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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9년 3월 10일 주일오전
렉시오나리 : 신26:1-11; 눅4:1-13
본문 : 창26:34-27:4; 28:1-9
제목 : “이삭의 어두움의 본질”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128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77편 5,6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84편 1,2,3
렉시오나리 후의 찬송 - 시117편(고정)
아멘찬송 - 시127편 1,2,3
성찬식 찬송 - 시65편 3,5
폐회찬송 - 시91편 1,5
이삭의 어두움의 본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래 전에 고려신학대학원에 교수선교사로 오셔서 사역하셨던 고재수 교수님께서 1983년에 한 잡지에 기고한 글 중에 “한국교회의 연령에 대한 검토”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 보면 고재수 교수님은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는 정반대의 상황 속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성경적 대답을 제시합니다. 1980년대는 인구 과밀로 인한 걱정이 매우 극심한 시기였고, 연세 많은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대로 인구가 계속 늘어서는 정말 지구적 위기가 올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던 때였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라는 광고가 연일 TV에서 나왔습니다. 둘 낳는 것도 많으니 가정에 하나만 낳자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때 고재수 교수님은 이 기고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인구 폭발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를 부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넓고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나라가 아니라 인구가 매우 조밀한 홀란드에서 왔다. 그곳에서는 거의 2킬로마다 마을이 하나씩 있다. 고국에서 나는 급속도로 성장하는 인구 때문에 야기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쉽사리 볼 수 있다.......하지만 우리의 주제는 가족 계획이라는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세상을 자녀들에게 열어 보이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으신 세상에 여러 생물들이 기꺼이 받아들여졌다고까지 말씀하신다(창1:28).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 근본적인 축복이 폐지된 곳은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가족 계획의 첫 번째 원칙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린아이들을 받으며 하나님을 위해 그들을 양육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인구 폭발을 억제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여 않고서는 복지 사회를 이루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한다.......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를 갖고 양육하는 데 있어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아니면 안락한 복지 국가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섬길 것인가 하는 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고재수, “한국교회의 연령에 대한 검토”, 복음과 지성, 1983년 6월호 통권 39호에서)
사실 저나 여기 연세 많으신 성도들이나,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때에는 아무도 지금처럼 인구 감소가 사회적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신자라고 할지라도 모두 다 정부의 방침을 따라서 “적게 낳아야 살 길이다”라고 생각했지, “많이 낳더라도 괜찮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때, 외국 개혁교회 출신의 한 교수님은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정말 지구적 위기를 가져올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령하셨는데, 말씀에 순종할 때 위기가 올 것인가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이제 우리는 누구의 생각이 옳았는지를 압니다. 당시에는 신자들조차 모두 눈앞의 위기 때문에 말씀을 제대로 믿을 수 없었지만, 결국은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가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얻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이 사실은 “신앙의 문제”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신자라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불신자들과 다르다는 것은 바로 이것, 곧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그것을 단순히 “삶의 문제”라고만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 역사 속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이 눈을 갖고 있었고,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창세기 27장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일어나는 일들을 구속 역사의 한 위치에 서서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그것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 역시 조망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주께서 말씀에 은혜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혼인에의 주목
창세기 27장 사건을 읽을 때 사람들이 통상 주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강조점이 오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을 살피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창세기 27장의 사건을 볼 때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의 추이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다가,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문맥적 특이성은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놓치는 특이성을 주목해 볼 때, 오늘 말씀의 의미가 확연하게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먼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1)
27장의 처음은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웠다”라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장절이 구분되어 있는 성경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별반 생각이 없이 이 1절의 이야기가 이 전체 이야기의 제일 처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장 구분이 없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한 번 읽어보시면, 창세기 26장의 내용이 이삭이 우물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과 다투는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는 33절에서 끝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27장의 시작은 정확하게는 27장 1절부터가 아니라 26장 34절부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주제별 구분을 위해서 동그라미가 쳐저 있는 것이 보이실 텐데, 이 부분을 보시면 동그라미가 26장 34절에 있고, 그 다음에 27장 5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구분 역시 27장 내용의 시작은 27장 1절이 아니라 26장 34절부터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점은 창세기 27장의 이야기, 곧 이삭이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이야기는 사실은 그 시작을 “에서의 혼인 이야기”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삭의 아들들에 대한 축복”과 “에서의 혼인 이야기”를 성경은 고의로 붙여 놓아 연관을 맺게끔 해 두었습니다.
2)
이 연관성은 이 점만으로는 설득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성경이 비록 불필요한 이야기를 쓰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경에는 종종 필요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첨언되어 있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생각이 조금 달라집니다. 이 전체 사건의 마지막 부분을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삭이 아들들을 축복하는 이야기는 그 축복 뒤에 앙심을 품은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하는 일로 치달아갑니다. 그래서 어머니 리브가는 이 일을 알고 야곱을 멀리 보내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이 일련의 이야기까지가 모두 끝나는 것이 28장 9절입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떠나 여행길에 오릅니다. 28장 10절이 야곱이 집을 떠난 첫 구절이기 때문에 이삭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의 마지막은 28장 9절입니다. 즉 27장의 이삭의 축복 이야기의 모든 전개의 끝은 28장 8절과 9절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 마지막을 다시 어떤 이야기로 맺고 있는지를 한 번 보십시오. 8절과 9절을 읽겠습니다.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대단히 놀라운 점은 이삭이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이야기는 그 시작도 에서의 혼인으로 시작하고 그 마침도 에서의 혼인으로 마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27장의 이야기는 “에서의 혼인”이라는 사건이 앞 괄호와 뒷 괄호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이삭의 축복 이야기 전체가 에서의 혼인으로 시작과 끝이 닫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한 번 질문해 보십시오. 이삭의 축복 사건이 모두 끝나고 난 후에 에서는 왜 8절과 9절 같은 행동을 할까요? 에서는 축복을 받지 못하고 난 후에 왜 혼인을 한 것입니까? 마치 오늘 말씀은 에서가 축복 사건이 있은 후에 자기가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은 자기가 혼인을 잘못한 것이 원인이기도 한 것처럼 “다시 혼인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 보아도, 아무 연관 없어 보이는 에서의 혼인과 이삭의 축복 사건은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의 행동과 혼인
자, 그러면 이삭이 아들들을 축복한 일이 왜 혼인과 결부되어 있는지를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이 점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 함께 28장 1절과 2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창28:1-2)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려 했다가 야곱의 속임수로 인해 야곱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다 내려주고 나서, 앙갚음으로 에서가 동생 야곱을 죽이려하자 어머니 리브가가 마련한 계획은 아들 야곱을 혼인 시키기 위해 멀리 보내는 것이었습니다(여기에도 주제가 혼인입니다!). 그런데 이 때 27장 46절에서 리브가는 이삭에게 큰 아들 에서의 두 아내, 헷 사람의 딸들로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한다”라고 하면서 야곱 역시 이 땅에서 딸들을 취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합니다. 그러자 이삭이 야곱을 보내면서 한 말이 바로 이 1절과 2절 말씀입니다.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밧단아람, 곧 리브가를 데리고 왔던 그곳으로 가서 거기서 아내를 취하라”
만약 성경을 여기밖에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듣고서 아무 생각이 안 날 수도 있겠지만, 창세기를 계속해서 설교를 들어온 우리로서는 이 말씀이 낯익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삭이 지금 야곱에게 하고있는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와 꼭 닮아 있습니까? 이삭이 지금 한 말은 사실은 처음, 누가 한 말입니까?
함께 창세기 24장 3절부터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24:3-4)
종이 여자가 오려 하지 않으면 아들을 데리고 “주인의 나온 땅으로” 돌아갈까를 물으니까 아브라함이 다시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보십시오. 6절과 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삼가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말라.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이삭이 야곱에게 한 이야기는, 사실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면서 이삭의 신붓감을 찾으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종을 자신의 고향 땅, 형제의 집으로 보내면서 거기에 가서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혼인을 위해 신붓감을 그렇게 멀리서 찾으려고 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아들이 이루는 가정을 통해 언약이 계승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질문을 종이 물었던 것에 대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종은 여자가 자기를 따라서 오지 않으면 이삭을 데리고 그 땅으로 갈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 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제가 이 장면은 이전에 설교하면서 “그 땅은 떠나온 땅이지 머물러야 할 땅이 아니다”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자를 따라 이삭이 그 땅으로 가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지금 머물고 있는 땅이 “약속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삶을 보는 시각 : 우리의 삶의 어떤 일들은 곧 무엇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로 이 이야기! 아브라함의 말을 통해서, 족장 아브라함은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성경이야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점은, 우리와 시대만 다를 뿐 족장들 역시 우리와 똑같이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 배고픔을 느끼고 추위와 더위를 경험하면서 살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족장들에게도 혼사는 혼사이고, 자녀 양육은 자녀 양육이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환경이 지금의 우리와 다를 뿐, 그들 역시 살아가는 데는 돈이 필요하고, 주위에는 믿지 않는 불신 이웃들이 있으며, 자신의 판단으로 인해 일이 그르쳐지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는, 그런 우리와 똑같은 종류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지만! 족장 아브라함은 자신의 인생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혼인을 앞둔 아브라함의 태도”를 통해서 적어도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의 일들”을 단순히 “삶의 일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의 혼사는 단지 혼사의 문제였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의 혼사의 문제는 “신앙의 순결의 문제”, “언약 계승의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여자가 원치 않으면 아들이 그리로 가도 되느냐의 문제는 단지 “가족들끼리 떨어져서 살게 된다”, “아들과 며느리를 자주 못 볼 수도 있다” 이런 문제였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들 이삭이 자신의 고향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을 포기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처럼 “혼사는 인륜지대사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중요했던 것은 혼인은 “언약결혼”이었다는 것이고, 자신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 있어, 치밀하고 철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매우 면밀하고 정확하게,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언약 안에서” 생각하고 이해했으며, 그것을 따라서 행동하고 대응했습니다.
이삭의 행동
자!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에서 이런 아버지를 가졌던 이삭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지를 보도록 합시다.
1)
먼저 에서의 혼인 그 자체를 보십시오.
우리는 창세기 26장 말미에서 에서가 혼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다.” 헷 족속의 딸을 아내로 취하였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명을!
여러분! 이것이 그냥 혼사로서 넘어갈 문제인지를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서 먼 고향 땅에까지 가서 아내를 취하여 온 일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종은 누구를 데려왔고, 이 사람과 누가 결혼했습니까? 이삭과 리브가입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앞서 말했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혼인의 일의 직접적인 당사자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혼인시킨 일을 직접 보고 경험했던 사람은, 이삭 자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이삭이! 큰 아들이 헷 족속의 여자와 혼인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물론 성경은 자세한 정황을 생략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에서가 성격이 포악해서 부모의 말을 안 들었을 수도 있고, 헷 족속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서 몇 날 며칠을 술만 퍼먹으면서 아버지께 혼인 안 시켜주면 죽어버리겠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무엇이 어떻게 되었건 간에! 어떻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버지의 그 일의 주인공이 된 이삭 자신이! 어떻게 이런 혼인을 허락했을 수가 있습니까?
심지어 이삭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와 다른 시대입니다.
우리는 앞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장가 보낼 때에도, 모든 일의 주체가 아브라함이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자유연애를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결혼을 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혼사의 주체는 혼인당사자가 아니라 집안의 어른이었던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헷 족속 사돈들과 상견례를 하고, 좋은 식당에 가서 허허 웃으면서 서로 술을 권하면서 밥을 먹고, 또 며느리가 인사를 오면 덕담을 해주고,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만약 눈꼽만큼이라도 이삭이 아들의 혼사를 “언약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보았더라면 결단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이 26장 말미의 이야기가 그대로 27장에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삭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고 큰 아들 이삭에게 장자의 축복을 내려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뻔히 금하신 것을 알고도! 단지 자기가 개인적으로 큰 아들 이삭을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창세기 27장의 이야기는 “에서의 혼인”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이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장면은, 성경의 판단에 의하자면 에서가 헷 족속의 여자들과 혼인을 하거나, 이스마엘의 딸들과 혼인을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언약의 파괴!”, “언약 계승의 단절!”, 삶의 문제를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보지 아니하고, 그저 삶의 문제로만 보기 때문에 욕망을 따라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
이것이 바로 에서의 혼인과, 이삭의 축복의 요점이었습니다.
창세기 27장 1절 말씀은 이삭을 “나이 많아 눈이 어두어 잘 보지 못하였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비록 이 문장 자체로는 단순히 그의 육체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 뿐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이삭의 “눈 어두움”이 그의 육체의 문제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진실로! 영적 어두움을 가졌던 것입니다!
삶의 문제를 언약의 문제로 보지 아니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불신자들과 똑같은 땅을 밟고, 똑같은 공기를 마시고, 똑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고 합니다. “은총”을 생각하십시오. 어떤 신학자가 말했듯이(스킬더) 만약 이것이 진짜 “은총”이라면 하나님의 은총을 불신자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신자에게만 세상이 은총입니다(스킬더는 일반은총이 진짜 은총이라면, 불신자에게는 동시에 심판이라고 말했다).
신자에게 일반은총이 “은총”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세상의 평범한 것들조차 모두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139:7-12)
아멘!
신자가 보는 세상은, 만물의 어느 한 자락에도 주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척박한 땅, 가장 은총이 없고, 가장 세상적이며, 가장 죄와 타락이 만연한 곳에 조차! 시편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지어 음부에도! 여호와께서는 거기 계시며,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이며, 신자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삭의 어두움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는 삶의 한 부분에서 실수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행위가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그는 “마치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어떤 물건에 가리워서 그림자가 지는 부분이 있는 것인양” 행동했습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는 삶의 어떤 부분들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다스리시지 않는 부분이 있는양”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혼인의 파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야말로 “불신실한 신부”였습니다. 모든 언약관계는 혼인으로 귀결됩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혼인하였고, 혼인을 통해서 언약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이삭은 삶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불신자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이것을 굳이 비유로 그리자면 에서의 헷 족속 여자와의 혼인이고, 그래서 성경은 이 이삭의 행태를 고발하기 위해 27장의 축복 사건 전후에, 에서의 혼인을 설명한 것입니다.
성도들께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삶의 모든 부분이, 여러분이 살아 숨쉬고 있는 모든 환경이, 다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는 것임을 알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설교의 서두에 말씀드린 이야기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적어도 “인구 문제” 같은 것은 정부의 시책을 따라 판단하고 생각하면서 살면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적어도 내 집 값이 오르냐 마느냐 같은 문제는, 언약의 관점 안에서 생각하지 않고 부동산 업자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녀의 교육 문제 앞에서는, 서울대를 보낼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소! 라고 하는 불신자들과 비슷하게 행동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성경은 이런 행동들, 곧 삶의 문제를 언약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 것을 “언약 배반”이라고 말씀합니다. “혼인의 파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신부된 자로서 적합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실을 잘 기억합시다.
지혜롭다 한들 어리석다
그리고 끝으로 오늘 본문 23절 말씀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2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아멘!
여기 “분별치 못하고”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성경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는 “인식의 문제”를 가리킵니다. 못 알아봤다는 것입니다.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눈이 있는데, 어두워서 못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십니다. 이삭은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속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삭은 한 순간도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를 어기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될 줄 알았는데,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가 인식하지 못했다, 알아채지 못했다, 분별하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삶의 문제를 언약으로 보지 못하는 신자는 “눈이 멉니다.” 자기 생각에는 자기가 똑똑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리석은 판단을 합니다. 아들이 수십 명이 아닙니다. 겨우 둘입니다. 털을 팔에 붙인 것이, 오늘날 특수분장 기술자들이 한 게 아닙니다. 엄마와 아들이 동물 털로 대충 붙인 것입니다. 누가 봐도 알아챌 수밖에 없는 엉성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속았습니다. 그런데도 넘어갔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어리석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떠나서 삶의 문제를 세속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신자들!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동안 보아 오셨습니다. 하나님보다 우리가 지혜로울까요? 아니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리어 “이들이 속게” 하십니다. 쉬운 속임수, 간단한 사실,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명제 앞에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무너지게 하십니다. 신자가 세상이 볼 때 어리석은 판단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을 판단하면, 시간이 지났을 때 설교 서론의 고재수 교수님의 글처럼, “놀라운 통찰력이었군요! 이제사 보니 당신이 옳았습니다!” 할 만큼 지혜로운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기 위해서 언약을 내팽개칠 때, 하나님이 앞장 서셔서 그의 눈을 어둡게 만드시고,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시고, 그의 인식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 카이퍼의 표현, “한치라도 주의 것!” 이것을 기억합시다.
삶의 모든 문제가 주의 손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언약 안에 살고, 언약 안에 숨쉬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참 지혜이신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