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 년 청나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산해관은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요?
현대 지도에 표기된 지금의 란하 동쪽 진황도 부근에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명사/지리지>와 명이 멸망하고 1911 년의 일까지 기록된 <청사고/지리지>에 기록된 산해관은
지금의 란하 서쪽에 있었습니다.
즉 현대 지도에 표기된 산해관은 1911년 이후 동쪽으로 대략 3~4 백? 리 옮겨 표시된 것입니다.
<명사/지리지> 京師
영평부 ...西距京師 550 裏
무녕현 府東少南...東有山海關
창령현 府東南 西北有碣石山
란주현 ...東有란(水+欒)河...東北距府 40 裏
위 말은 경사인 지금의 북경 동쪽 550 리 떨어진 노룡현이 영평부 치소이고,
그 동쪽이면서 조금 남쪽에 무녕현이 있고 무녕현 치소 동쪽에 산해관이 있으며,
부 치소 동남쪽에 창녕현이 있고 창녕현 치소 서북쪽에 갈석산이 있고,
또 란주현은 영평부에서 서남쪽으로 40 리 떨어져 있고 란주현 동쪽에 란하가 흐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란주현 동쪽에 흐르는 란하는 지금의 란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금의 란하 하류는 명.청 당시 바다였으며 혹 발해가 아니라 九河가 둘러빠진 곳이라라도 불리웠습니다.
즉 명 시기의 란하는,
<한서/지리지> 요서군 비여현의 난수濡水이며 <수경주>의 난수濡水와 같은 하수입니다.
<수경주>의 난수는 지금의 란하 상류의 반원 즉 ` ? ` 표시의 윗부분과 같으며,
중류 이하에서는 지금의 경유지보다 훨씬 서쪽에서 남류하여,
어양.우북평.요서군을 경유하여 갈석산 남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갔었습니다.
즉 현대 지도에 표기된 독석 부근에서 발원하여 다륜.란평을 거친 후 승덕 쪽으로 흐르지 않고,
바로 남쪽으로 흘러 지금의 고북구.흥륭.옥전 등을 경유하여,
동쪽 당산.란현 사이의 갈석산 쪽으로 향하였고 곧바로 지금의 란하 하류로 표시된 당시의 바다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추정지도 - 명.청 시기 란하
![](https://t1.daumcdn.net/cfile/cafe/163BA4374FFAD71C49)
주) 가. 요동군 - 의무려산.염난수.대요수.요택
나. 우북평군 - 백랑산.백랑수.난수濡水.경수.옥전
다. 요서군 - 갈석산.산해관.난수濡水.고죽성
이것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 <명사/지리지>에서 란하가 흐르는 란주현에서 영평부까지는 동북쪽으로 40 리
거리라 하였고, 영평부 치소에서 지금의 북경까지는 서쪽으로 550 리 떨어졌다는 기록입니다.
바꿔 말하면 명 시기 영평부에 있었던 산해관.란하.갈석산 등은 지금의 북경에서 대략 동쪽으로 600 여리 안팎에 있었고,
이 600 여리 지점은 지금의 란하 하구에 훨씬 못미치는 것인데,
지금의 란하 동쪽으로 단정하게끔 착오를 일으키게 된 원인은,
영평부 란주현의 란하를 지금의 란하로 오판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또한 논리적으로도,
<수경주/대요수>에는 동북류하며 우북평.요서.요동군을 경유하는 백랑수의 한 갈래가
남쪽으로 흘러 요서군 임유현의 옛 성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으니,
한 시기 요서군 임유현에 있었던 명.청 시기의 산해관은 당연히 지금의 란하 하류 서쪽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모로 보나 백랑수가 발원하는 우북평군은 지금의 란하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며
그 백랑수는 지금의 란하를 동쪽으로 넘어 흐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시각적으로 참고할 만한 것이 명 시기 장천성이 편찬한 <황여고>에 실린 `해운도`와
1562 년 정약증이 편찬한 <주해도편>에 실린 `요양총도`입니다.
<해운도>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D06424FFABD5909)
위 도면의 오른쪽이 북쪽 방향이니 참고하시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별하면서 지금의 요동만을 그린 것이라 단정합니다.
하지만 잘못 본 것입니다.
지금의 란하 하류입니다.
<요양총도>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A8E424FFAD0D327)
사실 위 `요양총도`도 `해운도`와 같이 지금의 요동만과 요동반도를 그린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하지만 대릉하는 한 시기 우북평.요서.요동군을 경유하는 백랑수였으며,
백랑수 상류가 경유하는 대정.흥중 지역은 <명사/지리지> 북평행도지휘사사 기록을 보면,
본래 대녕도지휘사사였고..대녕위가 그 치소이며...서남쪽으로 북평포정사(지금의 북경)까지는 800 리이다.
대녕위는 그 치소가 대정현이며...홍무 28 년(1395년) 4 월 좌.우.후 3 위를 영주營州 좌.우.중 3 호위로 개칭하고...
라고 한 바와 같이 대정현에 있는 대녕위에서 지금의 북경까지는 서남쪽으로 800 리 거리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산해관.갈석산.란하가 있는 영평부에서 북경까지 600 여리이고,
북위 시기부터 영주였으며 청 시기에는 직예성 조양부인 명 시기 대녕위가 북경까지 800 리라면...
당연히 지금의 란하 서쪽에 있는 흥륭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지금의 반가구수고로 흘러드는 하수가
바로 백랑수이며 그 경유지에 영주가 있었던 것입니다.
현대 지도에 표기된 산해관은 위 `요양총도`를 잘못 이해하고 혹은 잘못 이해한 척하며 악용하려고
현대 지도에 지명을 동쪽으로 옮겨 표기한 그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산해관을 지금의 란하 동쪽으로 옮기고,
산해관 북쪽에 있었던 영주와 백랑수를 동쪽으로 옮겨 지금의 대릉하와 조양으로 표시하고,
조양부 보다 더 북경에 가깝던 직예성 적봉부를 동북쪽으로 멀리 쫓아내고,
지금의 란하 동쪽 지류인 지금의 폭하인 2000 여년 동안 대요수.요하를 지금의 요하로 표시한 것 등등입니다.
당연히 열수(압록수1).왕험성.평양.浿水.漢水 등등은 모두 한반도로 몰아넣었습니다.
이것이 倭가 1860~1935 년 경까지 추진한 역사왜곡의 실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