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이반 일리히, 미토출판사 2002)’, 무엇이 진보인가
속도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어 그 한계 속에서 유지된다면 이는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발전되어 측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면 오히려 우리는 그 속도의 노예가 되어 빠르게 사는 삶을 강요받게 되며 또한 그 속도의 유지를 위해 우리의 온 시간과 노동, 땀을 쏟아 부으면서도 그 속도가 더욱 증가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갇혀 가족, 이웃을 돌아볼 시간조차 아깝다고 느끼는 최면에 걸리게 되며 점차 그 사회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가에 의해 계급과 계층이 나뉘고 결국 그러한 구조 속에서 계급과 계층 상승의 로망을 품고 속도 자본주의에 예속되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일리히는 에너지소비가 일정한계를 넘게 되면 산업화된 타율적인 수송체계가 사회공간을 지배하게 되고, 인간의 생활시간을 수탈하게 되며, 또 풍부한 사용가치(자율적으로 이동하는 힘)를 인간이 누리기 위한 여러 조건을 제약하게 됨을 지적한다.’(82쪽)
때문에 자주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속도를 우리가 우리 힘으로 낼 수 있는 만큼의 속도로 줄여야 한다는 것이며, 구체적 대안은 자전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낼 수 있는 만큼의 속도로 우리가 이동할 수 있는 만큼 이동하고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일해야만 무엇인가에 의지하지 않고 주체적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최근 개봉하여 수많은 관객을 감동시키고 있는 영화 ‘워낭소리’, 그 이야기의 핵심도 삶의 속도가 아닐까요? 빨라진 삶의 속도로 놓치고 지나는 것이 많아지니 작은 풀잎 하나에 감동할 시간도, 그러한 풀잎을 만나는 우연의 기쁨도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소와 함께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길을 걷는 할아버지의 속도는 우리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무수한 사람이 컴컴한 극장 안으로 몰려들어 자신의 지친 삶을 위로받는 모습을 보니 사회는 물론 자신에게 조차 소외된 채 왜소해진 ‘진보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주체성을 상실한 이들의 삶은 진보일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복지현장에서의 속도는 어떤 모습일까?
‘고도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길을 선택한다면 그 사회관계는 반드시 전문기술관료체제의 지배를 받게 되며, 그 간판이 자본주의이든 사회주의이든 간에 그것은 똑같이 굴욕적인 일이 될 것이다.’(11쪽)
우리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이웃사이의 자연스러운 나눔을 살려내고 북돋아 사회의 공생성을 만드는 속도를 기다리지 못해 사회복지기관이나 자원봉사자들이 모든 것을 대신 다 해버리는 ‘속도전戰’이 생각납니다. 당사자들의 자주성을 해치는 것은 물론, 좋은 뜻으로 돕고 나눈 사회복지사들과 자원봉사자들마저 그 빨라지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며 더 빠른 속도(점점 더 많은 후원과 예산)를 내기 위해 헛일에 힘쓰며 지쳐 나자빠지는 것은 아닌지요.
‘에너지위기는 에너지를 더욱 많이 투입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삶의 질이란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에너지 노예의 수로 결정된다고 하는 환상이 없어져야만 비로소 에너지 위기도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23쪽)
인정이 메마르고 이웃관계가 약화되는 복지위기에 복지(복지기관, 사회복지사, 예산)를 더욱 많이 투입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극복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환상일 수 있습니다. 그 방식이 사람들 사이의 인정과 나눔이 소통되게 여쭙고 주선하고 부탁하는 천천한 소의 걸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산, 위탁과 직결되는 ‘실적 속도전’의 굴레 속에서 어려운 이웃을 대상으로 삼아 대신해주고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러한 복지기계에 의해 우리의 자연스러운 나눔이 방해받을 수 있습니다. 복지가 인간의 자율성을 손상시킬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나눔에 대한 복지기관들의 독점(이웃을 자원화 하여 복지서비스에 부분적으로 참여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은 스스로 걸어 다니며 일상의 모든 것을 해결하던 우리가 자동차의 사용이 전제되거나 혹은 요구되는 사회시스템 아래에서 자동차 등의 수송체계에 의존하게 되어 결국 주체적인 자기 삶의 마땅한 행위인 ‘걷기(혹은 자전거타기)’로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고 그 사회속도를 따라갈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걷기를 포기하고 기계와 시스템에 의존하게 되듯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이웃관계는 끊어지고 단절된 개개인으로 쪼개져 결국 위에서 주어지는 복지서비스에만 의존하게 만드는 상황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습니다. 동네의 어르신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조차 서비스화 되어 바우처로 거래되는 사회의 미래는, 백화점 로비에서 인사하는 화석화된 미소를 만나 감동하지 않듯 세련되어 보일지는 모르나 진정한 인정과 나눔이 소통하지 못하는 건조한 사회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구두가 희소하며 구두를 신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맨발로 걷거나 여러 직인이 만드는 참으로 다종다양한 멋진 샌들을 신고 있다. 구두가 없다고 하여 그들의 자율적 이동이 제약되는 경우는 조금도 없다. 그런데 남미에는 학교, 직장, 공공기관 등이 맨발로 다니는 것을 금지한 후 주민에게 구두 신기를 강제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 교사나 정당의 간부들은 구두를 신지 않는 것을 ’진보‘에 대한 무관심의 증거라고 단정하고 있다. 국가발전의 추진자와 제화산업 사이에 아무런 의도적인 음모가 없다고 하여도 이러한 나라들은 이제 직장으로부터 맨발을 내쫓고 있다.’(67쪽)
이제 사회사업가들이 어떻게 일해야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에너지로부터의 해방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값싼 것이니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값비싼 것이다. 그러나 수송기관망의 속도증대로 인하여 교통이 피폐되어 버린다면 부유한 사람들도 그 높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102쪽)
김동찬 선생의 글 ‘사회복지에 역행하는 복지사업, 커다란 파도에 던지는 돌멩이’를 읽고 깊이 공감했습니다. 부끄러워 어찌해야할지 몰랐습니다..
7차 백두대간 때 최장열 선생님과 김동찬 선생이 앉아 ‘바위섬’ 노래를 불렀던 주문진 바위섬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꼿꼿한 돌들이 모여 작은 섬 이루니 사납게 달려오는 파도도 부서져 장관을 이뤘습니다. 그 모습 보러 사람들이 모이고, 모인 이들이 감동받아 노래 부르기도 하고 평온해지기도 하고..
김동찬 선생의 글 읽고 작은 마음 보탭니다. 그래도 서로 모여 바위섬 이루면 쉽게 휩쓸러 가지 않겠지요? 서로 기대고 있으니 쉽게 가라앉지는 않겠지요?
앞서서 일하며 고민해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느 밭을 갈지 몰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황소 적음.
첫댓글 "속도"라는 단어에 주목해 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껏 자랑해왔던 그 속도! '물질', 즉 '돈'의 풍요를 이뤄내 더 편해졌을 지 몰라도, 그 이면에 '사람', 즉 '인격'의 가치는 많이 훼손된 게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 입에서 지금도 '속도전'이란 말이 쉽게 나오는 걸 보면, 어찌 그리 '조바심'이 심한 지 안타깝습니다. 조바심, 속도전... 그것들 때문에 사람의 가치가 훼손되고, 아이들서부터 어르신들에게까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진보는 오히려 '회복'이 아닐까 합니다. 물질보다 사람을, 돈보다 인격을 중요시 하는, 속도 보다 본질을, 방법보다 가치를, 현상 보다 이면의 회복이 진보일 겁니다.
세진형,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서 소비를 부추겨 돈에 굴종하게 한다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길이 아니겠지요. 사람을 돕는다면서 에너지 고소비구조로 일한다면 사람이 딛고 사는 땅, 지구를 짜내서 사람에게 먹이는 일이니 결국 근본 토대를 무너뜨려 자멸, 공멸하게 말겠지요..
어느 밭을 갈지 몰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황소 적음. / 또 하나의 봄바람 이고 갈 다른 '황소' 여기 있습니다. 기꺼이 파도에 맞서 자리를 지키는 바위섬 중 하나 여기있습니다. 선생님.
'어느 밭을 갈지 몰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는 황소' 주상아... 먹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