자를 보존하시고, 세포의 유전자를 보존하시고, 지문을 보존하시고, 안구의 홍채를 보존하십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9:6)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오늘 내 인생이 계속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육체를 보존하십니다. 피부 관리 안 해도 멀쩡하게 보존하십니다. 건강관리 안 해도 건강을 보존하십니다. 심장이 뛰는 것, 호흡하는 것, 혈액이 순환되는 것, 음식물을 먹고 소화시키는 것, 체온이 유지되는 것, 면역력을 유지하는 것, 뇌의 연산과 메모리를 보존하십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언제나 나를 알아보도록 내 고유함을 보존해 주십니다. 마음도 마찬가집니다. 내 성품, 내 마음, 내 영혼을 보존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존하시기 때문에 내 인생은 하루하루 멀쩡하게 존재합니다. 할렐루야!
피조물과의 협력
하나님 섭리의 두 번째는 피조물과의 협력(Divine Concurrence, or co-operation)입니다. 협력이란 타자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만드실 때에 고유한 특성들을 주셨습니다. 지구상에 흔히 볼 수 있는 40여개의 원소들이 있습니다. 질소, 수소, 산소, 탄소 등등. 물 분자는 산소 한 개와 수소 두 개의 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물은 산소와 수소와는 전혀 다른 물질적 특성을 나타냅니다. 수소는 기체 중에 가장 가볍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열기구에 사용했습니다. 수소는 폭발력이 있습니다. 태양 에너지를 내는 주성분이 바로 수소입니다. 수소는 다른 원소들과 잘 결합됩니다. 수소는 주로 양이온으로 작용합니다. 산소 원자는 공기 중에서 반응성이 가장 큽니다. 모든 것을 태웁니다. 물에 잘 녹지 않고 일반 공기보다 무겁습니다. 산소는 사람의 호흡 작용에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각자의 특성이 있는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면 성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물은 산소나 수소의 특성이 거의 없습니다. 물은 산소나 수소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됩니다. 인체의 67%가 물입니다. 그러나 인체의 구성 요소를 얘기할 때 산소나 수소라고 하지 않고 물이라고 합니다. 산소나 수소의 특성이 아닌 물의 특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다른 물질을 잘 녹이는 용매입니다. 비열이 높고, 끓는점이 높습니다. 물 때문에 인체의 대사 작용이 일어납니다. 물 때문에 바닷물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지구 생태계가 안정됩니다. 그러면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었다고 산소나 수소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원소의 고유한 특성은 여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물의 고유한 특성을 정확히 지니면서,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 것을 하나님 섭리 중에서도 협력이라고 합니다. 원소들은 실험실에서 수없이 많은 물질로 합성됩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섭리하십니다. 이것을 섭리 중에서도 협력이라고 합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존에도 하나님의 협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참새는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을 날거나 먹이를 쪼아 먹습니다. 참새가 어디서 알을 낳고 새끼를 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참새 맘대로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새의 특성과 삶에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간섭하십니다. 참새가 일정한 삶을 살도록 관여하십니다. 먹이를 찾게 하시고, 짝짓기를 하게 하시고, 겨울을 나게 하십니다. 참새의 수명을 다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참새가 사냥꾼에게 잡혀 참새구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지구상의 생태계에는 먹이사슬이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이 뒤섞여 살아갑니다. 각자 제멋대로 사는 것 같습니다. 씨앗이 바람에 날려가기도 하고, 새들의 먹이가 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이런 동물이나 식물의 생태적 특성은 각 개체가 임의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협력하심으로써 어떤 결정을 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시104:10-14)
피조물과의 협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간과의 협력입니다. 모든 사람은 개성이 있습니다. 각 사람마다 생각과 사고방식이 다 다릅니다. 특히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든지 남들이 상관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생각이나 삶이 마냥 제멋대로는 아닙니다. 일정한 틀과 영역 안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정의감이 있습니다. 때로는 정의로운 행동을 선택합니다. 약자를 돕고, 악한 자를 제압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악한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배신을 하고, 간음죄도 짓습니다. 만일 누가 이런 악한 결정을 한다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간섭 속에 있습니다. 가령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나쁜 행위가 유다 멋대로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다른 용도에 사용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악행으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룟 유다의 악한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사용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 바람에 요셉은 애굽에서 13년 동안 온갖 고생을 했습니다.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 형들의 시기심을 사용하여, 야곱 집안,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 이주시키셨습니다. 요셉 형들의 악한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에 한 부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들의 선하거나 악한 생각, 행동까지도 간섭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시거나 악을 도모하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악한 자도 악한 날에 쓰실 뿐입니다. 이런 섭리를 협력이라고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50:20)
오늘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자유인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판단하고,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제아무리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한다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내가 옳은 결정을 할 때도 간섭하시고, 나쁜 결정을 할 때도 간섭하십니다. 내가 대인관계를 맺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전반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습니다. 지구상의 70억의 사람들이 각자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간섭 밖에서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공민족의 움직임이나, 국가 정책에도 관여하십니다. 한 개인의 독특한 움직임에서부터, 전 인류적인 움직임까지 하나님의 지속적인 섭리 속에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협력 아래서 존재합니다.
피조물의 통치
하나님 섭리의 세 번째는 통치(Divine Government)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존재 목적에 부응하도록 지속적으로 다스리십니다. 즉,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각 개체나 전체를 다스려 가십니다.
자연계의 모든 움직임은 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골치 아파 하는 것은 우주 가운데 작용하는 각종의 힘들을 어떻게 통합된 논리로 풀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과 약력을 어떻게 한 틀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름하여 통일장 이론입니다. 물리학은 관찰과 분석의 학문입니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어떤 원리를 찾아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아낸 원리들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안 배워도 잘 압니다. 모두가 한 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행성에 작용하는 중력도, 미시적 세계의 핵력도, 전자기력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다스리시니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각 피조물이 자기 역할에 충실하도록 제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이런 걱정을 합니다. 남극이나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지구를 덮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구는 대륙보다 바다가 더 넓습니다. 바다와 육지의 비율은 거의 7대 3 정도입니다. 바다의 평균 깊이는 –3,800m입니다. 육지의 평균 고도는 840m입니다. 육지를 깎아 바다를 메운다면 대략 -3000m가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바다의 깊이를 지구 반경(6378km)에 비한다면 거의 종이 한 장 수준입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에 바다가 형성된 과정을 이렇게 추측합니다. 최초의 지구는 고온의 수증기로 덮여 있다가 지표가 식으면서 공기중의 물이 엉겨서 내려와 바다가 되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대기권 위의 물과, 육지에 있는 물, 즉 바다입니다. 바다의 경계를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바닷물은 그 경계를 넘지 않습니다.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104:7-9)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옵니다. 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가을이 옵니다. 서울 시민들은 난지도에 쓰레기로 산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온갖 식물이 나오게 하셔서, 공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25)
하나님은 각 개인의 삶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응하도록 하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됩니다. 모세 시대에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붙잡아 두려고 온갖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집트 왕의 고집스런 성품을 십분 사용하셨습니다. 골리앗은 거인의 상징입니다. 그는 힘으로는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힘은 다윗의 물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꺾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도 다양한 도구로 쓰십니다. 때로는 하나님 백성을 돕게 하십니다.(에스라1:1) 때로는 심판의 도구로 쓰십니다.(사45:1)
요즘 이슬람 제국(IS, ISLAMIC STATES)이란 테러단체가 국제적인 트러블 메이커입니다. 2003년 알카에다의 이라크 하부 조직으로 출발한 단체입니다. 본래 명칭은 ISIL(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입니다. 레반트란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틴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명칭입니다. 그들은 마호메드를 따르는 국가를 창설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2014년 6월 명칭도 IS(Islamic State)로 바꾸고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칼리프로 추대했습니다. 이들은 모든 학교 교육은 서구 문명, 기독교 문명의 전파라고 해서, 학교를 파괴하고, 여학생들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만들거나 팔아먹습니다. 사람들을 납치하여 무자비하게 살해합니다. 그게 이슬람 국가라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습니다. 수니파가 뭔지 시아파가 뭔지, 이라크에 보면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폭탄 테러로 죽어갑니다. 그런데도 많은 젊은이들이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자폭 테러범으로 자원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 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 IS 대원이 들어와서 테러를 감행할지 모릅니다.
테러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IS가 아무리 제국을 건설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끝장 납니다. 국가든, 민족이든, 정부든, 사 단체든,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국가를 건설하든지, 기업체를 세우든지, 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127:1)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행17:26)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단4:17)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내 뜻대로 무엇을 세우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세우시고,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그의 다스림을 받으세요. 그것이 먼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비상 섭리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비상 섭리입니다. 비상 섭리란 통상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섭리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적입니다.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빠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타는 불 속에 들어가면 타죽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사흘이나 견디고 다시 나왔습니다. 성을 공략하려면 군사 작전을 펴야 합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은 단지 행진하고 소리를 지름으로써 무너졌습니다. 포도주를 만들려면 일정한 발효 과정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단번에 물로 만드셨습니다. 자연 법칙을 뛰어넘는 결과, 그것을 기적, 혹은 이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은 인간 편에서 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섭리일 뿐입니다. 단지 자연법칙을 사용하는 통상의 섭리와 비교하여, 비상 섭리라고 합니다. 비상 섭리 역시 하나님이 피조물을 유지 보존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비상시에 기적을 구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비상 섭리입니다. 비상시에 구하세요.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9:6)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계속 보존하고, 유지하고, 움직임에 간섭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섭리는 두 가지 면에서 이교도들이 말하는 의미와는 아주 다릅니다.
첫째로, 섭리는 피조물에서 멀리 떨어져 방관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초월자로서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을 인정하면서도 신의 섭리는 부정합니다. 신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자연법칙에 맡겨두시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창조를 말하면서 진화론을 얘기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물질의 기본 요소인 원소들이나, 혹은 생명의 기본만을 창조하시고, 나머지는 자연법칙에 맡기셨다고 합니다. 진화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법칙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연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자연 만물은 이 법칙대로 존재합니다. 자연 법칙 아래서 사물 하나하나가 서로 연관성을 맺고 상호작용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자연법칙에만 맡겨 두지는 않으십니다. 모든 피조물에 항상 관여하시되, 직접 간섭하십니다.
둘째로, 섭리는 범신론자나 자연신론자들이 말하는 만물 속에 내재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인도나 네팔 사람들은 자연 만물 자체를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천체들, 산과 바다, 짐승들, 돌덩이 하나, 나무 하나도 신이라고 합니다. 신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속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도 물질세계는 신으로부터 유출되어 나온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높은 신으로부터 하등한 신이 유출되고, 또 그보다 낮은 신이 유출되고, 맨 마지막에 존재하게 된 것이 물질 세계라는 생각입니다. 성경에 보세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고,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피조물의 존재 속에 개입하십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만물의 존재에 깊이 관여하시는 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만드셨지만 자연법칙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직접 간섭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 하나하나에 관여하시지만 사물 속에 갇혀계시지 않습니다. 물질세계에서 초월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 가지 방면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피조물의 보존이고, 둘째는 피조물과의 협력이고, 셋째는 피조물의 통치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 방면의 섭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피조물을 보존하심
하나님 섭리의 첫째는 피조물의 보존입니다. 보존(Divine Preservation)이란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전체, 혹은 사물 하나하나를 계속 존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주 만물은 그 존재를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십니다. 그러나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의탁해야만 합니다. 의존적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계속 존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보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태양계 행성들은 공전과 자전을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위치를 지켜갑니다. 지구는 대략 365일에 한 번씩 공전을 합니다. 타원형 궤도를 돌고 있기 때문에 근일점과 원일점을 돌 때에 속도가 다릅니다. 근일점에서는 초속 30km정도, 원일점에서는 초속 29km정도입니다. 만일 지구의 공전 속도가 들쭉날쭉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는 하루에 한 번씩 자전을 합니다. 지구의 적도 반경은 6388km이고, 원둘레는 대략 4만 km입니다. 지표에서 계산한 자전 속도는 대략 초속 463m입니다. 만일 우주 공간에서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들이 갈 길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가 자전을 멈추거나, 불규칙하게 자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달리던 자동차가 급정차만 해도 우리는 곤두박질칩니다. 하물며 음속 이상으로 회전하면서, 초속 30,000m로 움직이는 행성이 짐짓 속도를 높이거나 늦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태양과 달을 만드시면서 날짜와 연한, 계절을 두셨습니다.(창1:14) 행성의 움직임이 제멋대로라면 인간은 지구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생체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십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셨나요? 인체는 신비한 생체입니다. 100kg의 바벨을 들어 올릴 수 있고, 시속 40km로 달릴 수 있고, 200도 이상의 시야각까지 볼 수 있고, 계산기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보다 빨리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을 분석해 보면 산소, 수소, 탄소, 질소 등이 주성분이고, 인, 나트륨, 염소, 칼륨, 황, 철, 불소, 철, 실리콘 등 10여개의 원소에 불과합니다. 특히 인제의 67%는 물입니다. 물은 산소와 수소의 결합물입니다. 물은 비열(물체 1g을 1도 C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이 높습니다. 인체를 구성하는 대부분이 물이기 때문에 인간은 정온동물(定溫動物)이 될 수 있습니다. 물은 가장 좋은 용매(溶媒)입니다. 물질을 쉽게 녹입니다. 인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화 작용이나 흡수 작용은 인체가 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만일, 인체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와르르 분해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분이 빠져나가고, 뼈의 구성 물질이 사라진다면?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십니다.
나는 청소년기에 문득 이런 생각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봤습니다. 나는 어제 밤에 잠자리에 들어간 나일까? 아니면 어제의 나와 다른 나일까?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잘 안 합니다. 철학자 기질이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얼마 후에 생각해 보니 어제의 나가 틀림없는 나인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족들이 나를 알아보고, 친구들이 나를 알아보니까! 고등학교 때 헤어진 친구를 반백이 지나 만나서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의 모습은 고유합니다. 사람마다 그 고유함이 보존된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특성까지 보존하십니다. 지구상 70억 사람 개개인의 혈액의 인자를 보존하시고, 세포의 유전자를 보존하시고, 지문을 보존하시고, 안구의 홍채를 보존하십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9:6)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17:28)
오늘 내 인생이 계속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 육체를 보존하십니다. 피부 관리 안 해도 멀쩡하게 보존하십니다. 건강관리 안 해도 건강을 보존하십니다. 심장이 뛰는 것, 호흡하는 것, 혈액이 순환되는 것, 음식물을 먹고 소화시키는 것, 체온이 유지되는 것, 면역력을 유지하는 것, 뇌의 연산과 메모리를 보존하십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언제나 나를 알아보도록 내 고유함을 보존해 주십니다. 마음도 마찬가집니다. 내 성품, 내 마음, 내 영혼을 보존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존하시기 때문에 내 인생은 하루하루 멀쩡하게 존재합니다. 할렐루야!
피조물과의 협력
하나님 섭리의 두 번째는 피조물과의 협력(Divine Concurrence, or co-operation)입니다. 협력이란 타자와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만드실 때에 고유한 특성들을 주셨습니다. 지구상에 흔히 볼 수 있는 40여개의 원소들이 있습니다. 질소, 수소, 산소, 탄소 등등. 물 분자는 산소 한 개와 수소 두 개의 결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물은 산소와 수소와는 전혀 다른 물질적 특성을 나타냅니다. 수소는 기체 중에 가장 가볍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열기구에 사용했습니다. 수소는 폭발력이 있습니다. 태양 에너지를 내는 주성분이 바로 수소입니다. 수소는 다른 원소들과 잘 결합됩니다. 수소는 주로 양이온으로 작용합니다. 산소 원자는 공기 중에서 반응성이 가장 큽니다. 모든 것을 태웁니다. 물에 잘 녹지 않고 일반 공기보다 무겁습니다. 산소는 사람의 호흡 작용에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각자의 특성이 있는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면 성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물은 산소나 수소의 특성이 거의 없습니다. 물은 산소나 수소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됩니다. 인체의 67%가 물입니다. 그러나 인체의 구성 요소를 얘기할 때 산소나 수소라고 하지 않고 물이라고 합니다. 산소나 수소의 특성이 아닌 물의 특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다른 물질을 잘 녹이는 용매입니다. 비열이 높고, 끓는점이 높습니다. 물 때문에 인체의 대사 작용이 일어납니다. 물 때문에 바닷물의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지구 생태계가 안정됩니다. 그러면 산소와 수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었다고 산소나 수소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원소의 고유한 특성은 여전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물의 고유한 특성을 정확히 지니면서,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작용하는 것을 하나님 섭리 중에서도 협력이라고 합니다. 원소들은 실험실에서 수없이 많은 물질로 합성됩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섭리하십니다. 이것을 섭리 중에서도 협력이라고 합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존에도 하나님의 협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참새는 제멋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을 날거나 먹이를 쪼아 먹습니다. 참새가 어디서 알을 낳고 새끼를 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참새 맘대로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새의 특성과 삶에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간섭하십니다. 참새가 일정한 삶을 살도록 관여하십니다. 먹이를 찾게 하시고, 짝짓기를 하게 하시고, 겨울을 나게 하십니다. 참새의 수명을 다하게 하십니다. 때로는 참새가 사냥꾼에게 잡혀 참새구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도 하나님의 섭리는 계속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지구상의 생태계에는 먹이사슬이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이 뒤섞여 살아갑니다. 각자 제멋대로 사는 것 같습니다. 씨앗이 바람에 날려가기도 하고, 새들의 먹이가 되어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이런 동물이나 식물의 생태적 특성은 각 개체가 임의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협력하심으로써 어떤 결정을 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시104:10-14)
피조물과의 협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간과의 협력입니다. 모든 사람은 개성이 있습니다. 각 사람마다 생각과 사고방식이 다 다릅니다. 특히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하든지 남들이 상관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의 생각이나 삶이 마냥 제멋대로는 아닙니다. 일정한 틀과 영역 안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정의감이 있습니다. 때로는 정의로운 행동을 선택합니다. 약자를 돕고, 악한 자를 제압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악한 결정을 하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배신을 하고, 간음죄도 짓습니다. 만일 누가 이런 악한 결정을 한다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간섭 속에 있습니다. 가령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나쁜 행위가 유다 멋대로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다른 용도에 사용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의 악행으로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가룟 유다의 악한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사용되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 바람에 요셉은 애굽에서 13년 동안 온갖 고생을 했습니다.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 형들의 시기심을 사용하여, 야곱 집안,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 이주시키셨습니다. 요셉 형들의 악한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에 한 부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사람들의 선하거나 악한 생각, 행동까지도 간섭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악을 조장하시거나 악을 도모하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악한 자도 악한 날에 쓰실 뿐입니다. 이런 섭리를 협력이라고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45:5)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50:20)
오늘 내가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이 자유인 것 같습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판단하고,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제아무리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한다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내가 옳은 결정을 할 때도 간섭하시고, 나쁜 결정을 할 때도 간섭하십니다. 내가 대인관계를 맺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전반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습니다. 지구상의 70억의 사람들이 각자 제멋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간섭 밖에서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공민족의 움직임이나, 국가 정책에도 관여하십니다. 한 개인의 독특한 움직임에서부터, 전 인류적인 움직임까지 하나님의 지속적인 섭리 속에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협력 아래서 존재합니다.
피조물의 통치
하나님 섭리의 세 번째는 통치(Divine Government)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존재 목적에 부응하도록 지속적으로 다스리십니다. 즉,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이도록 각 개체나 전체를 다스려 가십니다.
자연계의 모든 움직임은 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골치 아파 하는 것은 우주 가운데 작용하는 각종의 힘들을 어떻게 통합된 논리로 풀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과 약력을 어떻게 한 틀에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름 하여 통일장 이론입니다. 물리학은 관찰과 분석의 학문입니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어떤 원리를 찾아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아낸 원리들이 어떻게 서로 얽혀 있는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안 배워도 잘 압니다. 모두가 한 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행성에 작용하는 중력도, 미시적 세계의 핵력도, 전자기력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 다스리시니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각 피조물이 자기 역할에 충실하도록 제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이런 걱정을 합니다. 남극이나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지구를 덮어버리지는 않을까? 그러나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구는 대륙보다 바다가 더 넓습니다. 바다와 육지의 비율은 거의 7대 3 정도입니다. 바다의 평균 깊이는 –3,800m입니다. 육지의 평균 고도는 840m입니다. 육지를 깎아 바다를 메운다면 대략 -3000m가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바다의 깊이를 지구 반경(6378km)에 비한다면 거의 종이 한 장 수준입니다. 과학자들은 지구에 바다가 형성된 과정을 이렇게 추측합니다. 최초의 지구는 고온의 수증기로 덮여 있다가 지표가 식으면서 공기중의 물이 엉겨서 내려와 바다가 되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둘째 날에 궁창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셨습니다. 대기권 위의 물과, 육지에 있는 물, 즉 바다입니다. 바다의 경계를 하나님이 정하셨습니다. 바닷물은 그 경계를 넘지 않습니다.
“주께서 꾸짖으시니 물은 도망하며 주의 우렛소리로 말미암아 빨리 가며,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곳으로 흘러갔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시104:7-9)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옵니다. 여름이 아무리 더워도 가을이 옵니다. 서울 시민들은 난지도에 쓰레기로 산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온갖 식물이 나오게 하셔서, 공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25)
하나님은 각 개인의 삶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응하도록 하십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됩니다. 모세 시대에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노예로 붙잡아 두려고 온갖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해 이집트 왕의 고집스런 성품을 십분 사용하셨습니다. 골리앗은 거인의 상징입니다. 그는 힘으로는 당해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힘은 다윗의 물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을 꺾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도 다양한 도구로 쓰십니다. 때로는 하나님 백성을 돕게 하십니다.(에스라1:1) 때로는 심판의 도구로 쓰십니다.(사45:1)
요즘 이슬람 제국(IS, ISLAMIC STATES)이란 테러단체가 국제적인 트러블 메이커입니다. 2003년 알카에다의 이라크 하부 조직으로 출발한 단체입니다. 본래 명칭은 ISIL(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입니다. 레반트란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틴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명칭입니다. 그들은 마호메드를 따르는 국가를 창설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2014년 6월 명칭도 IS(Islamic State)로 바꾸고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를 칼리프로 추대했습니다. 이들은 모든 학교 교육은 서구 문명, 기독교 문명의 전파라고 해서, 학교를 파괴하고, 여학생들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만들거나 팔아먹습니다. 사람들을 납치하여 무자비하게 살해합니다. 그게 이슬람 국가라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습니다. 수니파가 뭔지 시아파가 뭔지, 이라크에 보면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폭탄 테러로 죽어갑니다. 그런데도 많은 젊은이들이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자폭 테러범으로 자원합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덴마크, 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언제 IS 대원이 들어와서 테러를 감행할지 모릅니다.
테러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IS가 아무리 제국을 건설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끝장 납니다. 국가든, 민족이든, 정부든, 사 단체든,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국가를 건설하든지, 기업체를 세우든지, 다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이룰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127:1)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행17:26)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이니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단4:17)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내 뜻대로 무엇을 세우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세우시고, 어떻게 다스리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그의 다스림을 받으세요. 그것이 먼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비상 섭리
하나님의 섭리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비상 섭리입니다. 비상 섭리란 통상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섭리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적입니다.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빠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타는 불 속에 들어가면 타죽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불에 타지 않았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사흘이나 견디고 다시 나왔습니다. 성을 공략하려면 군사 작전을 펴야 합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은 단지 행진하고 소리를 지름으로써 무너졌습니다. 포도주를 만들려면 일정한 발효 과정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단번에 물로 만드셨습니다. 자연 법칙을 뛰어넘는 결과, 그것을 기적, 혹은 이적이라고 합니다.
기적은 인간 편에서 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섭리일 뿐입니다. 단지 자연법칙을 사용하는 통상의 섭리와 비교하여, 비상 섭리라고 합니다. 비상 섭리 역시 하나님이 피조물을 유지 보존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비상시에 기적을 구할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비상 섭리입니다. 비상시에 구하세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기도
느 9:1-8 / 최건호목사
오늘은 2월을 보내는 마지막 주일이며 3.1절을 기념하는 3.1절 기념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국민들의 국민적 회개운동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는 민족적 기도운동이 나타나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하나님 앞에 허물과 죄를 자백하면서 금식하거나 기도하는 사람과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 위기와 큰 전쟁을 만났을 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했습니다(삼하7:5,6).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가나 민족의 큰 위기와 전쟁에 직면했을 때 전 국민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는 간구의 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위기를 극복하며 전쟁을 승리했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미스바에서의 국민적 기도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회복해 달라고 민족적으로 회개와 기도운동을 벌였을 때 하나님은 개입하셔서 블레셋의 강대한 세력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억압과 압제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범죄한 일이 드러나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들을 때 개개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향한 회개운동을 벌였습니다(느 9:4,5). 교회는 개인의 구원도 중요하지만 선교와 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소속된 불의를 가지고 있는 국가 민족 공동체에 대해 책임을 가진 공동체의 일원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와 국가의 한 두 사람의 책임 때문에 사회와 국가 전체에 불행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죄와 불의와 악을 우리 사회에 행한 사람들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어느 때나 어느 시대나 민족공동체로서의 책임과 영향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책임을 가지고 협력하고 후원하며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어떤 불행도 막고 재난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자기 생활을 비추어 보았습니다(느8:5,6).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국민이 모이는 국민적이며 거족적인 회개운동들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도덕적 기준, 사회적 정의의 기준, 정치적 이념, 이데올로기 앞에서 심판하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자기 생활에 비추어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들의 도덕적인 윤리는 낡은 옷과 같고 때 묻은 옷과 같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우리의 양심과 생활과 행동 그리고 인간관계와 물질관계를 통회하며 회개해야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를 면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와 백성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민적으로 회개운동과 기도운동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고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한 회개와 기도에 한 사람 한 사람 참여해야 합니다. 합심의 기도, 회개의 기도, 믿음의 기도, 그리고 모든 사람과 연합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기적과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룹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큰 회복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는 백성
느 9:1-5 / 이수영목사
깊은 신앙의 사람 느헤미야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다 무너지고 불타버렸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을 뿐 아니라 거기에 머물지 않고 유다 백성의 영적 부흥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를 위하여 제사장 겸 율법학자인 에스라에게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읽고 가르쳐줄 것을 요청했습니다(느8:1). 이미 유다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졌지만 성전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제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섰고 뭇 백성은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으며(느8:2-3) 율법의 말씀을 들은 백성은 다 울었습니다(느8:9). 유다 백성의 신앙의 재건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백성이 율법책의 말씀을 들으러 다시 모였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했다”고 합니다. 하루의 낮을 열두 시간으로 본다면 그 사분의 일인 세 시간 동안 모두가 선채로 율법책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으며 또 세 시간 동안은 죄를 자복하며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율법책의 말씀을 들으러 모인 백성의 자세와 결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본문 1-2절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단순한 재건운동이 아니라 개혁운동이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몇 몇 레위 사람이 단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본문 4-5절). 느9:6-37의 그 기도는 참으로 한 문장 한 문장이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가 하신 일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하나님의 한이 없는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끊임없이 배반한 이스라엘 자손의 불순종과 불충에 대한 솔직한 자복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는 전체를 빠짐없이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나님을 유일신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만유의 주권자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하나님을 우주만물의 창조주이며 섭리주로 믿는 것입니다.)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당신의 백성을 택하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8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언약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9 주께서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10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그들이 우리의 조상들에게 교만하게 행함을 아셨음이라. 주께서 오늘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언약의 백성을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지키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11 또 주께서 우리 조상들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사 그들이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오는 자들을 돌을 큰 물에 던짐 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12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이 행할 길을 그들에게 비추셨사오며
(언약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못 하실 것이 없는 권능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13 또 시내 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그들과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시고
14 거룩한 안식일을 그들에게 알리시며 주의 종 모세를 통하여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그들에게 명령하시고
(언약의 백성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삶의 지침을 주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15 그들의 굶주림 때문에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들의 목마름 때문에 그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주께서 옛적에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주겠다고 하신 땅을 들어가서 차지하라 말씀하셨사오나
(택하신 백성의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6절부터는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에 대해 배은망덕하며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의 죄와,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베푸신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16 그들과 우리 조상들이 교만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17 거역하며 주께서 그들 가운데에서 행하신 기사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18 또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한 신이라 하여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였사오나
19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 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20 또 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가 그들의 입에서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그들의 목마름을 인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어
21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사오며
22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그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그들이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
23 주께서 그들의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고 전에 그들의 열조에게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말씀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으므로
24 그 자손이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되 주께서 그 땅 가나안 주민들이 그들 앞에 복종하게 하실 때에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왕들과 본토 여러 족속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임의로 행하게 하시매
25 그들이 견고한 성읍들과 기름진 땅을 점령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과 판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26절부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범죄, 하나님의 진노와 그로 인한 이스라엘의 고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 다시 죄 짓는 이스라엘이라는 틀에 박힌 역사의 반복을 상기시킵니다.
26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나이다.
27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사 그들이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그들이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에게 구원자들을 주어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28 그들이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 버려 두사 원수들에게 지배를 당하게 하시다가 그들이 돌이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주의 긍휼로 건져내시고
29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30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32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하심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조상들과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왕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당한 모든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옵소서.
33 그러나 우리가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셨음이니이다.
34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35 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36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37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왕들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그들이 우리의 몸과 가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
36-37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들의 땅에 살면서도 이방의 왕들의 종이 되고 자기들 땅의 소산을 대적이 마음대로 차지하게 되어 곤란함이 심해진 원인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섬기지 않았음에 있음을 자복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튼튼히 다시 세우며 그 언약을 성실하게 지킬 것을 서약하는 뜻으로 기록으로 남기고 이에 서명 날인하여 봉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마지막 38절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느헤미야가 주도한 이 유다 백성의 신앙개혁작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신앙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깨닫고 자복하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시며 그가 행하신 일이 무엇이고 그의 뜻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개혁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며 또 시급하다는 질책과 고함이 쏟아지는 가운데 종교개혁 제494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제 더는 기다릴 수 없이 변하고 새로워져야 하는 한국교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이신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들 각자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참으셨고 얼마나 용서하셨는지를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완악했으며 얼마나 큰 배역과 불충을 저질렀는지를 냉철히 돌아보고 자복하며 참회와 변화된 삶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유다 백성은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했다고 합니다. 우리를 현혹하며 우리의 마음을 복음의 진리와 구원의 기쁨에서 빼앗아가는 세상의 온갖 풍습과 행실로부터 단호하게 돌아서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끝내 돌이키지 않은 이스라엘 자손이 겪은 치욕과 고난과 설움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돌이켜보며 그런 역사가 우리에게서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하겠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긍휼과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로우신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고 복된 삶의 길을 흔들리지 말고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다
느 9:1-21 / 김동국목사
회개란 ‘나는 하나님을 버렸는데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이시니라”(요 1: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깨닫게 되면 우리 자신을 알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될지, 어디로 가야할 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지 잘 알게 됩니다. 말씀은 우리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입니다.
인류의 첫 번째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하고 물었을 때 하와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하고 하나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좀 더 지혜롭고 싶고 능력을 얻고 싶은 마음의 욕망이 하나님 말씀을 왜곡했습니다. 그로 인해 죄와 사망이 인류 가운데 들어왔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말라”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따르라고 유혹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말씀을 따르기 전에 먼저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성공하라.”
그리고 이성적으로 말씀을 분별하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도록 끊임없이 미혹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사단의 미혹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접하고, 읽을지라도 하나님 말씀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게서 고발당한 자들의 회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섬기며 계명을 지키라고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패, 무능력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성읍이 완성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했습니다.
새해 첫 날, 7월 1일 나팔절에 에스라를 불러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들으며 그들은 슬피 울고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곧 ‘말씀에 기록되었는데 안식일이니 울지 말라. 성일이니 울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 그 말씀대로 기뻐합니다. 또 그들은 초막절을 지켜야 한다는 율례의 말씀을 발견하고 15일에서 21일까지 초막절을 지킵니다. 나뭇가지로 지은 집에서 7일 동안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8일째가 되는 22일에 다시 성회로 모여 하나님 말씀 앞에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말씀에 갈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이 지적하는 자기의 죄를 보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초막절기는 지났지만 그들은 일상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모입니다. 9장 1-3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 달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고발 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을 들으며 자신들이 얼마나 말씀을 떠나 살았고 말씀의 내용과 다르게 생활했는가를 깊이 느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고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회개는 몇 가지 특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자발적으로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나 에스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우리 다 함께 모여 회개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랐습니다. 회개는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뉘우침은 마음으로 뉘우치고 생각으로 정리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고발 당해서 회개를 시작했는데 이제는 자신들이 자기 자신의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자기를 고발해서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세우는 것,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울면서 자복하며 ‘나를 벌하여 주옵소서. 회복시켜 주옵소서. 죄의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간절히 부르짖는 회개를 드립니다. 이들은 말로만 회개하지 않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사람들과 섞여 살았습니다. 그들은 혼인도 하고 사업상의 유익을 위해 친분관계도 맺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타락하게 하는 여건, 삶, 행실, 관계 등을 끊기 시작합니다. 손해가 올지라도 자기 삶에서 결단하고 끊어냅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의 능력이고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들 가운데 역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에게서 역사할 때에 우리 삶이 변화되는 겁니다.
두 번째 특징은 말씀과 기도 가운데서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이들은 아침 6시부터 9시까지 먼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3시간 동안은 회개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회개는 자신의 감정에 따른 회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따라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말하는 대로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영혼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회개를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자신의 전 생애를 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시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라
세 번째 특징은 이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회개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할 때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았다면 자신의 허무함과 죄 때문에 스스로를 포기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지식인이었고 그 시대 출세 가두를 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열망하고 사랑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열망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때 돌로 친 주범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 제사장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을 잡아와도 좋다’는 공문을 받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자신이 그렇게 열망했던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추구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자신의 생명과 온 영혼, 모든 것을 다해서 얻고자 했던, 만나고자 했던 하나님이 자신이 핍박했던 예수였다는 것을 안 사울의 심정은 죽을 수 있다면 죽고 싶었을 겁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상황 가운데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사울을 바울되게 합니다.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내 죄와 과거가 지적당하고 하나님이 나를 드러나게 하시는 대로 만 천하 앞에서 내 모든 과거가 다 드러난다면 내 삶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수록 실망하고 낙담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란 우리 자신만을 보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 자신과 함께 우리를 붙잡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불완전한 나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완전하시고 능력이 많으신 긍휼의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우리의 회개는 또 다른 회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와 같은 회개의 집회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한 쪽에서는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또 한 쪽에서는 경악하면서 그 높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회개 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중요한 진리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 번째는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며 모든 것을 자기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보게 뒨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선 이것을 두 가지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회개할 때 자기의 죄와 자기 열조의 허물의 죄를 자복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조상의 죄와 허물을 들먹일 때는 내가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모의 죄책을 드러내는 것은 부모의 죄책을 짊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죄인일 수 밖에 없는 것을 변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열조의 죄와 허물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자복하고 회개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라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 탓입니다. 내 회개를 들어주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 자기를 부인하는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가능하게 됩니다.
두 번째 증거는 ‘주께서’라는 단어가 6절에서 38절까지 51번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서’입니다. 창조도 ‘주께서’이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애굽에서 구해내신 것도 주님께서입니다. 모든 역사의 과정 속에서 주님이 개입하셨고 주님이 이루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해서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게 되면 내 중심의 사고에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옮겨집니다.
‘주께서 하셨다’
깊은 회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두 번째 변화는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6절부터 38절까지 모든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그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계셨는가 그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6절 말씀은 창조의 하나님이 우주와 만물 가운데 어떻게 계신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다 보존하시오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서 여기에만 기록된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들을 실현시키고 나서 그냥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보존하다’는 의미는 ‘다시 살게하다, 더 적극적으로 삶을 유지하도록 돕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회개하고 나서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고 계시구나’라는 것을 경험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높고 영화로우신, 모든 만물 중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민족을 부르셨는지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기도로써 고백하고 있습니다. 7절과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그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 씨에서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세상의 법칙은 사랑하는 자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선택한 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를 사랑할 만한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아브라함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시고 선택과 언약에 합당한 존재로 존재 자체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신 하나님, 개인의 삶에 치밀하게 역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택하시고 사랑하심
이것이 말씀을 통한 회개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의 과거, 우리의 현재, 우리의 미래도 하나님의 임재로 설명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났다면 우리는 우리 과거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명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를 묶고 있고 우리를 누르고 있는 모든 억압과 두려움과 절망과 공포가 우리 가운데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왜 내 인생은 이런가?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있는가? 왜 우리 민족이 이렇게 멸망하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깊은 회개 가운데서 말씀을 통해 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임재하셔서 철저하게 역사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그들을 이끌어내신 것을 고백하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9절에서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저희가 우리의 열조에게 교만히 행함을 아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주께서 또 우리 열조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사 저희로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 오는 자를 돌을 큰 물에 던짐 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셨사오며 또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저희와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저희에게 주시고 거룩한 안식일을 저희에게 알리시며 주의 종 모세로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저희에게 명하시고 저희의 주림을 인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며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주께서 옛적에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주마 하신 땅을 들어가서 차지하라 명하셨사오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대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갈 때에만 함께 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그 때에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이 곧아지고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떠난 그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그들과 함께 하셨는가를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16절부터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사십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이스라엘 백성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이것이 하나님이다. 이것을 섬기자”며 하나님을 동물 취급까지 하며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시며 그 죄악과 반역의 장소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 머무르십니다. 이들이 그것을 느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란 ‘나는 하나님을 버렸는데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해서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결심하고, 산 제물로 자신을 헌신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느 9:1-6 / 장석환목사(하늘기쁨교회)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의 소원은 각자 다르고 참 많아서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소원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세상 앞에
예루살렘 광장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주전 444년. 밤낮의 길이가 같은 날, 이제는 밤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추분에 유대 지역에 있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였습니다. 민간력으로는 새해이고. 종교력으로는 7월 1일입니다.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달입니다. 한 해의 후반전의 시작, 어떤 면에서는 인생의 후반전과 비슷하여 진정한 인생의 시작이기도 한 때입니다. 첫날은 나팔절이고, 10일은 대속죄일이며, 15일은 초막절이 시작되어 22일에 끝이 납니다. 주전 444년 이때는 느헤미야와 유대 백성들이 다 모여 예루살렘 성벽 완공을 감사하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크게 깨달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제 그들의 성체는 예루살렘 성벽을 넘어 하나님 한 분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진정한 성채요 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믿음은 세상의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안전하게 지켜주는 성채임을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자신들의 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초막절(22일에 마침)이 다 끝났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고 남았습니다. 그래서 24일에 다시 모였습니다. “그 달 스무나흗 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헤미야 9:1–2, NKRV) 그들은 모여 금식하며 통회하였습니다. 보통은 10일 대속죄일입니다. 이번에는 날짜를 늦추어서 보였는지 아니면 그때 속죄일을 보내고 또 모여서 통회하는 시간을 가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아마 후자일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깨닫고 기뻐하면 기뻐할수록 자신들의 지난날의 죄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통회하며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저버리고 나와서 또한 여전히 멸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모릅니다.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잘 살고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어가면서도 참으로 비참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청천벽력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산다고 생각하는 그 삶은 사실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산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전에는 잘 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닫고 나니 자신들의 죄가 너무 부끄럽고 아파서 통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한 형제가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참 마음에 아픕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안 아프고 천국 못가는 것보다 아프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나으니 좋습니다” “이전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강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천국소망이 강합니다.” 저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불쌍한 영혼이라는 것을 너무 모릅니다. 세상 앞에만 서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일에 너무 바쁘고, 너무 사랑하고, 너무 몰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보는 대로 보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할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있으니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멸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삶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통회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빨리 돌아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느헤미야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위로, 긍휼, 슬픔, 유감’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통칭하여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성벽이 없어 주변의 민족들에게 유린당하는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던 성벽을 재건하도록 느헤미야에게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고 위로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도록 하셔서 예루살렘 통독으로 자청하여 가도록 하셨습니다. 중앙정치에서 왕의 비서실장과 같은 위치에서 지방의 면장에나 해당하는 총독으로 내려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었을 때도 성내로 들어가 살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성벽의 필요를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완성됨으로 그들은 이제 자주적인 공동체로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후에 일시적으로나마 국가를 세우고 또한 외부 제국의 침략 가운데도 예루살렘과 그 안의 성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들이 모를 때도 그들을 마음에 가득히 담아두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느헤미야 9:3, NKRV) 그들은 첫 세 시간 동안 말씀을 읽었고 다음 세 시간동안은 회개하며 찬양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 거룩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방 안에 태양 빛이 들어오면 수많은 먼지가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멀쩡하던 곳이 수많은 먼지로 싸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발견하는 것은 두려운 것이나 가장 복된 일입니다. 회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최고봉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의 거룩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우리의 죄를 생각하면서 그 간격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한 예배자가 됩니다.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행복한 예배자입니다. 예배함이 가장 기쁜 행복한 예배자가 됩니다.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느헤미야 9:5–6, NKRV) ‘너희는 일어나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은 어떤 송축이나 찬양으로 다 할 수 없다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표현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결코 다 표현할 수 없으나 그래서 더욱더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에서 뛰어난 분’ ‘모든 찬양보다 더 위대하신 분’을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찬양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이 찬양해도 과하지 않은 그분을 힘을 다해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세상 앞에 서서 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열심히 살기도 하지만 그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죄스러운지를 깨닫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지키면서 그것을 더욱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며 통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자신들의 마음대로 살았던 과거를 통회하는 것입니다.
한 해의 후반전이 시작되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더 서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들 중 많은 분은 이미 인생의 후반전에 들어서고도 한참 지나기도 하였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아지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 우리가 가야 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말씀을 통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이제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제 진심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찬양하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찬양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진실한 사랑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찬양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영광 앞에 서십시오. 그래서 기쁨으로 예배하십시오. 하나님 그 이름을 힘을 다하여 찬양하지 않으면서 어찌 인생이 값지다 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