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법을 다른 법과 구별(분별/택법)하는 방식,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남북방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북방(논서)에서는 體相用으로 설명하고
남방(논서)에서는 특징(lakkhaṇo), 역할(raso), 드러남(paccupaṭṭhāno) 등으로 설명합니다.
비슷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sati라는 법에 대해서는
[Saranti etāya, sayaṃ vā sarati, saraṇamattameva vā esāti sati.
"이것 때문에 기억(Saranti), 혹은 이것은 그 스스로 기억하고,
혹은 단지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 한다.
Sā apilāpana lakkhaṇā,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을 특징으로 한다.
asammoharasā,
잊지 않는 것(asammosa)을 역할로 한다.
ārakkhapaccupaṭṭhānā, visayabhimukhabhāva paccupaṭṭhānā vā,
보호하는 것(ārakkha)으로 나타난다.
혹은 대상과 직면함(visayabhimukhabhāva)으로 나타난다.
thirasaññāpadaṭṭhānā, kāyādisatipaṭṭhāpadaṭṭhānā vā,
강한 인식(thirasaññā)이 가까운 원인이다.
혹은 몸 등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함[念處, satipaṭṭhā]이 가까운 원인이다.
ārammaṇe daḷhapatiṭṭhitattā pana esikā viya cakkhudvārādirakkhaṇato
dovāriko viya ca daṭṭhabbā.
이것은 기둥처럼 대상에 든든하게 서 있기 때문에(patiṭṭhitattā),
혹은 눈 등의 문을 지키기 때문에(rakkhaṇato) 문지기처럼 보아야 한다."]
여기서 體에 해당하는
//이것 때문에 기억(Saranti), 혹은 이것은 그 스스로 기억하고,
혹은 단지 기억하기 때문에 마음챙김이라 한다.//...에서
<마음챙김>은 [기억]으로 바꾸는 것이 옳습니다.
相(특징)에 해당하는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것(apilāpana)을 특징으로 한다.//...에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열거/나열]로 바꾸면 이해하기 쉽지 싶습니다.
用(역할/기능)에 해당하는
//잊지 않는 것(asammosa)//
<잊지 않는 것>은 바르게 번역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설명에서 마지막 [드러남, 보아야한다.]를 제외한 앞부분이 북방의 體相用에 상응합니다.
이러한 sati에 대해 경에서 직접 정의한 내용은
用(기능, indriya)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기능인가?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그러므로 <사띠와 사띠의 기능은 별개이다>라고 생각하시면
[차]와 [사람이나 사물을 운반하는 기능]을 지닌 것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사람이나 사물을 운반하는 기능]을 지닌 것을 [차]라고 한다는 설명방식입니다.
해맑은 님에게 드리는 의견
//신수심법 4념처에 대한 기억이 正念//..... 에 대해서
[4념처]라는 번역이 이미 정착되어 있어서 지금은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4가지 처>에 대한 念(기억) 즉 [4처-념]으로 읽으시면 이해하기 쉽지 싶습니다.
<4가지 처> 즉 신수심법이라는 4가지 수행 주제(토대, 대상)에 대해 잊지 않는 기억.
이렇게 <4가지 처>에 대한 念에 의해서
이러한 신수심법이라는 수행토대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作意가 있게 됩니다.
즉 이 말이 anupassati(지켜본다)라는 말의 의미로 생각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正念인 <4가지 처>에 대한
念에 의한 作意 - 지켜본다(anupassati)가 定의 무더기에 속하는 것인가 하면
外(색성향미촉 등)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內 자신의 고짜라(자신의 고향동네)인 신수심법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최소한 외부의 대상에 의해서 생겨나는 貪등의 불선법이라도 더 이상 생겨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는 만큼 [맑아지고 밝아지기] 때문입니다.
경문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tassa evaṃ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y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anti.
그가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물 때
마침내 저 세속에 얽힌169) 재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170)이 사라진다.
169) “'세속에 얽힌(gehasitā)'이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에 의지한 것(pañca-kāma-guṇa-nissitā)을 말한다.”(MA.iv.144)
170) '재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은 sara-saṅkappā를 옮긴 것인데 이것은 sara와 saṅkappā의 복합어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sara는 빠르게 달린다(dhāvanti)는 뜻으로 빠르게 일어나는 생각들(dhāvana-saṅkappā)을 말한다. (MA.iv.144)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그런 생각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은 안으로 확립되고 고요해지고 하나에 고정되어 삼매에 든다.
evaṃ, bhikkhave, bhikkhu kāyagatāsatiṃ bhāveti.]
즉 관심(作意)의 대상이
세속과 연결된 기억(sara)과 생각(saṅkappā)이 사라지는 만큼, 그 만큼 삼매에 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기억(sara)은 감각적 욕망과 연결되는 기억입니다. 갈애(욕애)의 동의어로 보셔도 됩니다.
예를 들면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 순이 생각, 돌쇠 생각, 등등.....
봄봄이 이해하기로는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이렇게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의 삼매에 들고 있으면서도
본인이 그것이 일종의 삼매상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삼매에 대한 잘못된 오해로 인해서 그 대상으로 作意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삼매상(사마디 니밋따)를 경험하시는 분들은 많은데 그것이 삼매의 표상입니다.
그러면 呼吸念三昧를 살펴보겠습니다.
[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비구들이여, 비구는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꿰뚫어 알고, …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kāye kāyānupassī, bhikkhave, tasmiṃ samaye bhikkhu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비구들이여, 이렇게 공부지을 때 그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위 인용문의 앞에
이른바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서>라는 표현이 있고
그 다음에 <마음챙겨 호흡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 카페에서 여러 차례 의견을 드렸습니다.
즉 [앞으로 수행할 순서, 방법 등에 대해서 기억을 확고하게 하고서] 결가부좌하고 앉는다.
이와 같이 16단계 혹은 4단계 [호흡 방법을 기억하면서 호흡한다].
16단계 호흡법에서
앞 부분에서만 [呼吸의 長短을 般若한다. pajānāti]라고 나타나고
세존의 호흡과는 다르게, 나머지 부분에서는 [sikkhati]라고 나타납니다.
여기서 [呼吸]에 대한 망상을 잠시 피워보겠습니다.
아마 우리들이 지켜보기로는 애기가 태어날 때 처음 지켜보는 것이
아기들의 [呼吸]이지 싶습니다.
즉 숨을 쉬고 있으면 일단 [순산의 표상]입니다.
이렇듯 [呼吸]이라는 것은 욕계에 태어난 우리 인간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것을 경문에서는 風大라고 하고 색계4선에서야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여튼 [呼吸의 長短을 般若한다. pajānāti]라고 했을 때
무엇을 [呼吸]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하는 것도 만만치 않지만
우리들이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그것이 [呼吸]이라고 하고 여기서는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長短]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단어만큼 이른바 실체인 法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른바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般若한다]라고 합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봄봄은 [주리반타카<Cudapanthaka>] 존자를 상기합니다.
말씀드리는 취지는 최소한 붇다에 대한 믿음이 있고
붇다께서 설하신 수행방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聰記가 있는 인간이라면
최소한 [長短을 般若한다. pajānāti] 이 정도는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이해했습니다.
[呼吸의 長短을 般若한다. pajānāti]라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한 수행입니다.
[주리반타카<Cudapanthaka>] 존자께서 하신 수행법과 같이.
그럼에도 막상해 보면 이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呼吸]에 대한 念이 사라져서 [呼吸]으로의 作意가 되지 않고
<세속과 연결된 기억과 생각(사유)> 혹은 재가에서 있었던 貪瞋이 스믈 스믈 피어나다가
아예 그 망상 속에서 한 동안 빠져 있는 것을 나중에야 이른바 '알아차리게' 됩니다.
여기서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은 과거(조금 전)에 헛짓을 한 것을
지금 [기억]이 나서 그래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기억]도 없다면 '알아차리게' 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緣起]가 아닌 [無緣]을 주장하는 삿된 견해 중에
無想有情이였던 존재가 다시 이 욕계 세상에 태어나서 수행하다가
과거를 기억하는 (제한적인) 숙명통을 얻게 되더라도
[無緣]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지 싶습니다.
[Agārasmā anagāriyaṃ pabbajito samāno ātappamanvāya padhānamanvāya
anuyogamanvāya appamādamanvāya sammāmanasikāramanvāya
tathārūpaṃ cetosamādhiṃ phusati,
yathāsamāhite citte saññuppādaṃ anussarati, tato paraṃ nānussarati.]
반면에 비상비상처나 상수멸에서 출정하면서 [기억] 하고서 출정하는 분들이
이 두 가지 처에 대한 위빳사나가 가능하게 하는 것도 sato입니다.
이러한 경지는 이렇다고 말씀하시니 그런 줄 아는 것이지 상상도 되지 않는 경지입니다.
하여튼 옆길 많이 빠졌지만
이 만큼 4가지 수행대상에 대한 기억, 기억에 의한 작의, 작의에 의한 지켜봄,
지속적인 지켜봄에 따른 마음의 안정(삼매)이 쉽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수행이 되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 [반야]가 아니라 [반복학습]입니다.
왜 [반야]가 아니라 [반복학습]인지는 각자 사유해 보시길 권합니다.
첫댓글 객이 먼저 의견을 적게 됩니다.
사띠의 개념이나 해석에 대해 논의되는 내용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 공부(괴로움의 소멸)에 어떤 유익한 점이 있는지 우선 궁금해 집니다.
제가 의문이 있어서 올린 주제들, 예를 들면 법을 관찰하고 닦는 것이 선정상태에서도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것은 닙바나를 성취할수 있느냐 없느냐에 직접 관련되는 것이라서 경전의 바른 해석은 정말 중요합니다.
반면에 이 사띠라는 것은, 저도 무위님처럼 사띠라는 용어 그대로 쓰자는 주의이고 니까야를 읽을 때도 마음챙김이나 새김으로 읽으면 생생하지 않아서 일부러 사띠로 바꿔서 읽습니다만,
수행적인 측면에서는 사과, 버스, 상승, 하강..이렇게 얘기하면 별도의 설명이 필요없이 다 알아듣듯이, 사띠하세요! 하면 그냥 무슨 의미인지다 압니다.
그래서 사띠는 수행적인 면에서는 사띠하세요, 알아차림하세요, 마음챙김하세요...
이렇게 말하는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건 좀 이상하지요. 수행용어로는 적합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저는 사띠가 봄봄님말씀처럼 수행에서도 '기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사띠는 모두 기억으로 수렴됩니다.
대신 저는 한 찰라전의 대상(몸과 마음의 현상)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대개 이런 말들을 합니다.
몸과 마음의 현상을 일어나는 즉시 바로 사띠하지는 못한다, 그것을 찰라간에 기억해서 사띠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치적으로는 맞는 말일수 있습니다.
미얀마에 우 뽕야(정확히는 우 뿐냐인데 미얀마 사람들은 우 뽕야로 부릅니다)라는 법명의 한국인 스님이 계십니다.
저도 갈때마다 찾아뵙는 훌륭한 스님이신데 양곤의 테라와다 국제불교대학원에서 귀국도 않으신채 고시원같은 기숙사에 머물면서 십수년간 교학을 공부하시고(교학을 공부하셨지만 수행승보다 더 수행자다운 분입니다) 2년여 전에 박사과정 논문이 통과된 분입니다.
이 스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대화하면서 가볍게 적은 메모라서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꿈 ...사띠는 본질적으로는 기억, 경전상으로는 일반적으로 기억이라는 의미로 사용, 사띠빠타나에서의 사띠는 단순한 기억은 아닐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수행적인 차원의 사띠빠타나에서의 사띠는 대상에 물들지 않고 가능한 한 빨리 대상(주로 마음)이 일어났다는 것을 거리를 두고(떨어져서)아는 것, 사띠는 한찰라전의 대상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기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찰라전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사띠다. 이 뜻을 담은 사띠의 번역어를 찾기는 어려울것 같다....
우 뽕야스님은 십수년간의 교학 공부를 마치시고 2년전부터 마하시를 거쳐 지금은 파욱에서 수행을 하시고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처럼 사띠는 수행에서도 기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다만, 한찰라전의 기억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개념정의가 수행에서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맞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확인하기가 어렵고 그냥 사띠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나무의꿈 그래서 어떤 분이, 이것이 정확한 사띠의 개념정의라고 하니까 로보스님이 그냥 듣고 계시다가 다른 법문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사띠를 기억으로 이해할 때, 한 찰라전의 몸과 마음의 현상을 기억하는 것을 사띠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삼마사띠가 되면 현재 순간을 실시간으로, 마치 CCTV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상카라가 일어나는 것도 찰라의 순간인데, 마음에 대한 삼빠자냐가 일어난 상태에서는 그 찰라간에 일어나는 상카라가 밑바닥에 잠재돼있던 원인으로부터 겉으로 표출되기까지의 과정이 영상을 보듯이 생생하게 찰라간에 동시에 관찰되어진다고 합니다.
그것을 봄으로써 지금까지 이런것에 휘둘렸나 하는 자각에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고 ...
그리고 그것이 나의 상카라가 아님을 이해하면서 놓아버릴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순간을 사띠하지 못한다는 일부 견해는 잘못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띠논의가 공부에 이익이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서 좀 무식한 입장에서 제 의견을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사두~사두~사두~
@나무의꿈
여러차례 본 카페에서 의견을 올렸듯이
[삼빠자냐]의 의미는 동시지, 즉각지, on time, real time(옳은 영어 표현인지는 모름)으로 앎----
이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처음에는 전찰나 경험한 것을 기억에 의해서 '알아차리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경문을 이해하기로는 [실시간 앎]으로 이해합니다.
사띠(기억)의 용도는
1. 스승으로부터 공부방법을 배웠다면 그 내용을 기억하는 것.
2. 위 내용과 겹치는 부분일 수 있는 것인데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서 = 앞으로 어떻게, 어떤 방법 순서 등을 기억하고서
3. 그런 내용이 기억된 상태에서 수행함.
4. 그러면 그 기억에 따라 대상(신수심법)을 잊지 않고 즉 기억함 - 대상으로 향함(작의)
5. 내로 삼매에 듦(바른 삼매면 좋겠지만 아니여도)
6. 삼매에서 알고 봄 (일어나는 법성-사라지는 법-일어나고 사라지는 특징 등)
7. 알고 본 사건을 기억함.
8. 그 기억이 마음에 확고하게 확립됨.
9. 다시 유사한 경험을 하면 <척 보면 알고 보게 됨>.
10. 그 결과 싫어하고 떠나게 됨.
....등 등
모든 과정에서 사띠(기억)이 작동함.
11. 삼매를 구성하는 법을 위빳사나할 때도.
@나무의꿈
//사띠하세요! 하면 그냥 무슨 의미인지다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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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그 의미를 확인해 보시면
그 범주가 아주 아주 많이 많이 넓다 못해
전혀 다른 개념까지 등장하지 않으려나요?
봄봄이 이 카페에 가입한 지 10년은 많이 넘은 것 같은데 기억이...... ^^
하여튼 처음 의견을 올린 것이 사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부터 지금까지 몇 차례 사띠의 의미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하면....
거의 '알아차림'이라는 의미의 반응 외에.....는^^
그러다가 최근 올린 의견 이후
아주 일부 '기억' ^^;;
@나무의꿈 로보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정념은 정정이 한참 진행된 다음에나 실천되겠군요. 봄봄님 말씀을 따르면 사념처에 대한 기억이 정념, 로보스님의 경험은 삼빠자냐로 개념 정의가 되는군요. 정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 봉봄님의 사띠에 대한 기나긴 여정이 (중간 글들은 안 앍거나 무지성으로 읽었지만) 유익한 결론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lmanu 제가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은 못하겠습니다만, 몸관찰을 예로 들면,
사띠는 몸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고, 삼빠자냐는 몸전체를 나 또는 나의 것이 아닌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 사띠는 대상을 잡고 삼빠자냐는 그 대상의 본래 모습을 아는 것...
수행이 진척되면 사띠의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삼빠자냐가 일어납니다.
수행의 3가지 무기는 사띠 삼빠자냐 아따삐라고 합니다.
삼빠자냐가 일어나야 비로소 위빠사나를 할 수 있고(그래서 수행의 우선적인 목표가 몸에 대한 삼빠자냐-->마음에 대한 삼빠자냐가 일어나는 것),
8정도의 마지막 삼마 사마디(정정)는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두 요소를 가진 것으로 이것이 올바른 선정(정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8정도는 수다원부터 닦을수 있는 것이고, 그 이전에는 7보장가+메따, 보시..
따라서 올바른 선정속에서는 담마를 들을수도 있고 사유도 되고, 그것을 이해해서 자신에게 적용할수도 있습니다.
부처님 설법 중에 제자들이 선정속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그러한 이유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위 제 글에서 스님이 삼마사띠라는 용어를 쓰셨을 때는 삼빠자냐가 일어난 상태를 전제한 말씀입니다.
사두~사두~사두~
@나무의꿈 다른 건 모르겠고, 봄봄님이 말씀하시는 사띠는 신수심법에 대한(외부 대상을 볼 때, 자신의 사처를 보려는) 기억이고, 이 때 주의력은 사처로 향하게 되고, 인식은 사처를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좌선에서는 자신의 몸이 대상이므로 외부대상과 명상대상이 일치하는 특징이 있구요. 저는 이 견해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lmanu 교학은 깨달은 분이 남기신 수행에 대한 가르침인 것이니 그 논의역시 수행의 나침반이 되고 유익함이 있어야 하는데...
사띠는 그런 면에서 현재 통용되는 정도로 충분하고, 오랫동안 논의될만한 주제는 아니지 않은가 해서 제 의견을 적어본 것입니다.
제가 다른걸 패러디해서 재밌게 표현하는 것이 있는데,
노느니 사띠하자!
오직 사띠!
사띠는 이 정도를 마음에 새기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띠를 기억의 의미로 말씀드리면
대부분 과거의 좋은 일 나쁜 일에 대한 추억, 회상 등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기억은 앞으로 할 것을 지금 기억해두는 것도 기억이고
지금 경험하는 것을 지금 기억시키는 것도 기억이고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지금 기억나게 하는 것도 기억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기억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선법을 증장시키는 [순이 생각, 철수 생각, 술 생각^^.... 등등]
다른 하나는 내 자신(고향 동네라고 번역된 고짜라)인 신수심법에 대한 잊지 않는 기억.
혹은 불법승-시계천 혹은 죽음 등에 대한 기억(수념)
[법을 관찰하고 닦는 것이 선정상태에서도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는가]
경문을 이해하기로는 삼매에서의 앎----- 이란 삼매 상태에서의 알고 봄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출정하고서 위빳사나 한다라고 직접 언급된 곳은
두 곳이면서 두 가지 처------ 비상비비상처와 상수멸처 뿐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억하세요//------
...............아니지 싶네요. ^^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세요.
(그러면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결과적으로 기억하게 되지 싶습니다.)
즉 신수심법이라는 수행주제를 잊지 말고 기억하세요.
이것이 4가지 수행주제에 대해서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 4념처 / 4처에 대한 념 = 정념
정념에 의해서 정정이, 정정에 의해서 바른 앎이, 바른 앎에 의해서 해탈이.....
지금도 헷갈리는 분이 몇 분 보이지요?
ㅎㅎ
의견을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한지
아니면 읽는 분들이 다른 곳으로 쳐다보려는...
이미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하여튼 새로 시작합니다.
//신수심법 4념처에 대한 기억이 正念//...라고 읽으시면 표현이 이상합니다.
또한
//사띠는 몸 전체를 인식하는 것//....는 나중의 이야기 이지 싶습니다.
먼저 용어정의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사띠는 '기억'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저항감을 느끼시면 ...... ^^;; 그냥 사띠(念)라고 할께요.
正念(삼마 사띠)은
신, 수, 심, 법이라는 수행주제, 토대, 대상에 대한 사띠 만을 말합니다.
하나로 줄이겠습니다.
즉 身(이것도 설명이 필요하나 여기서는 생략)
身이라는 處(念의 토대), 身이라는 대상에 대한 念이 身處-念(수심법 동일)이고
이렇게 몸(이라는 대상)에 대한 사띠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몸이라는 수행주제에 대한 집중을 말하는 것이지
몸을 인식한다든지 알아차린다든지 일어나는 법을 알고 본다든지 사라지는 .... 등등은
나중의 일입니다.
먼저 몸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주의를 기울인다. 즉 作意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身을 作意하고 있는 상황을 '身을 지켜본다.'라고 하고 [kāye kāyānupassī]
이것을 흔히들 身隨觀이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 隨觀(anu-passti)이라고 나타나니 '봄(見)'이 사띠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身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지켜본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바른 이해일 것입니다.
다시 반복해서 말씀드리면 念에 의한 作意, 作意에 의한 隨觀(지속적인 注視)
즉 身隨觀은 身注視라고 읽으시면 이해하시기 싶지 싶습니다.
하여튼 이렇게 몸을 꾸준히 집중(지속적인 注視)하고 있으면
먼저 본인이 인지하든지 인지하지 않든지 마음이 맑아집니다.
그 이유는 중요한 내용을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위 번역도 의견을 드릴 내용이 있지만 그대로 읽더라고
어느 정도의 貪과 관련된 瞋과 관련된 심리상태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더라고
가라앉고 맑아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삼매이거나 삼매와 가까운 심리상태입니다.
@봄봄
흔히들 삼매라고 하면 특정 대상에 대한 집중으로 이해하는데
오히려 대상에 대해 안정된 심리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불선한 대상을 떠나는 상황, 혹은 버려진 상태(사마타)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외부의 색성향미촉 등에 대해 일시적이나마 갈애가 발생하지 않아
안으로 즉 內로 삼매에 든 상태입니다.
그래서 正念이 定蘊에 속하는 이유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분들은 이러한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서 벗어나는 방도가
외부대상에 대해서는 가능한 등 돌리고 자기 자신(고짜라)에 대해서 關心을 기울이는 것이
경에서 말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가 사띠의 기본적인 공덕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안정되고 맑아지는 만큼 그 만큼 삼매가 깊어지지 싶습니다.
그러면 마치 강둑에서 서서 혼탁했던 강물이 맑아지는 만큼 더 투명해 지는 만큼
송사리가 움직이는 것도 보이고
더 어두운 곳의 가물치가 슬금슬금 이동하는 것도 볼 수 있지 싶습니다.
@봄봄
이러할 때 이것을 삼매에 들어서 알고 본다라고 하는 것이라 짐작합니다.
이것을 [내로 삼매에 들고 외로 알고 봄이 생겨난다]는 말씀이나
[삼매에서 알고 본다]는 말씀의 의미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념에 의한 삼매, 삼매 상태에서의
삼빠자나이든 위빳사나이든 어떠한 것이든 가능하지 싶습니다.
물론 정념과 같은 선법은 단독으로 작동하지는 않을 겁니다.
信, 精進, 念, 定, 慧. 혹은 戒-定-慧.
함께 작동하거나 다른 선법들을 증장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싶습니다.
정리합니다.
사띠는 '기억'입니다.
삼마 사띠라는 正念은
네 가지 수행주제인 '신, 수, 심, 법'에 대해 念念不忘하는 話頭一念입니다.
여기서 話頭는 네 가지 수행주제인 '신, 수, 심, 법'입니다.
봄봄님 설명이 수행에 많은 도움이 되네요.
정리및 분석능력 역시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