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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강호에 부는 낯선 바람
종남산 기슭에는 한 여인이 자그마한 초막을 짓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 여인은 날마다 종남산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 검술을 익혔다. 그런데 여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수심이 가득했다.
하루는 이 초막을 향해 낯선 가마가 천천히 다가왔다. 여인의 눈에 비친 가마꾼들은 모두 신출내기는 아니었다. 가마는 조금의 흔들림도 얼이 아주 평온하게 여인의 발치 앞에까지 이르더니 멈춰섰다.
가마가 땅에 닿자마자 뒤를 따라오던 계집애가 쪼르르 앞으로 나오더니 문발을 거두었다.
"다 왔사옵니다."
계집이 이렇게 아뢰자 가마 안에서 한 절세 미인이 나왔다. 그녀는 초막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보고는 인사부터 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언니가 보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어요."
초막 앞에 서 있던 여인은 임조영이었고 가마를 파고 온 여인은 자지였다. 임조영은 가마에서 내린 여인을 보자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 미친 놈하고는 아직도 살고 있느냐?"
그 말에 자지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임조영 앞에서 할말이 없었다. 한동안 말끄러미 임조영을 바라보던 자지가 입을 열었다.
"언니, 두꺼비에게 시집을 가면 두꺼비를 따라야 하고, 개에게 시집을 가면 개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나를 두고 한 말이지 뭐예요."
임조영이 자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여쁜 얼굴은 여전했으나 그 위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모용준과 지내는 그녀가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을 거라는 게 충분히 짐작되었다.
"그런데 여긴 왜 찾아왔지?"
임조영이 갑자기 측은한 생각이 들었는지 약간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자지가 좌우에 둘러 있는 사람들을 슬쩍 보며 대답했다.
"언니와 회포를 나누려고 찾아왔지요. 너희들은 저리로 가 있거라!"
그러자 가마문과 계집들이 뒤로 멀찌감치 물러섰다.
"언니, 풍문에 의하면 왕 공자님이 강호에 나타났다고 하던데 ……"
임조영의 귓전은 큰 종이 한 번 울린 후처럼 먹먹해졌다. 임조영으로서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람이 강호에 나타났다구?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믿을 수 없어……. 그 사람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내가 거짓말을 꾸며 내겠어요?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왕 공자님은 지금 중주(中州) 어딘가에 계시대요."
중주를 향해 걷고 있는 왕중양은 어느 때보다 평온한 마음이었다. 비록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원숭이가 눈에 밟혀 가슴이 아팠지만 언젠가는 다시 찾아갈 날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대로에 들어선 그는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황야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이 스치는 마른 풀숲에서 스르륵 스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를 잔뜩 세우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왕중양은 그것이 누군가가 검을 뽑아 드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아니나다를까,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풀숲에서 사내 셋이 튀어 나왔다. 한 사내는 칼을 무지막지하게 휘두르며 달려들었고, 다른 사내는 손에 붓을 들고는 왕중양을 공격했다. 또 나머지 하나는 청강검(靑鋼創)을 번뜩이며 그의 등뒤로 몸을 옮기며 다가왔다.
왕중양은 거목처럼 우뚝 서서 그들의 움직임만 주시했다. 낯선 사내들은 왕중양을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선회했다.
〈움직일 때는 나는 매와 같아야 하고 가만히 있을 때는 날개를 펴고 유영하는 독수리 같아야 한다.〉
왕중양은 속으로 《구음진경》의 한 구절을 되뇌었다. 뜻을 풀이하면 상대가 움직일 때는 가만히 있다가 상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아 손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건방진 놈이로군!"
검을 든 사내가 왕중양에게로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 들었다. 왕중양은 그 검끝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순간 몸을 피하자 그의 목덜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이어서 한 쌍의 붓이 끝을 세우고는 왕중양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역시 왕중양의 몸에 닿지는 못했다.
"제법이군!"
붓을 들고 있던 사내가 콧소리를 내더니 다시 공격해 왔다. 붓끝이 명치에 닿으려고 할 때였다. 왕중양이 손바닥으로 붓을 툭 내리쳤다. 그런데 보이지 않던 검날이 획 머리를 향해 차갑게 날아들었다.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사내는 그 검날에 머리가 날아갔을 것이다. 붓을 든 사내의 등에 식은 땀이 솟았다.
잠시 거리를 둔 왕중양은 이 싱겁고도 명분 없는 싸움을 어서 끝내고 싶었다. 서서히 손을 들어올린 그는 앞으로 내뻗은 채 가볍게 휘젓기 시작했다. 세 명의 사내는 왕중양의 동작을 지켜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중 붓을 들고 있던 사내가 지껄였다.
"손을 보니 어디서 붓이나 잡던 놈 같은데 괜한 수작 부리지 마라!"
왕중양의 희고 가는 손이 그에게 그렇게 보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놈의 눈은 곧 늘란 토끼처럼 변해 버렸다. 왕중양의 손동작이 차츰 속도를 더하며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긴 사내가 왕중양에게로 붓을 내밀었다. 왕중양의 손짓 한가운데로 불쑥 들어간 붓은 멀리 튕겨져 나갔고 사내는 힘없이 쓰러졌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다른 사내들은 그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검을 든 사내가 나섰다. 그는 '망월거서(望鳶巨雇)'라는 검법을 쓰며 왕중양에게로 접근해 왔다. 사내는 있는 힘을 다해 검끝으로 왕중양의 가슴을 내리쳤다.
"얏!"
왕중양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로 날아드는 검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에 막힌 검은 위잉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높이 솟구쳤다. 사내가위를 보고 있는데 검이 무서운 속도로 아래를 향해 내려왔다. 사내가 몸을 피하자 검이 땅에 꽂히며 반으로 접힐 듯 휘청거렸다.
이제 남은 것은 칼잡이였다. 그는 동료 둘이 모닥불 앞의 낙엽처럼 맥없이 당하자 화가 났다. 약간 두렵기는 했지만 동료들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칼을 머리 위로 치켜 든 그가 멧돼지처럼 크릉대며 달려 들었다. 막 왕중양의 정수리를 향해 칼을 내리찍을 때였다. 위잉! 구름을 뚫을 듯 칼이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그러더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땅에 푹 꽂혔다.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대들은 낙양삼걸이 틀림없겠지? 칼과 검 그리고 붓으로 온갖 재간을 다 부린다는 낙양삼걸에 대해서는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소. 그런데 왜 내게 싸움을 거는 것이오?"
아직 자기 자세 그대로를 고수한 채 왕중양이 물었다. 그러나 쌍붓잡이가 잡아먹지 못해 분하다는 투로 받아쳤다.
"왕중양, 이 놈아! 점잖은 체하지 말어. 네가 한 짓을 아직 모르겠느냐? 죽었다고 사람들을 믿게 한 다음 이렇게 활보를 하다니……."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가? 그대들의 눈에는 내가 악인으로 보이는가?"
"왕중양, 넌 금나라 군대를 물리치겠다고 또한 송나라 강산을 지키겠다고 얼마나 떠벌려 댔느냐? 그래서 네 말을 믿고 숱한 무림의 영웅호걸들이 몰려 들었는데 어째서 혼자 살아 돌아왔느냐?"
"나 역시 의군이 어떻게 패했는지 모르고 있소. 세 사람이 알고 있다면 나에게 알려 주시오!"
검잡이가 노기를 띠며 비웃었다.
"흥, 의군의 통수 노릇을 했던 네 놈이 의군이 패한 원안도 모른다니 그게 말이나 되느냐?"
칼잡이의 검날이 눈앞으로 획 지나갔다. 왕중양이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손을 들었다.
"정녕 나는 모르고 있소."
"둘째 동생, 셋째 동생, 이 놈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네. 이 놈이 금군과 결탁한 게 분명해. 그랬으니 의군이 패한 것이라고. 어서 이 놈을 죽여 억울하게 희생된 형제들의 넋이나 위로하자구."
맏이인 칼잡이가 울분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검잡이가 다시 왕중양을 향해 소리쳤다.
"왕중양, 넌 만 명도 더 되는 인명을 해쳤다. 그러고도 변명이나 일삼으려 하다니, 어서 내 검을 받아랏!"
검잡이의 신호가 떨어지자 모두들 한꺼번에 땅을 박차고 날아들었다. 몸을 높이 띄운 왕중양은 저 멀리로 날아가 일단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바위 위로 올라선 왕중양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사실 그 계곡을 떠나 온 뒤 제일 먼저 가 본 곳은 의군의 대영이 있던 장소였다. 그러나 바위 몇 개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 바윗돌은 막사가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게 귀퉁이를 눌러 두었던 것이었다.
세 명의 사내들이 어느새 왕중양이 있는 곳까지 와 다시 공격을 퍼부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오랫동안 연마해 온 '천지동수(天地同壽)'라는 초수를 쓰고 있었다. 이 초수는 위력이 대단해 당할 자가 드물다고 알려져 있기도 했다. 왕중양이 손을 쓰자 그 검은 심하게 요동을 치며 옆으로 비껴 나갔다. 다시 '평산출유(平山出岫)'라는 초수로 바꾼 검잡이가 사납게 달려 들었다. 등뒤로는 역시 칼과 붓을 들고 다른 사내들이 접근해 왔다. 공중으로 몸을 솟구친 왕중양은 그
저 피하기만 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세 사내의 병장기가 한곳에서 맞부딪쳤다.
이미 왕중양이 자기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얼른 자리를 피하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왕중양이 빙그레 웃으며 먼저 몸을 돌리는 게 아닌가. 이들은 천천히 걸어가는 왕중양의 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왕중양, 네 놈은 강호의 숱한 사람들을 해쳤다. 다시 기회가 생기면 네 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중주에 도착한 왕중양은 어느 객주집에 묵었다. 피곤한 몸을 뉘이고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잠결에 주위가 시끄러워 눈을 뜬 것이다. 객주집 마당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 객주집을 뒤져라. 그 놈을 놓치면 안 된다!".
마당에는 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는데 한결같이 병장기를 들고 있는 것이 강호 사람들 같았다. 왕중양이 천천히 일어나 문밖으로 나서려는데 한 사내가 소리쳤다.
"저 놈이 바로 왕중양이다!"
이들 속에는 왕중양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막다른 골목에서 호랑이를 만난 사람들처럼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때 검을 쥔 한 젊은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제법 위엄 있는 목소리를 내질렀다.
"왕중양, 네 놈은 네가 지은 죄를 알고 있느냐?"
젊은 사내를 유심히 훑어보던 왕중양이 점잖게 대꾸했다.
"이 왕중양이 죄를 지었다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그렇다면 내 말해 주지. 나는 무당파(武當派) 옥생(玉生)이고, 내 사부님은 바로 운심도장이시다!"
무당파의 원로이자 강호에서 가장 신망이 높은 운심도장을 들먹이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들은 일제히 왕중양을 꾸짖으며 옥생의 편에 서려 했다.
"왕중양, 내가 네 놈의 죄상을 까발기면 할말이 없을 것이다."
실눈으로 왕중양을 노려보던 옥생이 다시 다그쳤다.
"넌 명색이 의군의 수령이 아니었더냐? 의군들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는데 네 놈은 살아 남아 아직도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있다는 말이냐?"
왕중양은 난감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그런 오해와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자신이 겪은 기이한 사연들을 일일이 설명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이 왕중양을 어찌할 생각들이오?"
왕중양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너 때문에 많은 강호객들이 죽었다. 그러니 먼저 간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네 놈도 죽어야겠다!"
그러나 왕중양은 내심 새롭게 일고 있는 기운을 감지해 냈다.
'운심도장의 이름을 들먹이며 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속에는 무슨 다른 속뜻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내가 빙긋이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왕중양, 네가 무림의 맹주 노릇을 할 때 맹세를 한 적이 있지 않느냐? 금나라 군사들을 중원에서 몰아내지 못하면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코 잊을 수 없는 맹세였다. 왕중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하하하, 그런데 그대는 이 중주의 거리마다 우글대는 금군들을 보지 못했단 말이냐?"
왕중양이 뭐라고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여기저기서 비웃는 소리가 이어졌다.
"왕중양, 넌 왜 맹세를 저버리려고 하느냐?"
"스스로 자결을 하라구!"
"네가 죽으면 우리들은 강호의 탑에 따라 너를 무림의 맹주로서 장례를 치러 주겠다. 하하하!"
이렇게 왕중양을 향해 냉소의 화살들을 쏘아댔다. 그러자 뒤쪽에서 그럴 수는 없다며 누군가 단호하게 외쳐 댔다.
"그건 안 돼! 내 손으로 직접 저 놈의 목을 따야 속이 풀리겠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왕중양은 반가운 마음에 그를 불렀다.
"제 장로님이 아니시오? 그동안 안녕하셨소?"
왕중양이 존경하고 있는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그런데 제 장로는 대답 대신 서슬이 퍼런 눈으로 왕중양을 쏘아보았다.
"일년 동안 몸을 숨기고 다녔겠지만 강호의 법도는 피할 수가 없소!"
"나는 지난 일년 동안 죽은 목숨이었소. 몸을 숨겼다는 것은 오해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어도 다 설명하기가 어렵소."
제 장로의 냉소는 매우 차갑고 단호했다.
"그런데 그대는 어제 낙양삼걸을 만난 적이 있소?"
왕중양이 그렇다고 하자 제 장로가 죄인을 신문하듯 계속 캐물었다.
"그대가 그들에게 무공을 썼소?"
역시 틀린 말이 아닌지라 왕중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당에 모인 많은 사내들이 폭풍을 만난 바다처럼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장로가 손짓을 하자 몇몇 거렁뱅이가 손수레를 하나씩 끌고 들어 섰다. 수레는 모두 셋이었는데 그 위에는 시체 세 구가 누워 있다. 바로 낙양삼걸이었다.
큰형인 절명도(絶命刀) 진호(陳浩)는 칼에 앞가슴을 난도질당해 시뻘건 살점들아 마구 파헤쳐진 상태였다. 수레가 멎자 상처에서 다시 검붉은 피가 솟았다. 둘째인 쾌삼검(快三劍) 서성(徐聲)은 칼끝에 목을 찔려 죽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 상처를 발견하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검으로 가볍게 목을 찔러 피를 뽑아 낸 무서운 실력이었다. 그리고 셋째인 쌍붓잡이 이쟁(耳錚)의 가슴팍에는 자신의 붓 두 자루가 꽂힌 채였다. 이들의 모습만 봐도 싸움이 얼마나
잔인했고 끔찍했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왕중양으로서는 모를 일이었다. 분명 자기와 싸우다가 그들은 그냥 물러가지 않았던가.
제 장로가 다시 왕중양을 향해 분노에 가득 찬 소리로 외쳤다.
"왕중양, 그대의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바이오. 세상에서 낙양삼걸을 이렇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그대 밖에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소."
제 장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사내가 선동을 하며 칼을 쳐들었다.
"왕중양을 죽입시다!"
그러자 모두들 그 말에 찬동하는 몸짓을 했다. 사내가 왕중양을 향해 이를 갈았다.
"모용준이란 놈도 함께 죽여야 할텐데. 왕중양! 네 놈은 모용준이 숨어 있는 곳을 알겠지?"
"난 모르오."
"거짓말 말아라! 우리 강호객들치고 네 놈과 모용준이 의형제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냐?"
왕중양은 그것마저 부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답을 하지 않자 묵인한 것으로 여긴 사내가 더욱 의기양양해져 대들었다.
"그렇다면 왜 모용준의 행방을 모른다는 거냐?"
제 장로가 더욱 왕중양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틈을 주지 않고 합세했다.
"그대는 낙양삼걸을 죽인 데 대한 이유를 무림의 영웅들 앞에서 밝혀야 하오.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그 이유를 듣고 싶을 것이오. 난 이미 개방에 생사령(生沈令)을 내렸소. 그대가 그냥 얼버무린다면 천하에는 낙양삼걸을 죽인 자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될 것이오."
"제 장로도 처음엔 의군에 계시지 않았소? 그러니 후에 의군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소."
왕중양의 난데없는 질문에 사람들이 코웃음을 쳤다. 의군의 통수였던 자가 패한 의군의 소식을 모른다니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중양, 그대는 정말 총명하군. 그렇게 발뺌을 하면 무사할 줄 알았는가? 의군은 바로 그대의 손에 몰살당했지 않은가?"
"나 역시 남에게 모함을 당했던 처지요. 그런 내가 어찌 의군을 팔아먹을 수 있었겠소?"
"그대는 의군의 통수이기에 모용준이 의군을 팔아 넘겼다고 해도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소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왕중양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의 잘못도 컸기에 의군이 그런 운명을 맞은 것이 아니었던가. 처음부터 강력하게 모용준을 제지했어야 했다.
"할말이 없소. 아깝게 목숨을 바친 의군의 혼백을 달래고 싶은 사람은 어서 나를 치시오!"
사실 왕중양의 깊은 속에도 먼저 간 아까운 목숨들에 대한 죄책감이 가득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여기서 죽는다 해도 헛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왕중양의 머리가 서서히 숙여졌다. 이곳에 모인 사람 가운데는 사실 왕중양을 죽여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싶어하는 자들도 없지 않았다.
"이 놈, 우리 형제들의 목숨을 내놓아라!"
이렇게 소리치며 칼을 비스듬히 꼬나들고 나선 사내도 그런 개인적 욕망을 품고 있는 자 중 하나였다. 왕중양은 칼끝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막 사내가 칼을 치켜 들 때 한 사내가 검으로 칼을 막으며 후닥닥 뛰어들었다.
"잠깐만!"
직검 마옥과 그의 아내인 손불이였다. 마옥이 검으로 칼을 막고 있는 상태로 으름장을 놓았다.
"누구든 왕 공자님을 죽이려면 내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이다!"
곧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일이 차츰 기묘하고 흥미롭게 꼬여 가고 있어 사람들은 갈대숲처럼 시끄럽게 술렁였다.
"너희가 과연 왕중양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단 말이냐?"
한 사내가 마옥을 비웃으며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하하핫! 그렇다면 내가 왕중양의 목숨을 지킬 것이다! 내가 대신 네 놈의 칼의 받겠다."
이렇게 자처하고 나선 사람은 마옥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한가운데로 훌쩍 뛰어든 낮선 사내, 그는 다름 아닌 소성산의 의군 두령 구처기였다.
"그대들은 무슨 연유로 왕 공자를 죽이려 하오?"
구처기가 묻자 한 사내가 귀찮다는 투로 대꾸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왕중양이 의군을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봤소?"
사내는 머뭇거리지 않고 구처기의 말을 받았다.
"왕중양이 의군의 수령 노릇을 할 때 몇만 명이나 억울한 죽음으로 몰아갔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소?"
구처기가 다시 앙천대소했다.
"하하하핫! 중원에는 영웅호걸들이 많다고 하더니만 오늘 보니 그게 아니었소이다. 그 말을 들으니 내 얼굴이 붉어져 가만히 있을 수가 없소."
"뭣이라고? 어째서 너의 얼굴이 붉어지냔 말이다. 오늘 대답을 하지 않았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
"보건대 황천에 가신 운심도장님이나 모든 의군 형제들은 다 비장한 최후를 마쳤소. 금나라의 오랑캐를 물리치다가 돌아가셨으니 부끄러운 죽음은 결코 아니오. 허나 그대들이 왕 공자님을 이토록 원망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생각해 보시오. 왕공자님이 없었다면 의군을 모아 금나라와 대적할 수나 있었겠소? 아직 혈기가 남아 있다면 어서 달려가 금군들이나 칠 것이지 왜 왕공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오?"
불현 주위가 폭풍이 가라앉은 잔잔한 바다처럼 잠잠해졌다. 이들 대부분은 구처기의 말에 공감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고런데 옥생이 구처기의 말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잠깐!"
앞으로 한 발짝 나선 옥생은 구처기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구처기, 자네도 의군의 장수 노릇을 좀 했다고 왕중양을 싸고 도는 것인가? 이를 두고 동병상련이라 하던가?"
심지 약하게 물러설 구처기가 아니었다.
"옥생도장, 그대의 말은 틀렸소. 이 구처기가 금나라 놈들과의 싸움에서 지기는 했소. 하지만 이 중주청을 보시오. 도처에 금나라 오랑캐 놈들로 그득하지 만 모두들 고분고분 순종하고 있지는 않소? 그러나 난 목숨을 건고 싸웠소이다. 내 검에는 오랑캐의 피로 오랫동안 그 빛이 가려질 정도였소. 그런데 그대의 검에도 놈들의 피가 묻어 있소?"
구처기의 말에 옥생뿐만 아니라 거의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슴으로는 울부짖었지만 실제로 오랑캐와 맞서 싸워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심중은 차츰 왕중양을 이해하는 눈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마옥과 손불이는 왕중양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옥이 웃으며 왕중양에게 머리를 숙였다.
"저희 두 사람은 대혐을 사부님으로 모시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앞으로 저희는 사부님만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마옥이 무릎을 꿇고 엎드리자 손불이도 뒤를 따랐다.
"사부님, 제자들의 절을 받아 주십시오!"
왕중양의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들 일어나게."
이때 구처기도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이 제자도 사부님께 맹세를 하고자 합니다."
더 이상의 감동은 없을 것 같았다. 왕중양은 마땅하게 지금의 심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우물쭈물했다. 그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모두들 잘 생각하시오. 내 제자 노릇을 한다는 게 그다지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오. 편안한 나날들이 기다리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오."
"아닙니다. 이 구처기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후회를 하지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구처기가 검으로 자기 손가락을 찔렀다. 손가락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 피를 땅바닥에 뿌리며 맹세를 다졌다.
사람들은 하나 둘 돌아가고 마당에는 왕중양을 비롯해 몇 사람만 이 자리를 지켰다. 왕중양이 돌아보니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이들은 다시금 왕중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중 한 사내가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저는 이전부터 왕 대협의 높은 뜻에 감복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옥의 말을 듣고 많은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처음에 대협께서는 모용준의 모함으로 무공까지 잃어버렸지만 나라를 되찾는 일 때문에 다시 손을 잡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사연을 듣고 저는 더욱 대협의 깊은 뜻에 감동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자는 학대통(那大通)이라 부르는 사내였다. 또 그옆에 있는 사내는 왕심일(王尋-)과 유현자(劉玄子)였다. 이들은 후에 모두 왕중양의 제자가 되었는데 왕심일은 왕처일(王處-), 유현자는 유처현 (跳處玄)으로 이름을 고쳤다. 또한 학대통과 마옥 그리고 손불이는 자기 이름을 그대로 썼다. 이들이 바로 훗날 세상에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될 전진칠자(全眞七子)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다른 패거리들이 몰려와 시비를 걸까봐 마옥이 권했다.
"사부님, 먼저 조용한 곳으로 가 얼마 동안 쉬는 게 좋겠습니다. 일단 준비를 한 다음 금나라 놈들을 찾아 싸웁시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 난 자네들의 말을 따르겠네."
왕중양을 비롯한 이들은 다시금 서로의 믿음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앞으로 금군을 물리치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정의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을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왕중양은 이들의 깊은 뜻을 헤아려 보다가 문득 지난날을 회상했다.
"모용준이란 사람을 너무 미워하면 안 될 것이네. 그 사람이 없었더라면 의군이 패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 허나 그 사람이 있었기에 의군이 하나로 뭉칠 수도 있었다네."
이 말에 제자들은 다시 한 번 깊은 감격에 머리를 조아렸다. 왕중양이야말로 솔직하면서도 정의로운 가슴을 지닌 사내라고 믿었던 것이다. 모용준의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결과적으로 나타난 그의 충심은 높이 사려는 왕중양의 사려 깊은 마음이 이들을 감동시켰다.
마옥이 왕중양에게 물었다-
"제자는 강호에 오랫동안 몸을 두고 있었으나 사부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고 있지를 못했습니다. 개방의 홍칠공의 말을 듣고서야 사부님의 성품을 알게 죄었지요. 홍칠공은 언제나 사부님을 고금에 둘도 없는 인물이라 하였지요. 이 제자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말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칠의 모습을 떠올리는 왕중양의 눈가로 희비가 엇갈렸다. 그가 이토록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해 주고 있었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불현 임조영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난 종남산에 가 만나 볼 사람이 있다네. 혼자서도 충분하니 일이 끝나는 대로 우리 다시 만나도록 하세."
왕중양의 심중을 읽어 낸 제자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구처기가 따라가겠다며 한마디했다.
"제가 따라가겠습니다. 그 사이 여러 형제들은 중주 일대의 호걸들에게 연락을 취해 보게. 다시 의기를 들 가능성이 있는지를 말일세."
왕중양이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만일 내가 종남산에 가 친구를 만나면 푸대접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자네는 절대 내색을 하지 말게나."
구처기가 읍을 하며 잘 알겠다고 대답했다.
종남산에 이른 이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그마한 초막에서 밥짓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임 여협은 과연 이곳에 계셨군요. 제가 가서 문안을 올릴까요?"
구처기의 말에 왕중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내가……."
왕중양의 마음속은 매우 복잡미묘했다. 왕중양은 임조영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모용준과 손을 잡았었다. 그런데 결과는 무엇인가. 수많은 의군들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모용준에게서조차 배반을 당한 꼴이 아니던가. 또한 자신은 지난 일년 동안 어떤 고난을 겪었었는가…….
집 앞에 이른 왕중양이 임조영을 불렀다.
"아무도 없소?"
이윽고 한 계집이 나와 왕중양을 아래위로 훑었다.
"어디서 오신 나그네인가요? 누구를 찾으시죠?"
하인으로 보이는 이 계집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갖춘 왕중양이 물었다.
"혹시 임조영이라고 계시오?"
그러자 계집이 쌀쌀맞게 굴었다.
"여긴 오로지 기분이 몹시 상해 있는 사람밖에는 없는데요."
이 말에 왕중양은 내심 기뻐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미안하지만 가서 여쭈시게나. 옛 친구 왕중양이 찾아왔다고."
계집의 눈빛이 일순 요상하게 변했다. 이 계집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계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왕중양은 초조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실로 얼마 만에 만나는 임조영인가. 그동안 또 얼마나 많은 그리움으로 그녀를 잊지 않고 지내 왔던가.
드디어 임조영이 그 앞에 나타났다. 왕중양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는 어렵게 첫마디를 꺼냈다.
"셋째, 그동안 잘 있었나?"
임조영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였다. 그녀 역시 속내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숱한 말들에 시달려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왕중양이 그렇게 인사를 건네오자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모용준과 왕 대협님과 저는 이미 형제지간이 아니지요. 그날 이후로 세 사람은 의형제를 작파했다는 것을 잊으셨나요?"
임조영의 어조는 가슴까지 얼어붙게 할 정도로 냉랭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수천 마디의 말보다 단 한 번의 눈빛이 더 절실했다.
"둘째 동생 아니 그 모용준이라는 자가 의군을 몰살시켰소. 난 그자를 찾아 원한을 갚아야만 하오."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왕중양이 불쑥 모용준에 대한 화제를 꺼냈다. 임조영이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왕 대협님, 다시는 의형제를 맺었던 일과 거기에 속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세요."
임조영의 가슴에 애처롭고 아픈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이 사람은 알고나 있을까? 아마도 모르고 있을테지. 만일 알고 있다면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사실 임조영은 나라와 백성의 안녕만을 위해 힘쓰는 왕중양이 내심 미웠다.
"왕 대협께서는 오로지 금나라와 싸울 생각만 하고 있군요? 흉노를 멸하지 않고 어찌 제집만을 돌보랴, 하시던 당신의 명언이 떠오르는군요. 하지만 그 말을 중원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요?"
임조영은 자꾸만 본심과는 다르게 왕중양에게 미움의 화살을 던지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결코 무리한 생각은 아니었기에 그녀는 얼어 버린 가슴을 쉽게 녹여 버릴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왕중양이 다시 작별을 해야겠다며 몸을 일으켰다. 모용준을 찾는 일과 또 더 많은 일을 위해 그만 길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런 왕중양 앞에서 그녀는 할말을 끊었다. 왕중양이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안 되리라.'
그러나 왕중양은 속으로의 다짐과는 달리 임조영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냉정하게 대한 그녀의 태도가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욱 그러했다. 왕중양은 걸음을 세우지 않은 채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런데 멀어져 가는 왕중양의 뒷모습에 아쉬운 눈길을 던지고 있던 그녀가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에 막 고개를 떨군 순간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임조영을 본 왕중양의 가슴에서 싸늘한 찬바람이 불었다.
첫댓글 즐감~!
잘 읽고.... 감사합니다
^^
즐감
ㅈㄷ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