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의 4 복음서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나타내어 신약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바울의 로마서는 “바울의 복음서”와 같아서 그의 13개의 서신서중 제일 앞부분에 위치하면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과 삶의 의를 깊이 파헤치는 서신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쓴 것은 제 3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인 AD57년이었습니다( 롬15:19,행18:23). 고린도에 3개월 머무는 동안에 쓴 것으로(행20:3-6),그 고린도에서 가이오와 함께 있었으며(고전1:14),“그 성읍의 재무관 에라스도를 언급하고 있는데(롬16:23), 1세기경에 세워진 고린도의 한 비문에 의하면 ”공공 토목 공사의 감독관 에라스도가 자기 돈으로 이 길을 놓았다“는 말이 새겨져 있어서 이 시기의 저작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질의와 응답의 형식을 취하는 헬라어의 수사학적 기법을 통하여 성경의 교리를 가장 조직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체를 통해 흐르는 주제인 “義”(의)를 크게 3 부분으로 요약하였는데,1-8장까지의 “하나님의 의와 계시”부분,9-11 장까지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변론” 부분과, 12-16 장까지인 “하나님의 의의 적용”의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하신 본문 말씀은 로마서의 핵심을 다루는 칭의 부분(3:21-5:21)을 다루는 가운데서 “稱義(칭의)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행한 행위 때문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술하는 가운데에 도입된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특히 목사님의 본문 말씀이 들어 있는 로마서 4장은 “구원의 패스워드(password)”는 “오직 믿음”뿐임을 설명하면서 “믿음은 우리가 볼 수 없는 바를 신뢰할 수 있는 능력”임을 강조하면서 이를 다시 우리가 “믿음의 장”으로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의 서두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로 선언할 만큼 “믿음의 핵심‘을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창세기 15장에 하나님이 환상 중에 “아브람”을 바깥으로 이끄셔서 “하늘의 뭇별”을 보여 주시면서 아직도 아들이 없는 그에게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는 언약을 세우시는 과정에 성경 기자는 네레이터 화법으로 “아브람이 이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서술하고 있는 대목에 집중해 봅니다. 다시금 17장으로 장면을 바꾸어서,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요구하시면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고쳐 부르시면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17:5)고 하시면서 개명의 의의를 강조하셨습니다. 이 창세기 15장과 17장 사이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 로마서 4:1-16절까지의 내용으로 바울은 믿음의 조상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할례시냐 아니면 무할례 때이냐를 수사학적 표현으로 물으면서 다시금 본문 말씀의 도입부에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17절)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로마서는 헬라어의 정수가 담겨 있는 본체이지만 중요 구절을 묵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아브람“(아버지는 높임을 받는다)의 이름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비)이라 개명해 주신 이름(아브라함)”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히브리식 알파벳은 “ ם ה ר ב א ”으로서 변한 것은 “아브람”의 이름에 알파벳인 “ ה ”( 헤,he)만 추가된 것입니다. “he(헤)”는 “격자”를 뜻하는 것으로서 사방이 막힌 담으로 둘러싸인 곳으로부터 뚫린 구멍을 통하여 “빛”이 들어온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단어를 그 구성요소인 알파벳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영적인 단어의 구성을 보면 때때로 중요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고, 이러한 사실들은 성경의 구절로 보완 될 때가 있습니다. 즉 개명된 아브라함의 이름을 알파벳의 단위로 나열해보면 “아브”는 히브리어 사전의 첫 단어로 나오면서 “원아버지”란 뜻이고 “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인 빛을 머리에 각인하고 새기면서 살아갈 때에 수고와 슬픔을 이겨나가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즉 “열국의 아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의지해야만 가능한 존재입니다.
바울은 1~3장의 내용을 롬3:30의 “할레자도 믿음으로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으로 믿음의 절정을 이끌면서 또 다시 4장에서 반복적으로 믿음을 강조하는 수사학적 기법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율법을 행함으로써만이 의로워진다”는 것을 강조한 상황적인 배경을 “B 때문이 아니고 A 때문에 C로 여김을 받았다”는 논지로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롬1:17,갈3:11)의 반복적인 설명에 의해 설득하고 있습니다. 즉 “B(율법의 행위:4;14-16)때문이 아니고,A(아브라함의 믿음,4:17-21) 때문에 C(의롭다 하심을 받음,4:22)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을 “층 위의 층으로” 반복 강조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주의 해야 할 헬라어 원문은 17절의 “죽은 자를 살리시며” 로서 헬라어의 표기로는 “조오 포이운테스”로서 “생명을 만드는 자”란 뜻으로서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나타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의 “부르시는”은 “칼룬토스”로서 “명령하다, 소집하다, 점호하다”로 해석되는 단어인데 “하나님은 실제로 가능한 모든 것을 그의 명령 하에 두시고, 언제나 창조적인 능력으로 역사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위의 2 단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그리고 생명과 부활의 주로서의 권능을 완전히 믿었고, 불가능 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으로서의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절의 “바랄 수 없는 중에”란 “희망할 수 없는 중에” 혹은 “희망에 반대되는 여건 중에서도” 바라고 믿었다는 의미를 함축한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문 말씀으로 요약해보면 1)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과 부활의 주로서, 2)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창조주로서, 3)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로 그의 믿음의 토대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의 믿음에 대한 원리를 토대로 5장부터 구원에 대한 문제를 3가지 시제를 활용하여 설명한 것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이번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상황의 논리 앞에 무릎 꿇는 인간의 나약함 앞에선 우리에게 한 줄기 빛처럼 쏟아지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전해지는 그 똑같은 말씀을 잘 빚어서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와 생명을 실어 전해주시는 목사님의 설교에 움츠렸던 믿음의 한계를 넓혀봅니다. 한 주간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빛 되신 말씀을 의지하며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부르신 그 부름의 삶을 위해 달려갈 힘을 얻습니다. 할렐루야!
첫댓글 넘어질 수밖에 없는 나의 상황속에서, 현실의 보여지는 모든것을 뛰어넘게 하시는 생명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넘어졌다 일어서고 다시 반복하는 부끄러운 삶이지만 , 부르신 곳에서 다시 일어섭니다. 할렐루야~~!!!
잠깐 틈내어 왔더니 또 귀한 글이 있습니다. 스크랩했다가 좀 이따가 천천히 묵상하며 은혜받을까 합니다. 오늘도 주 안에서 귀한 은혜 나누며 할렐루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2명의 강도중 우편의 강도는 예수를 믿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 나를 기억하소서" 청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6시간 동안 예수는 마지막까지도 구원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변화시켰던 것이지요. 흉악한 죄를 짓고 십자가형을 당하면서도 믿음 하나로 구원을 받은 강도는 역설의 기독교를 반증합니다. 예수의 12제자였지만 비참하게 죽었던 가롯유다와 상당히 비교가 됩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믿음'임을, 또한 십자가에 달리면서도 마지막까지 '구속'을 완성하셨던 예수님을 본받아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노력해야겠습니다.
저는 엘에스더님 덕분에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열정이 생긴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올려주신 글들을 읽으면서 또다른 각도로 깨달음을 얻게 되니 나눔의 은혜가 더 풍성해지는듯 합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어원에서도 말씀에 대한 깊이를 더할 수 있었고, 엘에스더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 노력에 도전을 받습니다. 물론 오늘 목사님 말씀처럼 생활에 적용되지 않는 말씀은 무용지물이겠지요~문단에 대한 수정작업 없이 바로바로 깨닫는데로 나누어주셨던것이 더 은혜가 되는것같습니다. 괜한 말씀을 드려 죄송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