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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 봉헌>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요구에 의해 아브라함이 자기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자연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토록 가혹하신 분이신가?
하느님은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그런가 하면 오늘 두 번째 독서와 복음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외아드님마저 우리에게 아낌없이 바치신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상호 봉헌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 아들을 봉헌하시고
우리 인간도 하느님께 아들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의 봉헌이 더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곧 하느님의 봉헌이 인간의 봉헌보다 더 위대하다는 식의,
그런 유치한 얘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봉헌의 위대함보다는
하느님 봉헌의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진정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과 희생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가학적으로 즐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시고 너무 아파하시기에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우리에게 봉헌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느끼는 우리도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을 사랑으로 봉헌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호박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호박벌은 하루에 200km이상을 날아다닐 정도로 아주 부지런한 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뚱뚱한 몸통, 그리고 날개는 작고 매우 가벼워서 못난이 벌이라는 소리도 듣지요.
그런데 이 몸통과 날개를 연구했던 곤충학자들은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뚱뚱한 몸통과 작고 가벼운 날개를 보면서 도저히 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잘 날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날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자신이 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랍니다.
‘날 수 있을까?’라는 궁리보다는 ‘꿀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하루 종일 날아다니면서 꿀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호박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불가능이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표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불가능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과연 어디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까?
혹시 불가능하다면서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에도 해당합니다.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들고 불가능하게 생각하는 것은 세상 일이 먼저이고 주님의 일은 나중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하신 변모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신의 신성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우리들이 나중에 받을 영광의 자리를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라는 영광의 장면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라는 물을 갖게 됩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변모가 이루어진 공간은 ‘높은 산’이었습니다.
물론 타볼산이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하지만 제한적인 공간을 떠나서,
그 높은 산은 세상의 사람들과 분리되는 곳이며 오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곳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래쪽에 머물러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높이 올라간 사람들 앞에서 변모하셨다는 점이지요.
과연 우리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높은 곳을 어렵고 힘들다면서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래에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자신의 입맛에 좋은 것만 그리고 편한 것만을 따르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제1독서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의 뜻이 더 우선이기에 그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굳은 믿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뜻은 아래쪽에 있지 않고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입장만을 따른다면
결코 높은 곳에 오를 수 없으며, 주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셨던 그 큰 사랑을 기억하면서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거룩한 변모는 지금 이 자리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 인천교구 / 안식년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부활? 먼저 싸워야!>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는 로마 시대의 한 남자의 복수극을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180년경 로마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12년에 걸쳐 게르마니아 정벌을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정벌대의 대장이 바로 막시무스입니다.
왕은 로마에서 편히 먹고 지내는 자신의 아들 코모두스가 아닌 막시무스에게 로마 왕권을 물려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코모두스는 자신의 아버지 아우렐리우스를 살해하고 막시무스와 그 가족까지 모두 죽이라고 분부를 내립니다.
막시무스는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아내와 아들의 죽음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노예로 전락하여 경기장에서 로마 병사와 싸우다 죽어야하는 검투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술과 전투능력이 매우 뛰어났기에 나중에는 콜로세움에서 황제가 보는 가운데 로마 군인들과 전투를 벌입니다.
황제는 그가 막시무스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인기가 너무 높았기에 군중이 두려워 그를 죽이지는 못합니다.
결국 머리를 쓴 것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와 결투를 하여 로마인들로부터 자신의 왕권을 인정받겠다는 것입니다.
미리 막시무스의 옆구리를 칼로 찔러 서서히 죽게 만들어놓고 사람들 앞에서 결투를 합니다.
그러나 결국 막시무스가 승리하고 황제를 죽이고 자신과 같은 노예들을 다 놓아주게 만들어놓고 자신도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자신의 아내와 아들과 만나는 것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로마 황제를 위해 싸웠지만 결국 한 명의 노예로 전락하였고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로마 황제를 죽이게 된다는 것이 줄거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실 때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어떤 인물들이었을까요?
바로 글래디에이터처럼 왕들과 겨룬 인물들입니다.
왕을 섬기며 편하게 살면 좋았을 것을 굳이 고생하며 목숨을 바쳐 왕들과 대결했던 복수의 화신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키워준 이집트 왕실에 반기를 듭니다.
수많은 재해를 가져오고 이집트 모든 집안의 맏이를 죽이는 불행까지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군대를 바다 속에 수장시켜버립니다.
이것만이 그들 세력의 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로 이끌다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 묻힙니다.
그런데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다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성경엔 분명히 땅에 묻혔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단절입니다.
생명은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영원한 생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라자로도 부활했지만 그는 다시 죽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그냥 ‘부활’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제자들도 사실은 그 뜻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그 차이는 아주 단순합니다.
부활은 그저 육체적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한다는 뜻은 성령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다시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면 다시 죽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인 성령으로 부활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1코린 15,42)
그렇다면 모세는 육체적으로는 죽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한 인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투를 치러야만 하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과 싸우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이 온 세상과 싸우고 계심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당신과 같은 처지에 처할 것임을 미리 알려주시며
세상과의 싸움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됨을 되새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
아니, 이미 왔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2-33)
지금 예수님께서는 원수와 결전을 하시기 위해 타볼산에서 내려오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영광만을 바라며 그 곳에 텐트를 치고 머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싸우지도 않고 승리의 영광만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셔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사탄’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세상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데
가끔은 이 원수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돈과 명예와 성공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원수를 섬기면서도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부활은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고
그 싸움의 대상은 바로 마귀와 육신과 세상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또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바로 바알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예언자 사백 명과 혼자서 대결한 인물입니다.
그들 뒤에는 아합왕과 이제벨 여왕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항상 왕은 나를 두렵게 하는 대상입니다.
사실 파라오 왕이나 아합, 이제벨 등은 모두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두렵게 해서 감히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나의 왕이 내 안에 있는 자아인 것입니다.
겁이 나게 만들어서 십일조도 바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재물에 무릎 꿇게 만드는 왕이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왕과 싸워 승리해야만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과 대결할 때 하늘에서 무엇이 내려오는 시합을 했습니까?
바로 불입니다.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령의 불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령만이 영원한 생명이고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힘도 성령님이십니다.(로마 1,4 참조)
바알 예언자들이 자기 자신들의 몸에 상처를 내가면서까지 성령의 불을 청했지만 성령은 내려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 세상을 섬기면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반면 혼자서 왕과 왕비와 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정면 대결을 펼쳤던 엘리야에게는 성령께서 내리셔서 제물을 다 태우고 뿌려놓은 물까지 다 말려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성령으로 상징되는 불 마차에 들어올려졌습니다.
이것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의 부활입니다.
홀로 싸우려고 했기 때문에 홀로 승리를 거두었고
홀로 성령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으로 부활하지 못한 이들은 모두 죽은 이들이 되었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세상과 싸우기보다는
세상과 타협하여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지
하느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우상 숭배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금송아지는 우리를 성령으로 부활시킬 수가 없습니다.
편안하게 천막을 지어놓고 머물려는 마음을 버립시다.
우리 또한 분노에 찬 모습으로 성령의 칼을 들고 온 세상과 싸우러 나가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전까지 지금 본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은
당신의 부활 이후에야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영광이 아니라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싸우다 죽어야만 한다는 소명을 되새겨주는 결전을 위한 결심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매 기도할 때마다 이런 결심이 새로 서야 합니다.
우리 또한 세상과의 싸움을 하기 위해
타볼산을 내려오시는 그리스도의 그 비장한 눈빛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
<본래의 아름다움을 지켜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나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시며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같은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주님께서 주신 아름다움(창세 1,27)을 잘 지킬 수 있는 지혜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높은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십계판을 받았고,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신 장소도 산이었고, 그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 곳입니다.
우리도 가끔 산에 올라야 합니다.
몸과 마음의 침묵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변하셨습니다.
그분의 옷은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얼떨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마르9,5)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께, 하나는 모세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사실 엘리야나 모세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 그 영의 능력을 두드러지게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엘리야는 예언서를 대표하는 인물로 죽은 지 수백 년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과 얘기를 나누었다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요,
신약은 구약의 완성입니다.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앞길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엘리야,
하느님의 명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모세가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당했듯이
예수님께서도 만백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고통을 당할 운명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하얗게 빛난 옷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오게 될 부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사도가 고백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1요한 3,2)
라고 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영광의 모습을 기억하며 지금의 시련과 역경을 이겨나가라는 위로입니다.
이제 이 흰 옷은 곧 우리의 옷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허물과 후회 없이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자신을 깨끗이 하여, 하느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거룩” (2코린 7,1)하게 되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 하얗게 빛나야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 5,14)하고 선언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초막을 지어 머물고 싶어 한 것을 보면 좋긴 좋았나 봅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과 함께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는 이미 “하느님의 모습”(창세1,27)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의 숨”(창세2,7)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을 엉뚱한 곳에서 찾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것이 참 좋았다.” (창세1,31)고 하셨지만
그곳에서 찾지 않고 헛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변화되어 아름다움을 가꾸기도 해야 하지만
먼저 내 자신이 아름다움자체라는 것을 일깨우고 그것을 지키고 가꾸려 노력해야 합니다.
결코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지 말고
내 삶을 그리고 삶의 터를 꽃자리로 만드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보면 욕심을 내고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이 가장 값진 보석이 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자신이 큰 보석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산에서 내려온 것은 안주하지 않는 삶에로의 초대입니다.
‘초막 셋을 짓겠다’는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산에서 내려온 것은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꿋꿋하게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할 소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산에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산 아래로 내려 오셨습니다.
세상의 복잡하고 어려운 일, 감당하기 어려운 곳으로 내려오셔서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 광야에서 앞길을 인도한 것이 구름기둥, 불기둥이었듯이
오늘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는 것은 구름 속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결국 아름다움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주 하느님의 명대로 구리로 뱀을 만들어 기둥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렸어도 그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습니다(민수21,9).
그리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데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19,26).
주님의 말대로 하면 생명이 주어지고, 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본래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키워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얼굴은 마음의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에 회개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회개라는 것도 우리가 큰 죄를 지어서 회개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래 아름다움을 되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했던 마음에 소홀함이 있다면
다시금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며
온 삶이 그분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보시고 ‘참 좋다’ 하시길 희망합니다.
한 주간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잘 가꾸시길 바랍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예고 때에는 베드로 사도가 그러면 안 된다고 말렸고(마르 8,32),
두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두려워하기만 했고(마르 9,32),
세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의 반응이 아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 번째 예고 때에는 제자들이 못 들은 척 한 것인지...?)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만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도 예고하셨는데,
제자들은 수난도 죽음도 부활도 모두 이해하지 못했고,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제자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미리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당신의 본래의 모습이기도 하고,
부활 후의 모습이기도 하고, 승천 후의 모습이기도 한데,
어떻든 그 일은 수난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베드로의 말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행복하니 이대로 영원히 지내면 좋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단순히 예수님의 '변모'만 목격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와 그 나라의 행복과 평화를 체험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행복과 평화를 영원히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라는 것도 나타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고, 하느님께서 직접 대답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가, 또 제자들의 체험이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대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 행복과 평화를 누리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는 점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을 가리키고,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예고 말씀을 하신 뒤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마르 8,34-35)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십자가를 거부하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늘나라를 얻을 것이다."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의 수난 때에 제자들이 보인 모습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이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제자들은 모두 달아나버렸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했지만 모른다고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려고 하신 일은
실제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생애 전체를 생각하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그들에게 대단히 크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알고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마지막 목적지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입니다.
이것은 사순시기가 끝나면 부활절이 오는 것처럼 명확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확신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가다가 십자가를 만나면 지고 가면 되고, 가시밭길을 만나면 그대로 밟고 지나가면 됩니다.
십자가와 가시밭길이 힘들어도 참고 견디는 것은,
고통은 잠깐이고 행복은 영원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 얻을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하늘나라' 라는 목적지로 직행하기 위해서 자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사순시기를 생략하고 부활절로 직행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아직은 우리가 완전한 자격을 갖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1베드 1,6-7.공동번역)
- 전주교구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역설과 부조리 속에 찾아가는 신앙>
살다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사실 인간 존재 자체가 모순이요 역설이며, ‘문제’요, 인간의 삶 자체가 ‘문제의 연속’이니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짜증을 내고 따지며 이성적 잣대로 남을 판단하기도 하여 상대를 증오하는 일도 생긴다.
나아가 성경 말씀, 교회의 가르침,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이성의 끈을 붙들고 이성에 비추어 바라볼 때에 거부감, 혼돈, 갈등에 빠지기도 하고
심지어 신앙생활에 무관심해지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까지도 발생한다.
오늘 성경 말씀들은 이런 실존적, 영성적 실존 상황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준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준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하고 요구하신다.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요구이다.
어떻게 사람 목숨을 가지고 시험하시는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가?
더구나 살던 곳을 떠나 생명을 이어갈 외아들을 죽여 번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는 ‘잔인한 살인 요구’가 아닌가?
이 감당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요구에 따라
외아들에게 번제에 쓰일 장작을 짐 지우고 모리야 땅으로 외아들과 함께 걸어가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묵묵히 하느님의 말씀대로 따랐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요구, 아브라함이 모순과 역설 앞에서 겪는 당혹스러움과 어두움은
바로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 여정이다.
신앙은 이성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 아니다.
이성으로 이해될 수 없는 역설의 연속이요, 인간의 눈에 모순으로 보이는 ‘충격적이고 경이로운 도전’이다.
이성의 잣대를 내려놓지 않고 어떻게 이 역설과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서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요구하신 것은
이성적으로 볼 때 분명 ‘잔인한 살인 요구’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철저한 믿음의 봉헌’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야로 걸어가는 절대 침묵 속에서
‘이성의 잣대’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는 엄청난 신앙의 모험을 감행하였다.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모리야 땅까지의 침묵 속의 여정은
고통과 불안의 시간이요, 바로 역설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사회 문제와 불의 앞에서 분노하고 절망하고 갈등하는 우리 자신의 여정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정작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현실, 부조리를 접할 때는 이성의 끈을 놓지 못한다.
역설과 모순의 삶 자체를 신앙으로 눈으로 바라보거나,
성경말씀을 통해 재해석하거나,
또는 기도 안으로 그것을 끌어들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의미를 찾고 그에 따라 투신하는 것이
바로 영성생활이요 우리가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이리라.
그런데 우리는 이런 현실을 접하면서 감성적으로 반응하거나 이성으로 판단하는데 그치고,
때로는 체념하고 절망하며 피상적인 영성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아닌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던 제자들은 새하얗게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베드로 사도가 엿새 전에 확고한 신앙을 고백하였다고는 하나
제자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의 빛나는 모습을 보고 그 영광 안에 그저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한국 교회는 고통 받는 이들과 소외된 이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도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지 못한 채 안주하는 듯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삶의 역설과 모순이 가져다주는 당혹스러움과 혼란, 분노, 부조리를 신앙의 눈으로 읽어내는 십자가의 길보다는
당장 쉽고 편한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더불어 고난을 받아들이기보다는
눈앞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맛들이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희생과 투신, 포기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태도가 나에게 있는가?
- 작은형제회
* 박영식 야고보 신부님의 묵상글 *
<우리의 목적은 영광을 입으신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
공자가 인물이 잘 생기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여자가 이렇게 묘사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이빨이 톡 튀어나온 게 칠일 동안 굶은 상인데,
귀가 얼굴색보다 흰 걸 보니 문장만은 천하에 알려질만 하겠군.”
세계를 움직였던 지도자들 중 많은 이들이 병에 시달렸다.
쥴리어스 시저는 간질병 환자였고,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위궤양을 앓았단다.
사마천은 거세형을 받고 그 인생 패배의 쓰라림에서 <사기(史記)>라는 거작을 남겼다.
손자孫子는 발을 잘리는 형을 받고도 그 유명한 <병법(兵法)>을 썼다.
한비자는 유배의 고통 속에서 <한비자(韓非子)>라는 작품을 남겼다.
나폴레옹도 간질병환자였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스키도 극심한 가난 속에서 간질 발작을 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 작품들을 써냈다.
세계 연맹을 조직했던 토마스 윌슨은 뇌출혈로 몇 번이나 졸도했던 인물이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고 시력도 아주 나쁜데다가 천식까지 앓아서 앞에 있는 촛불을 끌 힘도 없었던 테오도르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인 대공황 때 미국을 구한 대통령이 되고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에디슨은 젊은 날에 청각장애자가 되었지만,
“내가 귀머거리가 됨으로 감사한 것은 연구에 몰두할 때 잡음이 들리지 않아서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드와잇 아이젠하워는 육군사관학교를 꼴등으로 졸업하고 심장병 때문에 육군 원수 시절에 열네 번이나 쓰러졌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졸업식 때 교장선생님이 청년 아이젠하워의 손을 잡고
“그대는 꼴등을 해주어서 다른 학생들에게 큰 역할을 해주었다. 그대는 꼴등을 한 게 영광이다.”라고 말했단다.
윈스턴 처칠도 그 주치의가 그에게 심장병이 있다는 사실을 숨겨 영국에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안겨다 주게 했다.
프랑스의 영웅 드골도 당뇨병과 백내장 때문에 일생 고생했다.
이집트의 카말 나세르 대통령도 고혈압과 당뇨병을 앓았다.
<빙점>이라는 작품을 쓴 일본인 미우라 아야꼬는
십일 년 동안 척추 카리에스에 걸려 병석에 누웠으나 그 절망 속에서 일어나 일본 최대의 문인이 되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어찌 보면 나무토막 같은 헬렌 켈러는
엄청난 불행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을 위해 훌륭한 자선 사업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백 명 중 하나가 되었다.
“고독은 모든 뛰어난 인물의 운명이요,”(쇼펜하우어)
“위대한 지각과 깊은 심정을 가진 사람에게 고통과 고뇌는 필연적인 것이다”(도스토예스키).
고난과 슬픔에서 위대하고 훌륭한 삶이 만들어진다.
“사람은 사랑과 고통에 힘입어서만 변화된다.”(F. 베이컨)
이처럼 고통 속에 기쁨과 구원이 있다.
따라서 크거나 작은 고난을 불행으로 여기지 말고 위대한 인생을 만들어주는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여겨야 하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감추어져 있던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잠깐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이러한 변모로써 신앙생활의 목적이 당신의 영광에 참여하여 당신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는 것임을 가르쳐주신다.
이 변모는 우리에게 하느님과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 희망을 일깨워준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사랑을 지키는 데 따라오는 모든 고통을 달게 받으려 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
고통 없는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통해 부활생명을 누리시듯,
죽음은 사람이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밟아야 하는 길이다.
영광의 길은 십자가를 전제한다.
고통 없는 명예 없고, 가시 없는 왕좌 없다.
바오로 사도는 날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비신자들과 신자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려고
바늘로 살을 콕콕 찌르는 고통을 겪고 구타와 고문과 투옥과 참수를 당했다.
그 결과 전 인류를 위한 구원공동체인 천주교의 토대를 만들었다.
수많은 성인 성녀들도 바오로 사도의 뒤를 따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하고 있다.
16세의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하여 정조 임금에게 출세를 약속 받았던 황사영 성인은 백서 사건 때문에 능지처참되었다.
죄인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속살이 보일 때까지 회칼로 살점을 조각조각 뜯어내는 형벌인데, 전문가는 4,700조각이나 되는 살점을 뜯어낸다고 한다.
그러나 순교자 황사영은 예수님을 닮아 석가모니보다 더 위대한 성인, 영원히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어 행복의 극치를 누리고 있다.
“하느님,
당신과 이웃을 위해 고통을 받게 해주시든지 아니면 저를 빨리 당신 품속으로 데려가시든지,
이 둘 중 하나만 허락해주소서.”
(아빌라의 대데레사)
신앙생활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함임을 인정하는가?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가 더 많은 인내심과 연민을 가진 인간, 결국에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임을 알고 그렇게 살고 있는가?
행복은 그리스도처럼 타인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것인 반면,
불행은 자기만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것임을 인정하는가?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인가?
남의 장점을 존중해 주고 남의 기쁨을 자기의 것인 양 기뻐하는 자이다.”
(괴테)
지금 하느님의 구원사업과 이웃을 건설하기 위해 고난을 겪으며 행복을 체험하는 사람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다.
- 가톨릭대 총장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금의환향(錦衣還鄕)>
감사합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형제자매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안식년을 맞이하여 수도원을 떠나 하루하루 하느님 향해 흐르는 강으로 살다가
마침내 다시 불암산이 되어 살고자 '아버지의 집' 요셉수도원에 돌아왔습니다.
어제 2월28일 오후 수도원에 도착하여 수도형제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니 흡사 금의환향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여 강론 제목은 지체없이 '금의환향'으로 정했고,
이렇게 비단옷 금의 대신 자색 고운 옷을 입고 3월 첫날, 사순 제2주일 감사미사를 봉헌합니다.
장충동 수도원을 떠나기 전 마음은 자못 착잡했습니다.
"떠나기 싫죠."
한 수도형제가 웃으며 넌지시 던진 말이었습니다.
흐르는 강처럼 좀 자유롭게 살다가 다시 산이 되어 살게 되니 답답할 거란 예상하에 한 말이 분명합니다.
"예, 신병 훈련소에 입대하는 기분입니다."
웃으며 화답하니 모두가 빙그레 웃음지었습니다.
와보니 신병훈련소 입대가 아니라 고향집에로의 금의환향입니다.
마치 물을 떠난 물고기가 맑은 물의 호수로 돌아온 듯 온 몸과 맘에 활력이 넘칩니다.
이제 다시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자마자, 배려 깊으신 주님은, 3월 1일 사순 제2주일,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불암산에서 당신의 변모체험 미사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지난 주일에는 광야에서의 유혹체험에 이어 이번 주일은 불암산에서의 변모체험입니다.
광야와 산이 대조가 참 의미심장합니다.
광야가 상징하는 바 수평의 세상살이라면 산이 상징하는 바 수직의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니 수평의 밋밋한 광야인생에 지쳤을 때는
지체없이 수직의 산을 찾아 주님을 만나야 합(삽)니다.
1독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주님의 시험에 합격하여 주님의 축복을 받은 곳 역시 모리야 땅에 있는 산이었습니다.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습니다.
아, 이런 주님과의 만남이란 신비 체험이 있어야 광야인생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사랑의 주님과 만나야 비로소 해갈되는 영혼의 목마름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장면은 정말 환상적인 아름다움입니다.
광야인생에서의 오아시스 체험이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환대를 상징합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중에 재현되고 체험되는 장면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당신의 변모체험 미사에 초대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환대의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지요.
이런 주님의 환대 신비체험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삶의 본질은 광야입니다.
세상도 광야요 내 마음도 '보이는 것이 없는' 광야입니다.
바로 여기 '보이는 것 없는' 광야에서 주님을 만나야 비로소 샘솟는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하느님은 희망과 기쁨의 원천이요, 이 하느님을 만나야 광야인생 살아낼 수 있습니다.
광야인생 잘 살면 성인이요 못 살면 괴물이나 폐인입니다.
성인, 괴물, 폐인 이 셋 뿐입니다.
아브라함, 바오로, 복음의 세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기에 성인들이 되어 희망과 기쁨 가득한 광야인생 살았습니다.
로마서의 바오로의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님을 만났기에 이런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아, 바로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
또 대사제가 되시어 이 거룩한 미사를 집전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났기에 이런 감동적인 고백을 토해내는 바오로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길은 사랑과 기도와 순종뿐입니다.
사랑의 기도요, 사랑의 순종입니다.
주님 사랑의 환대에 대한 응답이 사랑의 기도요 사랑의 순종입니다.
주님과 우정을 깊이하는데는 사랑의 기도가, 사랑의 순종이 제일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산에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는 베드로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신비 체험에 집착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상의 광야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순종의 성인들입니다.
겸손의 빛나는 표지가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독점적 사랑을 받았던 것도,
하느님의 벗이 되어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순종임을 깨닫습니다.
억지로의 순종이 아니라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진정 아브라함은 순종의 모범입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이 부르실 때 마다 즉각 응답하여 순종했던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넘치는 축복입니다.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겠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니 비단 아브라함뿐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경외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형제자매들에게 넘치는 축복을 주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집에 금의환향한 마음으로 주님의 환대를 받으며 이 거룩한 주님의 신비로운 변모체험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를 거룩하게 변모시켜 주시어
희망과 기쁨 충만한 광야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
오늘부터 전례력으로 고유 시기(사순, 부활, 대림, 성탄 시기)에는
되도록 그날 독서와 복음 말씀을 이어 주는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조금 더 넓은 맥락에서 본문을 묵상할 수 있도록 ‘오늘의 묵상’을 이끌어 가겠습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어둠의 골짜기를 걷는다 하더라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빛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이사악을 바치러 산에 오르던 아브라함은 앞을 내다볼 수 없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약속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게 되면 후손을 주시겠다던 하느님의 약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바칩니다.
인간의 계산과 논리를 훨씬 뛰어넘으시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 또한 온갖 환난과 박해를 겪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앞에서,
세상의 고발과 단죄는 힘을 잃고 맙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앞둔 제자들의 처지도 이와 같습니다.
복음서에서는 영광스러운 변모 다음에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해 줄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이 보았던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그 모든 것이 실현되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뵙는 그날까지 제자들의 눈앞에서 결코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제자들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의 수난을 견뎌 내야 합니다.
세상의 힘이 예수님을 없애 버릴 수 있는 듯이 거들먹거린다 해도
그분은 당신의 길을 고독하게 걸어가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르 9,7)
아브라함처럼, 바오로 사도처럼,
산에서 내려와 오늘의 기억을 간직해야 했던 제자들처럼,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을 우리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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