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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은총으로 받아 은총으로 주는 사랑>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독서 신명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소유가 되고,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선언하시고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데
거룩한 백성이나 완전한 사람이나 다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그런 존재가 되라고 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아담과 하와가 교만 때문에 하늘의 하느님처럼 되려고 하다가
오히려 땅에서 나왔으니 땅으로 돌아가 땅이나 일구는 존재가 되었고,
완벽주의 때문에 자기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히는데 그러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담의 죄나 잘못을 되풀이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지요.
하느님처럼 거룩하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된다 함은
교만 때문에 하느님과 경쟁하고 대결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하느님 갈망과 열망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을 하면 사랑하는 분을 닮고자 갈망하고
사랑하는 분이 원하는 것을 실천코자 열망하잖아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고자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사랑을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거룩함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고,
그러므로 우리의 거룩함도 다른 것이 아니라 이 거룩한 하느님만을 바라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제 우리는 사랑의 소극적인 측면에 대해서 봤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에게 악행을 하지 않는 것, 곧 살인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욕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봤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근근이 남을 해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더 완전하고 적극적인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데,
이는 땅에 떨어진 인간의 자존심을 회복하라는 도전이시고,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라는 촉구이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완전한 사랑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을 주님께서는 '햇빛 사랑'에 비유하십니다.
차별은 물론 구별도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비추는 것이 햇빛 사랑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빛을 안 주고 부자라고 많이 주거나,
반대로 가진 것 없으니까 많이 주고, 많으니까 적게 주지도 않습니다.
똑같이 주지만 집이 추운 가난한 사람은 햇빛이 귀하고 그래서 햇빛을 쬐고,
부유한 사람은 굳이 햇빛이 없어도 되니 빛을 쬐지 않는 게 다를 뿐이지요.
하느님 사랑도 그렇고 우리의 사랑도 하느님 사랑을 닮았다면 마찬가집니다.
빈부, 종족, 언어, 피부색을 구별이나 차별하지 않고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구별 없음과 차별 없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넘어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고
나에게 잘 해 주는 사람과 잘못하는 사람도 차별 없이 사랑합니다.
사랑이란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은총입니다.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사랑은 거저 주고, 무조건 주는 거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도 은총으로 받아 은총으로 주는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이 지금 천국에 있다면 나는 차라리 천국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얼마나 그 사람이 싫었으면 ‘천국’을 포기할 정도일까?”
<영혼의 정원>이라는 책의 저자인 스테니슬라우스 케네디 수녀의 글입니다.
이 수녀님의 말씀처럼 차라리 천국을 포기하겠다는 사람들이 실제로 종종 보게 됩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심지어 그 사람이 있는 곳이 천국이라면 그곳을 거부할 정도로 싫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자기 손해일 뿐입니다.
원수라고 생각되는 그 사람에게 큰 해가 돌아가기보다, 오히려 그 마음을 품고 있는 내 자신이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아름다움을 만들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미움은 가는 곳마다 건전한 생의 아름다움을 더럽히고 있지요.
그러면서 우리의 영에 큰 해를 입히고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원수를 미워하더라도 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우리 자신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것은 확실합니다.
나를 위해서도 이런 미움의 감정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왜 하필 내가 변해야 합니까? 그 사람 잘못인데!!”라는 감정이 생기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생각대로 바뀌는 것이 쉬울까요?
내 자신을 바꾸는 것이 쉽겠습니까?
결국 모든 열쇠는 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습니다.
폐렴 걸린 사람은 기침을 하기 마련이지만 기침이 폐렴의 원인이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폐렴 걸린 사람에게 기침을 하지 말라고 해서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병을 고치려면 이 사람의 폐에 침입한 박테리아를 죽여야 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미움, 적의, 원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원수로 생각하는 우리의 병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이 이해됩니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 있는 자라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 때에 비로소 지옥 같은 내 마음을 다시 밝은 빛으로 꺼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선택해서 기쁨의 삶을 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가능성이 80%가 넘어도 주저하지만, 어떤 사람은 가능성이 1%만 있어도 시도한다.”
어떤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약자의 삶을 사시겠습니까?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모든 성경 말씀은 내 안에서 성취되어야하는 예언>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희아(1985~ )는
두 손을 다 합쳐 손가락이 네 개이고, 무릎 아래로 다리가 없는 선천성 사지 기형의 1급 장애우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열 손가락이 다 있는 사람이 치기도 힘들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감미롭게 연주하며
국내외 장애·비장애인 모두에게 온몸으로 희망을 전하는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연필이라도 쥘 수 있게 하려는 부모의 바람으로 일곱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그녀 자신조차도 피아니스트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 잡지 인터뷰에서 그녀가 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하느님이 원하셨기 때문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이 어렸을 때부터 틈나는 대로 성경 비디오를 보여주며 함께 복음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한 피아노를 치기 힘들어도 바로 그 피아노 연주를 자기의 길, 자신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고통을 이겨내길 바랐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는 어딜 가나 항상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걸 믿었고,
굳은 신앙과 피나는 노력으로 믿는 바를 현실로 바꾸어놓은 것입니다.
[참조: 무지개 원리 2. 팔자는 없다]
성모님은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이래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통해 우리 안에서 성취되어 말씀이 진리임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러저러한 내용이 쓰여 있으니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말씀이 나를 통해 실현되어야만 그 말씀이 진리임을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내 안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받아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통해 성취되도록 예언된 모든 내용이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그 말씀을 실현시키려고 사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예언된 내용은 당신은 많은 수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죽는다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죽음을 거부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말씀이 거짓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언된 모든 말씀이 참 진리임을 당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증명해 내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이 참 진리임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서 하신 이런 모든 일들이
우리도 또한 따라서 하도록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발을 씻어주셨다면
우리 또한 이웃의 발을 씻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병아리가 어미닭의 따듯함으로 알에서 깨어나듯,
그리스도께서 당신 따듯한 성령의 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병아리가 이젠 계란을 낳고 또 자신의 온정으로 새로운 병아리가 태어나게 하듯이,
우리 또한 우리가 받은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전해주는 방식은 성경 말씀이 참 진리임을 우리 삶을 통해 증명해 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삶을 보고 성경을 믿고 교회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쓰인 아주 작은 계명 하나까지도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일 점 일획도 어김없이 우리 안에서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계명들조차도 지키지 않으면서 이웃에게는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우리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말씀을 실천할 때 그냥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실천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이웃이 성경 말씀이 진실임을 믿게 합시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이 약이다>
홍문택 신부님의 <사람을 상대할 게 아니랍니다>라는 글입니다.
“누가 당신을 모함합니까?
누가 당신을 두고 빈정거립니까?
누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닙니까?
누가 사사건건 당신을 반대합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얼마나 분하십니까?
얼마나 야속하십니까?
얼마나 그가 밉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미워하시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악(惡)의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가 상대가 아닌 만큼 그를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싸움 상대가 악의 세력인 만큼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길을 알려주셨기에
믿고 따르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 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 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맨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 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써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참된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십자가의 성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랑,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한 순간 이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에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 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2월 28일의 복음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3-48)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도달하는 일이고,
그것이 사랑의 궁극 목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가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하느님의 자녀로 완성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자녀로 완성되려면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자비가 바로 '완전한 사랑'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인간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마태 5,46), 또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마태 5,47) '불완전한 사랑'인데,
사실은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그런 일은 죄인들도 하는 일이고,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하는 일이기 때문에(마태 5,46-47),
사실상 사랑이 아닙니다.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려면
이웃도 사랑해야 하고 원수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예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 안에서는 이웃과 원수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녀이고, 형제이고, 이웃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이웃과 원수를 구분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사람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사랑의 불완전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44).
이 말씀은, "박해자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여라."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루카 23,34)
라고 기도하심으로써 박해자들을 위한 기도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인데,
박해자들도 '모든 사람' 속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박해자들도 구원받기를 바라신 기도입니다.
(그 박해자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숙제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입으로는 그렇게 기도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박해자들이 천벌을 받고 지옥으로 떨어지기를 바란다면?
당연히 거짓 사랑이고 거짓 기도입니다.
그래서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과 복수심을 없애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어떤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억울한 심정, 원한, 증오심, 복수심, 분노 등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경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원수를 사랑하는 행동 자체는 쉬울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평화를 되찾는 일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특별한 비결 같은 것이 있는가?
무슨 비결 같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원수를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일 자체가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 비결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노력을 해서 먼저 마음의 평화를 회복한 다음에 원수를 사랑하게 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이고,
이것은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행복'을 얻기 위한 노력도 됩니다.
사랑과 평화와 행복이 완성되는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만일에 원한과 분노와 증오심과 복수심 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완전한 사랑도, 완전한 평화도, 완전한 행복도 이루어지지 않고, 그런 곳이 하늘나라일 수는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원한과 미움이 하나도 없는 곳,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진 곳,
그래서 증오심이나 복수심 같은 것이 하나도 없는 곳입니다.
순교자 스테파노와 박해자 바오로가 형제가 되어서 함께 사는 곳입니다.
스테파노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어떤 감정이 남아 있을까?
순교하기 전에 이미 박해자들을 용서했으니(사도 7,60)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하늘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는 나중에 스테파노를 만났을 때 많이 미안해했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아직은 불완전한 존재들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금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너무 자책하거나 열등감에 빠지면 안 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완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우리도 완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내 좁은 사랑의 그릇 너머로>
불완전성과 한계와 불안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완전하다는 것이 과연 완벽함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 제1독서에서는 야곱의 열두 부족들과 새롭게 계약을 갱신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신명기의 핵심 주제가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통해 이스라엘이 당신의 백성이 된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을 떠나 당신과 일치할 것을 권유하시면서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당신께 충실한 신자들을 끝까지 보살펴주신다.
완전함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느님과 일치할 때 완전하신 그분이 우리를 충만케 해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에서 그 주도권은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하느님과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거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자화자찬하는 바리사이들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성실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다.
그분은 인간을 배제하거나 우리 처지를 굽어 살피지 않으신 채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더 비참한 상황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과 어둠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받아들여 묻히심으로써,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가야 할 완전함의 길을 보여주셨다.
오늘 복음에는 가슴과 영혼에 하느님 나라를 새기는 경험을 상징하는 내용이 나온다.
신명기에서는 그 상징이 조상이나 계명, 법령 등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히 복종하는 것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사랑과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마음과 영혼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행동을 요구한다.
이제 그리스도교적인 사랑은 그 본질과 궁극적인 차원을 드러내고 있다.
곧, 스스로 재판관이 되기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것, 자신을 박해하고 중상하는 사람, 증오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도리라는 말이다(5,44).
사랑하는 사람이나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을 못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5,46-47)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은 미움 때문에 갈라진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화해하고, 사랑으로 동화되어야 한다.
그 동기는 단 한 가지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조건 없이, 오직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용서하고 하나 됨은 자선이 아니라 책무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 속으로 침잠하며 배타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대립, 증오, 미움, 대화 단절 등은 성서가 가르치는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들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열라고 가르치신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판단할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것,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만 찾고 만나는 마음의 좁은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여전히 좋고 싫음,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가르는 옹졸한 판단의 잣대를 내려놓자!
시시비비 가리기 좋아하는 것, 호불호가 분명한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악덕일 수 있음을 명심하자.
나의 사랑의 그릇은 얼마나 넓고 깊은가?
내 안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 일, 마음의 상처는 무엇인가?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버팀목이라 여겨왔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무기들을 내려놓는 ‘영적 무장해제’를 하고 마음껏 하느님 사랑의 바다에 빠져보자!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바라보라, 사랑의 하느님을! - 사랑의 여정>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삶의 여정은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하느님을 찾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은 내적 광야의 특징입니다.
살아갈수록 누구나 직면하는 내적 진리입니다.
이는 바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찾으라는 표지입니다.
하느님을 찾을 때 광야는 낙원이되어 희망과 기쁨도 샘솟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 친히 마련해 주신, 2014.3.25.일부터 시작한 안식년의 순례여정이 2015.2.28.일로 끝나고,
오늘 형제들이 열렬히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의 집'인 요셉수도원에 귀가(歸家)합니다.
그동안의 여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의 여정'입니다.
20여일 동안의 단식순례여정, 1달 동안의 수녀원 피정지도 순례여정, 3달 동안의 국내성지 순례여정,
50여일 동안의 산티야고 순례여정, 3달 동안의 미국 뉴튼수도원 순례여정,
모두 눈부시고 풍요로웠던 하느님을 찾는 순례여정이었습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할 제 나는 몹시 기뻣노라."
주님의 집 산티아고 대성당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졌던 발걸음도 잊지 못합니다.
기적 같은 놀라운 사실은 순례여정 중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를 드렸고 강론을 인터넷을 통해 형제자매들과 나눴다는 사실입니다.
기쁨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강론과 더불어 참 많이 카톡사진을 통해 하느님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나눴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요셉수도원 도반들인 수도형제들에게, 또 장충동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에게,
알게 모르게 온갖 사랑과 기도로 도와준 형제자매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저는 모두를 기억하며 하느님께 매일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김명혁 명준 다미아노 형제입니다.
10여년 이상, 제 강론을 '사랑의 향기마을'에 이어 '가톨릭 굿뉴스'에 올리고 있으니 형제님의 항구한 하느님 사랑에 감동할 뿐입니다.
순례여정을 끝내고 다음 순례여정에 오를 때는 흡사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난 아브라함 같은 막막한 심정이었습니다.
안식년 중의 모든 순례여정이 그러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인 요셉수도원에 귀가해도 또 새롭게 시작될 내적 순례여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완전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사랑의 길'뿐입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내 사랑 부족, 믿음 부족뿐입니다.
사랑을 통해 완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육신은 노쇠해가도 사랑의 내적 성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게 인생의 의미입니다.
신비가, 관상가, 성인은 유별난 사람이 아니라 한결같이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 성장, 내적 성장도 결국은 사랑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보이는 않는 내적 광야에서 하느님을 뵈올 때
'텅 빈 허무'는 '텅 빈 충만'의 순수한 마음이 되고 여기서 샘솟는 사랑, 희망, 기쁨, 평화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닮아 완전한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주시는 한량없는 사랑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미약하고 초라한지요.
이를 깨달을수록 하느님을 더욱 열렬히 사랑하게 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마태 22,37-40)
하느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할 때 저절로 따라오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이며 이웃사랑입니다.
만고불변의 영원한 진리가 위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주님은 1독서 신명기의 모세를 통해 '오늘' 우리 모두 위 말씀에 충실할 것을 간곡히 촉구하십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무려 '오늘'이란 말이 3회나 거푸 나옵니다.
하느님께는 어제도 내일도 없고 오직 '영원한 오늘'만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의 사랑의 이중계명을 온 마음을 다해 실행하도록 합시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더욱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시편 119,1 참조)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사랑은 하느님의 유전자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가장 닮는 순간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의 능력이 있다.
인간의 사랑이란 혈육 간이 가장 가깝고 원수 간이 가장 멀지만 하느님의 사랑에는 거리도 경계도 장벽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땅과 하늘, 빛과 공기와 물을 주셨다.
그래서 하늘의 별, 땅의 꽃, 사람의 사랑…
이 모두가 아름답지 않던가.
그런데 사람들은 왜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렸을까?
‘자연, 나, 너, 그리고 하느님’으로 엮어진 큰 세계가 하나의 존재임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유전자를 가진 존재는 모두 하나의 몸이고 ‘공동체’(한가지 共, 한가지 同, 몸 體)이다.
사람은 공동체의 틈새에서 생겨났고 살아간다.
평생 쌀 한 주먹도 생산해 본적이 없지만 굶지 않고 살아온 것이 그 증거다.
이를 ‘공동체 세계관’ 또는 ‘공동체 영성’이라 한다.
공동체 세계에는 완전하신 분과 그분의 사랑이 있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은 하느님의 사랑과 합일되는 것이며,
그를 위해 내 안의 작은 사랑을 확장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이다.
공동체의 사랑을 가로막는 것은 미움이고 시기다.
그것이 단절이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사랑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공동체로 살고자 하는 이유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께 합일되는 길이다.
‘주님,
저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 것처럼 저희에게도 사랑하는 기술을 가르쳐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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