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보리, 겨울에 키워 여름 별미가 되다
우리나라에서 보리를 키운 것은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경기도 여주나 충청남도 보령 등 선사 유적의 집터에서 보리가 탄화된 상태로 발견된 것을 미루어 보면 기원전 10세기에도 보리를 재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건국을 위해 남쪽으로 내려올 때도 유화부인이 비둘기로 보리 종자를 보내줬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이다. 식량작물로서 보리의 위상이 작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농사직설’, 조선 중기에 고상안이 지은 ‘농가월령’ 등에서도 보리는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가을에나 수확할 수 있는 쌀 대신 여름철의 식량원이 될 수 있었고 약재로서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는 보리의 품종 분화와 재배 방식에도 진전이 있었는데, 17세기 초에는 품종별 파종시기와 보리 종자의 저온처리 등이 ‘농가월령’에 기록되었다. 특히 보리 종자의 저온처리는 서구인들보다 약 240년가량 앞선 기록이다. 19세기에는 봄보리의 품종이 올보리, 검은보리 등으로 품종 분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혼분식에서 벗어나 건강식의 자리를 노리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보리는 가난한 옛날을 상징하는 작물로 평가 절하되기도 했다. 보릿고개라는 말이나 쌀의 생산량 부족으로 인한 혼분식 장려운동 등이 그 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혼분식 장려 운동의 일환으로 학생들의 도시락에는 보리와 같은 잡곡이 일정 분량 들어가야 했다. 1980년대부터는 쌀 자급이 가능해지면서 혼분식 장려운동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쌀밥에 대한 욕구가 높았던 만큼 보리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맥주보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1974년 맥주 원맥의 국산화 정책과 맥주소비 증가로 인해 1975년도부터 맥주보리가 활발하게 재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울철이 따듯하고 강수량의 연중 분포가 균일해야 한다는 재배 조건으로 인해 제주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남부 해안지역으로 재배 적응지역이 국한되어 있다.
건강식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보리도 밥으로만 해먹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가공해 먹으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식습관이 서구화되다 보니 당뇨, 비만, 지질대사 이상과 같은 병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당지수가 낮고 대사증후군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보리가 이상적인 건강식품으로 다시 떠오른 것이다. 콜레스테롤 합성을 저해하는 토코트리에놀 성분, 혈중 지질 수치를 낮추고 혈당 조절에도 도움을 주는 베타글루칸 등이 그 주역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보리에 대한 세계적 인지도가 높지는 않다. 세계 최대의 보리수입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대부분의 보리를 낙타나 양 등의 사료로 수입하고 있다. 2위 수입국인 중국도 맥주를 만들기 위해 수입을 하는 것이 대다수다. 그런 만큼 원물에 대한 거부감을 줄일 수 있도록 가공된 보리 상품을 만드는 것이 수출에는 보다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다. 그 예로 찰보리빵, 보리국수, 보리차, 보리커피 등이 있다.
한편 건강에 신경을 쓰는 웰빙트렌드를 통해 보리 수출 길을 트는 경우도 있다. 가공되어 바로 마실 수 있는 RTD(Ready To Drink) 보리차, 알록달록한 색상과 기능성을 겸비한 색깔보리쌀 등이 그 예다. 특히 RTD 보리차 시장 규모는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 기준으로 500억 원대로 늘어났다. 집에서 끓여먹는 대신 간편하게 마실 수 있으면서도 국내산 보리를 사용한다는 점이 소비자들에게도 긍정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건강음료에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보리음료의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미 미국으로 15만 병이 수출된 사례도 이를 뒷받침한다.
색깔보리쌀의 경우는 이미 미국과 중국, 베트남 등으로 수출이 되었는데, 이 색깔보리들이 치매와 노화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3년만에 수출량이 40배 가까이 늘었다. 외국에서 볼 수 없는 색과 기능성을 지닌 것도 수출길을 든든하게 지켜줬다.
검은보리부터 찰보리까지 우리 보리 품종
흑다향 비바람에 잘 넘어지지 않고 알곡을 많이 맺는 검은보리이다. 2015년 보리차와 새싹보리용으로 개발되었다. 올보리 품종과 비교해 폴리페놀 함량이 높고 새싹보리로 취급할 때 사포나린, 폴리코사놀 등 기능성 성분 함량이 높게 나타났다. 2019년 보리차용으로 28톤이 보급되었고 새싹보리용으로 약 10톤이 공급되었다. 2020년에 70톤이 생산되어 공급될 예정이다.
흑보찰 2017년 개발된 검은 찰보리 품종이다. 밥으로도 지어먹을 수 있고 보리빵과 같은 가공식품에도 쓸 수 있다. 토양 곰팡이에 의해 바이러스를 옮기는 보리호위축병에 저항성이 있어 균질한 품질과 수확량을 유지할 수 있다. 국내 최초로 보리 낟알이 흑색인 종으로 안토시아닌과 폴리페놀이 풍부하다. 수량성은 새찰쌀보리의 95% 수준이지만, 수확량을 떨어트리는 보리호위축병에는 새찰쌀보리보다 저항력이 높다.
누리찰 2015년 개발된 흰쌀찰보리 대체종으로 2019년부터 보급이 시작되었다. 보리호위축병과 성숙 후 쓰러짐에 강하다. 또한 키가 흰찰쌀보리에 비해 크기 때문에 기계로 수확하는 것이 쉽다. 밥으로 지을 때 물을 잘 흡수하고 낟알이 부드럽게 퍼지면서도 점도가 높아 씹는 식감이 좋다. 녹말의 노화도 느리게 진행되어 식감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베타글루칸 함량은 6.8%로 일반 보리와 비슷한 수준이다.
광맥 추위를 잘 견디고 보리호위축병에 저항력이 높다. 비바람에 쓰러지는 현상에도 강해 기존 맥주보리 품종인 호품에 비해 같은 면적에서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하다. 특히 정상적인 시기가 아닌 때에 이삭이 나오는 현상이 적어 생육이 안정적이다. 단백질 함량이 적어 맥주용 보리로 품질이 우수하다. 제주도를 포함해 1월 최저 평균기온이 -4℃ 이상인 남부 맥주보리 재배지역에 적합하다.
영양 002년에 개발되어 2008년부터 보급된 사료용 청보리이다. 2008년 대한민국 우수품종상 경진대회에서 우수품종으로 선정되었다. 단위면적당 수량이 다른 품종에 비해 많이 난다. 습기로 인한 피해, 쓰러짐 현상에 저항력이 강하고 보리호위축병에도 강하다. 다만 까락이 다른 신품종보다 거칠기 때문에 가축의 선호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점이 약점이다.
유진 보리는 기본적으로 까락이 가시처럼 돋아나 껄끄러운데, 이를 개선한 삼차망 청보리는 톱니가 날카롭지 않아 가축들의 기호도가 높다. 알곡과 잎, 줄기까지 급여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 단백질, 전분, 섬유질이 많아야 하는 조사료의 조건에도 적합하다. 유진은 2016년 육성된 삼차망 청보리로 기존 삼차망 청보리에 비해 기계로 수확해도 알곡이 잘 붙어있는 내탈립성이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연호 우호보리와 영양보리를 함께 교배해 육성한 청보리이다. 줄기가 영양과 비교해 까락이 거의 없는 반매끈망 형태이기 때문에 그만큼 부드럽고 가축 기호성이 좋은 편이다. 다른 품종에 비해 추위를 견디는 힘이 좋고 잘 쓰러지지 않는다. 특히 젖산 함량이 높아 사료를 발효시키는 사일리지 형 조사료로 만들 때 품질이 좋게 나온다. 또한 건조시켰을 때도 다른 품종에 비해 많은 양이 나와 조사료로 적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