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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혜성의 거부할 수 없는 무서운 눈길에 쫄다시피 해 사격장에 오게 된 아영은 자신을 두고두고 저주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토록 쉬려고 했건만. 아니, 사실 어차피 오늘 의뢰가 있으니까 사격장에 가서 연습을 하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몰랐다.
"사격 좋아한다면서, 안하고 뭐해?"
혜성은 벌써 대여한 권총을 목표물에 겨누고 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영은 자신도 모르게 혜성의 방아쇠를 당기는 손으로 눈길을 줬다. 그의 섬세하고 가는 손이 총과 하나가 되어 매우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정혁의 손도 가늘고 예뻤지만 하얀 혜성의 손은 정말 게을러보이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아본 것 같은 그런 손이었다.
탕탕탕 -
혜성은 그동안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던 듯 연달아 총알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한방한방 총알이 목표물에 꽂힐때마다 오렌지색 선글라스 아래 살짝 가려진 그의 눈에서 매서운 빛이 났다.
혜성은 정말 사격을 잘했다. 열발의 총알중에서 세번 연속 목표물의 심장 주변에 박혔으니. 아마추어가 이 정도 하려면 꽤나 연습을 해야 했는데. 아영은 자신이 ‘사격’ 이라고 대답했을 때 혜성이 그다지 머뭇거리지 않고 사격장에 오자고 했는 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사실 공부와 검도밖에 모르는 혜성인 줄 알았는데. 그는 의외로 다방면에 능통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그는 농구,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고, 음악, 미술 등 예술분야에도 뛰어났다고 했다.
아영은 혜성의 사격솜씨를 보고는 꽤나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넋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혜성이 총을 내리고 뭘 보냐는 듯 아영을 다소 거만한 눈길로 쳐다봤다.
"사격 좋아한다는 거 거짓말이었어? 너 사격 할 줄 몰라?"
사람 자존심 상하게 하는데는 혜성만큼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쳇 - 명색이 아이스 아이즈인데. 사격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아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혜성의 비웃는듯한 시선이 느껴지자 아영은 곧 권총을 목표물에 대기시켰다. 그녀의 섬세하고 방아쇠에 걸쳐지는 부분에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쳐지고 곧 총의 입구에서는 연발탄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이어폰 너머로 탕탕탕 - 하는 큰 소리가 연달아 들렸고, 곧 목표물인 사람의 형상의 심장부위에 해당하는 곳에 아영이 연달아 쏜 10탄의 총알이 한꺼번에 박혔다. 혜성은 아영을 그저 신기하단 눈초리로 보고있었고 아영은 만족한 듯 살짝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오랜만에 찾는 사격장이라 그런지 슬슬 재미도 붙고 있었고, 또 10탄이 아주 정확히 같은 곳에 박히자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정도면 뭐...만족할 만 해...'
아영은 자신의 실력에 살짝 만족을 했다. 비록 살인청부업자이긴 하지만 분명 그런 직업도 엄청난 실력을 필요로 하는지라 약간의 자부심은 허용이 되었다. 대한민국에 그녀 말고 대체 몇 명의 사람이나 이런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세계 어느곳에 가도 아영의 사격실력은 최고중의 하나일 것이다.
"너....사격은 또 언제 배운 거야?"
혜성은 그제서야 자신의 페이스를 찾고 아영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녀의 신의 경지에 도달한 사격실력은, 검도에 이어 또 다른 충격이었다. 솔직히 혜성은 지금 자신의 눈이 믿겨지지 않았다. 지금, 거의 신기에 가까운 사격실력을 선보이고는 자신 앞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 있는 사람이 정녕 자신이 사랑하는, 아니 좋아하는 (아직 혜성은 사랑으로 인정한 바가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그를 위해 ‘좋아한다’ 라고 표현을 하겠다.)
1학년, 17세의 가녀리고 여성스러운 후배가 맞는건지 의심스러웠다.
저 정도의 실력이면 국가대표 금메달을 따고도 남았다. 권총으로 심장을 명중시키다니. 그것도 10발이나. 탑 CIA 요원들도 10발 모두를 명중시키지는 못했을것이다.
"어렸을 때...사격에 미쳐서...정말 많이 연습했었어요..."
아무리 사격에 미쳤었다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되려면 얼마나 연습을 많이 해야하는데. 저 정도면 내공이 적어도 5,6년은 쌓인 실력일 것이다. 물론, 5,6년 조차도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그저, 그 시간동안 사격장에서 먹고 자고 했다면 혹시라도 달성했을 수는 있었곘지만. 하지만, 저렇게 여성스럽고 예쁜 아이가 5,6년동안 사격장에서 먹고자고 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저 정도의 지성과 미모를 겸비하려면 죽자고 사격연습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닌데.
정말, 파고 들어가면 파고 들어갈수록 주춤할 정도로 무서웠다. 너무나도 가녀리고 폐쇄적인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가도, 이럴때면 천하의 신혜성도 간담이 서늘해 질 정도로 무서워졌다. 그녀는.
혜성은 더이상 여기 있다가는 자신이 뭐도 안될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아영을 사격장 밖으로 유도해가며 저녁을 같이 먹을것을 권했다.
사격장이 워낙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도 그렇고 한참 사격에 열중하느라 벌써 2시간은 족히 있고도 남았기에 시간은 벌써 저녁 7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됐어요...그냥 기숙사로 들어갈께요..."
아영은 10시에 정혁과 중요한 약속이 있었던지라 혜성과 저녁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아영이 다소 냉정하게 혜성의 제의를 거절하자 그러자 혜성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감정이 격해져서
"왜...같은방에서 살고 매일 마주치는데, 저녁식사도 한끼 못하나봐? 내가 그렇게 불편해? 아님...얼굴도 마주치기 싫을 정도로 지겨워?"
낮게 깔린 혜성의 목소리는 아영을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한눈에 봐도 그가 언짢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영은 그가 버럭 화라도 낼까봐 무서워 작은 목소리로 변명을 했다.
"그게 아니고...약속이 있어서요..."
"누구랑?"
문정혁이요 - 라고 말해도 되겠지만, 살인을 하러 가는거기 때문에 혹시나 나중에 꼬리가 밟히게 되더라도 증인을 절대로 만들어 놓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일단 혜성은 정혁과 자신이 아는 사이인건 지 알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영은 정혁을 만나러 간다고 하려다가 그냥 말을 돌려버렸다.
"그건...아실 거 없고요...그냥 이따가 10시에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되요..."
그러자 혜성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아무리 좋아하는 후배라지만,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버릇없게 말한것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아영 역시 자신의 입에서 함부로 튀어나와버린 말에 적잖게 당황했지만, 이미 혜성이 화가 나버린 후였다.
"내가....물로 보이나봐? 이젠...참견도 하지 말라는거네? 누가 그렇게 선배한테 버릇없게 굴래? 처음에는 꽤나 예의바른 애라고 생각했는데...너도 별 수 없구나?"
차가운 한마디를 남긴 체,아직은 서늘한 저녁봄바람을 맞으며, 혜성은 그렇게 먼저 휑하니 저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아영은 자신이 다소 버릇없고 싸가지 없는 말투로 말을 한 것은 인정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 혜성의 처신은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잘못을 한 것이 아닌데. 그저 한번 타이르고 말 것을 갖다가 혜성은 저리도 화를 내고 있었다. 아영의 판단으로썬, 그는 아직도 싸이코였다.
아영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영을 등지고 가는 혜성의 뒷모습이 상당히 쓸쓸하게 보였다.
그의 흰 마이가 바람에 날리며 왠지 모를 쓸쓸한 기운을 풍겼다.
늘 앞에서는 쌀쌀맞게 대했지만, 마음속으로만큼은 누구보다도 아영에게 잘 해주고 싶은 혜성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늘 이렇게 살아와서, 친구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쌀쌀맞게 대하는 그였고, 자신의 약점을 허용하지 않아서 그리고 늘 무섭도록 철저한 그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용납되지 않았다. 사랑이란 것은 여태까지 그에게는 하찮은, 필요따위는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사랑의 길을 걷고 있었다. 벗어나려고 해도, 이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거라는 생각은 해본적도 없었다. 친구들이 여자친구다 뭐다 할때마다 늘 비웃으면서 ‘어차피 헤어질텐데’ 라고 냉소적이게 말했던 그였다. 하지만 막상 시작을 해보니, 사랑이란 감정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감정인 것 같았다.주체할수도, 없앨 수도 없었다. 이제는.
"오늘도...병신짓 했네...."
쓸쓸하게 한마디를 툭 내뱉고는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물어 피면서 걸었다. 당장이라도 돌아가서 "유아영...내가 너 좋아해....우리 사귀자..."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알량한 자존심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입은 그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다. 슬프게도.
"왔네?"
한산한 저녁. 학교 뒷문에서는 정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각은 10시 정각이었다. 둘은 약속대로 의뢰받은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각각 옷과 사용할 장비가 들은 봉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프리랜서였기 때문에 각자 무기와 필요한 용품들을 챙겨야했다. 그 때문에 무기도 직접 소지하고 있거나 비밀장소에 숨겨놓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정말 위험천만했다. 하지만 프리랜서의 수입은 짭짤했다. 받은 돈을 회사와 나누지 않고 자신이 모두 챙기는 방식이니까. 그런 이유 때문에 아영은 군말 없이 전날 쇼핑을 나가서 150만원 짜리 파티드레스를 샀던 것이다.
"안좋은 소식이 있어..."
정혁이 갑자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뭔데?"
"오늘...파티 말야....승선파티라고 기자들이 취재하러 온다네?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아..."
"그....래?"
순간 아영의 눈에서 이 상황을 오히려 즐기는 듯한 광채가 났다. 위장잠입은 늘 즐거웠다. 위험천만하고 스릴이 있었기 때문에. 게다가 취재까지 하러 온다니. 정말 익싸이팅, 그 자체였다.
"게다가...생방송이래...12시 생방송.... 풋...이거 더 재밌겠는걸? 일명 챌런지 잖아. 우리의 실력의 한계에 도전 해 보는거야....큭...어때?"
아영과 마찬가지로 정혁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아예 쿡쿡대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섬뜩할 정도로 무서웠다.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결의와 정복욕에 가득 차 있었고, 또 살의로 번뜩이고 있었으니까.
"가자...시간 다 되었어..."
곧 정혁과 아영은 사람이 없는 뒷문을 넘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혜성은 정말 지루했다. 공부도 지겹도록 했고...숙제도 다 해놨고. 이렇게도 할일 없는 일요일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까의 일 때문에 책을 읽으려고 해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고 자려고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울적한 나머지 민우의 기숙사에 가서 놀다오긴 했지만 이미 암울해진 기분은 절대로 좋아지지 않았다. 아까 너무하게 굴어서 아영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기숙사에 돌아와 보니 아영은 없었다. 아까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늦게 들어오나보다.
사실 아까 너무하기는 했다. 누구와 만나기로 했냐고 꼬치꼬치 캐묻기를 하지 않았나, 저녁식사 한끼를 거절했다고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않았나. 정말 큰 맘 먹고 그녀에게 사과를 하려고 했는데. 사과를 해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는 혼란스러운 듯 애꿎은 머리를 마구 털어댔다. 그의 검은 머리가 거친 손길에 조금은 헝클어 졌다. 워낙 완벽한 그여서 머리가 헝클어지거나 옷차림, 또는 가방같은게 흐트러 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그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는 한참을 멍하니 소파에 앉아있다가 TV를 켰다. 한창 공부해야 할 고3이, 게다가 학생회장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는 있을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을 미화시키고 있었다. 교과서는 이제 하도 봐서 몇페이지 몇줄에 무슨 내용이 있는 지 줄줄 외우고 있었고, 게다가 이제는 하도 봐서 글자를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했다.
그는 여러가지 채널을 돌리다가 오늘 오픈하는 로얄 승선 파티홀더를 취재한 방송에 시선을 고정했다. 승선 파티홀더는 상류층들이 배위에서 와인을 마시고 파티를 여는 것이었는데 한번 하는데 거의 2억이 들 정도로 고가의 파티었다. 혜성은 자기의 부모님이 저런것을 한다고 하면 결사반대를 할 것이다. 비록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행성그룹의 회장내외였지만, 저건...정말로 쓸데없는 낭비였다. 한번 파티를 여는데 2억씩이나 든다니.
혜성은 한심한 듯 마음속으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그리고는 그가 채널을 돌리려고 했는데, 그는 갑자기 리모콘을 든 손을 허공에 든 채 멈추고 말았다. 텔레비전 안에 그의 친구 정혁이 보였기 때문. 그는 멋지게 턱시도를 빼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그 어느때 보다도 더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혁은 어떤 여자와 안고 춤을 추고 있었다. 혜성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분명 그 여자는 어디서 많이 본 여자였다. 남색톤의 드레스와 위로 멋스럽게 올린 머리, 예쁘게 한 화장에, 여러가지 장신구로 치장한…
가만 있어보자…
설마.....
그랬다.....
유아영이었다....
신혜성이 좋아하는 후배 유아영이 신혜성이 좋아하는 친구 문정혁과 서로 껴안은 채 브루스를 추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유아영과 자신의 둘도없는 친구 문정혁이…그랬다......그 두사람은 연인이었다.....언뜻 봐도 두 사람은 연인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순간, 너무도 화가났다. 문정혁이랑 만나 이런 승선파티에 참가하려고 혜성과의 저녁식사를 거부헀다. 혜성이 그토록 어렵게 제안한 저녁식사를, 연인 문정혁과 만나려고 거절했던 것이다. 평소에는 화를 잘 이길 정도로 이성적인 혜성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리모콘을 벽을 향해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리모콘이 깨지는 소리가 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리모콘은 산산조각이 났고.
텔레비전 안에서 다정하게 춤을 추고 있는 그 한쌍의 커플을 노려보고 있는 혜성의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그의 새하얀 얼굴은 분노에 더욱 하얗게 질렸고, 그의 얇고 선이 뚜렷한 붉은 입술은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눈은 성난 고양이의 그것처럼 잔뜩 부릅뜨여져 있었고.
하지만 그 증오의 눈빛도 오래 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어깨는 힘없이 축 처졌고, 증오와 분노로 불타던 그의 눈빛은 초점을 잃은 채 동공이 커졌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깨진 리모콘을 바라보다, 이내 끙 - 소리를 내며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14
"훗...이제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영을 껴안고 천천히 블루스를 추던 정혁이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혁을 쳐다보았고, 정혁은 사람들이 안보는 사이에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로 들어온 정혁은 턱시도를 벗고 준비해온 잠수복으로 갈아입었다. 고글과 산소호흡기로 얼굴을 가리니 그 누구도 그가 정혁일거라곤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준비를 맟니 정혁은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인적인 드문 배 뒷편으로 재빨리 뛰어갔다.
아직 5월이라 그런지 밤바다 바람은 꽤나 매서웠다. 두려울 법도 했지만 정혁은 대담하게 다이빙을 했다. 되도록이면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으며. 정혁이 바다에 떨어지면서 무언가가 출렁이는 소리는 들렸지만 사람들이 워낙 파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들었을 리는 만무했다.
깊이 900 미터 서해바다 한가운데의 바닷물은 정말 살을 에는듯이 차가웠다. 몸이 얼어버려 동상이 걸리기 전에 일을 빨리 끝내고 올라가야지 하는 생각에 정혁은 물거품이 미친듯이 이는 프로펠러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조금은 두려웠지만 애써 침착을 하며.
놀랄만한 수영실력으로 물살을 힘겹게 뚫으며 그는 준비해온 폭탄을 배 밑에 붙여두었다. 폭탄을 조작해 정확히 3분으로 맞춰놓고 그는 재빨리 물 위로 올라왔다. 아영의 부축을 받으며 철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정혁은 추위에 떨며 불평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왜 하필이면 밑이냐고...씨발...이제 2분 남았어...얼른 착수해..."
정혁은 투덜투덜대며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갔다. 단 일초라도 더 젖어버린 잠수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정말 너무 추워서 돌아버리는 것 같았다. 매서운 바람이 살을 토막내어버리는 것 같았다.
정혁이 할일을 다 마치고 다시 화장실에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자, 이젠 아영의 차례였다. 그녀가 맡은 일은 제일 중요한 목표물 김정인의 암살이었다. 아영은 초조한 눈빛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파티장에 들고온 헤르메스 캘리백에서 조그만 루거를 꺼냈다.
정확히 2분 후, 쿵 소리가 나며 배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에 사람들은 이리저리 치우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빠른 속도로 기우는 배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았다.
"빨리 구명보트를 내려!!"
선장의 호령에 따라 경호원들과 선원들은 급히 구명보트를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 아비규환이었다. 사람들은 정말 살려는 끈기가 강했던지라 너도나도 먼저 구명보트에 타려고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 침착을 하지 못해 밟혀죽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람들에게 밀려 바닷속으로 떨어져버리는 사람들도 적지않게 있었다. 그 난리속에서 유독 침착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영이었다.
목표물이 경호원들에게 둘러쌓여 구명보트로 올라타기 전에 죽여야만 했다. 김정인은 어디간 것일까. 와글바글하게 몰려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김정인을 찾는 아영의 눈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처럼 살벌한 빛을 내었다.
한참 김정인을 찾던 아영의 시야에 그가 드디어 들어왔다. 김정인은 경호원 대여섯명에게 둘러쌓여 구명보트에 올라타려고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가 구명보트를 타 수평선 저 멀리 사라지기 전에 빨리 행동해야 했다. 기회를 놓쳐 4만달러를 잃어버리고 정혁과 의뢰인의 신뢰를 모두 잃어버린다면 다시는 이 세계에 발을 들여좋기 어려울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아영은 재빨리 테이블에 놓여있던 쟁반을 집어들었다. 몇잔의 와인잔과 와인 두병이 올려져 있어 꽤나 무거웠지만 그런건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얼른 난간쪽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왼손에 들고 있던 루거를 오른손으로 들고 있던 쟁반 밑으로 옮겼다.
보지도 않고 총을 쏜다는 일은 정말 마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나 50% 정도의 찬스를 가질 수 있을랑말랑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적중률 50%...기회는 단 한번. 아영은 모든 걸 운명에 맡길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섬세한 손이 쟁반 밑에서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침착하기만 했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녀의 불안해 보이는 눈 바로 위에 위치한 길다란 속눈썹이 조금씩 떨렸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겼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명중률이 50 퍼센트가 아닌 10퍼센트로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김과 동시에 아영은 재빨리 공기총을 난간 넘어 검푸른 바다로 던져버렸다. 그리곤 재빨리 사람들의 관심을 사려고 픽 - 하고 쓰러졌다. 솔직히 쓰러지는 데 일부러 힘을 쓸 필요는 없었다. 방아쇠를 당긴 후, 저절로 다리에서 힘이 빠져 주저앉았으니까. 혹시라도 못 맞추었을때의 불안함 때문에.
곧 사람들이 몰려왔고 김정인 역시 자신이 총에 맞은 사실조차 모른 채 그저
사람이 쓰러졌다 하니까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시 턱시도를 입은 멋진 신사가 된 정혁 역시 화장실에서 급히 나와 아영을 부축 해 주는 척 했다.
"괜찮어 경아야?"
정혁이 아영의 가녀린 어깨를 마구 흔들기 시작하며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정혁의 팔을 힘겹게 잡은 아영이 일어남과 동시에 무슨일인지 보러 달려온 김정인이 입에서 검붉은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곧 나무갑판에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 그의 입과 심장에서 나온 피가 고이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극에 달했다.
배가 완전히 침몰하고 사람들이 구조선에 올라타고 난 후에야 수사는 진행되었다. 이세상에서 제일 말도 안되고 무능한 수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바보같았다. 유일한 증거물이 될 수 있는 무기도 찾지 못했고, 무기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용의자도 찾아내지 못했다.
범행에 사용된 총알은 흔하디 흔한 리볼버용 총알이었고, 게다가 누군가가 권총을 쏜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면 멀리서 쐈을텐데. 그렇게 멀리서 쏘고서도 명중을 했다면, 정말 신이 쏜 것과 같은 솜씨와 같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배 안에서는 무기 휴대자도 찾을 수 없었고 배가 갑자기 침몰했기에 사건은 더욱더 복잡해져 결국은 포기하고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최고였어, 솔직히 그걸 니가 명중시킬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말야, 이젠 내자리까지 넘보겠는걸?"
"무슨, 대단했어, 보스야말로 완전 프로 같던걸?"
"푸훗, 나 원래 프로야. 그래, 있다 보자...너랑 일하는 건 언제나 즐겁단 말야..."
일을 마친 두 사람이 기숙사로 돌아왔을때는 거의 아침 6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아영은 선도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허둥지둥 교복으로 갈아입고 배정받은 건물로 뛰어갔다.
저 멀리서 혜성이 보였다. 여느 때처럼 학생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살펴보며 규율에 어긋나는 학생이 있으면 차가운 목소리로 꿇어앉아, 라고 말하며 벌점을 메기는 그였다.
어느 관점에서 보나 혜성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그 아무리 객관적인 관점이라고 해도. 미남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외모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는 오목조목 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고, 날카로운 눈과 오똑 선 콧날, 그리고 얇은 입술은 씨디로 가려질 정도의 크기의 하얀 얼굴에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의 목과 팔, 다리, 그리고 손 역시 그의 얼굴만큼이나 햐얀걸로 봐서는, 그는 완벽한 귀공자 타입이었다.
오늘은 빳빳하게 다려진 그의 하얀 셔츠 위로 길게 나온 그의 턱선과 목선이 너무나도 아름다워보였다. 단정하게 서 있는 그의 자세에서도 감히 범할 수 없는 위엄이 풍겨나왔고.
혜성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 그리고 친한 후배들. 그러니까 평소에 그와 잘 어울리는 동완, 민우, 정혁, 선호, 그리고 진은 전교생의 우상이었다. 그들이 복도에 한번 떴다 하면 모든 학생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넋을 놓은 채로 그들을 쳐다보는 것은 예사였고, 그들이 앉았던 의자는 여학생들만의 신성한 자리였고, 그들의 타액이 묻은 수저나 젓가락들은 여학생들의 보물이었다.
하지만 특히 혜성은 학생회장이란 엄청난 자리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연예인보다 더 인기가 많은 스타로 떠올랐다. 사실 3학년때부터만 그런 것이 아니다. 혜성은 어렸을때부터 여학생들의 선망을 달고 다녔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를 매우 잘했기 때문에 늘 유명했다. 모두들 한참 이성에 눈을 뜰 나이인 고등학교에 와서는 그것이 더 심해져 그는 귀찮을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지만.
하지만 모든 유명인사들이 그렇듯, 혜성은 감히 다가가지 못할 만큼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지만,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도 싫어했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의 일에 참견을 하거나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경우, 그리고 그를 귀찮게 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는 낯을 매우 가리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어떻게라도 그의 관심을 끌어보려던 극성스러운 일부 여학생들은 그가 아침 선도에 나오기 시작하자 일부러 이름표를 달지 않고 나오거나 교복을 불량스럽게 입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혜성은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저 그들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꿇어앉으란 말만 차갑게 할 뿐이었다.
아영은 어제의 일도 있고 해서 되도록이면 혜성과 자연스레 지내려고 평상시와 별 다를 바 없이 허리를 굽혀 그에게 인사를 했다. 최대한 예의바르게.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하지만 혜성은 아영을 무시하는 듯 그냥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어제 일에 화가 나 있는가보다. 아영은 저 쫌생이가 아직도 삐졌나 하고 어이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뿐이었다. 솔직히 아영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혜성은 분명 별거 아닌 일로 저리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자 아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교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뒷통수를 내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아영은 그날 내내 두고두고 차마 혜성을 때리지 못했던 자신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저녁식사때도 아무말 않고 그저 조용히 반찬을 헤집어 놓던 혜성이었다. 그는 어째 점점 더 말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민우는 그래도 그를 위하는 마음이라고 억지로 혜성의 입에 밥을 떠서 먹여주려고 했지만 혜성은 먹기 싫다며 완강하게 그를 거부했다. 민우를 포함한 그의 친구들은 정말 걱정이 태산같았다. 혜성이 밥을 한번 먹지 않기 시작하면, 그는 분명 영양실조로 쓰러질때까지 밥 한 숫가락도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중학교때도 그랬다. 공부를 한답시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제때 제때 밥을 먹지 않더니만, 나중에는 자신이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정신력으로 체력의 한계를 넘더니만, 시험이 끝나자마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곤 했다. 그 버릇을 고친 줄 알았는데. 다시 도졌나보다.
얼마 남지 않은 SAT때문에 민우는 마음잡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마에 빨간 글씨로 ‘파이팅이민우’ 라고 써놓은 하얀 머리띠까지 두르고 있었는데, 초인종소리가 났다. 백발백중 자신을 찾아온 사람일 것이다. 왜냐면 그와 같이 방을 쓰는 룸메이트는 친구가 없는 불쌍한 왕따였으니까.
민우는 욕을 내뱉으며 현관문으로 터덕터덕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나 기분 안좋아’ 라고 쓰여있었다.
"아씨발, 누구...."
문을 벌컥 열어버린 민우는 시험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밤 늦게 자신의 기숙사에 찾아온 사람에게 욕을 퍼부어 주려고 입을 열었는데, 그의 앞에 힘 없이 서있는 사람은 어깨가 축 쳐진 채로, 복도 벽을 마디가 툭툭 나온 손가락으로 힘겹게 짚고 서 있는 혜성이었다.
"이게 누구야? 신혜성 아냐, 들어와,"
혜성은 분명 어젯밤에도 그의 기숙사에 방문을 했었다. 시험기간이라고 공부 좀 하라고 민우에게 빽 소리를 지른 장본인이, 공부를 해야할 시간에 민우의 기숙사에 놀러온 것이다. 전날에도 민우는 공부를 하려고 했다가 혜성이 찾아오자 얼씨구나 하고 그와 노닥거렸지만, 오늘은 하도 불안해서 공부를 좀 하려던 통이었는데.
그리고 3학년이 되서 방을 더 이상 같이 쓰지 않게 되자 왠만하면 민우의 기숙사에 놀러오지 않았던 혜성이었는데. 기숙사에 놀러오라고 하면 혜성은 늘 바쁘다고 투정을 부렸다. 아니면 공부 해야하는데 네 기숙사에 가서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어, 이놈아 – 라고 민우의 머리를 콩 때리며 얄밉게 말하던 혜성이었는데.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여기서 좀 당분간 있어도 되냐?"
힘겹게 서있던 혜성의 손에는 검은색 천으로 만든 짐가방이 하나 들려있었다.
"엥? 뭐야 신혜성, 너 무슨 일 있냐?"
민우가 놀라 목소리를 높이며 혜성에게 물었으나 혜성은 그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지나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의 깔끔떠는 그답지 않게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 현관에 나뒹굴게 만들어놓고.
“야, 너 뭐야! 여기 갑자기 왜 짐을 싸들고 와! 네 기숙사에 불이라도 났냐?”
민우가 자신의 운동화 위에 보기싫게 놓여있는 - 혜성이 구겨신은 캔버스화를 정돈해놓으며 농담조로 물었다. 하지만 혜성은 기분이 안좋은 듯 쌀쌀맞은 투로 민우에게 대충 말을 하고는 짐가방을 소파에 턱 – 소리가 나게 내버려두었다.
"몰라...피곤해...나 그냥 잘께...소파에서 자도 되지?"
"이민우...저기...누구 왔어?"
민우와 같은 방을 쓰는 3학년 학생이 혹시나 민우를 방해할까 조심스런 목소리를 내며 방문을 연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개성사관고 기숙사 내부의 배치는 모두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민우는 자신의 기숙사 룸메이트와 각방을 쓰고 있었다.
민우와 같이 기숙사를 쓰는 3학년 학생은, 무심코 방문을 열었는데 소파에 앉아있는 혜성을 보자 바로 얼어버리고는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이민우랑 같은방을 쓰는것도 굉장히 큰 행운인데 신혜성이 찾아오다니! 뜻하지 않게 학교의 유명인사들을 여러명 볼 수 있어 잠시나마 좋았다. 그는. 그러나 혜성이 그를 매서운 눈길로 쳐다보자 그는 얼른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참...저새끼 때문에..."
민우가 짜증나는 듯 불평을 했다.
하지만 혜성은 그의 말을 들은채도 하지 않은 채 혜성은 거실에 놓여있던 고급스러운 아이보리색 소파에 아무렇게나 앉아 벌러덩 누워버렸다. 워낙 편두통이 있던 그는 다시 두통이 몰려오는지 관자놀이를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는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는 반듯하고 꽉 매어져있던 넥타이가 성가셨는지 거칠게 이를 풀어헤쳤다. 잠자코 그를 보고있던 민우가 혜성의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물었다.
"야...신혜성...얼굴이 정말 안좋아 보여...너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나한테만 살짝 흘리면 안되냐?"
"몰라...이민우...나 지금 피곤해...그냥 내버려 둬...."
"알았어..."
민우가 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을 닫으려다가 한번 더 슬쩍 혜성을 떠봤다.
"신혜성...살짝만.... - "
하지만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미 신경이 날카로워질대로 날카로워진 혜성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민우의 얼굴에다가 정통으로 쿠션을 한방 던져버렸기 때문에.
얼굴에 맞은 쿠션을 바닥에 팽개쳐버린 민우는 궁시렁궁시렁 대며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에 들려왔던 혜성의 고함소리 때문에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야 이새끼야, 어디서 또 궁시렁궁시렁 대? 그냥 닥치고 네 방에나 들어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혜성이 큰 소리를 민우에게 소리를 질렀다. 사실 혜성은 그다지 화가난 것 같지는 않고 다소 귀여운 쪽으로, 마치 투정을 부리듯 어리광을 피우고 잇는 것이었다. 눈꼬리를 잔뜩 올리며 화를 내는 혜성도 너무 귀여웠다. 지금 이리 투정을 부리고 있는 혜성은 마치 귀여운 새끼여우 같았다.
"미친놈아, 여기가 네 기숙사냐? 네 방은 어디다가 팽겨치고! 너 그리고 오늘 순찰은 어떡하고 여기 왔냐? 유아영이랑 무슨 일 있는거지 그지?"
혜성이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파한 민우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듯 다시 한번 혜성에게 물었다.
"몰라! 귀찮아!! 다 귀찮아!! 요새 정말 돌아버릴 것 같다고!! 이민우! 너 지금 꼴보기 싫으니까 당장 들어가! 나도 정말 지쳤어!"
혜성은 다른 곳에서 상처를 입고 와서 애꿎은 민우에게만 잔뜩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민우는 지금 당장이라도 혜성에게 달려가 헤드락을 걸고 싶었지만 아직 공부를 다 끝마치지도 않았고, 또 지금 혜성에게 덤비면 태권도 공인 4단인, 뿐만 아니라 현재 무슨일때문인진 모르겠지만...(사실 민우는 이미 아영때문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지만.) 잔뜩 독이 올라있는 혜성에게 덤볐다간 미래가 불투명해질 것 같아 그냥 포기하고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책상에 억지로 앉은 그가 신경질 적으로 갈색 머리를 헝클어 놓으며 책을 읽어나가려 하지만 혜성이 걱정되는 듯 자꾸 거실쪽을 겻눈질했다. 이미 방문은 닫혀있었지만. 요새 혜성이 정말 이상해진 것 같았다. 가끔 이유없이 실실 웃는가 하면 어쩔때는 이렇게 예민해지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고. 하지만 어쩐지 오늘은 신경질의 상태로 봐서는 그의 기분이 어제보다 더 안좋아진 것 같았다.
민우는 꼭 자신이 혜성의 밥이 된 것 같았다. 밖에서 상처입고 돌아와서 오랜 친구인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다니. 내가 봉이냐고, 신혜성. 어쨌든 애꿎은 이민우만 혜성과 아영의 기싸움에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15
그 다음날은 화요일이었다. 그 날은 바로 학교가 끝나고 곧장 검도부로 달려가야하는 날. 아영은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일요일 이후 혜성이 자신을 싸그리 무시했고 게다가 어젯밤에는 어딜 갔는지 기숙사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게다가 혜성이 순찰도 나오지 않는 바람에 아영은 6시간동안 잠도 못자고 기숙사를 쭉 돌면서 계속 자신의 방을 주시했지만 혜성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길고 긴 물리수업이 끝나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영은 기계적으로 밥만 퍼먹으며 계속 혜성이 앉아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에 앉은 그의 친구들은 모두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지만 유독 혜성만큼은 먼산을 바라보고 있는것이 보였다.
순간 혜성에게 다가가 무슨일이 있었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차마 그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1시에 있었던 학생회 모임에서도 혜성은 6,7월중으로 CCTV 설치를 할 계획이니 모두들에게 조금만 더 수고하라며 제일 먼저 나가버렸다.
정말 이상했다. 설마 일요일 일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건 아닐테고. 만약 그렇다면 저렇게까지 화가 날 필요는 없었을텐데. 계속 혜성엥 대해 생각을 하다 보니 수업시간에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차라리 조는 편이 오히려 더 수업내용이 들어왔을것이다.
아영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며 혜성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아영은 4시가 되자 급히 도복으로 갈아입고 검도부실로 향했다. 원래 4시 반부터 시작했지만 아영은 늘 4시까지 가서 연습을 하곤 했다. 준비운동이고 어쩌고 하는 이유도 있엇지만, 무엇보다도 일찍 검도부실에 가는 이유는 혜성이 늘 4시가 되면 검도부실에 먼저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대체 무엇때문에 화가 난건지.
7층에 위치한 검도부실의 육중한 문을 열고들어가자 기대와는 달리 방은 텅 비어있었다. 아영은 한숨을 쉬며 불을 켜고 들어가 선반에서 자신의 목도를 꺼내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연습에 열중했던가. 곧 아영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고 그녀는 조금씩 가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연습은 갑자기 열린 문에 중단되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혜성이었다.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흑단처럼 검은 머리,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 옆에 살짝 섀도우가 비칠정도로 오똑한 콧날, 카리스마 넘치고 뚜렷한 쌍커풀이 잡힌 두 눈, 그리고 매혹적인 붉은 입술. 그리고...검은 도복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그의 아찔한 쇄골까지.
아영은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들을 뇌에서 바삐 지우기 시작했다. 자꾸 왜 그런것들이 보이는 건지. 왜 자꾸 그런 혜성의 모습들이 눈에서 아른거리는 것인지.
"안녕하세요 선배님..."
아영은 얼른 목도를 내려놓고 인사를 했지만 혜성은 그녀의 성의있는 인사를 받지도 않고 싸그리 무시하며 가방을 내려놓으러 저쪽으로 걸어갔다.
"선배님 - "
아영이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문이 열리며 단원들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그렇게 들어오다 마지막 단원이 들어온 시각은 4시 35분이었다.
"왜이리 늦었어? 시간 지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아주 제대로 늦었네..."
혜성이 못마땅한 듯 단원들을 싸늘한 훑으며 핀잔을 줬다. 오늘따라 더욱 매서운 눈빛에, 그의 눈밖에 나기 싫었던 단원들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 라고 되풀이 할 뿐이었다. 혜성은 요 며칠 사이에 더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사람들을 한없이 더 움츠러 들게 만들 정도로.
"연습 시작해...여름방학 때 설악산으로 수련회 간다... 거기서 10명 뽑을거야...대회 출전자로...거기에 맞춰서 스케쥴 조정하도록 해...포기하려면 지금이라도 하던지..."
혜성의 말에 30명쯤 되는 단원들이 재빨리 죽도를 들고 파트너들과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아영의 파트너는 혜성이었는지라 우물쭈물 혜성에게 연습 안하실거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혜성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그의 모습은 조금은 편안해 보였지만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의 카리스마는 100% 눈에서 나오는 카리스마가 아닌 전체적인 인상에서 풍겨오는 것인 것 같았다.
아영은 그냥 우물쭈물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런데 갑자기 혜성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짜증스런 기색을 내비치며.
"몇번은 말해야 알아듣냐고! 몰아부칠때든 방어를 하든, 절대로 허리 숙이지 말라고! 자세를 굽히면 어떡해? 제대로 안해?"
혜성이 짜증스럽게 말하자 모두들 경직된 듯 그자리에 서 있었다. 단원들이 일제히 멈춰서자 그가 다가가 단원 한명을 손짓으로 지명했다.
"지세원....너 나와..."
지세원이라고 불린 남학생을 비롯한 모든 단원들은 '이젠 죽었구나'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원은 동료들의 동정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우물쭈물 혜성에게 다가갔다.
"여기로 와...나랑 대결이다..."
혜성이 마룻바닥 한가운데에 그려진 큰 원을 가르키며 명령조로 말했다. 그제서야 매를 맞을것이라 생각했던 세원은 약간 다행스럽다는 듯 잔뜩 경직되어있던 얼굴을 조금이나마 풀었지만 혜성과 대결을 한다는 것이 막막했는지 곧 다시끔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런 그와는 반대로 혜성은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거만해 보일 수 있는 표정이었지만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런 표정이었다.
혜성의 선재공격이 시작되면서부터 승패는 이미 갈라진 듯 했다. 세원이 밀려도 정말 한참 밀리는 것 같았다. 혜성은 쉴새 없이 몰아부쳤고 세원은 벅찬 듯 겨우 방어를 하는 식으로. 혜성이 기합소리와 함께 마지막 한방을 날리자 세원의 손목이 비틀어지더니 검을 놓치고 말았다.
손목이 꺾인 세원이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자 단원들은 우와 - 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혜성을 동경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몇분이었어?"
혜성이 묻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45초 입니다 - 라고 대답했다.
"지세원...검은 생명이야. 검을 떨어뜨린것만으로 해도 넌 이미 검도를 할 자격을 잃어버린 것이야. 그리고 허리 펴라고 몇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안펴? 2학년이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도 아니고...게다가 너 검도 4단이잖어, 그것밖에 못해? 연습 좀 해..."
혜성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훑으며 말했다. 그러자 세원은 아주 제대로 움츠러든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들어가자 혜성의 시선이 아영으로 향했다..
"유아영 나와."
그의 억양과 말투가 다른때와 변함없이 차가웠지만 어느정도 평상시로 돌아온 것 같아 아영은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아영은 최대한 당당히, 하지만 거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정도의 느낌으로 원을 향해 걸어갔다.
아영이 원 안으로 들어가자 혜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서운 기세로 아영에게 달려들기 시작한다.
곧 목도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아영과 혜성의 빠른 몸놀림이 화려한 볼거리가 되었다. 그들의 목도가 바람을 가르며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단원들의 귀에 울려퍼진다.
저번에도 한번 봐서 그다지 새로운 것은 없었지만 혜성과 아영의 대결은 정말 무서웠다.
섬세한 몸놀림의 아영과 딱딱 떨어지듯 분명하면서 스피드 있는 혜성의 몸놀림은 분명히 천지차이였지만 각자의 기술은 정말 마스터 피스라고 할 수 있을만큼 능숙했다.
단원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아영은 느끼고 있었다. 혜성이 전과는 다르게 꽤나 감정적으로 움 직인다는 것을. 그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영의 것과 부딪치는 그의 목도에 상당한 힘이 들어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이 지나자 아영은 지치기 시작했다. 무섭게 달려드는 혜성도 무서웠거니와 그런 그를 막아내느라 힘을 너무 많이 소비한 것 같았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있는 지
딱 죽기 전까지만 버티다 쓰러져 버리는 그녀였다. 더이상 숨을 쉴 힘도 남아있지 않던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면서 그녀가 입고 있던 새하얀 도복의 치맛자락이 바닥에 부스스 늘어졌다.
단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딱딱한 바닥에 부딪쳐 버린 머리가 아파왔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점점 어지러워지면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마지막으로...누군가가 15분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눈 앞이 칠흑같이 까매졌다.
깨어보니 아직도 검도부실인 것 같았다. 허리가 마구 쑤셔오는걸로 봐선 쓰러졌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소파에 누워있던걸 보니 누군가가 자신을 옮겨준것 같았다. 아영은 순간적으로 그것이 혜성이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다. 검도부실은 사람들이 다 나간 듯 쥐죽은 듯 조용헀지만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머리맡을 보니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기려는 혜성이 눈에 들어왔다.
아영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자 혜성은 아영의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지만 왠지 안타까워 보였다. 마치 다가가서 어루어 만져주고 싶은데, 미치도록 그러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워 하는 것처럼. 하지만 아영은 그런 그의 눈빛을 읽지 못했다.
"선배님...저 쓰러졌었어요?"
"그래..."
아영이 힘겹게 일어나며 혜성에게 물었다. 혜성은 다소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는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어하는 듯 했으나, 곧 입을 다시 다물고는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폐 끼쳐드려서. 근데 선배님 저한테 화나신 것 있으세요? 그때 일이라면 - "
"넌 아직도 내가 일요일 일가지고 화났을 것 같아? 난- "
혜성이 발끈한 듯 소리치다가 갑자기 말을 툭 끊었다. 그리곤 탁자위에 있던 가방을 집어들고는 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운동화가 마룻바닥을 밟으면서 차가워보이는 발자국소리가 났다. 아영은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 걸어가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어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럼...뭔데요?"
아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혜성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순간 혜성의 눈빛이 약간 흔들리는듯 했으나 그는 다시 마음을 굳힌 듯 아까의 냉정한, 포커페이스 신혜성으로 돌아왔다.
"말해봤자...됐어, 나가봐."
어떠한 대답을 기대했던 아영은 혜성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자 다소 불쾌한 얼굴을 하고는 일어나 가방을 챙기고 밖으로 나가버린다. 혜성에게 인사조차도 하지 않은 채.
아까 쓰러졌던게 창피했는데 게다가 혜성과의 앙금은 아직도 씻어내지 못했으니. 게다가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하지만 자신도 할만큼 했다고 느꼈다. 그렇게 사과하고, 물었고, 최대한 그에게 예의바르게 대했는데. 도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저리도 까탈스럽고 재수없게 구는 것인지. 하여튼 신혜성은 인간말종이었다.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이제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계속 저렇게 삐져있으라고 하지. 어디 내가 이제 신경을 한가닥이라도 기울이나 보자고.
아영이 문을 닫고 나가자 마자 혜성의 고개가 푹 수그러 지며 그가 들고 있던 가방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밝은 노란색 조명을 받앙 반질반질한 마룻바닥에 물방울이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혜성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흐느끼지 않으려고 입을 한손으로 막았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고, 그의 흐느끼는 소리가 입을 막은 손 사이로 제멋대로 새어나왔다.그렇게 한참을 서서 울먹이던 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네가 변명이라도 하러 온 줄 알았다...차라리 네가 변명을 했다면...아니, 내가 나가라고 했을때...나가지 않고 한번이라도 다시 물어봐 줬다면...널 용서해 주고 싶었는데...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는데....왜 그랬니...왜...그냥 나가버린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